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용이 백인서 옆에 앉아 백인서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미안해요.”백인서가 최지용의 귀에 속삭이며 주위를 둘러보고 약간 멋쩍게 덧붙였다.“아이들이 처음으로 먼 곳에 가는 거라 그런지 무척 들떠 있네요.”“뭐가 미안해?”“그게... 아무래도 지용 씨 비행기 안이니까요.”“이제부터는 네 비행기이기도 해.”최지용은 다정하게 백인서의 코를 비비며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갑자기 이상한 냉기가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구석에 앉아 있던 조용한 남자아이가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흘깃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그때 집사가 다가왔다.“도련님, 비행기 점검이 끝났습니다. 이제 이륙 준비하겠습니다.”“그래요.”최지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영미에게 항공권을 예매해 줬나요?”“영미 아가씨는...”집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경호원들 말로는 영미 아가씨가 산에서 며칠 더 머물고 싶다고 하더군요.”“뭐라고요?”최지용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도 거기 더 있고 싶어 한다고요?”“사진을 몇 장 더 찍어서 나중에 사진전을 열 계획이라며...”최지용은 의아해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영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영미가 더 머물고 싶다면 더 머물게 두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돈도 있고 경호원도 있으니 특별히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백인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상 풍경은 점점 작아졌고 백인서는 이곳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다.어쩌면 앞으로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백인서는 머리를 최지용의 어깨에 기대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눈을 감았다....이번 공익 프로젝트의 성공은 조 회장을 시장 자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했다.사위인 권욱도 그를 도와 물심양면으로 협력했으며 각종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조순영의 손을 잡고 딸을 안고 다정한 가족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들은 사이좋은 부부이자 자상한 아버지와 귀여운 딸
“햇볕에 타서 그래요.”“어쨌든, 거기서 고생 많이 했을 텐데.”백인서가 웃음을 터뜨렸다.강소아는 늘 백인서가 곁에 없으면 고생할까 봐 걱정했다. 마치 백인서도, 강소아가 곁에 없으면 누군가 강소아를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최군형과 최지용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묘한 이해가 담긴 미소를 주고받았다. 강소아와 백인서는 자신들을 그냥 공기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다.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군형과 강소아는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별처럼 둘러싸여 사라졌고, 최지용도 바쁜 응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백인서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그때, 누군가가 샴페인 한 잔을 내밀었다.백인서가 올려다보니, 취기가 오른 듯 얼굴이 붉어진 권욱이 백인서 앞에 서 있었다.권욱은 넥타이를 살짝 풀며 발코니 쪽을 가리켰다.백인서는 권욱을 따라 발코니로 나섰다. 넓고 조용한 발코니는 왁자지껄한 연회장과는 다른 세상이었다.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왔고 샴페인은 달콤한 향을 남기며 목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백인서는 고개를 숙이며 드문 평온함을 즐기고 있었다.“왜 안에서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여기 나온 거예요?”권욱은 잠시 백인서를 쳐다볼 뿐 굳이 대답하지 않으려는 표정이었다.사실 대답하지 않아도 백인서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지치기 마련이었다.권욱은 조순영과 인생을 함께할 마음이 정말 없는 걸까? 조순영은 그에게 충분히 어울리는 좋은 아내이고 훌륭한 어머니였다.“이번 일... 고마워.”잠시 침묵하던 권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맙긴요.”백인서는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저도 개인적인 바람이었어요. 아이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았으면 했거든요.”“장인어른께서 참 고마워하셔. 너를 자신의 귀인이라고 말하셨어. 조만간 기회 봐서 자리 마련할게.”“조 회장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백인서는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다만... 그분이 선거 연설에서 말한 것
백인서는 순간 멍해졌다. 기억의 판도라 상자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열리는 듯했다. 백인서는 산골을 떠나며 과거를 함께 묻어두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소년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백인서를 그 시절로 다시 끌어들이고 있었다.백인서는 급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흐릿한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정승우... 아니, 그럴 리가 없다.그 아이의 이름은 분명 엽이었었다.그 남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도박에 져서 돌아와 막 출산한 아내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이 아이는 빚을 갚으러 온 아이라고, 엽이라고 불렀다.그렇게 그 아이의 이름은 엽이가 되었던 거다.그러니... 정승우는 다른 집 아이일 것이다.그래, 그래야만 한다.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씨 성을 가졌으니, 아마 다른 집 아이일 것이다.백인서는 두 걸음 물러서며 옷깃을 움켜쥐었고 손끝이 살짝 떨렸다.정승우의 눈에 있던 적의는 사라지고 어딘가 부드러운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의 거친 얼굴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색이었다.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이미 자신의 존재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운 것일까?