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백아영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그토록 숨기려고 애썼던 사실이 결국에는 한태윤의 귀에 흘러 들어가게 되다니!비록 질문이긴 했으나 말투만큼은 단호하지 않은가? 마치 그의 아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백아영은 한태윤과 엮이기 싫어서 혼자 아이를 낳기 위해 오로지 도피할 생각만 했지, 그가 이미 알고 심지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결국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머리가 하얘졌다.패닉에 빠진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성준은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책임질게요.”백아영은 바짝 긴장하더니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녀의 안색이 사뭇 어두웠고, 마음이 뒤숭숭하며 심란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태윤 씨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정 마음에 안 든다면 애초에 이런 아이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그게 가능해요?”이성준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내가 뿌린 씨인데 직접 거둬야죠. 게다가 아이만 데려가고 엄마를 버리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니까 아영 씨와 결혼...”“태윤 씨!”백아영은 당황한 듯 말을 끊더니 연신 뒤로 물러섰다.“제 뜻은 이미 똑똑히 전달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죠. 아이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태윤 씨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끝까지 아이를 핑계로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저도 최후의 수단으로...”백아영은 이를 악물었다.“아이를 지워버릴 거예요.”“안 돼요!”이성준은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다가가 백아영의 팔을 붙잡으며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내 아이예요. 만약 지워버린다면 열 명은 더 낳게 할 거예요.”“네?!”할 말을 잃은 백아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령 축구팀을 만들어도 될만한 터무니없는 숫자를 내뱉더라도 왠지 모르게 한태윤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이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태윤 씨, 저 좋아하는 사람 있으니까 그 남자와 함께하고 싶어요.”이성준은 두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고,
그녀의 바람대로 한태윤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하지만 백아영은 심장을 도려낸 듯한 괴로움에 못 이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맞은편 집으로 돌아온 이성준은 가구와 장식품을 모조리 부숴버렸지만, 치솟는 분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내가 그렇게 싫어? 나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그가 이성준일 때는 임신해서 불편한 몸인데도 밤새 도망치려고 하더니, 한태윤의 신분으로 찾아갔을 때는 명색이 아이의 친아버지라서 차마 외면하지 못하겠으니 울면서 제발 떠나 달라고 애원했다.즉, 어떻든 간에 그는 아니라는 뜻인가?한때 아무리 사랑해도 마음이 식으니까 한없이 모질고 매정한 여자 같으니라고!위정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백아영에 대한 그의 불만은 이미 극에 달했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장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냐는 말이다!“어차피 사장님이든 한태윤 씨든 다를 바 없는데, 굳이 신분을 바꿀 필요가 있나요?”이성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황에서도 의기소침했다.“이제 와서 내가 신분을 바꿔가며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싫어하지 않겠어?”위정이 한마디 보탰다.“지금도 거기서 거기라...”이성준은 발끈하며 외쳤다.“꺼져!”밤이 되자 안 그래도 조용한 마을은 주의를 조금만 기울여도 맞은편에서 물건을 깨부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순간, 백아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머릿속으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때려 부수는 이성준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먹먹했다. 아마도 그녀와 한태윤이 같이 있는 모습을 봤을 가능성이 컸다.비록 아무한테도 상처 주기 싫었지만, 세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새벽 2시.강아지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은 마을은 가로등도 꺼져 있어 쥐 죽은 듯 조용했다.집에서 몰래 나온 백아영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도망치려 했으나 정원을 나서자 길 건너편에 서 있는 한태윤을 발견했다.차가운 밤기운 속에서 대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온몸에 한
“한태윤 씨와 썸을 타면서 정작 다른 남자를 좋아한대요! 심지어 임신한 몸으로 그 사람 찾으러 갔다니까요?”이웃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입을 틀어막았다.“한태윤 씨는 무슨 죄예요?”“그러니까요, 딱 봐도 괜찮은 남자더구먼. 게다가 일편단심 한 여자밖에 없던데, 하필이면 저런 무개념의 소유자를 만나서 참...”“그게 무슨 소리야?”류씨 아주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아영 아가씨가 자네 집 송이의 다리도 치료해줬는데 은인으로 섬겨도 모자랄 판에...”왕씨 아주머니는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뭐?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어? 송이를 구해줘서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썩어빠진 인성까지 받아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한 눈이나 팔고 진짜 최악이야, 당신이 봐도 뻔뻔스럽지 않아?”“그쪽이 뭔데 사람을 함부로 욕하지?”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문득 울려 퍼졌다. 이성준은 어두운 안색으로 입구에 서서 왕씨 아주머니를 노려보았는데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살갗을 파고들 것 같았다.기에 눌린 왕씨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면서 무의식중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한태윤의 험담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동정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다시 용기를 끌어 올렸다.“태윤 씨, 화 푸세요. 저도 태윤 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대신 열 받았을 뿐이에요.”“하!”이성준이 피식 웃더니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내 일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는 거지? 아영이가 임신한 몸으로 불편함까지 무릅쓰며 그쪽 딸아이를 구해줬는데 감사하기는커녕 뒤에서 호박씨나 까? 심지어 길가에 떠도는 유기견을 구해줘도 꼬리를 흔들며 고마워할 줄 아는데!”그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입을 함부로 나불대는 거 좋아하니까 없어도 그만이지 않겠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지 않은 곳에서 덩치가 산만 한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 왕씨 아주머니를 우악스럽게 끌어내 커다란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따귀를 때릴 때마다 우렁찬 마찰음이 울려 퍼졌는데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백
