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는 짐승을 길들이는 법의 모든 챕터: 챕터 701 - 챕터 710

916 챕터

제701화

정곡을 찔린 심보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묵인이 곧 인정과 다름없지 않은가?“물론 누굴 좋아하는 건 개인의 자유라서 제가 왈가불가할 입장은 아니죠. 만약 정말 성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진심으로 축복할게요. 단...”백아영의 어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이성준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이자 현무의 아빠죠. 혹시라도 더러운 음모와 수작을 부린다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줄 테니까 조심해요.”비록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불과했지만, 심보라는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동안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면서 이성준은 물론 백아영도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청순가련한 겉모습 때문에 아무한테나 괴롭힘을 당할 듯싶었지만, 사실은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순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아영 씨의 지나친 걱정인 것 같네요. 전 성준을 다치게 할 생각이 없어요.”...아무리 기다려도 백아영이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성준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요리를 들고 방으로 찾아갔다.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는데,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한 채 착잡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맞은편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맞은편은 바로 그가 구한 집이다. 한때 자신도 똑같은 자세로 앉아 백아영을 지켜보지 않았는가?순간 바짝 긴장한 그는 목소리마저 살짝 떨렸다.“뭘 보고 있어요?”백아영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갔다. 비록 기분이 좋아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슬픈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려졌고, 마치 한순간의 착각인 듯싶었다.이성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백아영은 요즘 마음이 뒤죽박죽이라 입맛도 별로 없는 탓에 이성준이 만든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지는 못했다.이성준이 설거지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백아영도 뒤쫓아 갔다. 순간, 잔뜩 경계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 씨는 왜 따라와요? 침대에 누워서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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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2화

그날 밤 이성준은 유난히 깊은 잠에 빠져 백아영의 아침밥을 차려줄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임산부는 한 끼라도 거르면 배가 고프기에 자책감이 들어 스스로 머리를 내리쳤다. 이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커다란 침대 위에는 가지런히 놓인 침구를 빼고 아무도 없었다.게다가 그는 아직 남아 있는 약 기운 때문에 후유증이라도 생긴 듯 머리가 살짝 어지러우면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이성준은 즉시 뛰쳐나가 류씨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었다.“백아영은 어디 갔지?”류씨 아주머니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새벽에 어떤 남자랑... 같이 나갔어요.”“누구?!”“몰, 몰라요...”이성준은 류씨 아주머니를 놓아주고 곧바로 CCTV를 확인했다. 화면 속에서 백아영은 기쁜 얼굴로 남자의 품에 뛰어들었다.두 사람은 다정하게 포옹을 나눴고, 백아영의 얼굴에 실로 오랜만에 보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의 곁에 있을 때는 허구한 날 우거지상을 한 채 근심과 걱정을 지우지 못하더니 다른 남자 앞에서는 환한 미소를 짓지 않겠는가? “사장님, 이 남자는 류인하라고 하는데 아영 씨의 대학 동기예요.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학교 다닐 때부터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죠. 비록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일반 커플보다 훨씬 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둘은 취향도 비슷하고 찰떡 호흡을 자랑해서 다른 친구들도 최고의 소울메이트로 인정해 줬대요. 류인하는 해외 업무까지 미루고 부랴부랴 돌아왔는데, 곧장 여광마을로 향했거든요.”보고를 이어가는 위정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백아영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남자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이성준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대학교 졸업하고 연락도 끊겼다는데 왜 이제 와서 그리워하는 거지? 나랑 결혼할 때 아영이가 이런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당시 결혼식을 준비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눈에는 온통 자신밖에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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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3화

“네가 침대에서 자.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류인하는 검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마치 대학교에 다닐 때처럼 정직하고 바른 느낌이 들었다.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고 여전히 의술 연구밖에 모르는 공붓벌레 같았다.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며 백아영은 속으로 몰래 탄식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초심마저 잃은 듯싶었다.“인하야, 고마워.”“보라 씨는 은인이고 넌 동창인데 돕는 게 당연한 거지.”류인하는 잽싸게 짐을 풀었다.“임신까지 한 몸으로 종일 이동했는데 무리가 가기 마련일 테니까 얼른 쉬어. 푹 잘 수 있게 향을 피워줄게.”향에 불을 붙이자 단향의 냄새가 서서히 피어올랐고, 긴장이 탁 풀리면서 편안한 느낌에 백아영은 졸음이 쏟아졌다.그녀가 잠든 뒤 류인하는 소파에 앉았고, 백아영을 바라보는 눈빛이 서서히 탐욕으로 물들더니 욕심이 가득했다.그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현실 앞에 무릎 꿇게 되었다.사실 그동안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못 찾아 좌절도 겪고 모욕도 당해 출세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심지어 누군가 모함하는 바람에 자칫 의학계에서 영구 추방될 뻔했다. 결국 절망에 빠져 그는 투신자살까지 계획했다.나중에 심보라의 도움을 받아 심리 상담받았는데, 인맥을 통해 재취업의 기회를 쟁취하게 힘을 써준 덕분에 다시 한번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었다.그와 동시에 이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 약육강식이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그는 더는 의학 연구에만 매진하지 않았고, 점점 사회생활에 치중했다. 착하고 어리숙한 겉모습과 달리 뒤로는 악랄한 수작을 부려 사람을 탈탈 털릴 때까지 갉아먹었다.하지만 아직 만족하기에는 일렀다. 그는 어디까지나 남을 위해 일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야망은 풍선처럼 커지고 있지만, 딱히 실현할 방법이 없었다.심보라는 그의 은인이자 귀인이다. 이번에 백아영의 남자친구로 위장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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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4화

