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후, 백유미는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이어 그녀는 곽승재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백유미가 부드럽게 말했다.“승재야, M국에서 며칠 동안 아팠다면서 당분간은 더 쉬어야겠다. 나는 먼저 재무실에 가볼게.”곽승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백유미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다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곽승재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육현석은 이미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육현석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형, 알아냈어. 성아연이라는 형수 친구가 개인적으로 백유미랑 연락하고 있더라고. 여기 그 두 사람의 통화 기록과 카페 CCTV 사진이 들어있어.”곽승재는 손을 뻗어 자료를 건네받고 서류를 꺼냈다.육현석이 말한 대로 안에는 통화 내역과 영상 캡처본이 몇 장 있었다.“경제적인 거래는 없었어?”곽승재가 물었다.육현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알아보려고 했는데 없었어. 하지만 이 성아연이라는 여자 최근 돈을 헤프게 쓰면서 명품 신발과 가방을 많이 사더라고. 다 자기가 낸 돈이야. 예전에는 형수가 명품 선물을 해줬었는데 최근에는 형수와 사이가 틀어진 건지 형수가 저 여자 번호까지 차단한 것 같더라고. 아, 맞다. 성아연의 아버지가 보름 전에 고씨 가문에 큰 비즈니스를 이어줬는데 형수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비록 애초의 목적은 성아연과 백유미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었지만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이다 보니 고은서와의 관계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관련 자료는 다 들어있으니 형이 한번 확인해 봐.”자료를 보며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비즈니스에 대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전에 고은서가 관련 계약서를 보고 있을 때 그가 그중의 많은 허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당시 그는 고은서가 고씨 가문 사업에 신경을 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속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은서와 성아연의 관계는 그도 조금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줄곧 한통속이었고 서로
“어쩐 일이세요?”“형수님, 지금 예원 별장에 안 묵으시고 호텔로 가셨어요?”‘곽승재가 직접 얘기했을 리는 없고... 박지연이 얘기했겠지?’“그래서 무슨 일인데요?”“헤헤, 오해하지 마세요. 형을 도와서 얘기하려는 게 아니에요.”육현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형수님이 사는 곳에 적응되신 건지 물으려고 연락드렸어요. 듣기로는 집을 사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시내에 집 몇 채를 소유하고 있어요. 나중에 정보를 보태드릴 테니 형수님이 마음에 드시는 집이 있으시면 선물로 드릴게요.”고은서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괜찮습니다. 해드린 것도 없는데 받을 이유가 없어요. 제가 직접 사면 됩니다.”고은서가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육현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형수님, 비록 저랑 형이 친형제는 아니지만 감정적인 문제에서는 저는 박지연 씨와 같은 입장에서 형수님을 지지합니다.”‘나를 지지하는 것조차도 박지연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밝히다니...’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지연이한테 마음이 있으신 거예요?”육현석이 급히 답했다.“형수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저랑 박지연은 의견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예요. 절대 박지연한테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거예요!”‘박지연이 자기 같은 타입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형수님, 비록 형수님의 의견을 지지하지만 형이 형수님한테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나서 이혼하시는 거라면 형 대신 한 말씀 드리고 싶네요. 형도 형수님을 신경 쓰는데 잘 표현하지 않아서 그래요.”빙빙 돌려서 말해도 육현석은 결국 곽승재를 도와 말하고 있었다.역시 곽승재의 좋은 친구이자 동생이었다.“오빠가 신경 쓰든 쓰지 않든 이제 상관없어요. 제가 이혼하려고 마음먹은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완곡하게 거절당한 육현석이 잠시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네. 형수님, 들어가세요.”백유미가 곽승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백유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책상에 올려두었던 자료를 백유미 앞에 내밀었다.백유미가 한번 보더니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이건 성아연 시와 나의 통화 기록이잖아. 전에 카페에 함께 있던 사진도 있네? 무슨 문제라도 있어?”곽승재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물었다.“성아연이 그날 밤 네 숙소에 가서 소란 피운 건 네가 계획한 거야?”백유미는 한순간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한참 멍해 있다 그녀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승재야, 네 뜻은 내가 성아연 씨와 몇 번 연락했으니 내가 성아연 씨를 시켜서 그 난리를 피웠다는 거야?”백유미의 표정이 굳어졌다.“네가 왜 이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어. 성아연 씨와 만난 적은 있어. 성아연 씨한테 내 카톡 연락처도 있어. 하지만 난 그런 짓은 한 적 없어.”백아연은 몇 달 전 술자리에서 성아연이 먼저 그녀의 전화번호를 추가하고 카카오톡을 추가했다고 했다.