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름이 막 엘리베이터를 나서는데 한선우가 나타나 여름을 막아섰다.“적당히 해! 전에 알아듣게 설명했잖아”여름이 피해서 가려고 했다.“여름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어!”한선우가 갑자기 팔을 잡았다.“모르고 있었어?”휘청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천히 돌아보았다.“거짓말이지!?”“아니라니까. 위로해주려고 계속 전화했던 거야. 그런데 너희 집에서 너한테는 아예 말도 안 해줬나 보네. 나도 이제야 들었어.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여름은 한선우를 와락 밀치고 차에 올랐다.그러나 손이 너무 떨려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이래서 어떻게 운전을 해. 내가 데려다 줄게. 어딘지 알아.”한선우가 차 키를 가져가면서 여름에게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여름이 차에 타자 안전벨트까지 해주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여름은 차에서 내리더니 비틀거리며 식장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영정을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약혼식에서 뵌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니!불효한 손녀로서 너무나 죄송했다.“누가 오라고 했어!”상복을 입은 강태환이 여름을 보자 버럭 화를 내더니 여름을 입구로 밀어냈다. “당장 여기서 나가!”“내가 왜 못 와요? 나도 할머니 친손녀인데요.”여름이 미친 듯 맞섰다.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섰다.“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줘요? 왜 할머니 임종을 지킬 권리마저 빼앗아 가시는데요?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감히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해!”강태환이 마구 소리를 지르자 한선우가 와서 막아서며 소리쳤다.“여름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여름이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얼마나 아끼셨는데요. 가시는 길도 지키지 못하게 하면 할머니께서 눈도 못 감으실 겁니다.”‘눈도 못 감는다’는 말에 강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름이 급히 물었다.“왜 할머니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나요? 지난번에 뵈었을 때 마비가 있어도 식사는 제대로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리가 없잖아요?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사적인 일로 소란 피우지 말아 주세요!”여름이 단호하게 그들을 막아섰다. 그리고 말없이 영정사진 앞에 꿇어앉았다. 꿇어앉는 것 외에 할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동성에 정착해서 기업을 일으켜 세운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TH그룹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는데 부고를 외부에 알리지도 않고 장례식장에는 애도하는 조문객들조차 없다.******날이 저물 무렵.최하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모님 혼자 요리를 하고 있었다.“강여름 씨는요?”“아직 귀가 전입니다.”이모님의 대답을 듣자 얼굴이 구겨졌다.‘의처증인가, 집에 돌아오면 와이프부터 찾는단 말이야.’이모님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손목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이다.차가 막히는 건가?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젠장. 잘해주려고 했더니 너무 일만 열심히 하는 거 아냐.‘저녁 아홉 시까지 귀가하는 것으로 계약서상에 명시했지만, 전화조차 받지 않는 건 너무하다.“먼저 식사하세요.”이모님이 식사를 차렸다.최하준이 식탁을 보고 멈칫했다.“이거 직접 하셨습니까?”“네, 일전에 사모님께서 저한테 가르쳐주셨어요. 호호.”이모님이 웃으며 말했다.“사모님이 집을 비우게 되면 선생님께 해드리라고 하셨어요. 제가 맛을 봤는데 사모님이 하신 거와…”말을 마치기도 전에 최하준이 요리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언제든 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나 보군.”‘괘씸하게도 날 가지고 장난하는 건 아니겠지? 그저 소송 때문에 날 이용해 먹은 건가?’도우미 이모님은 깜짝 놀랐다. 여름이 이 집에 온 후 집주인은 날이 갈수록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아니에요. 사모님의 의중은 야근할 때를 말하는 거였어요.”최하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여움이 점차 사그라들었다.‘그래, 기다려보자. 아직 아홉 시도 안됐잖아.’최하준이 위층
