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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좋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요.”최하준의 훈훈한 얼굴이 다시 침착하고 냉정해졌다.“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민수는 이번 루브린호텔 사건에서 전선만 바꿔치기한 게 아닙니다. 이 자가 사용한 방수 자재 또한 최하품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주화그룹 공사 건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 리모델링했던 주택, 박물관, 비즈니스클럽에도 똑같은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이민수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그럴 리 없어, 저 녀석이 다 알아냈을 리 없어!’“하지만 후반 작업을 담당했던 업체들 모두 누수, 단전 등의 부실 상황에 대해 보고한 바 있습니다. 여기 업자들이 직접 녹화한 비디오가 있습니다.”최하준이 메모리카드를 제출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건축 공정도 날림으로 진행해 건물 몇 동에서는 벽면 타일이 떨어져 내려 사람이 다친 사례까지 있었습니다. 이민수의 배경이 워낙 세서 피해자는 배상금 조금 받고 눈감아줄 수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업자들의 고발 영상이 재생되자 이민수는 스르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부 자신과 함께 작업했던 사람이다. 잘 묻어놨기에 영원히 드러날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이 인간은 대체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괴물인가!두려움과 절망이 함께 밀려왔다.이렇게 후회스러운 적이 없었다.여름이 이런 대단한 인물과 연줄이 닿아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오만함을 완전히 뺀 이민수는 여름을 보며 구원이라도 청하듯 말했다.“여름아, 나 좀 살려주라. 내가 잘못했어. 나 네 오빠잖아, 우린 사촌이야, 가족, 어?”여름은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날 모함할 때는 우리가 가족인 게 생각 안 났나 봐? 하늘이 다 보고 있어.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벌 받아야지.”말을 마치고 여름은 주대성을 보았다.“호텔 일은 제 책임도 있습니다. 제가 TH를 믿고 계약하시라고 했으니까요. 사실 제가 회사를 그만둔 것도 이민수 씨가 자재 대금 빼돌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랬던 겁니다. 윗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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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재판이 끝난 뒤 이민수는 죽은 듯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이윽고 경찰이 와 끌고 나갔다.강태환 일가는 완전히 기가 죽은 채 뒷문으로 서둘러 빠져나갔다.윤서가 감격에 겨워 달려와 여름을 꽉 안았다.“완전 사이다! 진짜 대단하세요! 저는 뭐 길어봤자 20년 형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무기징역이라뇨. 완전 인정! 팬 됐어요, 진짜.”“맞아요, 정말 대단했어요.”여름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빨리, 더 통쾌하게 끝났다. 이민수를 제대로 혼내줬고, 가족들은 잘 빠져나갔지만, TH는 망했다. 이제 TH에 공사를 맡기는 곳은 없을 것이다.“대단? 그게 전부입니까?”최하준이 눈썹을 치켜 올려 여름을 응시했다.이제껏 재판이 끝나면 늘 들어오던 찬사지만 오늘 여름의 평가는 더 듣고 싶었다.여름이 고개를 들어 최하준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검은 눈동자에 심장이 마구 뛰었고 왜 그런지 얼굴마저 뜨거워졌다. 당연히 그냥 대단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너무 멋있고 매력적이었다.다만 이런 닭살 멘트를 내뱉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바로 이때, 양유진이 품위 있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한선우가 따라왔다.“우리 여름 씨, 축하해요.”양유진이 대견하다는 듯 부드럽게 여름을 보다가 최하준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최 변,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여름 씨 이렇게 승소할 수 있게 도와줘서.”잔뜩 올라가 있던 최하준의 입꼬리가 조금씩 쳐지고 있었다.‘뭐지, 지금 이 상황은? 내 사람 일에 왜 다른 남자가 나한테 감사하다는 거야?”싸늘한 기운이 최하준을 휘감았다. 윤서와 여름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그러나 한선우만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양유진에게 여름을 뺏기기라도 할까 봐 다급히 최하준의 손을 잡고 말했다.“오늘 정말 신세 많았습니다. 제가 여름이를 대신해서 감사드릴게요. 시간 되실 때 제가 식사 대접하겠습니다.”“흥!”목 깊은 곳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빛은 더욱더 싸늘해졌다. 최하준이 웃자 여름은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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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그럼요.” 