성아연의 인스타에서 그녀는 성아연이 고은서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백유미가 매번 인스타를 올릴 때마다 성아연은 가시 돋친 댓글을 달고는 했다. 고은서가 투신해서 다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성아연이 백유미를 카페에 나오게 했다고 했다.“성아연 씨는 나를 꾸짖으며 너를 멀리하라고 협박하면서 심지어 회사까지 그만두라고 했어. 그리고 너랑 은서 씨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지.”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백유미의 목소리에는 쉽게 알아채지 못할 억울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엄숙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성아연 씨한테 해명했지만 성아연 씨는 듣지 않고 나를 위협하고는 자리를 떴어. 승재야, 네가 CCTV 영상을 확인했으니 알겠지만 너도 보다시피 같이 있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 성아연 씨는 자리를 떠났어.”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운호 산장에서 단합한 최근 날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사이가 그렇게 안 좋으면서 먼저 연락한 이유는 뭐야?”“원래는
“승재야, 귀국하고 나서 몇 달 동안 혹시나 너한테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서 줄곧 너와의 사이에 신경 썼어.”박유미는 정말 울컥하며 말을 이었다.“은서 씨가 나한테 어떻게 하든 난 다 참았어. 나라고 태생적으로 마음이 넓은 게 아니야. 나도 속상하고 마음 아파. 하지만 네가 곤란할까 봐... 승재야,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날 의심하고 조사하는 거야?”백유미가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백유미 이마에서 보이는 흉터 자국과 슬픔을 애써 억누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곽승재의 날카로웠던 기세는 얼마간 누그러졌다.“너랑 관련 없다면 이 일도 마음에 두지 마.”백유미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나도 너한테 마음을 품었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네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난 너를 친구로만 생각하고 대했어. 승재야, 앞으로 의심스러운 점 있으면 그냥 나한테 직접 물어봐. 너한테 한치의 숨김도 없이 솔직하게 얘기할게.”곽승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판주로 가서 일해.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네.”백유미는 뭔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곽승재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GS그룹 빌딩에서 나온 후에야 백유미는 핸드폰을 꺼내 백승엽에게 전화를 걸었다.“유미야, 어떻게 됐어? 승재가 믿었어?”백유미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그쪽은 아무 문제 없죠?”“내가 처리했는데 걱정할 것 없어. 약국 신입은 실수한 게 있어서 이미 해고당했어. 설사 승재가 사람을 보내 조사한다고 해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거야.”백승엽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유미야, 그렇게 고생하면서 승재가 고은서를 의심하게 만들더니 왜 또 고은서의 혐의를 벗기려고 이렇게 애쓰는 거야? 헛고생한 게 되지 않겠어?”‘헛고생이 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 혐의는 내가 직접 고은서를 위해 씻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 혐의가 벗겨지지 않을 거야.’그러나 백유미는 아버지에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아버지
이전 해찬시에 있던 거에 비해 유성준은 조금 야위었지만 특유의 따듯한 분위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할아버지, 성준 오빠.”고은서가 기뻐하며 두 사람을 불렀다.“은서 왔어?”유성준의 얼굴에도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고은서가 그들 앞에 다가가 고준석의 옆에 앉아 유성준에게 물었다.“성준 오빠, 해성에는 MQ에 취직하려고 온 거야?”“성준이는 먼저 MQ에서 1년간 도와주고 그때 가서 상황 봐가면서 다시 정하려고 한다.”고준석이 답했다.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당분간 외국에 가고 싶지 않네. 마침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왔지.”유정길을 생각하자 고은서의 기분도 조금 가라앉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성준 오빠,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 앞으로 해성에 머물면서 저희를 가족으로 생각하세요.”“예전에 투정만 부리던 은서가 이제 다 커서 사람 위로할 줄도 아네.”유성준이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그러게 말이야.”옆에 있던 고준석도 맞장구를 쳤다.“은서도 다 커서 집안 사업에 신경 쓰기도 해. 계속 믿을만한 사람을 영입해야 한다고 하더니 성준이 네가 들어오면 은서도 마음 놓을 수 있겠지.”고은서는 자신의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냈다.“맞아요! 하지만 성준 오빠를 MQ의 부대표로 임명하면 왠지 인재를 낭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유성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에이 그럴 리가. 너랑 할아버지가 실망하지 않으면 다행이지.”그들이 정다운 얘기를 나눌 때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아마 네 외삼촌 일행일 거야.”고준석이 말을 이었다.“은서야, 네 삼촌도 성준이를 알고 있어. 성준이가 MQ에 들어가면 어차피 다 마주하게 될 사이이니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고. 미리 친해지면 좋잖아.”고은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들여서 외삼촌을 불안하게 하는 것보다 정당하게 유성준을 영입하면 모두가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이내 고은혜를 포함한 고은서의 외삼촌
