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서는 순간 멍해졌다. 기억의 판도라 상자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열리는 듯했다. 백인서는 산골을 떠나며 과거를 함께 묻어두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소년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백인서를 그 시절로 다시 끌어들이고 있었다.백인서는 급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흐릿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정승우... 아니, 그럴 리가 없다.그 아이의 이름은 분명 엽이었었다.그 남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도박에 져서 돌아와 막 출산한 아내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이 아이는 빚을 갚으러 온 아이라고, 엽이라고 불렀다.그렇게 그 아이의 이름은 엽이가 되었던 거다.그러니... 정승우는 다른 집 아이일 것이다.그래, 그래야만 한다.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씨 성을 가졌으니, 아마 다른 집 아이일 것이다.백인서는 두 걸음 물러서며 옷깃을 움켜쥐었고 손끝이 살짝 떨렸다.정승우의 눈에 있던 적의는 사라지고 어딘가 부드러운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의 거친 얼굴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색이었다.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이미 자신의 존재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운 것일까?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 시절의 기억이 백인서에게 좋을 리가 없으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정승우는 백인서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가 이내 물러섰다. 정승우는 조용히 백인서를 바라보았고 눈엔 밝은 달빛을 담고 있었다. 정승우는 이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선생님, 제가 수업에 자주 안 나왔으니 기억하지 못하시는 게 당연해요.”“아... 그래.”백인서는 손가락을 천천히 풀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수업에 잘 나오지 않은 거야?”“집이 가난하고 학교가 멀어서요. 그래서 가끔 안 나갔어요.”“이제는 기회가 주어진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과를 내야 해.”“네, 그럴 거예요.”정승우는 미소 지었다.“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라면, 뭐든 최선을 다할 거예요.”백인서도 정승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때
최신 업데이트 : 2024-11-13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