“둘이 호텔에 갔나?”최하준이 일어났다. 두 눈은 질투심으로 이글거렸다.김상혁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최하준을 오랫동안 보필해 왔지만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강여름이 최하준의 내면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이 틀림없다. 최하준 본인조차도 인식을 못 하는 것 같다.“찾을 필요 없어.”최하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있다 오는지 보지.”김상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장례식장.여름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강태환과 이정희, 그리고 강여경 셋은 자정이 되자 집으로 돌아갔다.커다란 장례식장 안에는 강여름과 한선우만 남아 있었다.“이제 그만 집에 가.”여름은 한선우가 자기 때문에 남아 있는 걸 알았지만 어떤 호의도 받고 싶지 않았다.“난 안 가. 할머니가 살아 생전에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다고. 가시는 길 끝까지 함께 해드려야지.”한선우가 여름의 옆에 떡 버티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여름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한선우 조차도 할머니를 이렇게 대하는데, 명색이 아들이고 딸처럼 사랑 받았던 며느리인데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강태환과 이정희 부부의 태도는 여름의 상식에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깊은 밤, 장례식장 안은 너무나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여름은 향불을 붙이느라 열중한 나머지 한선우가 어깨에 옷을 걸쳐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날이 밝자 강태환과 가족들은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여름의 눈은 하도 울어서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나올 때에도 여전히 크나큰 슬픔에 잠겨 제정신이 아니었다.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던 마지막 단 한 명의 혈육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제 이 세상에 여름은 혼자 남겨졌다.한선우가 여름을 차에 태웠다.“기분 전환 겸 근처로 드라이브나 갈까?”두 사람은 자주 짧은 여행을 갔었다. 한선우는 갑자기 예전에 좋았던 그날들이 떠올랐다.“괜찮아. 출근해야지.”여름이 차갑게 거절했다.“너 지금 상태가 너무….”
여름도 너무 놀랐다. 자신의 어깨에 한선우의 옷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구나. 분명 또 오해를 한 거야.’하지만 여름은 지금 너무 피곤했다. 싸우고 싶은 생각도, 힘도 전혀 없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한선우가 가늘게 눈을 뜨고 물었다. 한선우가 아무리 둔해도 같은 남자로서 최하준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여름이랑 의뢰인과 변호사 이상 뭔가가 있는 거야?’“내가 뭘 하는지 똑똑히 보시지.”최하준은 무표정하게 여름의 턱을 살짝 들어올려 거리낌없이 입을 맞추었다.“강여름씨는 내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는 떨어져. 안 그랬다간 당신 네 한주그룹은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한선우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말도 안 돼! 여름이는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아요. 여름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응?”여름도 놀란 나머지 아무런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수없이 많은 상상을 했었다. 거만하게 최하준의 손을 잡고 한선우 앞에 당당히 나타나 ‘내가 너의 외숙모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을.그런데 복수는커녕 이렇게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다니…. ‘그래, 나는 그냥 계약에 종속된 관계니 최하준이 원하는 대로 있어야겠지?’“아직 모르겠습니까?”여름의 얼굴에 가득 찬 슬픔을 보니 더욱 화가 났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입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이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재판에서 승소하고 감옥에서 썩지 않게 해주었으면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한선우가 큰 충격으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얼굴은 창백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아니, 난 믿을 수가 없어.”어릴 때부터 작은 공주님처럼 잘 자라온 여름이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믿거나 말거나 마음대로 하십시오.”여름의 하얀 얼굴을 쓰다듬으니 마음속에 숨겨둔 잔인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여름이 절망할수록 최하준은 더욱 통쾌했다.이것은 모두 강여름이 자초한 일이다!“이 나쁜 자식!”한선우는 더
