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아프게 설득을 해야 하나 걱정했건만 여름은 주저하지 않고 앉아서 음식을 다 비웠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로봇처럼.최하준은 정말로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이제껏 살면서 다른 사람을 달래본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과도 할 만큼 했다. 똑똑하고 사랑스럽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서재에서 최하준은 영상통화로 친구 몇 명을 초대했다.이주혁이 욕실 가운을 입고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고 말했다.“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 웬일로 우리 생각이 다 나셨을까?”송영식도 낮게 웃었다.“그러게 말이야. 평소에 웬만하면 너한테 연락 안 하잖아. 네가 우리랑 연락하기 귀찮아 하는 거 같아서 말이지.”지훈이 시원하게 웃었다.“우리 하준이가 여성 분께 뭔가 많이 잘못한 모양이야? 얼마나 답답했으면 우리까지 호출했겠어?”하준이 눈을 부라리며 이지훈을 보았다. 김상혁이 이미 싹 다 보고한 모양이다.“내 생각엔 말이다, 이번 일은 완전히 네 잘못이라고 본다.”이지훈이 말했다.“돌아가신 할머님이 강여름 씨에게 끔찍했다던데. 강 회장 집안 사람들이 여름 씨를 나 몰라라 하는 마당에 사랑을 준 유일한 할머니까지 그렇게 되었으니, 여름 씨 속이 어떻겠냐?”최하준이 침울한 얼굴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친구들 모두 복잡한 심정으로 최하준을 보았다. 최하준이 담배를 피운다는 건 정말 일이 안 풀릴 때라는 것을 오래된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이주혁이 웃으며 물었다.“우리가 도와줄게. 이성문제에 관한 거라면 나도 경험이 좀 있잖냐.”이지훈이 대신 설명했다.“우리 여름 씨가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하준이, 오해를 하고 남자랑 바람 피러 나간 줄 알았다지 뭐냐. 모욕이란 모욕은 다 주고.”송영식이 ‘헉’ 소리를 냈다.“야, 너 불 난 집에 부채질했구나?”이주혁도 덧붙였다.“좀 심했네.”하준이 친구들에게 눈을 부라렸다.“알았으니까, 아이디어 좀 내 봐. 가족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기운이
이튿날, 이른 새벽.여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최하준은 이미 일어나 침대 옆에 앉아 여름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뭐 하려고 합니까?”“아침밥 하려고요.”최하준이 살짝 찡그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침밥 챙길 정신이나 있겠어?’“안 해도 됩니다.”최하준이 여름의 팔을 잡았다.“그러기 싫어요. 아침 식사를 챙기는 건 내 의무니까.”여름이 고분고분한 하인처럼 행동했다.그런 모습에 슬며시 짜증이 올라왔다.“안 먹을 겁니다. 옷 갈아입어요. 갈 데가 있어요.”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 집에서 나갈 수 있다면 출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도 물 건너 간 것 같다.“네.”준비를 마치고 최하준은 직접 차를 운전해 여름을 어느 교외 지역으로 데리고 갔다.여름은 최하준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묻지도 않았다. 이 사람과 말을 섞기도 싫었다.눈앞에 묘지가 나타났다. 여름은 이제야 알았다. 이곳이 할머니가 안장된 묘소라는 것을.“왜 여길 데려왔어요?”“추모의식을 치르려고 합니다”최하준이 차에서 내렸다. 여름은 멍하니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이미 장례는 치렀어요. 이럴 필요 없어요. 당신과는 상관없어요.”여름은 할머니 죽음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한선우만 장례식에 가고 나는 못 가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도 할 일은 해야겠습니다. 최소한 서류상 남편이니까.”최하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나를 언제 와이프로 대해주기나 했나, 뭐.”여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가족은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가족 장례식에도 안 가겠다고는 한 적 없습니다.”최하준이 여름을 안아서 차에서 내려주었다.이어서 대형 트럭 한 대가 오더니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 김상혁이 차에서 뛰어 내렸다.“할머니 생전에 입으셨던 의복이랑 물건입니다.”여름이 트럭을 올려다 보았다.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걸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이게 다 뭐….”김상혁은 최하준이 뭐라고 할까 봐 지레 걱정이 되어 설명을 덧붙였다.
