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더 나빠질 건 없다고 생각했던 고월영의 마음이 또다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꼭 이런 식으로 수치를 주어야 속이 후련했을까?“내 여왕비의 자격은 현왕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니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왕비 신분을 잃고 그의 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완전히 그의 노리개가 되라는 말과 같았다.현왕비나 측실이 아닌,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가 원할 때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첩과 같은 존재였다.고월영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지언도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이 좋지 않았다.많이 힘들고 상심했을 텐데도 그녀는 겉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녀는 이곳에서 점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지언은 착잡한 마음을 감추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전하께서 그러셨습니다. 자신이 마음껏 주무르고 놀던 여인을 동생의 왕비로 계속 둘 수는 없다고요. 앞으로… 여왕비라는 신분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고월영은 말없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지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아씨, 시안이가 많이 곤욕을 치렀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살아남기 힘들지도 모릅니다.”“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그녀가 고저 없이 공허한 목소리로 물었다.지언이 말이 없자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뒤돌아서며 그에게 말했다.“뜻은 잘 알겠다.”그날 이후, 고월영은 강현준의 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들을 만났다.한 명은 무안희였고 한 명은 장군부의 여덟 째, 고여추였다.고월영이 홀로 시안을 부축하며 후원에 나타났을 때, 고여추는 시녀를 물리고 종종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니? 시안이는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시안은 통증에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고여추를 보자 반가운 마음보다는 불길한 마음이 더 들었다.고월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언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그들의 거처는 후원에서도 가장 편벽
Last Updated : 2024-02-2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