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보 아줌마는 모든 걸 알고 있다.마음이 급해진 심보라는 절대 이성준이 이 모든 걸 믿도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성준아, 만약에 아영 씨가 정말로 널 사랑하고 있다면 앤니 씨와의 오해가 풀린 순간 널 선택하지 않았을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게 당연한 거잖아.”앞뒤 안 맞는 건 사실이다.“제가 그 이유를 압니다.”위정이 착잡한 기색으로 편지 하나를 이성준에게 건네줬다.그건 공항에서 받은 편지였는데 당시 백아영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고 편지의 담긴 작별 인사로 이성준이 다시 힘들어할까 봐 걱정된 그는 지금껏 이걸 숨겼다.방금 뚱보 아줌마의 말을 듣고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고 편지를 읽어봤는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을 본 순간 섣불리 행동했던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사장님, 죄송합니다. 이걸 숨기지만 않았어도 아영 씨와의 오해가 이렇게 깊어지지는 않았을 텐데...”편지에는 백아영의 청초한 글씨체가 담겨있었고 마음 꾹꾹 눌러 담은 채 쓴 글은 그녀의 무거운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듯했다.백아영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 이성준이라고 밝혔다.그가 맞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정말 이성준이다!그녀는 한태윤에 대한 확신 없는 마음이 이성준 때문이라며 자책했지만 이성준이 바로 한태윤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아무도 그들 사이를 가로막을 수 없었고 더 이상 선택할 필요도, 도망칠 필요도 없다.“아영아...”이성준을 감싸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그윽한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그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선우 일가를 향해 질주했다.“이성준!”심보라는 무의식적으로 뒤쫓으려 했지만 차는 이미 떠났고 절망은 순식간에 그녀를 삼켜버렸다.이로써 애써 숨겨왔던 모든 비밀이 샅샅이 드러났다.이성준이 백아영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심보라는 그를 잃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그가 선우 일가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이미 떠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어디로 갔는지 여러 사람에게 물었으나 선우 일가 가족마저도 그들의 목적지가 어
폭우가 쏟아졌지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막지 못했고 그는 폭우 속에서 백아영을 품에 꼭 안았다.차가운 비에 온몸이 흠뻑 젖었으나 서로를 끌어안은 몸만큼은 따뜻했다.“아영아.”이성준의 갈 곳 잃었던 마음은 비로소 피난처를 찾은 듯 안정되었다.“왜 왔어?”F국 행 비행기에 올라탔던 백아영은 비행기를 돌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이성준, 넌 정말 개자식이야.”두 시간 전, 선우 일가에서 심은아를 체포했을 때 마침 그녀에게 잡혀있던 정호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고작 직원에 불과한 그를 이렇게까지 대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굳이 제경으로 돌아와서 당신을 찾는 게 뭔가 수상쩍어서 잡아뒀는데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게 됐지 뭐예요.”심은아는 비꼬며 백아영을 바라봤다.“아영 씨, 의술도 뛰어나고 변장술도 뛰어나면서 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거죠? 당신이 알고 있는 한태윤? 그 사람 가짜예요.”백아영은 동공이 흔들렸다.“그럴 리가 없어요.”“풉, 믿기지 않으면 직접 보시던가. 제가 직접 조사한 자료들이에요. 당신이 알고 있는 한태윤이 남원에 있을 때 제경에는 또 다른 한태윤이 있었어요.”증거가 눈앞에 버젓이 놓이자 백아영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그제야 자신이 간과했던 디테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처음 한태윤을 만났을 때 그의 신분이 의심되어 여러 번 떠봤으나 삐쩍 마른 앙상한 몸을 본 순간 절대 이성준일 리가 없다며 단정지었고 그 사람이 진정한 한태윤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그 시도로 이성준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나서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았다.솔직히 한태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백아영은 오직 그 사람이 이성준이 맞는지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다.이로 인해 나중에 한태윤의 모습이 변해가며 이성준과 겹쳐 보이기도 했지만 같은 사람일 리가 없다며 섣불리 단정 지었다.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백아영은 마치 얼음물을