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 시절의 기억이 백인서에게 좋을 리가 없으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정승우는 백인서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가 이내 물러섰다. 정승우는 조용히 백인서를 바라보았고 눈엔 밝은 달빛을 담고 있었다. 정승우는 이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선생님, 제가 수업에 자주 안 나왔으니 기억하지 못하시는 게 당연해요.”“아... 그래.”백인서는 손가락을 천천히 풀며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수업에 잘 나오지 않은 거야?”“집이 가난하고 학교가 멀어서요. 그래서 가끔 안 나갔어요.”“이제는 기회가 주어진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과를 내야 해.”“네, 그럴 거예요.”정승우는 미소 지었다.“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거라면, 뭐든 최선을 다할 거예요.”백인서도 정승우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때
“왜 나만 보면 도망가려고 해? 두려울 게 없다, 이거야?”“엄마...”“My son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 이 배은망덕한 녀석!”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어머님, 안녕하세요.”표아정은 머리를 다듬으며 마치 화려한 공작새처럼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백인서를 힐끗 쳐다본 후, 몇 초 지나서야 대답했다.“응, 너도 잘 지냈니?”그러고는 백인서의 손가락을 보더니 아무 장신구도 없다는 걸 알아챘다.최지용은 어머니의 반응을 보고 재빨리 눈치를 채고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엄마, 인서가 반지를 안 낀 건, 반지가 조금 커서 그래요. 인서 손가락이 가늘어서 오늘 같은 자리엔 잘 안 어울리죠. 게다가 인서가 그 반지를 무척 아껴서 서랍에 보관해 두고는 아무 때나 꺼내지도 않아요!”표아정은 아들을 한 번 더 쳐다보며 입을 삐죽였다.“내가 뭐랬니? 말도 안 했는데 혼자서 잔뜩 떠드네.”“그게...”“알았어, 너희 젊은 사람들은 그런 디자인을 안 좋아할 수도 있겠지.”“아니에요, 어머님!”백인서가 황급히 말했다.“저는 정말 마음에 들어요...”“마음에 안 들면 이 녀석한테 새로 사달라 해!”표아정이 웃으며 말했다.“얼마든지 사달라고 해!”최지용과 백인서는 동시에 놀란 듯 서로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표아정은 백인서의 손을 잡고는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아끼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역시 우리 인서가 제일 훌륭해! 이번 공익 프로젝트도 아주 성공적이었어. 비록 진짜 기획자는 권욱이지만, 네가 그 뒤에서 큰 역할을 했으니, 공이 적지 않지.”“어머님, 과찬이세요.”“그렇게 잘한 거예요?”최지용은 외계인을 보는 것처럼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엄마 예전에 이런 거 싫어하셨잖아요...”“뭘 싫어했는데? 난 너 같은 철부지가 더 싫어!”표아정을 최지용을 째려보며 말했다.최지용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멀리서 최군형은 이 장면을 보고는 입 모양으로 최지용에게 말했다.“가족 전통이지!”부모들은 처음엔 며느리
백인서는 문을 활짝 열었다.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승우이었다.“너였어?”백인서는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긴 왜 온 거야?”정승우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눈빛만 깊어졌다.그때 강소아가 나와서 정승우를 보고는 잠시 놀라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백 선생님이 데려온 학생이야? 오늘 밤 이런 자리 처음이지? 밥은 잘 먹었어?”정승우는 멍하니 강소아를 쳐다보다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이렇게 예쁜 누나를 본 적이 없었다.정승우는 세상에서 누나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정승우의 시선이 다시 백인서에게 향했다. 문득, 그의 누나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아름다움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천사 같다는 점이었다.“얘!”백인서가 정승우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뭘 그렇게 보고 있어?”“아, 아무것도 아니에요...”정승우는 고개를 급히 숙였다. 이 나이 또래의 소년에게도 이미 부끄러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방금 그렇게 쳐다본 게 실례인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기분이었다.“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잖아.”백인서가 물었다.“여기 왜 온 거야?”“저는...”“여기는 모유 수유실이야. 이 표지판 못 봤어?”정승우는 더욱 당황하며 작은 손으로 옷깃을 꽉 쥐었다.그 말을 하고 나서 백인서도 조금 후회했다. 평생 산골에서 자란 아이가 모유 수유실이 뭔지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백인서는 산속에서 여인들이 아이를 돌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공공연히 아이에게 젖을 먹었고 사생활 같은 건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개는 작은 숲이나 나무 그늘에 들어가 조용히 수유할 뿐이었다. 그런 폐쇄적이고 낙후된 환경에서 여성은 단지 출산과 양육을 위한 도구로 여겨졌을 뿐이었다.강소아는 정승우의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고 다가가 정승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작은 어깨를 곧추세우도록 도와주었다.“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키가 안 커!”강소아는 웃으며
