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이미 잠이 든 백아영은 왕씨 아주머니의 호들갑에 억지로 눈을 떴다.“새로 이사 온 집 사모님이 아영 아가씨 찾으러 왔대요.”“저를요?”백아영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굳이 한밤중에 찾아온 이유는 뭐냐는 말이다.단잠을 깨우는 것밖에 더 있지 않겠는가?임신하고 나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피곤한 그녀는 일어나기 귀찮았다.“무슨 일인지 아주머니가 저 대신 알아봐 줘요. 정 안 되면 내일 다시 찾아뵙겠다고 전해주세요.”말을 마치고 나서 이불을 덮고 다시 침대에 누우려는 순간 왕씨 아주머니는 강경하게 나섰다.“아영 아가씨랑 아는 사이라고 했어요. 오늘 밤 만나지 못한다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네요.”이런 막무가내인 사람이 있다니?백아영은 마지못해 옷을 걸치고 나갔다.이내 심보라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상담사님이 여긴 웬일이죠?”“늦은 시간에 폐를 끼쳐 죄송해요.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심보라는 굳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실 이성준과 저는 오랜 친구예요. 아영 씨가 얘기했던 남자분과 성준이 동일 인물인지는 얼마 전에 성준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죠. 물론 성준이가 거절당한 것도 알고 있어요. 그 뒤로 성준은 슬픔에 잠겨 하루가 멀다고 하게 술을 마시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죠. 다행히 제가 옆에서 시시각각 보살펴주면서 위로한 덕분에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아졌거든요. 다만...”그녀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성준은 아영 씨가 걱정되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죠.”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백아영도 맞은편에 이사 온 선남선녀 커플이 바로 이성준과 심보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동안 괜스레 감시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이성준 때문이었다.자신이 결코 예민해서가 아니라 이성준이 진짜 곁에 있었다니!“원래는 아영 씨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면 경호원만 남기고 떠나기로 했거든요. 그나마 눈에 보이지 않아야 덜 고통스럽고 괴로워할 테니까. 하지만 정작 아영 씨를 보게 되자 성준은 차마 떠나질 못하더라고요.
그러나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했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의 곁에 남아 있냐는 말이다.“저만 사라져준다면 성준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요?”심보라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아영 씨도 성준을 사랑하잖아요. 정녕 함께 할 생각이 없어요?”백아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비록 가슴이 아프긴 했으나 태도만큼은 단호했다.심보라는 그제야 마지못해 말을 이어갔다.“눈에서 멀어진다면 성준도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시간은 모든 걸 잊게 해준다. 물론 감정도 마찬가지이다.이성준을 바라보는 백아영은 비통한 심정으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미안해.”그러고 나서 조심조심 방을 나섰다.최면에 걸린 이성준은 깊은 잠에 빠져 쉽게 깨어나질 못한다. 하지만 이때, 손가락이 움찔하더니 마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에서 허우적댔다.방을 나서자 백아영은 위정을 맞닥뜨렸다.그녀를 발견한 위정은 어두운 안색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여기는 왜 왔죠?”두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이성준에게 잊지 못할 상처까지 안겨줬는데 어찌 그녀가 곱게 보일 리 있겠는가?백아영은 주먹을 움켜쥐며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제가 찾아온 건 비밀로 해주세요. 오늘 저녁에 떠날 테니까.”위정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백아영이 급하게 떠나는 이유가 이성준을 멀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깨닫자 사장님의 진심이 짓밟혔다는 생각에 괜스레 더 화가 났다.“떠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사장님께서 또 찾으러 갈 게 뻔한데, 이제 그만 괴롭혀줄래요?”“다신 절 찾지 못할 거예요.”백아영이 나지막이 말했다.“선우 일가 경호원도 같이 갈 예정이라 성준에게 걱정 끼치는 일은 없어요.”이렇게 되면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찾으러 왔다는 핑계도 무용지물이 된다.사랑한다고 할 때는 언제이고 마음이 바뀌자마자 매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이라니!위정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집으로 돌아간 백아영은
“전 의사예요. 어쩌면 치료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리 한번 확인해볼게요.”백아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왕씨 아주머니는 그녀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기며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백아영 씨, 며칠 동안 고용주 노릇 좀 했다고 내 딸까지 어떻게 할 궁리는 집어치워요! 괜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당장 나가요!”왕씨 아주머니는 힘도 강하고 기세도 사나워서 백아영을 단번에 문밖으로 밀어냈다.백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왕씨 아주머니가 문을 쾅 하고 닫는 바람에 밖에 덩그러니 서 있게 되었다.아직 여자아이의 다리를 확인해보지 못한 탓에 치료 여부는 미지수였다. 이대로 가버린다면 아이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 운명에 처할뿐더러 왕씨 아주머니의 어리석음과 고집 때문에 목숨마저 잃을지 모른다.이현무와 배 속의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결국 잠깐의 고민을 끝으로 진중구에게 문자를 보냈다.「진 선생님, 아까 본 여자아이가 다리를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확인해보고 싶은데 혹시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진중구가 재빨리 답장했다.「외과 진료도 하실 줄 아세요?」비록 알고 지낸 지 며칠밖에 안 되었지만, 진중구는 백아영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 게다가 의술도 워낙 뛰어나서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하기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다.진중구는 핑계를 대며 왕씨 아주머니 부부를 옆방으로 데려가 송이의 증상에 관해 얘기했고, 백아영은 몰래 아이의 방으로 잠입했다.후다닥 상처를 체크해보니 최대한 빨리 다리를 절단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건 사실이다.물론 이는 보통 의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백아영은 은침을 꺼내 재빠르게 침을 놓기 시작했다.한 시간 후.진중구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느라 목이 마를 지경이었다. 마침 물을 가지러 갔던 왕씨 아주머니는 돌아가기 전 딸아이의 방에 들렀다가 백아영을 발견하게 되었다.게다가 딸아이의 다리에는 침이 촘촘하게 꽂혀 있었다.“당신!”화