비행기는 다시 이륙했고 선우경진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아영아, 그러지 말고 성준 씨 용서해 줘. 다 널 사랑하니까 그런 거잖아. 네가 죽음으로 괴로워하며 고통받을까 봐 걱정되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한 거야.”백아영은 창가 자리에 앉아 점점 멀어지는 땅을 바라보다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만약 제가 죽을병에 걸렸는데 모든 사람에게 숨기고 혼자 죽으면 오빠는 절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그게...”선우경진은 말하려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날 사랑한다는 이유를 앞세워서 했던 모든 행동이 다 상처로 남았어요. 내가 못난 사람이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 매일 고통에 허덕이며 수없이 나 자신을 원망하고 의심했어요. 밤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죽는 것보다 못한 날들을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오해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게 용서될까요? 나만 바보 됐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선우경진은 입을 벙끗했으나 차마 한 글자도 말하지 못했다.피치 못할 사정인 건 맞지만 거듭된 상처로 인해 백아영의 마음은 이미 산산조각났고 사랑하는 만큼 상처가 더 깊었기에 쉽사리 용서하지 못하는 그녀의 고충도 이해되었다.외유내강의 성격인 백아영이라면 아마 평생 이 일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우강에서 이성준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백아영이 진지한 눈빛으로 선우경진을 바라보자 그는 다급하게 맹세했다.“절대 얘기하지 않을게. 믿어줘.”백아영은 얼굴을 옆으로 돌려 창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차분한 듯 보이지만 눈가에서는 조용히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고 그 모습을 본 선우경진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아영이가 마음을 굳게 먹어서 이번에는 도와주기 힘들 것 같아요. 미안해요.」「어디로 가는 중이에요?」「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요.」「어딘데요?」「저번에 도와줬다가 들킨 후로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아영이랑 맹세했다고요.」「그러니까 어디로 가고 있냐고요!」「우강...」...우강
백아영은 고개를 숙이고 평평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임신할 때부터 입덧이 심했지만 이현무 못지않은 훌륭한 아이라며 굳게 믿고 있었다.당시 이현무는 치명적인 맹독에도 굳건히 살아남은 아이였기에 사막 횡단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자신의 처지부터 돌아보는 게 어때요? 우강에 들어가서도 지금처럼 쓸모없는 사람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심은아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며 진실한 표정을 보였으나 백아영은 연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혀 믿지 않았고 우강에 도착하면 기필코 심은아의 입을 열게 만드리라 다짐했다.“정말 엄마가 살아있다고 생각해요?”심은아의 눈빛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우강은 사람의 뼈까지 씹어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무서운 곳인데 2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살아있을까요? 아마 해골로...”“정현아!”온유성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덜덜 떨며 백아영의 손을 덥석 잡자 그녀는 재빨리 맞잡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타일렀다. “엄마는 절대 죽지 않았을 거예요. 최고의 의술을 갖고 있으니까 우강에서도 인정받는 의사가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엄마의 의술을 봐서라도 쉽게 죽이지 못할 거예요. 엄마도 어쩌면 우리가 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요.”백아영의 말을 들은 온유성은 미간이 살짝 누그러졌으나 여전히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인 듯 악몽을 꾸고 있었다.백아영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온유성이 도대체 무슨 악몽을 꾸고 있길래 이토록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우강에는 또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걸까?선우경진은 7, 8명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를 불러들였다. 모두 근육질의 남자였는데 몸 곳곳에 끔찍한 흉터가 남아있었고 사나운 인상의 그들에게서는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여자야? 죽고 싶어 환장했어?”용병 부대의 리더인 찰스는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며 경멸하듯 백아영을 바라봤다.“난 저 여자랑 같이 들어가고 싶지 않아