“아까...” 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먼저 노크해야지, 바로 문손잡이를 돌리면 안 돼.”정승우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이런 것도 배워야 해.” 백인서는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선생님 사무실에 가든 친구 기숙사에 가든 항상 먼저 노크를 해야 해. 바로 문을 여는 건 예의가 아니거든, 알겠지?”정승우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말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아까 그건, 정승우가 아니었다.십여 분 전, 정승우는 시끄러운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조용한 복도로 나왔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 방의 문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리는 모습을 발견했다.정승우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주 경계심이 강했는데 문이 열리지 않자 곧장 자리를 떴다.그제야 정승우가 그곳으로 걸어갔고 마침 방 안에서 ‘누구세요?’하는 백인서의 목소리가 들려 걱정스러운 마음에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왜 또 말이 없어?” 백인서는 약간 답답한 듯 말했다. “방금 내가 한 말 잘 기억했지?”정승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너는...”백인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정승우는 빠르게 돌아서서 걸어갔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콧물을 흘리면서 백인서에게 업히려 하던 작은 소년의 모습이 불쑥불쑥 나쁜 기억들과 함께 떠올라 백인서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다. 백인서가 그 산골 마을을 떠날 때, 엽이는 겨우 세 살이었다. 정대명이 평생 기다린 아들이었지만, 그조차도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지 못했다.정대명은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도박에서 지거나 술에 취할 때면 먼저 딸을 때리고 그 다음엔 아들에게 손을 대곤 했다. 그럴 때면 백인서는 어린 엽이가 매를 맞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동생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빗자루와 회초리가 백인서의 몸에 가차 없이 내려쳤지만 백인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더는 견딜 수 없던 백인서는 오랜 시간 계획을 세운 끝에 어느 안개 낀
그 말을 들은 정대명은 눈이 번쩍 뜨였다.“영...영미 아가씨...”정대명은 어쩔 줄 몰라 손발을 허둥대며 놀라움과 탐욕이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영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연배로 보면 저의 윗분이신데, 이 정도는 후배가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라 생각해 주세요.”정대명은 입맛을 다시며 도시에서 온 술맛이 얼마나 특별할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영미는 타이밍을 맞춰 정대명에게 음식을 더 담아 주며 웃으며 권했다. 정대명의 경계심이 조금씩 풀리면서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예의라곤 없는 태도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고 입맛 다시는 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었다.영미는 정대명의 먹는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몇 잔의 술이 들어가자, 정대명의 경계는 풀리고 태도는 한결 느긋해졌다. 정대명은 가슴을 두드리며 영미에게 호언장담했다.“영미 아가씨, 아가씨는 내게 두 번째 부모님이나 다름없다니까! 하하하... 내가 무식해서 말을 잘 못하지만, 아가씨가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테니까!”“정말요?”바로 영미가 기다린 대답이었다.“진짜지, 진짜!”정대명은 하늘에 맹세하듯 손을 올리며 술기운에 취해 말을 더듬었다.“영미 아가씨가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는데, 내가 아가씨 말을 안 들으면... 응? 내가 그러고도 사람이야?”“좋아요.”영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사실 특별히 부탁드릴 건 없고요, 다만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쭤보고 싶어요.”“뭔데?”“백홍이 노구예요?”정대명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갔고 술기운이 반쯤 날아간 듯했다.정대명은 의아한 표정으로 영미를 쳐다보았고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백홍 그 빌어먹을 년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혹시 백인서가 이름을 바꾸고 복수하러 찾아온 걸까?이렇게 생각한 정대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고 식탁을 뒤집을 듯한 기세였다.영미는 깜짝 놀랐고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세요, 알겠죠?”정대명은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며 대답했다. 언제 죽어도 아쉽지 않은 목숨이지만 낯선 이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영미는 턱을 치켜들었고 눈에는 싸늘한 빛이 서렸다.“솔직하게 말해요. 백홍이 대체 누구예요?”“그... 그 사람은 인신매매범이야.”정대명은 감히 숨길 수 없었다.영미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방금 그 ‘썩을 년’은 누굴 말한 거예요?”“백인서라고, 내 딸을 말한 거야.”“백인서...”영미의 귓가에 윙 하는 소리가 울렸다.“산골 아이들을 오성에 데려가 공부하게 도와준다던 그 백인서요?”“그래, 맞아!”정대명은 고개를 급히 끄덕였다.“전에 백홍이 우리 동네에서 일을 했었는데, 유일한 딸이었던 백인서를 나한테 맡기고는 매달 돈을 보내줬었거든.”“그러니까, 백인서가 당신 양녀였다는 말인가요?”“맞아.”정대명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하지만... 나중에 도망가 버렸어.”“왜 도망갔죠?”정대명은 입술을 깨물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영미는 이미 짐작했다. 그날 밤, 정대명이 자기 아들을 어떻게 때렸는지 영미는 똑똑히 보았다. 친아들한테조차 그렇게 독하게 손을 대는데 양녀에게는 얼마나 더 가혹했을지 뻔했다.백인서가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어쨌든 영미가 가장 궁금했던 비밀이 풀린 것이다.영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악의에 가득 찬 그 웃음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정 선생님.”영미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정대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목소리에는 악랄함이 스며들어 있었다.“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까 제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맞죠?정대명은 떨리는 눈길로 영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나중에 필요하면 연락할 테니 기다리세요.”영미는 경호원에게 손을 흔들어 정대명을 밖으로 내보내도록 지시했다.“정 선생님, 여기서 지내세요. 제가 최고급 방으로 준비해 드릴게요!”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