백아영은 제 발 저린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어제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몸에서 왜 술 냄새가 나요? 혹시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이내 눈을 가늘게 뜬 채 예리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추궁했다.순식간에 주도권이 빼앗긴 상황에서 이성준이 되레 양심에 찔렸다.몸이 아직 완치된 게 아니라서 백아영은 그에게 술을 한 방울도 마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며 금지령을 내렸다.사실 그동안 술을 적지 않게 마셨는데, 어젯밤에도 홧김에 들이붓지 않았는가?“에헴.”이성준은 어색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반찬을 집어주었다.“얼른 밥 먹어요. 음식이 다 식겠어요.”백아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약은 어디 있죠? 약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사실 완치약 처방은 이미 전달받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아직 한 입도 대지 못했다.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여자의 시선을 느낀 이성준은 즉시 장담했다.“내일부터 꼭 먹을게요.”그날 밤, 이성준은 맞은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면서 깨끗한 옷과 약도 챙겼다.심보라는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표정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성준아, 진짜 들어가서 같이 살려고? 아영 씨는 속으로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는데 네가 곁에 있어봤자 고통만 남지 않을까?”“보라야, 넌 심리상담사니까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뻔할 거야.”이성준은 캐리어를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심보라는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비록 그를 부르고 싶었으나 입만 벙긋했을 뿐 차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심리상담사로서 그의 생각을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 설령 백아영의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더라도, 그녀가 늘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며 언제든지 그 사람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곁에 남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이성준을 막기에 그녀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질투에 눈이 먼 심보라는 증오심이 활활 타올랐다. 이성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
백아영이 말했다.“워낙 작은 동네라서 그나마 침을 잘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진 선생님밖에 없어요.”이성준은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이제야 그녀를 찾아온 게 너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벌써 외간 남자한테 등을 몇 번이나 보여줬냐는 말이다.이내 어두워진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당장 여자 한의사를 찾아서 여기로 보내!”백아영은 어이가 없었다.“굳이 번거롭게 할 필요 있나요?”“내 여자의 몸을 아무나 본다는 게 말이 돼요? 함부로 쳐다봤다가는 그 눈알을 파버릴지도 몰라요!”이성준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진중구를 갈기갈기 찢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초인간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 줬다고 할 수 있다.처음 보는 흉측스러운 표정은 부드럽고 온화한 그의 이미지와 전혀 안 어울렸지만, 이상하리만치 이질감이 없었다. 극과 극의 상반된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져 오히려 거부하기 힘든 매력으로 다가왔다.결국 백아영도 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나 많이 넘어갔는지 모른다.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언젠가 다른 사람과 훌쩍 떠나버리고 말 거야...”“그 입 다물어요!”이성준이 성큼성큼 다가가 이불로 그녀의 몸을 꽁꽁 싸맸다.“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겁쟁이에 불과하다는 뜻이죠. 배짱도 없는 남자랑 무슨 행복을 논한다는 거예요? 아영, 그런 놈은 잊어버리고 날 선택하지 않을래요?”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배 위에 살포시 닿았고, 온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이제 우리 일가족은 영원히 함께하는 거죠.”백아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꿀처럼 달콤한 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혹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앞으로 네 식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이성준이 요리하러 주방으로 간 사이 백아영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상대방은 다름 아닌 심보라였다.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 낮게 가라앉았다.“아영 씨, 지금 행복해요?”행복이라는 단어에 움