윤서도 얼른 나서서 거들었다.“오늘 최 변호사님 공이 너무 커서, 여름이가 따로 대접을 해야 할 거예요.”“예, 그러니까요. 제가 벌써 예약을 해놨거든요. 먼저 갈게요.”여름은 서둘러 최하준을 끌고 나갔다.빨리 피해야지, 안 그러면 최하준의 마수에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여름이 최하준을 휙 잡아끌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양유진과 한선우 표정이 심각해졌다.양유진은 최하준과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다. 워낙 까다로워서 말 씹히는 것도 다반사인데 여름은 이 사람 팔을 잡아끌고 간다?갑자기 레스토랑에서 두 사람이 함께 사라졌던 일이 생각났다. 이 두 사람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한선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직 남아있는 윤서를 붙들고 물었다.“윤서야, 여름이랑 최 변 사이에 뭔가 있는 거지? 최 변이 설마 여름이 좋아하는 거냐?”“맞다, 네 친구가 최 변을 안다고 했지? 그게 누구야?”“최 변호사는 의뢰하기도 힘들고 사건을 맡는다고 해도 수임료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는데, 여름이가 그런 큰 돈이 있어?”한꺼번에 여러 질문이 쏟아지자 윤서는 짜증이 났다.“오빠랑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가! 짜증 나게.”“너….”한선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잘 들어요. 그나마 지난번에 여름이 파출소에서 꺼낼 때 힘 보탠 거 때문에 봐주는 거지, 아니면 벌써 내 손에 죽었어, 흥!”윤서가 한선우를 떨치고 가버렸다.******지하 주차장.김상혁은 앞에서 운전하고 뒷자리엔 두 사람이 말없이 앉아있었다.최하준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며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그러나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싸늘한 기운에 차 안은 마치 에어컨이라도 켜놓은 듯 몹시 싸늘했다.여름은 수시로 최하준을 곁눈질했다. 이 남자 기분이 안 좋다는 건 잘 알 수 있었지만, 질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아마 조신하지 못하게 행동했다고 의심하는 거겠지.여름이 다른 남자 차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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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좋을 대로.” 최하준은 넥타이를 당기며 김상혁에게 말했다.“속도 올려. 뛰어내리면 바로 죽을 수 있을 정도로.”“…….”이 악마 같은 인간.김상혁이 정말 속도를 내는 걸 보며 여름은 씩씩거리며 최하준을 노려봤다. 진짜 뛰어내릴 용기는 없었다.“이리 와요.”여름이 안정된 걸 보고 최하준은 쌀쌀맞게 손가락으로 손짓했다.“안 묶는다고 약속하면요.”여름이 불안해하며 말했다.“내가 언제 묶는다고 했습니까? 혼자 넘겨짚어 놓고.”최하준은 짜증 내며 덥석 여름의 팔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끌어다 앉혔다.차 안에 다른 사람도 있는데, 여름은 난처해 화르르 얼굴이 빨개졌다. 섣불리 움직이기도 그렇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오늘 뭐 먹고 싶어요? 다 해줄게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그놈의 먹을 거.”최하준의 표정이 냉랭했다.“온종일 먹는 거 말고는 나한테 해줄 게 없습니까?”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온종일 나한테 먹을 것만 찾는 건 당신이잖아!’“흥, 오늘 그 사람들은 왜 온 겁니까?”“모르겠어요.”여름이 맑고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앞으로 그 두 인간은 만나지 마십시오.”“…….”여름은 최하준의 오만한 말투에 진땀이 났다.한선우가 형편없는 인간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양유진은 성공한 청년사업가라고! “싫은 눈치입니다?”최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위험한 눈빛이었다.“아유, 천만에요.”“그 사람들 쭌이랑은 차원이 다르죠. 오늘 쭌 법정에서 완전 멋졌어요. 정말 어떻게 한 거예요? 민수 오빠가 저지른 범행은 나도 몰랐는데 그렇게 다 찾아내고. 진짜 대단해요!”여름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사실이었다.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재판이었다. 이민수는 워낙 교활한 인간이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판을 뒤집기란 너무 어려워 보였다.하지만 최하준은 그걸 우습게 해냈다.최하준을 바라보는 여름의 눈이 너무나도 초롱초롱 빛나 최하준은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재판에서 수없이 이겨봤지만 이번 재판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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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했어도 그럴 참이었다.보답의 의미로 그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준비했다.식사 준비를 하며 인터넷 뉴스를 잠시 들여다봤다.좋았어! 지금 인터넷은 온통 TH를 욕하는 여론으로 뒤덮였다. 