30분 후, 백유미는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이어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백유미가 부드럽게 말했다.“승재야, M국에서 며칠 동안 아팠다면서 당분간은 더 쉬어야겠다. 나는 먼저 재무실에 가볼게.”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백유미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다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육현석은 이미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육현석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형, 알아냈어. 성아연이라는 형수 친구가 개인적으로 백유미랑 연락하고 있더라고. 여기 그 두 사람의 통화 기록과 카페 CCTV 사진이 들어있어.”곽승재는 손을 뻗어 자료를 건네받고 서류를 꺼냈다.육현석이 말한 대로 안에는 통화 내역과 영상 캡처본이 몇 장 있었다.“경제적인 거래는 없었어?”곽승재가 물었다.육현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알아보려고 했는데 없었어. 하지만 이 성아연이라는 여자 최근 돈을 헤프게 쓰면서 명품 신발과 가방을 많이 사더라고. 다 자기가 낸 돈이야. 예전에는 형수가 명품 선물을 해줬었는데 최근에는 형수와 사이가 틀어진 건지 형수가 저 여자 번호까지 차단한 것 같더라고. 아, 맞다. 성아연의 아버지가 보름 전에 고씨 가문에 큰 비즈니스를 이어줬는데 형수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비록 애초의 목적은 성아연과 백유미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었지만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이다 보니 고은서와의 관계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관련 자료는 다 들어있으니 형이 한번 확인해 봐.”자료를 보며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비즈니스에 대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전에 고은서가 관련 계약서를 보고 있을 때 그가 그중의 많은 허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당시 그는 고은서가 고씨 가문 사업에 신경을 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속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와 성아연의 관계는 그도 조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줄곧 한통속이었고 서로
“어쩐 일이세요?”“형수님, 지금 예원 별장에 안 묵으시고 호텔로 가셨어요?”‘곽승재가 직접 얘기했을 리는 없고... 박지연이 얘기했겠지?’“그래서 무슨 일인데요?”“헤헤, 오해하지 마세요. 형을 도와서 얘기하려는 게 아니에요.”육현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사는 곳에 적응되신 건지 물으려고 연락드렸어요. 듣기로는 집을 사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시내에 집 몇 채를 소유하고 있어요. 나중에 정보를 보태드릴 테니 형수님이 마음에 드시는 집이 있으시면 선물로 드릴게요.”고은서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괜찮습니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받을 이유가 없어요. 제가 직접 사면 됩니다.”고은서가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육현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형수님, 비록 저랑 형이 친형제는 아니지만 감정적인 문제에서는 저는 박지연 씨와 같은 입장에서 형수님을 지지합니다.”‘나를 지지하는 것조차도 박지연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밝히다니...’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지연이한테 마음이 있으신 거예요?”육현석이 급히 답했다.“형수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저랑 박지연은 의견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예요. 절대 박지연한테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거예요!”‘박지연이 자기 같은 타입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형수님, 비록 형수님의 의견을 지지하지만 형이 형수님한테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나서 이혼하시는 거라면 형 대신 한 말씀 드리고 싶네요. 형도 형수님을 신경 쓰는데 잘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빙빙 돌려서 말해도 육현석은 결국 곽승재를 도와 말하고 있었다.역시 곽승재의 좋은 친구이자 동생이었다.“오빠가 신경 쓰든 쓰지 않든 이제 상관없어요. 제가 이혼하려고 마음먹은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완곡하게 거절당한 육현석이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네. 형수님, 들어가세요.”백유미가 곽승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백유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책상에 올려두었던 자료를 백유미 앞에 내밀었다.백유미가 한번 보더니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이건 성아연 시와 나의 통화 기록이잖아. 전에 카페에 함께 있던 사진도 있네? 무슨 문제라도 있어?”곽승재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성아연이 그날 밤 네 숙소에 가서 소란 피운 건 네가 계획한 거야?”백유미는 한순간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한참 멍해 있다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승재야, 네 뜻은 내가 성아연 씨와 몇 번 연락했으니 내가 성아연 씨를 시켜서 그 난리를 피웠다는 거야?”백유미의 표정이 굳어졌다.“네가 왜 이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어. 성아연 씨와 만난 적은 있어. 성아연 씨한테 내 카톡 연락처도 있어. 하지만 난 그런 짓은 한 적 없어.”백아연은 몇 달 전 술자리에서 성아연이 먼저 그녀의 전화번호를 추가하고 카카오톡을 추가했다고 했다.성아연의 인스타에서 그녀는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백유미가 매번 인스타를 올릴 때마다 성아연은 가시 돋친 댓글을 달고는 했다. 고은서가 투신해서 다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성아연이 백유미를 카페에 나오게 했다고 했다.“성아연 씨는 나를 꾸짖으며 너를 멀리하라고 협박하면서 심지어 회사까지 그만두라고 했어. 그리고 너랑 은서 씨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백유미의 목소리에는 쉽게 알아채지 못할 억울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엄숙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성아연 씨한테 해명했지만 성아연 씨는 듣지 않고 나를 위협하고는 자리를 떴어. 승재야, 네가 CCTV 영상을 확인했으니 알겠지만 너도 보다시피 같이 있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 성아연 씨는 자리를 떠났어.”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운호 산장에서 단합한 최근 날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사이가 그렇게 안 좋으면서 먼저 연락한 이유는 뭐야?”“원래는