용병 부대 7명, 선우 일가 경호원 10명, 백아영 일행까지 더해 총 21명이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향했다.황사와 함께 찌는듯한 더위가 밀려왔다.막 잠에서 깬 온유성은 고통스럽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여기, 너무 익숙한데...”“아빠, 전에 오신 적 있어요?”“아마도. 그런데 기억이 잘 안 나네. 머리가 너무 아프구나...”백아영은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아빠, 그러지 말고 돌아가서 쉬는 게 어때요?”“안돼, 정현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조건 갈 거야.”온유성은 엄청난 고통을 억누르며 단호하게 말했다.“최대한 빨리 기억을 되찾아볼게. 어쩌면 우강에 도착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낙타위에 앉은 백아영은 점점 뜨거워지는 사막의 열기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고 아랫배가 이따금 아파져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길을 재촉했다.“잠깐만 쉬었다가 가시죠.”“이제 시작인데 벌써 쉬다뇨? 몸이 그렇게 약하면서 왜 굳이 따라나서서 방해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네요.”찰스는 단칼에 거절했다.“아직은 쉬면 안 돼요. 버티지 못할 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요.”백아영은 이를 악물었다.“잠깐 쉰다고 우강에 못 가는 것도 아니고, 고용주가 급하지 않다는데 왜 이렇게 재촉하죠? 누가 보면 목적이 따로 있는 줄 알겠어요.”“얼른 끝내고 다른 일도 해야죠.”“제가 두 배의 계약금으로 다음 타임까지 살게요.”찰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그녀의 말에 타협하지 않고 이유를 설명했다.“아영 씨,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있어요. 우강에서 열리는 만사각 경매에 참여하실 생각이라면서요? 시간을 지체하다가 경매를 놓칠 수도 있어요.”만사각 경매는 보름에 한 번씩 열리고 우강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꿰뚫어 보는 만물박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이 기회를 놓치면 보름이나 기다려야 한다.외부인이 죽지 않고 우강에서 보름을 머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제
찰스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마시고 담배꽁초를 날려 황사 속으로 떨어뜨렸다.곧이어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직접 손을 써야지.”이튿날 밤.다들 사막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찰스는 부하 두 명을 시켜 망을 봤고 선우 일가도 경호원 두 명을 남겨두고 그들과 함께 밤을 지켰다.낙타를 타고 온종일 움직였던 백아영은 너무 지쳐서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잠이 들어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고 미세한 움직임에도 바로 대응할 수 있게 신경을 곤두세웠다.백아영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을 떴다.그녀는 자신의 텐트를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고 모닥불에 의해 비친 누군가의 그림자를 보고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위험해!”고요한 밤에 울려 퍼진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사람들 모두 잠에서 깼고 그 시각 누군가 백아영의 텐트를 찢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찰스였다!그는 피에 굶주려 있는 야수처럼 백아영을 노려보더니 주저없이 그녀를 덮쳤다.“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었는데 왜 일을 크게 만들고 난리야.”백아영은 간신히 찰스의 손을 피하고 작은 몸을 이용하여 재빨리 텐트에서 나왔다.텐트 밖. 선우 일가의 경호원과 용병들은 이미 맞서 싸우고 있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아영아, 얼른 가자.”선우경진은 심은아를 묶은 밧줄을 잡아당기며 다른 한 손으로 백아영의 손을 잡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선우철은 혼수상태인 온유성을 등에 업었다.“다른 사람들은 어떡해요?”“용병들을 막고 있을 테니까 우린 일단 가자. 실력자니까 알아서 잘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만에 하나 도망가다가 용병에게 따라잡히면 절대 싸워서 이길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팀장님, 그 사람들 도망갔어요.”다니엘이 괴로워하며 입을 연 그 시각 백아영 일행은 모래 언덕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자고 있는 동안 성가신 경호원들을 암살한 후 손쉽게 백아영을 처리할 계획이었으나 그녀의 비명 소리에 모든 사람이 잠에서 깼고 계획이 물거품 됐을
