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는 짐승을 길들이는 법의 모든 챕터: 챕터 691 - 챕터 700

916 챕터

제691화

백아영은 그제야 남자가 메고 있는 보온박스를 발견했고, 마침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죄송해요.”백아영은 서둘러 은침을 내려놓았다.결국 배가 고픈 나머지 죽도 한 그릇 사서 먹었다. 위가 뒤틀리던 느낌도 서서히 잦아들더니 따뜻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멀리서 백아영의 인상이 펴진 것을 발견한 이성준은 그제야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그러고 나서 현금 뭉치를 죽 파는 사장한테 건네주었다.원래 가게를 마감한 사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 때문에 마지못해 장시를 개시해 불만이 가득했으나 돈다발을 보는 순간 입이 귀에 걸렸다.“다음에 밤늦게는 물론 새벽이라도 부르면 당장 죽을 들고 찾아갈게요!”...백아영이 묵는 집 맞은편 통유리창 앞, 이성준은 의자에 앉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침실을 바라보았다.방안을 비추는 불이 꺼지자 비로소 한시름 놓고 옆에 있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심보라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성준아, 진짜 여기 남아 있을 거야?”이성준은 이미 이 집을 웃돈까지 얹어주며 구했다. 비록 두 눈을 뜨고 지켜보면서도 납득하기 힘들었으며 불안하기까지 했다.여기 머물러 있는 이상 백아영과 언젠가 만날 텐데 조만간 오해가 풀릴까 봐 두려웠다.그렇게 되면 이성준의 곁에 더는 그녀가 머물 자리는 없었다.“지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굳이 아영 씨 걱정 안 해도 될 듯싶은데? 이렇게 지켜보기만 하면 너만 힘들지 않겠어? 성준아...”심보라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갔다.“이제 너 자신을 놓아줘.”이성준은 술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시선은 줄곧 백아영의 집을 향했고,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니까.심보라는 절망에 빠졌다. 계속 충고해봤자 입만 아프다는 사실이 뻔한지라 백아영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이성준을 보며 질투심에 휩싸였다.하지만 질투가 날수록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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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2화

늦은 밤, 이미 잠이 든 백아영은 왕씨 아주머니의 호들갑에 억지로 눈을 떴다.“새로 이사 온 집 사모님이 아영 아가씨 찾으러 왔대요.”“저를요?”백아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굳이 한밤중에 찾아온 이유는 뭐냐는 말이다.단잠을 깨우는 것밖에 더 있지 않겠는가?임신하고 나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피곤한 그녀는 일어나기 귀찮았다.“무슨 일인지 아주머니가 저 대신 알아봐 줘요. 정 안 되면 내일 다시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세요.”말을 마치고 나서 이불을 덮고 다시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왕씨 아주머니는 강경하게 나섰다.“아영 아가씨랑 아는 사이라고 했어요. 오늘 밤 만나지 못한다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네요.”이런 막무가내인 사람이 있다니?백아영은 마지못해 옷을 걸치고 나갔다.이내 심보라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상담사님이 여긴 웬일이죠?”“늦은 시간에 폐를 끼쳐 죄송해요.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심보라는 굳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실 이성준과 저는 오랜 친구예요. 아영 씨가 얘기했던 남자분과 성준이 동일 인물인지는 얼마 전에 성준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죠. 물론 성준이가 거절당한 것도 알고 있어요. 그 뒤로 성준은 슬픔에 잠겨 하루가 멀다고 하게 술을 마시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죠. 다행히 제가 옆에서 시시각각 보살펴주면서 위로한 덕분에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아졌거든요. 다만...”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성준은 아영 씨가 걱정되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죠.”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백아영도 맞은편에 이사 온 선남선녀 커플이 바로 이성준과 심보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동안 괜스레 감시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이성준 때문이었다.자신이 결코 예민해서가 아니라 이성준이 진짜 곁에 있었다니!“원래는 아영 씨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면 경호원만 남기고 떠나기로 했거든요. 그나마 눈에 보이지 않아야 덜 고통스럽고 괴로워할 테니까. 하지만 정작 아영 씨를 보게 되자 성준은 차마 떠나질 못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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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3화

