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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왕의 비밀: Chapter 281 - Chapter 290

382 Chapters

제281화 버려진 말

“예, 전하!”두 명의 호위무사가 고월영에게 다가갔다.그들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고월영의 허리를 걷어찼다.고월영은 이를 질끈 악물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다른 한 명이 다가와 그녀의 옷깃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촤르륵!아찔한 소리와 함께 고월영의 상의 절반이 찢겨져 나가며 둥근 어깨가 드러났다.“내 몸에 손대지 말거라! 이 몸은 여왕비다. 여왕 전하께서 너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야!”그녀는 이를 질끈 깨물고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호위 무사들이 움찔하더니 동작을 멈추었다.비록 잡혀온 몸이지만 상대는 황족이었다. 황족을 욕보인 행위는 머리가 날아갈 수도 있는 중범죄에 해당했다.강현정이 자신의 무사들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년은 왜놈과 내통하고 우리 황실의 명예를 더럽힌 죄인이다. 너희들도 공범으로 몰려 처단 당하고 싶으냐! 당장 저년의 옷을 찢어버리라는데도!”“정왕 전하, 제가 현왕에게는 버려진 말이긴 하지만 여왕의 부인입니다. 저를 이렇게 욕보이시면 여왕 전하를 적으로 돌리시는 거예요. 현우 오라버니가 사실을 알면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이거 놔!”호위무사들이 다시 달려들어 그녀의 옷을 잡아당겼다.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상의가 거의 뜯겨져 나갔다.그녀의 가녀린 어깨와 팔이 바깥으로 드러났다.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반항했지만 이미 정왕에 의해 혈도가 막힌 상태라 호위 무사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그만하지 못할까! 정왕 전하, 제발 멈춰주십시오! 여왕 전하께서 아시면 크게 실망하실 겁니다!”“이것들아! 이거 놓으라는데도!”정왕은 고월영의 옷이 한벌 한벌 찢겨져 나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의 의도를 이해한 호위들도 급하게 옷을 벗겨내는 대신, 조금씩 조금씩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겉옷이 다 찢어지자 그들은 내의에까지 손을 댔다.그 모든 과정이 그녀의 의지를 점점 잠식시키고 있었다.안타깝게 이 상황을 지켜보던 주희가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전하, 아마 현왕 전하께서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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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차라리 죽여!

“그만… 그만하거라….”고월영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강현준이 자신을 이토록 증오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일년이나 함께한 정이 결국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내가 당장 눈앞에서 죽어간다고 해도 전하께서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겠죠.’고월영은 손을 들어 호위들을 밀쳐내려 했다.한 호위무사가 그녀의 손을 잡아 바닥에 제압했다.다른 녀석이 다가와서 그녀의 속옷 고름을 풀기 시작했다.주변의 사내들이 눈을 퍼렇게 뜨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월영은 제압당하지 않은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머리를 올릴 때 장식으로 달아둔 비녀가 손에 잡혔다.“전하, 왕비께서 자결하려고 합니다!”당황한 주희가 소리치며 고월영을 향해 달려갔다.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고월영이 비녀를 목에 대는 순간 손을 쳐서 비녀를 떨어뜨리기는 했지만 이미 목에는 긴 상처가 나 있었다.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흘러서 바닥에 떨어졌다.겁에 질린 호위무사들이 동작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주희가 다가가려 했지만 고월영은 다시 비녀를 잡아 피가 흐르는 목에 가져다댔다.“여왕비 마마, 고정하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주희가 다급히 소리쳤다.강현정도 눈을 부릅뜨고 고월영을 노려봤다.이 나라의 1황자인 자신의 왕부에서 자결을 하려 하다니! 미친 여자가 틀림없었다.사실 목숨까지 거둘 생각은 없었다. 현왕의 오만하고 태연한 태도에 화가 났을 뿐이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호위를 시켜 아우의 왕비를 욕보인 사실이 황제의 귀에라도 전해지는 날에는 크게 노하실 게 뻔했다.죄가 있든 없든, 그녀는 황족에게 시집온 몸이었다.황족의 여인은 죽일 수는 있어도 더럽힐 수는 없다. 황가의 명예와 직결된 일이었다.“제가 여기서 죽으면 아바마마께도 소식이 전해지겠지요. 1황자 전하, 과연 아바마마께서 전하와 이 일이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실까요?”고월영은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정왕과 시선을 마주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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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18기병단