‘곽승재가 왜 여기에 온 거지?’“외할아버지, 곽승재도 부르셨어요?”고은서가 고준석에게 물었다.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오후에 승재한테서 문안 전화가 왔었는데 너도 오고 하니까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을 꺼내 봤지. 그러니 오겠다고 하더구나.”고준석은 지금도 고은서와 곽승재가 이혼하는 걸 원치 않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름이 지나도록 고은서와 곽승재 사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리가 없었다.곽승재를 이 자리에 부른 것도 아마 두 사람 사이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귀찮아 죽겠어. 곽승재는 대체 언제 사인하려는 거야. 끌면 끌수록 더 번거로워지는데.’고은서는 민시후와 합작할 충동까지 들었다.공식적인 담판을 하고 온 듯 곽승재는 화이트색 셔츠와 검은 정장 차림을 하고 걸어들어왔다. 평소와 별다름 없는 차림이지만 온몸에서 시선을 이끄는 범상치 않은 기품이 느껴졌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한 번 스쳐보고는 예의 바르게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유성준에게 말을 걸었다.“오빠도 해성에 오셨네요?”유성준은 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응, 오후에 금방 도착했어.”“승재야, 마침 잘 왔어!”고국성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들었다.“성준이가 얼마 안 있으면 MQ에 정식 직원으로 들어올 거야. 해성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네가 잘 보살펴줘.”고국성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가 답했다.“물론이죠. 듣기로는 전에 계속 해외에 있었다고 하던데요?”곽승재는 무심코 물었다.“네. 이젠 안 가려고요. 아무래도 고향 땅이 더 좋은 법이니까요.”유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곽승재는 더는 묻지 않고 웃으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서 있지만 말고 얼른 다들 앉아. 은서야, 앉아서 뭐해? 승재가 앉게 얼른 일어나.”단은숙이 고은서를 비난하듯 말했다.다른 자리도 많았지만 다 고준석과 멀리 떨어진 자리들이었다. 단은숙의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곽승재
“누구야 그 남자? 민시후야? 아니면 유성준인가?”고은서는 약간 어이없었다.‘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민시후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데 유성준은 왜 나오는 거야?’곽승재는 고은서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말을 이어갔다.“유성준이 해외에서 꽤 잘나가는 거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MQ에 들어가서 네 삼촌 조력을 한다고? 목적이 뻔하잖아.”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방금전에 아주 확실하게 답해준 거로 알고 있는데, 못 알아들은 거야?”곽승재는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말했다.“해외로 가지 않는다고 해도 왜 하필 해성으로 온 걸까?”곽승재는 유성준이 고은서를 위해 MQ로 들어갔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해친시에서 유성준과 두 번 정도 만난 이후로는 서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곽승재의 말을 도무지 믿어줄 수가 없었다.“내가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린 곧 이혼할 사이야. 쓸데없는 점유욕은 집어치워.”고은서는 짜증 난다는 듯 말하고는 작업실을 나갔다.곽승재는 그녀로부터 오는 향긋한 냄새에 입술을 살짝 오므리다가 그녀 뒤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식탁 앞에 도착했다.다들 원형 식탁 앞에 착석했고 이어 고은혜도 방에서 나왔다.그녀는 곽승재를 보자마자 전에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어색해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은혜야, 예절 없게 왜 이래. 형부를 봤으면 인사해야지.”단은혜가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고은혜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부.”곽승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승재야, 은서야, 얼른 와서 앉아.”고준석은 왼쪽에 남겨둔 자리를 가리키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고은서가 고준석 옆에 붙어 앉고 곽승재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저녁은 꽤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고국성은 술까지 꺼내 들고 유성준과 곽승재에게 따라줬다.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국성은 자신의 회사 경영 경험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고 유성준은 옆에서 타이밍에 맞추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고은서는 듣자마자 재빨리 대신 거절했다.“할아버지, 여기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그냥 돌아가서 쉬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고준석이 말했다.“없다니? 전에 네가 산 그 많은 옷들이 아직도 옷장에 있지 않느냐.”“...”확실히 전에 옷을 많이 사두긴 했었다.어느 날 이곳에 묵게 될 때 갈아입을 옷이 없는 상황을 대비해 여러 벌 사두었었다. 하지만 곽승재는 전에 한 번도 고준석 집에 묵은 적이 없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요.”고은서가 다른 이유로 다시 둘러댔다.“그래?”고준석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고은서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았다.‘같이 밥 먹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여기에 묵을 생각은 절대 하지마!’곽승재는 고은서를 힐끗 보더니 고준석에게 말했다.“확실히 처리할 일들이 남아있긴 해요.”고은서가 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은근 좋아할 때 곽승재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온라인으로 처리하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잘됐구나. 