이번에 강태환은 조사 대상이 아니었지만 네티즌들은 그룹 총수인 강태환이 무고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게다가 TH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TH는 끝이다!여름을 오해하던 사람들도 모두 이제는 동정하고 있었다.예전에 몇천 명정도이던 팔로워 수가 지금은 수십만 명이 되었다. 웬만한 인플루언서 못지않았다.이모님이 화려하게 차려진 칠첩반상을 보고 감탄했다. “어머나, 사모님 음식 솜씨가 이렇게 훌륭하시니 내가 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던 거군요.”여름도 안다. 하준이 말은 안 해도 이미 자신의 음식에 길들어 있다는 걸.“다음에 음식할 때는 레시피를 알려드릴게요. 그럼 제가 없어도 이모님이 해주실 수 있잖아요.”“좋죠. 하지만 사모님이 안 계실 일이 있겠어요? 평생 함께하는 게 부부인걸요.”이모님은 웃으며 청소를 계속했다. 여름의 말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이제 재판도 끝났겠다, 여름은 이제 돈 버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하준 옆에 묶여있을 수는 없었다.식사 준비를 마치고 보니 이모님이 바빠서 하는 수 없이 여름이 직접 이층에서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수영장으로 가 최하준을 불렀다.온수 풀장 안에서 돌고래처럼 움직이고 있는 건장한 남자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수영장 가에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여름은 살짝 넋이 나갔다. 자신이 보았던 수영선수들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 이 사람이 수영까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 최하준이 맹렬히 여름이 있는 쪽의 수면을 뚫고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젖은 채로 이마에 붙어 있어 물방울이 머리카락을 따라 뺨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높은 콧날을 지나 새빨간 입술, 쇄골까지…여름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먹는데 몸은 어떻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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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다시 앞으로 돌아와 얼굴을 닦으려고 할 때 두 눈이 마주쳤다. 최하준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여름의 얼굴도 빨개졌다.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최하준은 머리 속에 팽팽했던 한 줄기 줄이 끊어진 것 같았다. 돌연 여름의 허리를 잡고 물었다.“그거, 끝났습니까?”여름은 머리가 멍해져서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곧, 여름의 몸이 들어 올려졌다. “뭐 하는 거예요?”여름이 놀라서 최하준의 목을 껴안았다.“강여름 씨, 당신 유혹 기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군요.”최하준은 여름을 안고 위층 침실로 갔다.여름은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유혹했냐고, 저기요, 당신이 나더러 닦으라 그래 놓고. 자제력 갑인 사람 아니었어? 언제는 역겹다며?”침대에 던져질 때까지 여름은 옴 몸이 떨렸다.계약서에 사인한 날, 이런 날이 오게 되리란 걸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났다. 지난번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었다.최하준이 그녀의 코끝을 손끝으로 꼬집었다.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잠깐만요.”여름이 최하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눈가가 빨겠다. 원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쭌, 우리 이러면 안 돼요. 난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주제 파악이 빠르군요.”최하준이 주춤하더니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말문이 막힌 여름은 억지로 계속 괴로운 척했다.“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알아버려서…. 당신은 정상급 변호사고 나는 빽 없는 일개 디자이너잖아요. 이렇게 평범한 내가 신계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 당신을 잡고 늘어지는 건 신성 모독 같은 거죠.”“내 침대에 올라오지 못해 안달 아니었습니까?”“…….”‘그땐 한선우 외삼촌인 줄 알고 그랬지.’하지만 사실을 얘기할 순 없었다.“그땐 뭘 잘 몰라서, 당신 몸을 차지하면 마음도 차지하게 될 줄 알았죠. 나중에야 틀렸단 걸 깨달았어요.”“틀렸습니다.”최하준은 여름의 턱을 쓰다듬더니 그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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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화가 나 전화를 걸었다.“강여름 씨, 당장 돌아오지 못하겠습니까? 계약서 내용 다시 짚어줘요? 내가 자선사업 하는 줄 압니까? 필요할 때는 공짜로 도와달라고 하더니, 그깟 음식이 몇백억짜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게다가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순진한 척입니까?”