그러나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했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의 곁에 남아 있냐는 말이다.“저만 사라져준다면 성준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요?”심보라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영 씨도 성준을 사랑하잖아요. 정녕 함께 할 생각이 없어요?”백아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비록 가슴이 아프긴 했으나 태도만큼은 단호했다.심보라는 그제야 마지못해 말을 이어갔다.“눈에서 멀어진다면 성준도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시간은 모든 걸 잊게 해준다. 물론 감정도 마찬가지이다.이성준을 바라보는 백아영은 비통한 심정으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미안해.”그러고 나서 조심조심 방을 나섰다.최면에 걸린 이성준은 깊은 잠에 빠져 쉽게 깨어나질 못한다. 하지만 이때, 손가락이 움찔하더니 마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에서 허우적댔다.방을 나서자 백아영은 위정을 맞닥뜨렸다.그녀를 발견한 위정은 어두운 안색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여기는 왜 왔죠?”두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이성준에게 잊지 못할 상처까지 안겨줬는데 어찌 그녀가 곱게 보일 리 있겠는가?백아영은 주먹을 움켜쥐며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제가 찾아온 건 비밀로 해주세요. 오늘 저녁에 떠날 테니까.”위정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백아영이 급하게 떠나는 이유가 이성준을 멀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깨닫자 사장님의 진심이 짓밟혔다는 생각에 괜스레 더 화가 났다.“떠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사장님께서 또 찾으러 갈 게 뻔한데, 이제 그만 괴롭혀줄래요?”“다신 절 찾지 못할 거예요.”백아영이 나지막이 말했다.“선우 일가 경호원도 같이 갈 예정이라 성준에게 걱정 끼치는 일은 없어요.”이렇게 되면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찾으러 왔다는 핑계도 무용지물이 된다.사랑한다고 할 때는 언제이고 마음이 바뀌자마자 매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이라니!위정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집으로 돌아간 백아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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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4화

“전 의사예요. 어쩌면 치료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리 한번 확인해볼게요.”백아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씨 아주머니는 그녀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백아영 씨, 며칠 동안 고용주 노릇 좀 했다고 내 딸까지 어떻게 할 궁리는 집어치워요! 괜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당장 나가요!”왕씨 아주머니는 힘도 강하고 기세도 사나워서 백아영을 단번에 문밖으로 밀어냈다.백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왕씨 아주머니가 문을 쾅 하고 닫는 바람에 밖에 덩그러니 서 있게 되었다.아직 여자아이의 다리를 확인해보지 못한 탓에 치료 여부는 미지수였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아이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 운명에 처할뿐더러 왕씨 아주머니의 어리석음과 고집 때문에 목숨마저 잃을지 모른다.이현무와 배 속의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결국 잠깐의 고민을 끝으로 진중구에게 문자를 보냈다.「진 선생님, 아까 본 여자아이가 다리를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혹시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진중구가 재빨리 답장했다.「외과 진료도 하실 줄 아세요?」비록 알고 지낸 지 며칠밖에 안 되었지만, 진중구는 백아영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게다가 의술도 워낙 뛰어나서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하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다.진중구는 핑계를 대며 왕씨 아주머니 부부를 옆방으로 데려가 송이의 증상에 관해 얘기했고, 백아영은 몰래 아이의 방으로 잠입했다.후다닥 상처를 체크해보니 최대한 빨리 다리를 절단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건 사실이다.물론 이는 보통 의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백아영은 은침을 꺼내 재빠르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한 시간 후.진중구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느라 목이 마를 지경이었다. 마침 물을 가지러 갔던 왕씨 아주머니는 돌아가기 전 딸아이의 방에 들렀다가 백아영을 발견하게 되었다.게다가 딸아이의 다리에는 침이 촘촘하게 꽂혀 있었다.“당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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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5화

하지만 포기하는 대신 송이를 기어코 병원에서 집까지 데려왔고, 이제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다.진중구는 곧바로 다가가 송이를 꼼꼼히 체크하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이제 다리 절단 안 해도 돼요!”“정말요? 선생님, 백아영 씨와 사적인 친분이 있다고 해서 저를 속이면 안 됩니다.”“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거짓말하겠어요? 아영 씨는 워낙 의술이 뛰어나서 송이의 다리를 치료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진중구는 백아영을 우러러 바라보았다. 기적을 직접 목격하게 되자 흥분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왕씨 아주머니는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뜨렸다.“아직 상처 소독이 남아 있긴 한데...”백아영이 왕씨 아주머니 앞에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치료를 계속할까요?”왕씨 아주머니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영이 몸에서 은침을 빼내자 그녀는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송이의 상처를 치료하고 나니 벌써 동이 트기 시작했다.지친 기색이 역력한 백아영은 기지개를 쭉 켰다.“향후 치료법에 대해서는 이미 진 선생님께 전달했으니 관리만 잘한다면 다리는 완치될 거예요.”말을 마치자 백팩을 등에 메고는 떠나려고 했다.“잠깐만요.”왕씨 아주머니는 난감한 얼굴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밤새 잠도 못 자고 임신까지 했는데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몰라요. 떠나더라도 눈 좀 붙이고 가요. 내 침대 빌려줄 테니까.”이제 막 동틀 무렵이라 시간은 아직 이른 편이었다. 만약 한잠 자고 일어났는데 이성준이 그녀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때 가서 떠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어젯밤에 이미 뜻밖의 일로 지체하지 않았는가?백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시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정류장은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을 제외하고 인기척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따라서 정류장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물론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눈부신 사람이다.훤칠한 키와 고귀한 분위기, 설령 뒷모습이라고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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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6화