“듣기 싫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않습니까!”눈에서 붉은 핏발이 서 있었다.“당신을 믿을 거라 착각하지 마세요! 나를 사랑하니 어쩌니 하더니 막상 재판에서 이기고 나니까 내가 더 이상 쓸모가 없나 봅니다? 더 이상 한선우에게 남은 미련이 없다더니 이제는 대놓고 같이 호텔을 들락거리는군요.”말도 안 되는 추측에 여름은 기가 찼다. 예전 같으면 따박따박 따져 물었겠지만 오늘은 정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말싸움조차 힘이 들었다.“내가 한선우와 호텔로 들어가는 걸 직접 봤나요?“호텔에 가지 않았으면 왜 어젯밤 집에 오지 않았습니까? 왜 한선우 옷을 여름 씨가 입고 있을까요? 거울을 한 번 보세요. 호텔방에서 뒹굴었던 모습 그대로 아닙니까.”최하준이 노려보았다. 여름도 똑같이 노려보았다.여름은 화가 나다 못해 울 지경이었다. 어젯밤 할머니 영정 앞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집에 안 들어왔다고 나를 더러운 여자 취급하다니.여름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대로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최하준 씨! 직접 와서 보세요! 직접 당신 눈으로 똑똑히 보시라구요! 내 몸에 그런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난 아직 첫 경험도 없다고!”여름의 감정이 더 격해졌다. 슬픔과 비통함에 어느새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여름이 눈물을 흘리자 최하준은 당황스러웠다. 짜증스럽게 자신의 옷을 벗어 여름을 덮어주었다.“그럼, 한선우와의 일은 오해라고 해 두죠. 하지만 다른 사람과 밖에 있다 밤새 돌아오지 않았으니 계약상 위반은 위반입니다. 강여름 씨, 계약 위반의 대가를 내가 똑똑히 알게 해주겠습니다.”“뭐라고요?”여름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인간은 도대체! 화가 나 돌 지경이다.“지금부터 여기에만 있어요. 회사 출근도 금지입니다. 어떠한 불순한 행동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최하준이 냉랭한 한 마디를 남기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여름은 나갈 힘도 없었다. 너무 피곤했다.세상에 유일한 내 편,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최하준은 늘 의심하고 상처를 준다.
“저, 저는…”“누가 이렇게 일을 하다가 말라고 했나?”최하준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김상혁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름에게 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이성적인 일을 저지른 자신을 믿기 힘들었다.분명히 강여름은 심한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가장 괴로운 순간에 하필이면 내가. 이모님도 여름이 좀 이상해 보인다고 하질 않았던가.‘잠깐. 요즘 너무 힘든 일이 많았는데, 설마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최하준이 다급하게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성큼성큼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 이불 속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여름을 보았다. 두 눈은 감겨 있고 얼굴은 하얀 도자기처럼 창백하고 마치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최하준은 혹시 죽은 건 아닌지 덜컥 겁이나 손을 뻗어 여름의 코끝에 손가락을 살짝 가져가 보았다. 여름이 힘없이 눈을 떴다. 최하준을 보고는 가까스로 일어나 앉았다.너무 힘들고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나가지 못하게 하는 걸로 부족한가요? 뭐가 더 있어요? 그냥 말해요.”여름의 말하는 모습을 보자, 긴장했던 심장이 다시 안정을 찾았고 숨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다만 자신의 오해로 이 지경이 된 여름을 보니 사과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기는 싫어서 난처했다.“어젯밤에 할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까?”여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최하준이 주저하며 말했다.“어제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습니까? 전화를 해도 받지도 않길래 무슨 일이 있지 싶어서….”“내가 사고날까 봐 걱정한 게 아니라 딴 남자와 무슨 짓이라도 하는 줄 알고 그런 거잖아요.”여름이 차갑게 대꾸했다.“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요. 슬퍼서 죽을 것 같은데 전화를 받을 정신이 있는 줄 알아요?!”최하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다는 건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게다가 나한테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날 한번이라도 온전히 믿어준 적 있어요? 알지도 못