순식간에 진한 피비린내가 주변에 진동했다.“자객이다! 전하를 호위하라!”정원으로 수십 명의 호위 부대가 들이닥쳤다.정왕은 그들의 뒤를 따라 쳐들어온 십 명 남짓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검은색 야행복에 온몸으로 살기를 풍기는 그들은 현왕부의 18기병단이었다.그런데 정작 도착한 인원은 열일곱 명이고 한 명이 빠졌다.“악!”고개를 돌린 주희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호위대원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질렸다.대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딱 봐도 조금 전에 칼을 맞고 쓰러진 것이었다.숨이 붙어 있는 두 명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연일?”조금 전에 그들의 눈앞을 스치고 지난 사람은 연일이었다.연일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정왕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네가 감히….”현왕의 심복으로 얼굴이 알려진 연일이 대놓고 정왕부에 쳐들어와 살인을 벌이다니!이놈이 미친 건가? 후환도 두렵지 않나?연일은 쓰러진 두 호위무사의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정왕을 바라보며 말했다.“정왕 전하를 모셔오라는 저희 현왕 전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분노한 정왕이 고함을 쳤다.“할 말 있으면 4황더러 여기 와서 하라고 해!”연일은 고저 없이 무감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현왕 전하께서는 현왕부의 여인을 죽이든 살리든 상관하지 않겠으나, 능욕하는 자는 그게 누구든 척살하라고 하셨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검을 휘두르자 간간이 들리던 신음소리마저 사라졌다.그와 동시에 조금 전에 고월영의 옷을 찢었던 호위무사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검붉은 피가 정왕부의 땅을 흠뻑 적셨다.정왕의 부하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정왕의 앞을 가로막고 벌벌 떨었다.나머지 호위대는 이미 18기병단의 인원들에 의해 제압당했다.주희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면서도 단호한 표정으로 정왕의 앞을 막아섰다.“연일,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현왕부의 일개 호위대원일 뿐이다. 황족인 전하를 다치게 하면 너도 살아남지 못해! 아무리 현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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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을 막는 자, 모두 죽이라!황제의 핏줄인 정왕을 앞에 두고 참으로 무례한 발언이었다.정왕은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18기병단 단원들은 일당 백을 하는 무림고수들이었다.그들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서 연일의 뒤로 착지했다.왕부에는 많은 호위대가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연일은 위에서 정왕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전하, 훗날 또 뵙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는 몸을 솟구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나머지 인원들도 경공을 써서 어느새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전하, 쫓아갈까요?”호위대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18기병단이 엄청난 저력을 가진 부대이긴 하지만 왕부의 모든 인력을 동원한다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주희는 가볍게 정왕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전하, 저들을 막으면 쓸데없이 더 많은 피만 보게 될 겁니다.”“소란이 커지면 황제폐하의 귀에까지 전해질 수 있습니다. 현왕께서 폐하께 오늘 있었던 일을 알린다면 폐하께서 크게 노하실 겁니다.”사실 처음부터 주희는 오늘 밤 행사를 반대했었다.정왕도 위험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지난 번에 현왕에게 당한 뒤로 분풀이 상대가 필요했다.그 상대가 고월영이었던 것이다.그는 분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강현우가 고월영을 정식으로 내치지 않은 이상, 그녀는 여전히 여왕비의 신분이었다.황제는 절대 황족을 능멸한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이 사건으로 그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었다.자칫 잘못하면 힘들게 여태껏 쌓아 올린 완벽한 형상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었다.결국 강현정은 검을 바닥에 던지고 홀연히 떠나버렸다.“전하….”주희는 쫓아가서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정원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주희 부인, 이제 저희는 뭘 해야 하나요?”시종과 호위무사들이 난감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주희는 눈이 찔려 바닥을 뒹굴고 있는 무사들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얼핏 보면 잔인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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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삶의 의미

낮은 한숨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녀의 귀에 전해졌다.고월영은 흠칫 놀라며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길 모퉁이에 사람 그림자가 언뜻 보이자, 그녀는 손에 든 비녀를 자신의 목에 가져다댔다.바짝 긴장한 그녀의 모습에 연일은 안타까워 한숨이 나왔다.벌레도 밟으며 꿈틀하는데 진심으로 죽고 싶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하지만 그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당장이라도 자결할 것처럼 무기를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그 모습이 안타까워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고월영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상대는 검은 야행복에 희미한 빛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몸에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은 그녀를 겁주기에 충분했다.그 그림자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일어설 힘조차 없는 고월영은 긴장감에 떨다가 결국 예리한 비녀의 끝으로 목을 살짝 찔러버렸다.“마마, 저입니다.”놀란 연일이 다급히 말했다.그녀가 진심으로 찌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마마, 진정하시고 그거 내려놓으세요!”연일이 다급히 말했다.고월영은 그제야 연일을 알아보고 손을 내렸다. 하지만 비녀는 여전히 손에 꼭 쥔 채로였다.그녀는 다른 손을 들어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았다.‘하… 초라하고 비참하구나.’그녀는 소매로 힘껏 얼굴을 닦았다.연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비녀를 그에게 겨누고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다가오지 말거라!”“마마, 현왕부에 계실 때는 적어도 마마에게 직접적인 해를 끼친 사람은 없지 않았습니까.”연일이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얼굴에는 눈물자국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연일을 마주하자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다.‘저렇게 두려움에 떨면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라니!’연일은 속으로 감탄하고 말았다.처음에는 참 싫었던 사람이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싫은 감정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마마, 다 우셨으면 이제 소인과 함께 왕부로 돌아가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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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연약한 척 그만하시죠