그럼 힘들게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렴.”고준석은 허허 웃으면서 결정을 내렸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래요.”고은혜가 말했다.“너 내일 학교 가는데 왜 갑자기 할아버지 집에서 자겠다는 거야. 얼른 집으로 돌아가!”단은숙이 명령조로 말했다.고은혜는 입을 삐죽거리며 반박했다.“엄마, 평소에 시도 때도 없이 할아버지 환심 사게 자주 곁에 있어줘라고 했었잖아. 오늘 할아버지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환심을 사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 설득해서 지금 해외로 가려고 그러는 거잖아!”고은혜가 벌떡 일어서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엄마, 고집 좀 그만 부려. 나 스무 살이야, 이제 어른이라고.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일쯤은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너!”단은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얼굴이 빨개졌다.“그만해. 은혜가 자고 가겠다는데 그렇게 하게 해. 애도 다 컸는데 너무 엄하게 대하지
“곽 대표님은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병뚜껑 열어주는 것조차 꺼릴 만큼?”여시은의 말투에는 약간의 유감과 억지로 짜낸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곽승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시은 씨가 원하는 건 물을 마시는 결과가 아닌가요? 물을 마실 수 있으면 되지, 누가 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왜 중요하지 않아요?”여시은은 눈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저는 곽 대표님이 열어준 병의 물만 마시고 싶은데요.”노골적인 애정 공세에 곽승재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여시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이 없이 여전히 공세를 이어갔다.“솔직히 말할게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집안 어른의 뜻대로 조금씩 알아가면 안 될까요?”곽승재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우리 집안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략결혼을 반대하세요. 아버지의 일방적인 희망 사항일 뿐이죠.”“그리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재혼 계획이 없습니다.”여시은은 여전히 달콤한 미소를 유지했다.“당장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에요. 어쩌면 만나다가 전혀 안 맞는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잖아요?”“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시은 씨와 맞지 않아요.”곽승재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고은서는 원래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와 결혼한 후 시들어버렸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해 저한테서 도망쳤어요. 이혼한 후 그 여자는 다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됐죠. 그러니 저는 남편으로 자격 미달이에요.”“시은 씨는 여 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따님이고 조건이 우월하니 더 나은 남자를 만나셔야죠.”여시은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저는 고은서와 달라요. 고은서는 완전한 사랑을 원했지만 저는 조건이 맞는 파트너면 돼요.”“사랑이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없어도 상관없어요.”그녀는 돌직구를 날렸다.“제가 고은서보다 승재 씨에게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고은서 만큼 똑똑하거나 유능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들에게는 장
“아니,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여재훈 씨가 테이프 커팅에 참석했었잖아. 그때 외할아버지와 삼촌도 있었는데 서로 아는 눈치가 아니었어.”고은서는 말을 이어갔다.“당신도 우리 삼촌을 알잖아. 조금이라도 연줄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지. 여재훈 씨와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서 인사하고 관계를 맺으려고 했을 거야.”사실 그날 삼촌은 여재훈과 안면을 트려고 했지만, 여재훈 주변에 중요 인물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여시은이 오직 당신 때문에 나를 저격하는 거라고 생각해.”“당신들 둘이 Y국에서 만난 적 있잖아. 여시은은 그때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을 거야.”고은서의 분석이 정확할 수도 있다.곽승재는 이전에 곽현수에게 왜 백유미를 귀국시켜 그와 고은서의 결혼 생활을 망쳤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그때 곽현수는 고씨 가문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여시은이 적합한 상대라고 말했었다.곽현수는 단지 할머니 때문에, 그리고 여씨 가문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 이혼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여시은도 Y국의 파티에서 만난 두 집안 어른들이 둘을 만나게 하려 했고, 그녀도 그와의 정략결혼에 긍정적인 태도였다고 인정한 바 있다.고은서의 분석이 맞았지만 곽승재는 마음이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그녀의 말투가 너무나 차분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곽승재는 고은서의 태도에서 자신을 향한 감정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가슴 속에서 둔탁한 통증이 밀려왔다.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입을 열려는 순간, 회의실 방향에서 여시은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곽승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그 사이 눈앞까지 다가온 여시은이 배려심 있게 말했다.“곽 대표님,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세요. 10분 쉬고 회의를 계속한다고 전할게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생수 한 병을 곽승재에게 건넸다.곽승재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