순간, 백아영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그토록 숨기려고 애썼던 사실이 결국에는 한태윤의 귀에 흘러 들어가게 되다니!비록 질문이긴 했으나 말투만큼은 단호하지 않은가? 마치 그의 아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백아영은 한태윤과 엮이기 싫어서 혼자 아이를 낳기 위해 오로지 도피할 생각만 했지, 그가 이미 알고 심지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결국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머리가 하얘졌다.패닉에 빠진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성준은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책임질게요.”백아영은 바짝 긴장하더니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녀의 안색이 사뭇 어두웠고, 마음이 뒤숭숭하며 심란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태윤 씨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정 마음에 안 든다면 애초에 이런 아이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그게 가능해요?”이성준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내가 뿌린 씨인데 직접 거둬야죠. 게다가 아이만 데려가고 엄마를 버리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니까 아영 씨와 결혼...”“태윤 씨!”백아영은 당황한 듯 말을 끊더니 연신 뒤로 물러섰다.“제 뜻은 이미 똑똑히 전달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죠. 아이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태윤 씨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끝까지 아이를 핑계로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저도 최후의 수단으로...”백아영은 이를 악물었다.“아이를 지워버릴 거예요.”“안 돼요!”이성준은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다가가 백아영의 팔을 붙잡으며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내 아이예요. 만약 지워버린다면 열 명은 더 낳게 할 거예요.”“네?!”할 말을 잃은 백아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령 축구팀을 만들어도 될만한 터무니없는 숫자를 내뱉더라도 왠지 모르게 한태윤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이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태윤 씨, 저 좋아하는 사람 있으니까 그 남자와 함께하고 싶어요.”이성준은 두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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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7화

그녀의 바람대로 한태윤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하지만 백아영은 심장을 도려낸 듯한 괴로움에 못 이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맞은편 집으로 돌아온 이성준은 가구와 장식품을 모조리 부숴버렸지만, 치솟는 분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내가 그렇게 싫어? 나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그가 이성준일 때는 임신해서 불편한 몸인데도 밤새 도망치려고 하더니, 한태윤의 신분으로 찾아갔을 때는 명색이 아이의 친아버지라서 차마 외면하지 못하겠으니 울면서 제발 떠나 달라고 애원했다.즉, 어떻든 간에 그는 아니라는 뜻인가?한때 아무리 사랑해도 마음이 식으니까 한없이 모질고 매정한 여자 같으니라고!위정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백아영에 대한 그의 불만은 이미 극에 달했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장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냐는 말이다!“어차피 사장님이든 한태윤 씨든 다를 바 없는데, 굳이 신분을 바꿀 필요가 있나요?”이성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황에서도 의기소침했다.“이제 와서 내가 신분을 바꿔가며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싫어하지 않겠어?”위정이 한마디 보탰다.“지금도 거기서 거기라...”이성준은 발끈하며 외쳤다.“꺼져!”밤이 되자 안 그래도 조용한 마을은 주의를 조금만 기울여도 맞은편에서 물건을 깨부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순간, 백아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머릿속으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때려 부수는 이성준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먹먹했다. 아마도 그녀와 한태윤이 같이 있는 모습을 봤을 가능성이 컸다.비록 아무한테도 상처 주기 싫었지만, 세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새벽 2시.강아지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은 마을은 가로등도 꺼져 있어 쥐 죽은 듯 조용했다.집에서 몰래 나온 백아영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도망치려 했으나 정원을 나서자 길 건너편에 서 있는 한태윤을 발견했다.차가운 밤기운 속에서 대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온몸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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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8화