백아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마지못해 말했다.“괜찮아.”“아영아, 너 임신했어? 이 남자는 또 누구야?”선우경진이 화가 난 얼굴로 빤히 쳐다보며 묻자 그녀는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결국 선우경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류인하가 곧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자 함께하기로 선택한 장본인이라고만 알려줬다.그녀가 입이 마를 정도로 열변을 토하며 선우경진을 겨우 설득하자 아직 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성무열이 불쑥 쳐들어왔다.그는 집을 박차고 들어서자마자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어이, 류씨. 당장 기어 나오지 못해?”억울한 표정의 류인하는 성무열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도 백아영을 위해서 용기를 끌어 올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나름 남자다운 행동이지만, 백아영은 그를 막아섰다.“오빠, 일단 인하가 쉬게 방으로 좀 안내해줘요. 전 무열이랑 얘기 좀 나눠볼게요.”불같은 성격의 성무열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백아영뿐인지라 선우경진은 잽싸게 류인하를 데리고 떠났다.“왜 저 자식의 편을 들어주는 거야?”성무열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렸다.“아영아, 저놈 너한테 엿 먹이고 있는 거야.”백아영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성무열이 류인하가 왜 그녀의 남자친구인지에 대해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엉큼한 자식 같으니라고! 일부러 기자들 앞에서 말실수한 거야.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해! 아마도 여론몰이를 통해 선우 일가의 사위 자리를 꿰차려고 하겠지.”일부러 말실수하다니?백아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류인하는 착하고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인지라 이런 가능성은 생각지도 못했다.성무열이 콕 집어 말하자 왠지 모르게 이질감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모른 척하며 말했다.“내 남자친구야...”“흥, 안 믿거든?”성무열이 비아냥거리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나 같은 남자도 안중에 없는데 저런 놈을 좋아할 리 있겠어? 이성준은 당사자라서 속았을지 모르지만 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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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5화

백아영과 류인하의 공개 열애 인정 관련 뉴스는 성무열뿐만 아니라 이성준도 알게 되었다.비록 이미 마음의 준비는 했으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순간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마치 불이 붙은 폭탄이 펑 터지는 것처럼 화가 폭발했다.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나머지 백아영을 끌어안고 있는 류인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뚝!순간 TV 모니터가 꺼지면서 심보라가 술 두 잔을 들고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차라리 보지 않으면 상처라도 덜 받지. 한잔할래?”이성준이 싸늘한 얼굴로 술을 건네받아 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 머릿속으로 몸조심해야 한다며 약 먹는 동안만큼은 술 먹지 말라는 백아영의 말이 떠올랐다.그리고 자신도 약속하지 않았는가?심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아영 씨가 네 곁에 있었더라면 술로 아픔을 달래는 일도 없을 텐데... 너랑 비교하면 대체 뭐가 더 좋은지도 모르는 사람을 왜 선택했는지.”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비수처럼 이성준의 심장에 꽂혔고, 파도처럼 일렁이는 슬픔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근심과 걱정을 잊기 위해 술보다 좋은 건 없었다.그는 고개를 젖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심보라는 몰래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다시 술잔을 가득 채웠다.단향이 옆에서 아른거렸고, 알코올 냄새와 단향의 향기가 어우러져 방안을 가득 메웠는데 특이한 향 때문에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정신이 흐릿한 와중에 이성준은 백아영의 모습을 보았고, 그제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3일 뒤.이성준을 찾으러 온 성무열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특이한 향을 맡았다. 알코올과 단향이 어우러진 냄새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했다.순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는데, 이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그러고 나서 싸늘한 눈빛으로 소파에 멍하니 누워있는 남자를 쏘아보았다.“자포자기한 모습을 보니 마약 중독자라고 해도 믿겠어요. 만약 결혼하기 전에 목격했더라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췄을 텐데.”이성준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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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6화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건 이성준에게 불공평했고 때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한들 적어도 백아영의 남은 삶에 조금이나마 행복을 더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다행이다.슬픔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으니까.“아영아, 어디가?”막 입구에 도착한 백아영은 마침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선우경진과 마주쳤고 그의 뒤에는 심은아가 묶여있었다.본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먹이를 발견한 늑대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아영을 노려봤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흉측했다.“나랑 같이 심은아 심문하러 갈래?”성우경진이 물었다.허씨 일가는 이성준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물론 백아영의 50조를 받아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비유할 수 있을 뿐 예전만큼의 세력을 자랑하지는 못했다.허씨 일가와 손을 잡았던 심은아는 보호막이 사라지는 순간 이성준이 설치한 함정에 빠져 손쉽게 붙잡혔다.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심보가 고약하고 잔꾀가 많은 심은아는 어쩌면 백아영 어머니의 행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하여 백아영도 그녀를 심문하려 했으나...“오빠, 전 급한 일 때문에 잠깐 나갔다 올게요. 먼저 하고 있어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차에 올라타 재빨리 떠났다.심은아는 음흉하고 사악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백아영이 이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별장의 모든 조명이 꺼진 채 오직 가로등만이 반짝이고 있었다.그녀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를 입력해 안으로 들어갔다.아직도 그대로인 비밀번호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이성준이 있는 안방으로 다가갔다.백아영은 안방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공기 속에 뒤섞인 알콜 냄새를 맡았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단향과도 너무 잘 어울려 묘하게 그 속으로 취하는 듯 서서히 잠이 밀려와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했다.앞서 여광마을에 있을 때도 이성준의 방에서 이 향기를 맡았으나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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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7화