“자포자기하는 모습은 마마답지 않습니다.”연일은 그녀의 눈에서 깊고 깊은 절망을 읽었다.항상 총기로 반짝이던 두 눈이었는데 이제는 빛을 다 잃어버린 모습이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소인은 비 마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안이라는 그 시종은….”“뭐라!”고월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하지만 극심한 고통에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연일은 잠깐 주저하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부축해서 일으켰다.“마마, 저는 여왕 전하도 아니고 예전의 현왕 전하도 아닙니다. 제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도 아무 소용 없사옵니다.”조금 전에 그녀가 뛰는 모습을 뒤에서 오래 지켜보았던 연일이었다.그렇게 뛰었으면서 갑자기 서 있기도 힘든 척하다니!조금 전에 그녀에게 느꼈던 안타까운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모시는 상전도 이 여인의 이런 모습에 혹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분노마저 치밀었다.연일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인은 마마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지만 마마께서 계속 이러시면 시안이라는 그 시종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미친놈!”고월영은 눈을 부릅뜨며 그를 쏘아보고는 힘껏 그의 손을 밀쳐냈다.“힘없는 여인을 괴롭히면서 어찌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 돌아갈 테니 시안이는 털끝도 건드리지 말거라!”그녀는 온몸에 힘을 다 써서 똑바로 섰다.그녀를 바라보는 연일의 두 눈에는 혐오의 감정만 가득 담겨 있었다.연약한 척해서 안 먹히니까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 걸까?참말로 가식적인 여인이었다.“그럼 빨리 가시지요. 소인은 돌아가서 전하께 답보를 드려야 한단 말이옵니다.”뒤돌아선 그는 현왕부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고월영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한걸음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뒤따랐다.하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걸었다.연일은 고월영이 느리게 따라오자 점점 더 짜증이 치밀었다.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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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요물

연일은 고월영을 부축해서 바닥에 앉았다.그녀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그대로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연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했다.결국 그렇게 머뭇거리다 보니 고월영은 그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었다.연일은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싫어하는 인물이기는 해도 상대는 여왕비였다.그녀를 부축해서 제대로 앉히려던 순간, 그의 시야에 피가 흥건한 그녀의 종아리가 들어왔다.‘다쳤단 말인가?’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치맛자락을 살짝 열었다.고월영의 하얀 종아리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 것처럼 긴 상처가 나 있었고 아직도 거기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상처가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얗고 매끈한 종아리에 나중에 흉터가 생길 것을 생각하니 조금 안쓰럽기는 했다.게다가 그녀의 발목은 상당히 부어 있었다.‘아픈 척 연기했던 게 아니었다!’아마 그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아픈 것도 억지로 참으며 끝까지 걸었던 것 같았다.저 정도로 부었는데 길을 걸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연일은 치맛자락을 다시 내리고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다.저도 모르게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사실을 말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그는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가 없었다. 만약 다친 걸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걸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무엇 때문에 그리도 고집을 부리신 겁니까!’연일은 고개를 들고 아득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걸어서 현왕부까지 가려면 적어도 한 시진 정도는 필요했다.조금 전에 경공을 써서 그녀를 쫓았기에 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그는 고월영의 뻘겋게 부은 발목을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등에 업었다.그러나 여자의 부드러운 가슴이 등에 닿자 그는 급기야 고월영을 다시 내려놓았다.그런 촉감을 느끼는 것마저 죄를 짓는 것 같았다.고월영의 창백한 입술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뭔가 말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연일은 더 이상 그녀를 보지 않으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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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나를 뭐라고 불렀느냐