한마디 한마디가 듣고 있는 여름을 때리고 있었다.처음엔 미안하기만 했던 여름도 이제 화가 치밀었다.“무슨 근거로 내가 처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한선우랑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다면서 아직 첫 경험이란 게 남아 있다는 겁니까?”최하준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사귈 수도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한 적 없어요.”여름은 위축되어 말했다.“믿거나 말거나.”최하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10분 주겠습니다. 당장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감당 못 할 일 생길지도 모릅니다.”망연자실한 여름은 수영장 가에 잠시 서 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빚진 것 투성이인데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최하준은 현관에 서서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불빛이 가물가물하게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냥 무서워서….”여름은 고분고분하게 곁으로 가 허심탄회하게 사과했다.“아직 원하면, 방으로 돌아갈게요.”최하준이 이를 꽉 물고 물었다.“전에 나한테 술수 쓸 때는 두려워 보이지 않던데?”“그땐… 너무 좋아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거든요!”여름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거짓말을 했다.“거절당하고 나서는 소심해져서, 트라우마가 생겼어요.”“…….”좀 아까 깎인 체면이 조금 회복된 기분이었다.“알겠습니다. 당분간 손 안 대는 걸로 하죠. 밥 먹읍시다.”최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거실로 돌아갔다.여름은 멍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쉽게 자신을 놓아주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TH그룹.회의실에서 강테환은 사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AB팀에 벌써 디자이너 다섯 명, 건축사 네 명이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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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걔가 우리 민수도 망가뜨린 거예요! 그 못된 것!”이정희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싸우지 마세요!”강여경이 달려와 두 사람을 제지했다.“아빠, 잊어요. 지금은 좌절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에겐 아직 화신이 있어요. 세계적인 기업이잖아요. TH보다도 크다고요!”“하지만 그건… 네 할머니….”강태환이 주저했다.“살 길을 강구하셔야죠. 변수가 있을지 모르잖아요.”“여경이 말이 맞아요. 전에 줄서서 나한테 아첨하기 바쁘던 부인네들 TH에 일 생기니까 그림자도 안 보이잖아요. TH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이제 동성에 설 자리도 없게 된다고요.”강태환이 잠시 갈등하더니 곧 눈에 독기가 스쳤다.“맞는 말이야!”******여름은 꿈을 꾸었다.플럼가든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다 살아계시던 어릴 적. 두 분은 여름을 무척 아끼셨고, 여름은 자주 플럼가든에 가서 지냈다.그러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할머니는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여름아, 할머니는 이제 힘들구나. 할아버지 따라가련다.”“안 돼요….”여름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곧 팔 하나가 여름을 다시 뜨거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중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곧이어 최하준의 입술이 느껴졌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꿈을 꿨어요.”여름은 최하준의 입술을 피하며 조용히 말했다.여름의 눈 밑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최하준은 손을 뻗어 여름의 머리를 안고는 작은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눌렀다. “그냥 꿈일 뿐입니다. 괜찮아요.”“네” 여름이 최하준에게 바짝 붙었다.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다정했던 적이 있었나? 마치 금실 좋은 부부 같았다. 여름은 어색해서 최하준을 살살 밀어냈다.“아침밥 하러 갈게요.”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밥을 먹지 않아서 최하준은 배가 많이 고팠다.밥을 먹고 여름은 출근할 준비를 했다.최하준이 조용히 말했다.“W팰리스 공사 건은 이제 그만 해요. 양유진하고 부딪히는 일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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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난 당신이 함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최하준이 격하게 여름을 놓고 떠났다. 