하지만 포기하는 대신 송이를 기어코 병원에서 집까지 데려왔고, 이제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다.진중구는 곧바로 다가가 송이를 꼼꼼히 체크하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이제 다리 절단 안 해도 돼요!”“정말요? 선생님, 백아영 씨와 사적인 친분이 있다고 해서 저를 속이면 안 됩니다.”“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거짓말하겠어요? 아영 씨는 워낙 의술이 뛰어나서 송이의 다리를 치료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죠!”진중구는 백아영을 우러러 바라보았다. 기적을 직접 목격하게 되자 흥분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왕씨 아주머니는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뜨렸다.“아직 상처 소독이 남아 있긴 한데...”백아영이 왕씨 아주머니 앞에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치료를 계속할까요?”왕씨 아주머니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영이 몸에서 은침을 빼내자 그녀는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송이의 상처를 치료하고 나니 벌써 동이 트기 시작했다.지친 기색이 역력한 백아영은 기지개를 쭉 켰다.“향후 치료법에 대해서는 이미 진 선생님께 전달했으니 관리만 잘한다면 다리는 완치될 거예요.”말을 마치자 백팩을 등에 메고는 떠나려고 했다.“잠깐만요.”왕씨 아주머니는 난감한 얼굴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밤새 잠도 못 자고 임신까지 했는데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몰라요. 떠나더라도 눈 좀 붙이고 가요. 내 침대 빌려줄 테니까.”이제 막 동틀 무렵이라 시간은 아직 이른 편이었다. 만약 한잠 자고 일어났는데 이성준이 그녀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때 가서 떠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어젯밤에 이미 뜻밖의 일로 지체하지 않았는가?백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다시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정류장은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을 제외하고 인기척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따라서 정류장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물론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 눈부신 사람이다.훤칠한 키와 고귀한 분위기, 설령 뒷모습이라고 할지
순간, 백아영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그토록 숨기려고 애썼던 사실이 결국에는 한태윤의 귀에 흘러 들어가게 되다니!비록 질문이긴 했으나 말투만큼은 단호하지 않은가? 마치 그의 아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이다.백아영은 한태윤과 엮이기 싫어서 혼자 아이를 낳기 위해 오로지 도피할 생각만 했지, 그가 이미 알고 심지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결국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머리가 하얘졌다.패닉에 빠진 그녀의 표정을 본 이성준은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책임질게요.”백아영은 바짝 긴장하더니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녀의 안색이 사뭇 어두웠고, 마음이 뒤숭숭하며 심란했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태윤 씨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정 마음에 안 든다면 애초에 이런 아이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그게 가능해요?”이성준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내가 뿌린 씨인데 직접 거둬야죠. 게다가 아이만 데려가고 엄마를 버리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니까 아영 씨와 결혼...”“태윤 씨!”백아영은 당황한 듯 말을 끊더니 연신 뒤로 물러섰다.“제 뜻은 이미 똑똑히 전달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죠. 아이의 존재 여부를 떠나서 태윤 씨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끝까지 아이를 핑계로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저도 최후의 수단으로...”백아영은 이를 악물었다.“아이를 지워버릴 거예요.”“안 돼요!”이성준은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다가가 백아영의 팔을 붙잡으며 험상궂은 얼굴로 말했다.“내 아이예요. 만약 지워버린다면 열 명은 더 낳게 할 거예요.”“네?!”할 말을 잃은 백아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령 축구팀을 만들어도 될만한 터무니없는 숫자를 내뱉더라도 왠지 모르게 한태윤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이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태윤 씨, 저 좋아하는 사람 있으니까 그 남자와 함께하고 싶어요.”이성준은 두 눈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고,
그녀의 바람대로 한태윤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하지만 백아영은 심장을 도려낸 듯한 괴로움에 못 이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맞은편 집으로 돌아온 이성준은 가구와 장식품을 모조리 부숴버렸지만, 치솟는 분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내가 그렇게 싫어? 나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그가 이성준일 때는 임신해서 불편한 몸인데도 밤새 도망치려고 하더니, 한태윤의 신분으로 찾아갔을 때는 명색이 아이의 친아버지라서 차마 외면하지 못하겠으니 울면서 제발 떠나 달라고 애원했다.즉, 어떻든 간에 그는 아니라는 뜻인가?한때 아무리 사랑해도 마음이 식으니까 한없이 모질고 매정한 여자 같으니라고!위정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옆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백아영에 대한 그의 불만은 이미 극에 달했다.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장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냐는 말이다!“어차피 사장님이든 한태윤 씨든 다를 바 없는데, 굳이 신분을 바꿀 필요가 있나요?”