“출구가 어딘지 당장 말해요.”백아영은 손에 은침을 든 채 싸늘하게 물었다.손발이 묶여 꼼짝할 수 없었던 심은아는 돌담에 기대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출구가 있는 건 맞는데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적어요. 숨이 간신히 붙어있을 때 찰스가 수습하러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그때가 되면 백아영 일행은 기진맥진하여 반항할 힘조차 없을 것이다.백아영은 소름이 돋았다. 마치 거대한 그물에 걸린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상황은 심은아가 오래전에 짜놓은 판이었고, 계획은 그녀가 처음 잡혔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같은 시각 우강에 있던 제갈연준은 핸드폰을 보더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내 사랑 드디어 잡혔네. 며칠 뒤면 내 곁으로... 아참, 아니지.”그 생각에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백아영 일행은 황급히 도망친 탓에 달랑 배낭 하나밖에 챙기지 못했고 보급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 났다.설상가상으로 온유성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두통으로 의식을 잃은 데다가 이제는 고열을 앓았는데 백아영의 침술로 억제할 수 없었다.심은아는 옆에 앉아 고소해하며 얄밉게 웃고 있었다.“상태를 보니까 찰스가 오기도 전에 한 명이 죽겠는데요?”“닥쳐! 함부로 입 놀리다가 네가 제일 먼저 죽게 될 거야.”백아영이 분노하며 위협하자 심은아는 입을 닫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눈에 거슬렸다.온유성에게 마지막 침을 놓은 후 백아영은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졌고 선우경진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아영아!”백아영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저 괜찮... 우웩!”말을 마치기도 전에 백아영은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먹은 음식이 없으니 연신 물만 토했고 목이 불타는 듯 쓰라렸다.겨우 한 끼를 굶었다고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며칠 동안 이런 상황을 반복해야 한다니... 차라리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다 나때문이야. 내가 제대로 조사했다면 찰스가 속한 용병 부대를 고용하지 않았을 텐데...”선우경진이 죄책
백아영은 동공이 급격하게 움츠러들었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선우경진과 선우철을 바라봤다.그들의 컨디션은 백아영보다 조금 나았지만 솔직히 전성기였다고 해도 두명이 찰스 일행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백아영은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당황하며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이 풀려 다시 쓰러졌고 절망으로 가득 찬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바로 이때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온유성이 눈을 떴는데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섬뜩함을 자아냈다.순간 이성을 되찾으면서 시선이 다시 부드러워지더니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출구가 어딘지 내가 알아.”말하던 그는 다가가서 백아영을 번쩍 안더니 마치 길을 아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하게 걸음을 옮겼다.선우경진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고모부, 길은 아신다고요? 기억을 되찾으신 거예요?”온유성의 품에 안긴 백아영은 익숙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이상하고 낯선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빠, 기억 돌아왔어요?”온유성은 전방을 주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아주 조금. 네 엄마가 예전에 우강 사람들에게 끌려갔거든. 우강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줄곧 온화하고 상냥한 모습을 유지하던 그는 선우정현을 언급할 때면 이를 악물었고, 야윈 얼굴이 흉측하게 변하더니 범접할 수 없는 싸늘함을 드러냈다.아무리 애써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메이즈 캐슬은 온유성 덕분에 탈출할 수 있었고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사막을 바라보자 백아영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그 시각 심은아의 표정은 극도로 추악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유성을 바라봤다.“출구를 어떻게 알고 있지? 당신... 누구야?”온유성은 그녀를 무시하고 백아영을 안은 채 사막을 거닐며 우강을 향해 걸어갔다.우강은 사막의 금지구역 안에 있는 캐슬이었고 주위는 강으로 둘러싸여 오아시스를 형성했다.백아영과 일행들은 며칠 동안의 에너지 소모가 막강한 탓에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어도 컨디션이 좀처럼 회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