입 아프게 설득을 해야 하나 걱정했건만 여름은 주저하지 않고 앉아서 음식을 다 비웠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로봇처럼.최하준은 정말로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제껏 살면서 다른 사람을 달래본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과도 할 만큼 했다. 똑똑하고 사랑스럽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서재에서 최하준은 영상통화로 친구 몇 명을 초대했다.이주혁이 욕실 가운을 입고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고 말했다.“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웬일로 우리 생각이 다 나셨을까?”송영식도 낮게 웃었다.“그러게 말이야. 평소에 웬만하면 너한테 연락 안 하잖아. 네가 우리랑 연락하기 귀찮아 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지훈이 시원하게 웃었다.“우리 하준이가 여성 분께 뭔가 많이 잘못한 모양이야? 얼마나 답답했으면 우리까지 호출했겠어?”하준이 눈을 부라리며 이지훈을 보았다. 김상혁이 이미 싹 다 보고한 모양이다.“내 생각엔 말이다, 이번 일은 완전히 네 잘못이라고 본다.”이지훈이 말했다.“돌아가신 할머님이 강여름 씨에게 끔찍했다던데. 강 회장 집안 사람들이 여름 씨를 나 몰라라 하는 마당에 사랑을 준 유일한 할머니까지 그렇게 되었으니, 여름 씨 속이 어떻겠냐?”최하준이 침울한 얼굴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친구들 모두 복잡한 심정으로 최하준을 보았다. 최하준이 담배를 피운다는 건 정말 일이 안 풀릴 때라는 것을 오래된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이주혁이 웃으며 물었다.“우리가 도와줄게. 이성문제에 관한 거라면 나도 경험이 좀 있잖냐.”이지훈이 대신 설명했다.“우리 여름 씨가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하준이, 오해를 하고 남자랑 바람 피러 나간 줄 알았다지 뭐냐. 모욕이란 모욕은 다 주고.”송영식이 ‘헉’ 소리를 냈다.“야, 너 불 난 집에 부채질했구나?”이주혁도 덧붙였다.“좀 심했네.”하준이 친구들에게 눈을 부라렸다.“알았으니까, 아이디어 좀 내 봐. 가족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기운이
이튿날, 이른 새벽.여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최하준은 이미 일어나 침대 옆에 앉아 여름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뭐 하려고 합니까?”“아침밥 하려고요.”최하준이 살짝 찡그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침밥 챙길 정신이나 있겠어?’“안 해도 됩니다.”최하준이 여름의 팔을 잡았다.“그러기 싫어요. 아침 식사를 챙기는 건 내 의무니까.”여름이 고분고분한 하인처럼 행동했다.그런 모습에 슬며시 짜증이 올라왔다.“안 먹을 겁니다. 옷 갈아입어요. 갈 데가 있어요.”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 집에서 나갈 수 있다면 출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도 물 건너 간 것 같다.“네.”준비를 마치고 최하준은 직접 차를 운전해 여름을 어느 교외 지역으로 데리고 갔다.여름은 최하준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묻지도 않았다. 이 사람과 말을 섞기도 싫었다.눈앞에 묘지가 나타났다. 여름은 이제야 알았다. 이곳이 할머니가 안장된 묘소라는 것을.“왜 여길 데려왔어요?”“추모의식을 치르려고 합니다”최하준이 차에서 내렸다. 여름은 멍하니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이미 장례는 치렀어요. 이럴 필요 없어요. 당신과는 상관없어요.”여름은 할머니 죽음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한선우만 장례식에 가고 나는 못 가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도 할 일은 해야겠습니다. 최소한 서류상 남편이니까.”최하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나를 언제 와이프로 대해주기나 했나, 뭐.”여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가족은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가족 장례식에도 안 가겠다고는 한 적 없습니다.”최하준이 여름을 안아서 차에서 내려주었다.이어서 대형 트럭 한 대가 오더니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 김상혁이 차에서 뛰어 내렸다.“할머니 생전에 입으셨던 의복이랑 물건입니다.”여름이 트럭을 올려다 보았다.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걸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이게 다 뭐….”김상혁은 최하준이 뭐라고 할까 봐 지레 걱정이 되어 설명을 덧붙였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