이성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황에서도 의기소침했다.“이제 와서 내가 신분을 바꿔가며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 싫어하지 않겠어?”위정이 한마디 보탰다.“지금도 거기서 거기라...”이성준은 발끈하며 외쳤다.“꺼져!”밤이 되자 안 그래도 조용한 마을은 주의를 조금만 기울여도 맞은편에서 물건을 깨부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순간, 백아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머릿속으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때려 부수는 이성준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먹먹했다. 아마도 그녀와 한태윤이 같이 있는 모습을 봤을 가능성이 컸다.비록 아무한테도 상처 주기 싫었지만, 세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로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새벽 2시.강아지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은 마을은 가로등도 꺼져 있어 쥐 죽은 듯 조용했다.집에서 몰래 나온 백아영은 모두가 잠든 새벽에 도망치려 했으나 정원을 나서자 길 건너편에 서 있는 한태윤을 발견했다.차가운 밤기운 속에서 대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온몸에 한
“한태윤 씨와 썸을 타면서 정작 다른 남자를 좋아한대요! 심지어 임신한 몸으로 그 사람 찾으러 갔다니까요?”이웃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입을 틀어막았다.“한태윤 씨는 무슨 죄예요?”“그러니까요, 딱 봐도 괜찮은 남자더구먼. 게다가 일편단심 한 여자밖에 없던데, 하필이면 저런 무개념의 소유자를 만나서 참...”“그게 무슨 소리야?”류씨 아주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아영 아가씨가 자네 집 송이의 다리도 치료해줬는데 은인으로 섬겨도 모자랄 판에...”왕씨 아주머니는 코웃음을 쳤다.“그래서 뭐?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어? 송이를 구해줘서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썩어빠진 인성까지 받아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한 눈이나 팔고 진짜 최악이야, 당신이 봐도 뻔뻔스럽지 않아?”“그쪽이 뭔데 사람을 함부로 욕하지?”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문득 울려 퍼졌다. 이성준은 어두운 안색으로 입구에 서서 왕씨 아주머니를 노려보았는데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살갗을 파고들 것 같았다.기에 눌린 왕씨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면서 무의식중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한태윤의 험담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동정하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다시 용기를 끌어 올렸다.“태윤 씨, 화 푸세요. 저도 태윤 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대신 열 받았을 뿐이에요.”“하!”이성준이 피식 웃더니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내 일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는 거지? 아영이가 임신한 몸으로 불편함까지 무릅쓰며 그쪽 딸아이를 구해줬는데 감사하기는커녕 뒤에서 호박씨나 까? 심지어 길가에 떠도는 유기견을 구해줘도 꼬리를 흔들며 고마워할 줄 아는데!”그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입을 함부로 나불대는 거 좋아하니까 없어도 그만이지 않겠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지 않은 곳에서 덩치가 산만 한 경호원 두 명이 다가와 왕씨 아주머니를 우악스럽게 끌어내 커다란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따귀를 때릴 때마다 우렁찬 마찰음이 울려 퍼졌는데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백
백아영은 제 발 저린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어제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몸에서 왜 술 냄새가 나요? 혹시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이내 눈을 가늘게 뜬 채 예리하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추궁했다.순식간에 주도권이 빼앗긴 상황에서 이성준이 되레 양심에 찔렸다.몸이 아직 완치된 게 아니라서 백아영은 그에게 술을 한 방울도 마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며 금지령을 내렸다.사실 그동안 술을 적지 않게 마셨는데, 어젯밤에도 홧김에 들이붓지 않았는가?“에헴.”이성준은 어색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반찬을 집어주었다.“얼른 밥 먹어요. 음식이 다 식겠어요.”백아영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약은 어디 있죠? 약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사실 완치약 처방은 이미 전달받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아직 한 입도 대지 못했다.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여자의 시선을 느낀 이성준은 즉시 장담했다.“내일부터 꼭 먹을게요.”그날 밤, 이성준은 맞은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짐을 싸면서 깨끗한 옷과 약도 챙겼다.심보라는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표정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성준아, 진짜 들어가서 같이 살려고? 아영 씨는 속으로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는데 네가 곁에 있어봤자 고통만 남지 않을까?”“보라야, 넌 심리상담사니까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뻔할 거야.”이성준은 캐리어를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심보라는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비록 그를 부르고 싶었으나 입만 벙긋했을 뿐 차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심리상담사로서 그의 생각을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 설령 백아영의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더라도, 그녀가 늘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며 언제든지 그 사람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더라도 곁에 남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이성준을 막기에 그녀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질투에 눈이 먼 심보라는 증오심이 활활 타올랐다. 이성준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