“승재야, 귀국하고 나서 몇 달 동안 혹시나 너한테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서 줄곧 너와의 사이에 신경 썼어.”박유미는 정말 울컥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난 다 참았어. 나라고 태생적으로 마음이 넓은 게 아니야. 나도 속상하고 마음 아파. 하지만 네가 곤란할까 봐... 승재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날 의심하고 조사하는 거야?”백유미가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백유미 이마에서 보이는 흉터 자국과 슬픔을 애써 억누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곽승재의 날카로웠던 기세는 얼마간 누그러졌다.“너랑 관련 없다면 이 일도 마음에 두지 마.”백유미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나도 너한테 마음을 품었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네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난 너를 친구로만 생각하고 대했어. 승재야, 앞으로 의심스러운 점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물어봐. 너한테 한치의 숨김도 없이 솔직하게 얘기할게.”곽승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판주로 가서 일해.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네.”백유미는 뭔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곽승재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GS그룹 빌딩에서 나온 후에야 백유미는 핸드폰을 꺼내 백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다.“유미야, 어떻게 됐어? 승재가 믿었어?”백유미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그쪽은 아무 문제 없죠?”“내가 처리했는데 걱정할 것 없어. 약국 신입은 실수한 게 있어서 이미 해고당했어. 설사 승재가 사람을 보내 조사한다고 해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거야.”백승엽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유미야, 그렇게 고생하면서 승재가 고은서를 의심하게 만들더니 왜 또 고은서의 혐의를 벗기려고 이렇게 애쓰는 거야? 헛고생한 게 되지 않겠어?”‘헛고생이 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 혐의는 내가 직접 고은서를 위해 씻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 혐의가 벗겨지지 않을 거야.’그러나 백유미는 아버지에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아버지
이전 해찬시에 있던 거에 비해 유성준은 조금 야위었지만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할아버지, 성준 오빠.”고은서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 왔어?”유성준의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고은서가 그들 앞에 다가가 고준석의 옆에 앉아 유성준에게 물었다.“성준 오빠, 해성에는 MQ에 취직하려고 온 거야?”“성준이는 먼저 MQ에서 1년간 도와주고 그때 가서 상황 봐가면서 다시 정하려고 한다.”고준석이 답했다.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분간 외국에 가고 싶지 않네. 마침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왔지.”유정길을 생각하자 고은서의 기분도 조금 가라앉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성준 오빠,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앞으로 해성에 머물면서 저희를 가족으로 생각하세요.”“예전에 투정만 부리던 은서가 이제 다 커서 사람 위로할 줄도 아네.”유성준이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그러게 말이야.”옆에 있던 고준석도 맞장구를 쳤다.“은서도 다 커서 집안 사업에 신경 쓰기도 해. 계속 믿을만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고 하더니 성준이 네가 들어오면 은서도 마음 놓을 수 있겠지.”고은서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냈다.“맞아요! 하지만 성준 오빠를 MQ의 부대표로 임명하면 왠지 인재를 낭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유성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에이 그럴 리가. 너랑 할아버지가 실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지.”그들이 정다운 얘기를 나눌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아마 네 외삼촌 일행일 거야.”고준석이 말을 이었다.“은서야, 네 삼촌도 성준이를 알고 있어. 성준이가 MQ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마주하게 될 사이이니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미리 친해지면 좋잖아.”고은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들여서 외삼촌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정당하게 유성준을 영입하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이내 고은혜를 포함한 고은서의 외삼촌
‘곽승재가 왜 여기에 온 거지?’“외할아버지, 곽승재도 부르셨어요?”고은서가 고준석에게 물었다.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오후에 승재한테서 문안 전화가 왔었는데 너도 오고 하니까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을 꺼내 봤지. 그러니 오겠다고 하더구나.”고준석은 지금도 고은서와 곽승재가 이혼하는 걸 원치 않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름이 지나도록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리가 없었다.곽승재를 이 자리에 부른 것도 아마 두 사람 사이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귀찮아 죽겠어. 곽승재는 대체 언제 사인하려는 거야. 끌면 끌수록 더 번거로워지는데.’고은서는 민시후와 합작할 충동까지 들었다.공식적인 담판을 하고 온 듯 곽승재는 화이트색 셔츠와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 걸어들어왔다. 