더는 여름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이렇게 넘어가겠구나.’하고 여름은 한시름 놓았다. 보아하니 아직 애정 작전이 통하는 듯싶었다.******오전 9시.여름은 회사에 도착하자 곧장 도재하를 찾아갔다.지난번에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면서 휴가를 내고 내내 출근을 하지 않았었다.사람들이 갑론을박으로 도재하를 곤란하게 하는 것도 걱정되었고 온갖 풍문에 시달리는 자신이 도재하의 명예에 손상을 입힐까도 걱정되었다.이번 소송은 지나갔지만 도재하에 대해서는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정말 죄송합니다. 회사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여러 가지로 폐만 끼쳤어요.”도재하가 여러 가지로 압박이 있었을 텐데도 자신을 내쫓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괜찮아. 난 언제나 널 믿고 있었으니까.”도재하가 웃으며 커피를 따라 주었다.“그리고 이번 일은 전화위복이 될 거야. 내가 동성에 진출해서 TH가 가장 큰 경쟁 상대였는데 이제는 강 회장님이 TH를 매각하려고 하더라고.”여름은 흠칫 놀랐다. TH가 이번에 큰 손해를 본 것은 알았지만 강 회장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는 없었다.TH를 잃고 나면 동성에서 강태환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데 과연 매각할까?“그렇게 놀라지 마. 이민수 스캔들이 너무 커져서 TH의 명성이 크게 무너졌어. 최소한 2년 안에는 아무도 TH와 일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고위급 간부들과 디자이너들이 다른 곳으로 다 이직해 버려서 강 회장이 버틸 수 없었을 거야.”도재하가 설명했다.“아무도 그 위험을 안고 투자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나중에 재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강태환이 지금 TH를 매각하고 나면 남는 돈도 있을 것이고 더 큰 손실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할 수도 있는 것이다.“이번 일에 네 공이 크다.”재하가 건배라도 하듯 머그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여름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일 많이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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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오후. 여름이 막 엘리베이터를 나서는데 한선우가 나타나 여름을 막아섰다.“적당히 해! 전에 알아듣게 설명했잖아”여름이 피해서 가려고 했다.“여름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어!”한선우가 갑자기 팔을 잡았다.“모르고 있었어?”휘청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천히 돌아보았다.“거짓말이지!?”“아니라니까. 위로해주려고 계속 전화했던 거야. 그런데 너희 집에서 너한테는 아예 말도 안 해줬나 보네. 나도 이제야 들었어.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여름은 한선우를 와락 밀치고 차에 올랐다.그러나 손이 너무 떨려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이래서 어떻게 운전을 해. 내가 데려다 줄게. 어딘지 알아.”한선우가 차 키를 가져가면서 여름에게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여름이 차에 타자 안전벨트까지 해주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여름은 차에서 내리더니 비틀거리며 식장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영정을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약혼식에서 뵌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니!불효한 손녀로서 너무나 죄송했다.“누가 오라고 했어!”상복을 입은 강태환이 여름을 보자 버럭 화를 내더니 여름을 입구로 밀어냈다. “당장 여기서 나가!”“내가 왜 못 와요? 나도 할머니 친손녀인데요.”여름이 미친 듯 맞섰다.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섰다.“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줘요? 왜 할머니 임종을 지킬 권리마저 빼앗아 가시는데요?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감히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해!”강태환이 마구 소리를 지르자 한선우가 와서 막아서며 소리쳤다.“여름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여름이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얼마나 아끼셨는데요. 가시는 길도 지키지 못하게 하면 할머니께서 눈도 못 감으실 겁니다.”‘눈도 못 감는다’는 말에 강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름이 급히 물었다.“왜 할머니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나요? 지난번에 뵈었을 때 마비가 있어도 식사는 제대로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리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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