며칠 못 본 사이에 그는 몰라보게 야위었다. 얼굴의 가장자리가 움푹 파일 정도로 살이 빠졌고 턱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는데 거기에 정리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까지 더해지자 정말 폐인이 따로 없다.평소의 박력 넘치고 잘생긴 모습과 달리 곧 무너질 듯 위태위태해 보였고 마치 세상에 의해 버림받은 것처럼 정신마저 피폐한 상태였다.그 모습에 백아영은 심장이 움츠러들며 아파지기 시작했다.“전에는 이것보다 훨씬 심했어요. 이 정도는 많이 나아진 거라고 할 수 있죠.”백아영의 등 뒤에 있던 심보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고 그 속에 담긴 원망과 증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그런데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네요. 아영 씨 때문에 그동안 제가 했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됐어요. 또 힘들어하며 고통에 사무칠 텐데 만약에 아영 씨가 성준이를 위해서 이렇게 했다는 걸 알게 되면...”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는 않았지만 백아영을 향한 비아냥거림은 그대로 느껴졌다.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성준의 두 눈을 바라봤다.이성준은 환각이라고 생각하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면서도 눈에서 애틋함이 가시지 않았다.“아영아, 이게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그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행여나 눈앞의 백아영이 사라질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는데 손바닥에 닿은 촉감은 더없이 생생했다.이성준은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백아영?”백아영은 눈물이 밀려와 눈시울이 따끔거렸지만 주먹을 불끈 쥔 채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그녀는 심호흡하며 애써 감정을 가다듬은 후 차분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현무 물건 챙기러 왔어.”이성준은 그윽한 눈빛으로 백아영을 바라봤다.차가운 그녀의 태도에 술이 깨는 듯 정신이 말짱해졌다.“술 적당히 마셔. 계속 그렇게 마시면 위경련 더 심해질 거야.”백아영은 1초라도 더 망설였다가는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아 의사로서 조언 한마디를 하고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이성준을 막 스쳐 지나가던 그때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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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8화

선우경진은 잔뜩 흥분하며 백아영의 방문을 열었는데 그녀의 모습을 보고선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너... 왜그래?”핏기조차 없는 창백한 얼굴에 다크서클은 턱 끝까지 내려왔고 호두처럼 팅팅 부은 두 눈까지 더해지자 처참하기 그지없었다.묻지 않아도 그녀가 밤새 울었다는 걸 알아챈 선우경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일 있어?”“아무것도 아니에요.”말로는 별일 없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쉬어서 마치 사포에 간 것처럼 걸걸했다.백아영은 개의치 않은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엄마는 지금 어디 있어요?”“우강에 계시대.”선우경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을 이었다.“컨디션도 안 좋은 것 같은데 괜히 임신한 몸으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쉬고 있어. 내가 안전하게 모셔 올게.”우강은 F 국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곳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각종 세력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뿐만 아니라 무법천지로 날뛰는 흉악범이 부지기수라서 F 국 정부마저도 관리하지 못하고 포기한 법외의 땅이다.그만큼 위험하다는 걸 뜻하는데 그곳에 절대 선우경진만 보낼 수 없었다.“저도 갈 거예요.”백아영은 확고했다.“네 몸을 생각해서라도...”선우경진은 백아영이 무조건 갈 거라 예상하고 직접 방으로 찾아왔지만 막상 그녀의 초췌한 모습을 보니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표정이 일그러졌다.“여기 남아있는 게 더 힘들어요.”백아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성준을 만나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릴 바엔 차라리 다른 곳으로 떠나 몸도 마음도 멀어지는 게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현무도 어젯밤에 잠 설쳤어. 이따가 깨면 내가 이씨 가문으로 데려다줄게.”...이현무가 잠에서 깼을 때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백아영은 떠난 지 오래였다.이씨 가문으로 돌아온 그는 방에 틀어박혀 이성준을 끌어안고 울었다.“아빠, 엄마가 떠났어요. 또 한동안 못 볼 텐데 어떡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엉엉...”술을 마시려던 이성준은 그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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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09화