“현준 오라버니….”고월영은 급기야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하지만 이어서 전해지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그녀의 하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종아리와 발목의 상처는 이미 약을 바른 상태였고 옷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하지만 이 사내가 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걸 고월영은 알고 있었다.“지금 나를 뭐라고 불렀느냐?”강현준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고월영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현왕 전하를 뵙습니다.”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예를 취했다.오늘 그 사건을 겪은 이후로 그는 더 이상 그녀가 아는 강현준이 아니었다.이 남자가 자신에게 일말의 정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고월영은 아픔을 참으며 침상 안쪽으로 뒷걸음질쳤다.하지만 강현준은 가볍게 손을 뻗어 그녀를 확 잡아당겼다.너무 힘을 많이 줘서 그런지 그녀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침상에 쓰러졌다.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울렸다.“전하! 왜 이러십니까!”강현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왔다.고월영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힘도, 도망갈 곳도 없었다.사내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올렸다.그리고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오늘 누구를 만났느냐? 운주의 첩자와 내통을 했다지?”고월영은 턱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고통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하지만 강현준은 그녀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점점 그녀를 옥죄어왔다.고월영은 극심한 고통에 입술을 악물고 침상에서 무릎을 꿇었다.강현준이 주는 압박감이 너무도 강렬해서 이대로 다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정왕 전하가 없던 죄를 만들어 저에게 뒤집어씌운 거라는 것을요. 저는… 첩자를 본 적도 없고 그자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단지….”“단지?”강현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그의 거친 동작으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점점 핏기를 잃어갔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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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여왕 전하가 돌아오실 때까지

등 뒤에서 그녀의 치마를 들추던 남자가 동작을 멈추었다.“그래. 그럼 몸조리가 끝난 뒤에 다시 오지.”그는 그대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나가기 전, 그는 고월영에게 이런 말을 했다.“오늘 이후로 너는 이제 여왕비가 아닌 내 노리개일 뿐이다.”그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고월영은 양 손이 결박된 채로 침상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문이 닫힌 순간 그녀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벽에 몸을 기댔다.양손이 묶인 상태라서 편히 눕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강현준은 더 이상 예전의 강현준이 아니었다.고월영은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대체 언제까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월영 자신도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녀는 몸을 비틀어 속박을 풀려고 했지만 얼마나 꽉 묶었는지 풀리지가 않았다.결국 그녀는 그대로 기둥에 기댄 채, 스르륵 눈을 감았다.손목이 지끈거리며 아파왔다.이대로 내일 아침이 지나면 손목을 제대로 쓸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강현준에게서 연민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이 잔인한 행보를 하루빨리 멈춰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그녀는 살아남고 싶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고월영이 거의 잠들 때쯤에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아득한 의식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고월영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아니기를 바랐는데 결국 시안마저 그들의 손에 잡혀온 것이다. 앞으로 힘든 나날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강현준은 몸조리가 끝나기 전에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이어지는 반달 남짓한 시간 동안 고월영과 시안은 영하각에 반 감금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밖으로 나가는 건 허락되었지만 왕부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그들이 외출할 때면 항상 호위 무사가 뒤를 따라다녔다.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을 때 고월영은 거의 방 안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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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제발 이러지 마세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본 고월영은 흠칫 놀라며 들고 있던 서책을 바닥에 떨구었다.하지만 긴장도 잠시, 그녀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서 예를 올렸다.“현왕 전하를 뵙습니다.”강현준은 손을 뻗어 문을 쾅 하고 닫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고월영은 가슴이 철렁했다.그의 손에는 탕약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강현준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탕약을 내려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탕약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지? 어서 와서 마시거라.”고월영은 상에 놓인 탕약을 빤히 바라보았다.향을 맡아 보니 시안이 매일 가져다주던 탕약과 매우 흡사했다.“전하, 시안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그녀가 물었다.“내 왕부에서 내가 시종을 어디로 보냈든 왕비가 나한테 따질 자격은 못 되지.”강현준은 의자로 다가가서 앉더니 싸늘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약이 써서 마시기 싫으면 그냥 버리면 되니 그런 얼굴로 자꾸 내 인내심을 자극하지 말거라.”고월영은 말없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다가가서 탕약을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그녀는 이런 사소한 일로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얌전하게 굴면 화풀이 정도로 끝내고 빨리 나가주기를 속으로 빌었다.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었는지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그녀가 그릇을 내려놓자 강현준의 두 눈이 미묘하게 빛났다.“온순한 모습이 참 보기 좋구나.”그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허리를 기대더니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가까이 와보거라.”고월영은 애써 당황함을 감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여전하군. 아니면 나만 보면 일부러 도발하는 게냐?”강현준이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고월영은 모른 척한다고 화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다가가지 않으면 그가 또 뭘 할지 알 수 없었다.강현준은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냉소를 지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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