정곡을 찔린 심보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묵인이 곧 인정과 다름없지 않은가?“물론 누굴 좋아하는 건 개인의 자유라서 제가 왈가불가할 입장은 아니죠. 만약 정말 성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진심으로 축복할게요. 단...”백아영의 어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이성준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이자 현무의 아빠죠. 혹시라도 더러운 음모와 수작을 부린다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줄 테니까 조심해요.”비록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불과했지만, 심보라는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동안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면서 이성준은 물론 백아영도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청순가련한 겉모습 때문에 아무한테나 괴롭힘을 당할 듯싶었지만, 사실은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순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아영 씨의 지나친 걱정인 것 같네요. 전 성준을 다치게 할 생각이 없어요.”...아무리 기다려도 백아영이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성준은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요리를 들고 방으로 찾아갔다.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는데,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한 채 착잡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맞은편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맞은편은 바로 그가 구한 집이다. 한때 자신도 똑같은 자세로 앉아 백아영을 지켜보지 않았는가?순간 바짝 긴장한 그는 목소리마저 살짝 떨렸다.“뭘 보고 있어요?”백아영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갔다. 비록 기분이 좋아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슬픈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려졌고, 마치 한순간의 착각인 듯싶었다.이성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백아영은 요즘 마음이 뒤죽박죽이라 입맛도 별로 없는 탓에 이성준이 만든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지는 못했다.이성준이 설거지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백아영도 뒤쫓아 갔다. 순간, 잔뜩 경계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 씨는 왜 따라와요? 침대에 누워서 쉬고
그날 밤 이성준은 유난히 깊은 잠에 빠져 백아영의 아침밥을 차려줄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임산부는 한 끼라도 거르면 배가 고프기에 자책감이 들어 스스로 머리를 내리쳤다. 이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커다란 침대 위에는 가지런히 놓인 침구를 빼고 아무도 없었다.게다가 그는 아직 남아 있는 약 기운 때문에 후유증이라도 생긴 듯 머리가 살짝 어지러우면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자 이성준은 즉시 뛰쳐나가 류씨 아주머니를 붙잡고 물었다.“백아영은 어디 갔지?”류씨 아주머니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새벽에 어떤 남자랑... 같이 나갔어요.”“누구?!”“몰, 몰라요...”이성준은 류씨 아주머니를 놓아주고 곧바로 CCTV를 확인했다. 화면 속에서 백아영은 기쁜 얼굴로 남자의 품에 뛰어들었다.두 사람은 다정하게 포옹을 나눴고, 백아영의 얼굴에 실로 오랜만에 보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의 곁에 있을 때는 허구한 날 우거지상을 한 채 근심과 걱정을 지우지 못하더니 다른 남자 앞에서는 환한 미소를 짓지 않겠는가? “사장님, 이 남자는 류인하라고 하는데 아영 씨의 대학 동기예요.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학교 다닐 때부터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죠. 비록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일반 커플보다 훨씬 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둘은 취향도 비슷하고 찰떡 호흡을 자랑해서 다른 친구들도 최고의 소울메이트로 인정해 줬대요. 류인하는 해외 업무까지 미루고 부랴부랴 돌아왔는데, 곧장 여광마을로 향했거든요.”보고를 이어가는 위정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백아영이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남자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이성준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대학교 졸업하고 연락도 끊겼다는데 왜 이제 와서 그리워하는 거지? 나랑 결혼할 때 아영이가 이런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당시 결혼식을 준비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의 눈에는 온통 자신밖에 없었
“네가 침대에서 자.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류인하는 검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마치 대학교에 다닐 때처럼 정직하고 바른 느낌이 들었다.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고 여전히 의술 연구밖에 모르는 공붓벌레 같았다.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며 백아영은 속으로 몰래 탄식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초심마저 잃은 듯싶었다.“인하야, 고마워.”“보라 씨는 은인이고 넌 동창인데 돕는 게 당연한 거지.”류인하는 잽싸게 짐을 풀었다.“임신까지 한 몸으로 종일 이동했는데 무리가 가기 마련일 테니까 얼른 쉬어. 푹 잘 수 있게 향을 피워줄게.”향에 불을 붙이자 단향의 냄새가 서서히 피어올랐고, 긴장이 탁 풀리면서 편안한 느낌에 백아영은 졸음이 쏟아졌다.그녀가 잠든 뒤 류인하는 소파에 앉았고, 백아영을 바라보는 눈빛이 서서히 탐욕으로 물들더니 욕심이 가득했다.그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잔혹함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현실 앞에 무릎 꿇게 되었다.사실 그동안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못 찾아 좌절도 겪고 모욕도 당해 출세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심지어 누군가 모함하는 바람에 자칫 의학계에서 영구 추방될 뻔했다. 결국 절망에 빠져 그는 투신자살까지 계획했다.나중에 심보라의 도움을 받아 심리 상담받았는데, 인맥을 통해 재취업의 기회를 쟁취하게 힘을 써준 덕분에 다시 한번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었다.그와 동시에 이 세상이 얼마나 잔혹한지, 약육강식이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그는 더는 의학 연구에만 매진하지 않았고, 점점 사회생활에 치중했다. 착하고 어리숙한 겉모습과 달리 뒤로는 악랄한 수작을 부려 사람을 탈탈 털릴 때까지 갉아먹었다.하지만 아직 만족하기에는 일렀다. 그는 어디까지나 남을 위해 일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야망은 풍선처럼 커지고 있지만, 딱히 실현할 방법이 없었다.심보라는 그의 은인이자 귀인이다. 이번에 백아영의 남자친구로 위장하라는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