백아영은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이 줄곧 싸늘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고, 그 모습에 그녀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자신이 발 디딜 곳이 없다며 단정했다. 그래서 더더욱 왜 울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백아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매일 울고 있는 이유는 꼭 알아내고 싶었다.그는 백아영의 행복을 위해서 손을 놓았다.그런데 류인하가 행복마저 줄 수 없다면 백아영의 곁에 남아있을 자격이 있을까?“성준아, 어디가?”막 술을 꺼내온 심보라는 외출하려는 이성준을 의아하게 바라봤고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백아영 찾을 거야.”심보라는 신경이 곤두서서 재빨리 쫓아갔다.“찾아서 뭐 할 건데? 어제도 아영 씨 봤다고 밤새 못 잤잖아. 성준아, 왜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혀?”머릿속에 온통 백아영의 걱정으로 가득 찬 그는 자기 몸을 돌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차에 오르려 문을 열었다.“지금 찾아가도 소용 없어. 아영 씨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잊었어? 그 어떤 감정조차 남아있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고 아영 씨는 지금이랑 똑같이 입 꾹 닫은 채 널 멀리할 거야.”심보라는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네가 이렇게 매달릴수록 아영 씨도 힘들어.”정곡을 찌르는 심보라의 말에 그는 자리에 굳어버린 채 표정마저 싸늘하게 변했다.백아영이 한태윤에게 마음이 남아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성준에게는 다가온 적이 없었고 늘 피하기만 했기에 어쩌면 이런 행동은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솔직히 찾아가더라도 왜 우는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커서 이성준은 머뭇거렸다. 그 틈을 타 심보라가 말을 이었다.“네가 아영 씨에게 미련이 남은 건 알겠는데 세상에 여자는 많아. 정말 꼭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내가 대신해서 갈게. 심리상담사로서 내가 찾아가는 게 너에게도, 아영 씨에게도 훨씬 도움 되는 일이야.”그는 입술을 깨물며 망설였다. 심보라는 구구절절 일리 있는 말을 내뱉으며 이성준을 말렸다.“도련님,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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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0화

뚱보 아줌마는 모든 걸 알고 있다.마음이 급해진 심보라는 절대 이성준이 이 모든 걸 믿도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성준아, 만약에 아영 씨가 정말로 널 사랑하고 있다면 앤니 씨와의 오해가 풀린 순간 널 선택하지 않았을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게 당연한 거잖아.”앞뒤 안 맞는 건 사실이다.“제가 그 이유를 압니다.”위정이 착잡한 기색으로 편지 하나를 이성준에게 건네줬다.그건 공항에서 받은 편지였는데 당시 백아영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고 편지의 담긴 작별 인사로 이성준이 다시 힘들어할까 봐 걱정된 그는 지금껏 이걸 숨겼다.방금 뚱보 아줌마의 말을 듣고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편지를 읽어봤는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을 본 순간 섣불리 행동했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사장님, 죄송합니다. 이걸 숨기지만 않았어도 아영 씨와의 오해가 이렇게 깊어지지는 않았을 텐데...”편지에는 백아영의 청초한 글씨체가 담겨있었고 마음 꾹꾹 눌러 담은 채 쓴 글은 그녀의 무거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듯했다.백아영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이성준이라고 밝혔다.그가 맞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정말 이성준이다!그녀는 한태윤에 대한 확신 없는 마음이 이성준 때문이라며 자책했지만 이성준이 바로 한태윤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아무도 그들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었고 더 이상 선택할 필요도, 도망칠 필요도 없다.“아영아...”이성준을 감싸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그윽한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선우 일가를 향해 질주했다.“이성준!”심보라는 무의식적으로 뒤쫓으려 했지만 차는 이미 떠났고 절망은 순식간에 그녀를 삼켜버렸다.이로써 애써 숨겨왔던 모든 비밀이 샅샅이 드러났다.이성준이 백아영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심보라는 그를 잃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그가 선우 일가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이미 떠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어디로 갔는지 여러 사람에게 물었으나 선우 일가 가족마저도 그들의 목적지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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