“한태윤 씨와 썸을 타면서 정작 다른 남자를 좋아한대요! 심지어 임신한 몸으로 그 사람 찾으러 갔다니까요?”이웃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입을 틀어막았다.“한태윤 씨는 무슨 죄예요?”“그러니까요, 딱 봐도 괜찮은 남자더구먼. 게다가 일편단심 한 여자밖에 없던데, 하필이면 저런 무개념의 소유자를 만나서 참...”“그게 무슨 소리야?”류씨 아주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아영 아가씨가 자네 집 송이의 다리도 치료해줬는데 은인으로 섬겨도 모자랄 판에...”왕씨 아주머니는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뭐?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어? 송이를 구해줘서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썩어빠진 인성까지 받아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한 눈이나 팔고 진짜 최악이야, 당신이 봐도 뻔뻔스럽지 않아?”“그쪽이 뭔데 사람을 함부로 욕하지?”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문득 울려 퍼졌다. 이성준은 어두운 안색으로 입구에 서서 왕씨 아주머니를 노려보았는데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살갗을 파고들 것 같았다.기에 눌린 왕씨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면서 무의식중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한태윤의 험담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동정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다시 용기를 끌어 올렸다.“태윤 씨, 화 푸세요. 저도 태윤 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대신 열 받았을 뿐이에요.”“하!”이성준이 피식 웃더니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내 일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는 거지? 아영이가 임신한 몸으로 불편함까지 무릅쓰며 그쪽 딸아이를 구해줬는데 감사하기는커녕 뒤에서 호박씨나 까? 심지어 길가에 떠도는 유기견을 구해줘도 꼬리를 흔들며 고마워할 줄 아는데!”그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입을 함부로 나불대는 거 좋아하니까 없어도 그만이지 않겠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지 않은 곳에서 덩치가 산만 한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 왕씨 아주머니를 우악스럽게 끌어내 커다란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따귀를 때릴 때마다 우렁찬 마찰음이 울려 퍼졌는데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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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9화

백아영은 제 발 저린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어제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몸에서 왜 술 냄새가 나요? 혹시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이내 눈을 가늘게 뜬 채 예리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추궁했다.순식간에 주도권이 빼앗긴 상황에서 이성준이 되레 양심에 찔렸다.몸이 아직 완치된 게 아니라서 백아영은 그에게 술을 한 방울도 마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며 금지령을 내렸다.사실 그동안 술을 적지 않게 마셨는데, 어젯밤에도 홧김에 들이붓지 않았는가?“에헴.”이성준은 어색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반찬을 집어주었다.“얼른 밥 먹어요. 음식이 다 식겠어요.”백아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약은 어디 있죠? 약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사실 완치약 처방은 이미 전달받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아직 한 입도 대지 못했다.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여자의 시선을 느낀 이성준은 즉시 장담했다.“내일부터 꼭 먹을게요.”그날 밤, 이성준은 맞은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면서 깨끗한 옷과 약도 챙겼다.심보라는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표정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성준아, 진짜 들어가서 같이 살려고? 아영 씨는 속으로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는데 네가 곁에 있어봤자 고통만 남지 않을까?”“보라야, 넌 심리상담사니까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뻔할 거야.”이성준은 캐리어를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심보라는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비록 그를 부르고 싶었으나 입만 벙긋했을 뿐 차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심리상담사로서 그의 생각을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 설령 백아영의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더라도, 그녀가 늘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며 언제든지 그 사람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곁에 남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이성준을 막기에 그녀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질투에 눈이 먼 심보라는 증오심이 활활 타올랐다. 이성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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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0화

백아영이 말했다.“워낙 작은 동네라서 그나마 침을 잘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 선생님밖에 없어요.”이성준은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이제야 그녀를 찾아온 게 너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벌써 외간 남자한테 등을 몇 번이나 보여줬냐는 말이다.이내 어두워진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당장 여자 한의사를 찾아서 여기로 보내!”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굳이 번거롭게 할 필요 있나요?”“내 여자의 몸을 아무나 본다는 게 말이 돼요? 함부로 쳐다봤다가는 그 눈알을 파버릴지도 몰라요!”이성준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진중구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초인간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 줬다고 할 수 있다.처음 보는 흉측스러운 표정은 부드럽고 온화한 그의 이미지와 전혀 안 어울렸지만, 이상하리만치 이질감이 없었다. 극과 극의 상반된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져 오히려 거부하기 힘든 매력으로 다가왔다.결국 백아영도 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넘어갔는지 모른다.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언젠가 다른 사람과 훌쩍 떠나버리고 말 거야...”“그 입 다물어요!”이성준이 성큼성큼 다가가 이불로 그녀의 몸을 꽁꽁 싸맸다.“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겁쟁이에 불과하다는 뜻이죠. 배짱도 없는 남자랑 무슨 행복을 논한다는 거예요? 아영, 그런 놈은 잊어버리고 날 선택하지 않을래요?”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배 위에 살포시 닿았고, 온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이제 우리 일가족은 영원히 함께하는 거죠.”백아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꿀처럼 달콤한 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혹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앞으로 네 식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이성준이 요리하러 주방으로 간 사이 백아영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상대방은 다름 아닌 심보라였다.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 낮게 가라앉았다.“아영 씨, 지금 행복해요?”행복이라는 단어에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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