“외할아버지, 숙모 말로는 엄마가 북성에 있을 때 가슴 아픈 연애사가 있었던 것 같대요. 제 생부는 아닐 거라고 하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고은서는 돌직구를 날렸다.“그럴 리 없어. 네 엄마는 활발하고 낭만적인 성격이었지만 고집스러운 면도 있었어. 쉽게 마음을 주지 않지만 한번 주면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어.”고준석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점에서는 네가 엄마를 똑 닮았어. 그래서 그때 곽승재와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데...”‘왜 갑자기 내 얘기로 넘어간 거지?’“북성에 연인이 없었거나, 있었다면 제 생부란 말씀인가요?”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생부일 가능성이 낮아. 북성에서 돌아왔을 때 다른 곳에서 돌아왔을 때와 별다른 정서 변화가 없었거든.”고준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엄마가 유부남과 엮였을 리 없어. 송민준 부모의 이혼이 엄마와 상관없을 거야.’“오히려 해외에 머물던 어느 날 전화가 와서 깜짝선물을 준비했다며 신난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말을 이어가던 고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애하는 줄 알고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될 줄은...”“은서야, 네 엄마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네 생부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알아.”고준석은 외손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네 엄마는 치료가 안 되는 불치병을 앓은 것도 아니었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너무 지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목이 멘 듯한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서도 코끝이 찡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노인의 아픔을 다시 건드린 자신이 미웠다.고은서는 고준석의 손을 꼭 잡았다.“외할아버지,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엄마는 외할아버지같이 이해심이 넘치는 분을 아버지로 두어 너무 행복했을 거예요.”하지만 고준석은 더 슬퍼 보였다.“가끔은 내가 너무 자유를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 구속했으면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고은서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엄마가 미혼모 신분으로 나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북성에 첫사랑까지 있었다고? 이렇게 복잡한 연애사가 있었다니.’“내가 그냥 제멋대로 추측한 거야. 연인 관계가 아니라 형님 마음을 아프게 한 친구일 수도 있지.”단은숙은 가방을 손에 들고 고은서에게 주의를 주었다.“이 얘기를 외할아버지나 삼촌한테 절대 하지 마. 내가 또 쓸데없는 소리 했다고 나무랄 거야.”외할아버지는 고은서의 엄마를 각별히 아꼈다. 미혼모가 됐어도 한 마디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아파하며 그녀의 과거를 캐묻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집은 따뜻한 피난처였고, 엄마는 그 안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유했다. 말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털어놓을 것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아픈 기억일 테니 가족들이 상처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고은서의 엄마는 조향사로서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MQ의 베스트셀러 향수가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고, 이는 MQ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래서 삼촌 부부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가족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니 주변 사람들도 무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은서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없는 것이 큰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씨 가문을 노리는 세력이 나타나서 진상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엄마의 과거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단은숙은 가방을 부인들 단톡방에서 자랑하기 위해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고은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엄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엄마는 북성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정말 첫사랑이 있을까? 혹시 송씨 집안 사람?’문득 송민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송민준과 송민아는 이복남매였다.‘그렇다면 송민준의 친모가 아버지와 이혼하셨다는 건데, 설마 엄마가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아니겠지?’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고은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만약 송민준이 정말 C선생이라면, 그가 고씨 가문을 증오하는 이유는 충분하다.하지만 고은서는 엄마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