평소와 별다름 없는 차림이지만 온몸에서 시선을 이끄는 범상치 않은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한 번 스쳐보고는 예의 바르게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유성준에게 말을 걸었다.“오빠도 해성에 오셨네요?”유성준은 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응, 오후에 금방 도착했어.”“승재야, 마침 잘 왔어!”고국성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성준이가 얼마 안 있으면 MQ에 정식 직원으로 들어올 거야.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네가 잘 보살펴줘.”고국성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가 답했다.“물론이죠. 듣기로는 전에 계속 해외에 있었다고 하던데요?”곽승재는 무심코 물었다.“네. 이젠 안 가려고요. 아무래도 고향 땅이 더 좋은 법이니까요.”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곽승재는 더는 묻지 않고 웃으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서 있지만 말고 얼른 다들 앉아. 은서야, 앉아서 뭐해? 승재가 앉게 얼른 일어나.”단은숙이 고은서를 비난하듯 말했다.다른 자리도 많았지만 다 고준석과 멀리 떨어진 자리들이었다. 단은숙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곽승재
“누구야 그 남자? 민시후야? 아니면 유성준인가?”고은서는 약간 어이없었다.‘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민시후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데 유성준은 왜 나오는 거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말을 이어갔다.“유성준이 해외에서 꽤 잘나가는 거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MQ에 들어가서 네 삼촌 조력을 한다고? 목적이 뻔하잖아.”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방금전에 아주 확실하게 답해준 거로 알고 있는데, 못 알아들은 거야?”곽승재는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말했다.“해외로 가지 않는다고 해도 왜 하필 해성으로 온 걸까?”곽승재는 유성준이 고은서를 위해 MQ로 들어갔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해친시에서 유성준과 두 번 정도 만난 이후로는 서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곽승재의 말을 도무지 믿어줄 수가 없었다.“내가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린 곧 이혼할 사이야. 쓸데없는 점유욕은 집어치워.”고은서는 짜증 난다는 듯 말하고는 작업실을 나갔다.곽승재는 그녀로부터 오는 향긋한 냄새에 입술을 살짝 오므리다가 그녀 뒤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식탁 앞에 도착했다.다들 원형 식탁 앞에 착석했고 이어 고은혜도 방에서 나왔다.그녀는 곽승재를 보자마자 전에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어색해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은혜야, 예절 없게 왜 이래. 형부를 봤으면 인사해야지.”단은혜가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고은혜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부.”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승재야, 은서야, 얼른 와서 앉아.”고준석은 왼쪽에 남겨둔 자리를 가리키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고은서가 고준석 옆에 붙어 앉고 곽승재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저녁은 꽤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고국성은 술까지 꺼내 들고 유성준과 곽승재에게 따라줬다.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국성은 자신의 회사 경영 경험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고 유성준은 옆에서 타이밍에 맞추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고은서는 듣자마자 재빨리 대신 거절했다.“할아버지, 여기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그냥 돌아가서 쉬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고준석이 말했다.“없다니? 전에 네가 산 그 많은 옷들이 아직도 옷장에 있지 않느냐.”“...”확실히 전에 옷을 많이 사두긴 했었다.어느 날 이곳에 묵게 될 때 갈아입을 옷이 없는 상황을 대비해 여러 벌 사두었었다. 하지만 곽승재는 전에 한 번도 고준석 집에 묵은 적이 없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요.”고은서가 다른 이유로 다시 둘러댔다.“그래?”고준석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고은서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같이 밥 먹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여기에 묵을 생각은 절대 하지마!’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보더니 고준석에게 말했다.“확실히 처리할 일들이 남아있긴 해요.”고은서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은근 좋아할 때 곽승재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온라인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잘됐구나. 그럼 힘들게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렴.”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결정을 내렸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래요.”고은혜가 말했다.“너 내일 학교 가는데 왜 갑자기 할아버지 집에서 자겠다는 거야. 얼른 집으로 돌아가!”단은숙이 명령조로 말했다.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엄마,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할아버지 환심 사게 자주 곁에 있어줘라고 했었잖아. 오늘 할아버지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환심을 사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설득해서 지금 해외로 가려고 그러는 거잖아!”고은혜가 벌떡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엄마, 고집 좀 그만 부려. 나 스무 살이야, 이제 어른이라고.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일쯤은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너!”단은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얼굴이 빨개졌다.“그만해. 은혜가 자고 가겠다는데 그렇게 하게 해. 애도 다 컸는데 너무 엄하게 대하지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