불꽃이 모두 꺼지자 최하준이 할머니 무덤 앞에 섰다. 정성을 다해 절을 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여름은 조금 놀랐다. 할머니 장례에 이렇게까지 최하준이 정성을 쏟을지 몰랐다.뭔지 모를 감정으로 혼란스러워졌다.“할머니께 뭐라고 했어요?”최하준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강여름이 내 곁에 있는 한 내가 꼭 지킬 테니 안심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여름이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됐거든요. 조금만 나를 더 믿어주기만 해도 좋겠네요.”산에서 내려오면서 또 다른 무덤을 지나쳤다. 특이하게도 묘비에 사진이 있었다. 최하준이 사진을 보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이 분은?”“아, 우리 고모예요.”여름은 무덤 앞에서 절을 했다.“여름 씨랑 많이 닮았군요.”최하준이 말했다.“그래요. 우리 할머니도 내가 고모랑 많이 닮았다고 했어요.”여름이 어깨를 으쓱했다.“어쩐지 어머니하고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더라니. 고모 딸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여름이 순간 얼떨떨했다. 고개를 급히 저었다.“그럴 리가요. 우리 고모는 결혼도 안 했는 걸요. 젊을 때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딸이 있을 수 있겠어요. 아휴, 괜히 말해서 사람 이상하게….”최하준이 침묵했다.두 사람은 말없이 산을 내려왔다. 여름이 한참을 주저하며 말했다.“저, 오늘은 출근하고 싶은데, 가도 될까요?”최하준이 찡그렸다.“거리감 느껴지게 그렇게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냥 다른 남자들과 가까이 지내지만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전화는 반드시 받으십시오.”“그럴게요.”여름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빨리 돈을 벌어야 당당하게 이혼할 수 있지.’******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여름은 화신그룹 방 팀장에게 연락했다. 약속시간을 잡은 후 오후에 화신그룹 분양 현장에 나가보았다. 1층 분양 모델하우스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여름은 평면도를 들여다보며 구조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2층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는 줄 전혀 모른 채.그 사람은 강여경이었
“염려마십시오. 제가 즉시 가서 알아서 잘 해보겠습니다.”******여름은 로비에서 30분을 기다려 방 팀장을 만나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 팀장은 여름에게 커피를 권했다. 두 사람이 앉아서 막 이야기를 나누려는 순간, 방 팀장의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방 팀장이 전화를 끊고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강여름 씨, 기술팀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20분이 지나도 방 팀장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다섯 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여름은 조금 짜증이 났다. 오늘 아무래도 늦게 들어갈 것 같다.최하준이 또 의심할까 싶어 여름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오늘 늦을 것 같아요.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시작하지도 못했어요.”여름이 먼저 전화를 걸어주자 최하준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여름 혼자 계속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졌다.“거기 어딥니까?”“화신그룹이오.”최하준은 밖을 보았다. 지금 있는 곳이 화신과 멀지 않았다.“그렇군요.”여름은 최하준이 더는 캐묻지 않자 얼른 전화를 끊었다.조금 더 기다리니 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안녕하십니까. 강여름 씨 맞으시죠? 방 팀장이 지금 좀 급한 일이 생겨서요, 모시고 가서 현장 실측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명함에는 왕동민 이사로 적혀 있었다.“실내 공간에 직접 들어가볼 수 있습니까?”조금 이상했다.“지붕은 덮었지만 외벽은 시공 전이라 지금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왕동민이 친절하게 말했다.“회사는 이번 인테리어에 매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왔던 인테리어 회사들은 모두 직접 공간을 측정했습니다.”여름은 호기심이 생겼다.“다른 인테리어 회사에서도 왔단 말씀이시죠?”“그렇습니다. 어떤 인테리어 회사는 우리 회사 이사님 중 한 분과 친분이 있다고 합니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밖으로 나왔다. 경쟁 회사의 소식을 더 많이 들으려고 애쓰다 보
여름은 무척 당황했다.“어디 봐요. 내가 한 번 볼게요.”“의사도 아니면서, 보면 압니까?”여름은 말문이 막혔다. 최하준의 등을 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름은 미칠 것 같았다.“등에서 피가 나요!”“그만, 난 괜찮아요”여름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는 건 구급차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전화를 하는 것뿐이었다.천만 다행히 몇 분 후 구급차가 도착했다.구급차에 타자마자 대원이 능숙하게 최하준의 옷을 가위로 자르고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등에 보이는 커다란 상처와 핏자국, 그리고 얼룩진 피멍이 드러나자 여름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상처가 만약 여름의 몸에 생겼다면 아파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준은 이렇게 상처가 깊은데도 앓는 소리는커녕 여름을 안고 걸어 나왔다.‘이 사람 어쩔 거야….’ 여름은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끓어올랐다.최하준이 모욕을 줄 때면 미칠 듯이 미웠다. 그런데 벼랑 끝에 몰렸을 때마다 자신을 구해주는 건 다름 아닌 최하준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이번에는 스스로 부상까지 입으면서...여름은 알고 있었다. 오늘 만약 최하준이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울지 마세요. 남자분은 등에 외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대원이 위로해주었다.“……”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여름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최하준은 울고 있는 여름을 보고는 가슴이 시리다가도 한편으로 좀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정말 날 좋아하나 보군. 조금 다친 걸 보고 이렇게 울다니 정말 바보지만 사랑스럽잖아.’“하지만 어깨 쪽은 인대가 끊어졌을 것 같은데,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대원이 말했다.마지막 한 마디에 여름은 절망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요. 결국 엄청 심하단 말이네.’어릴 적 발을 삐었을 때 아파서 죽을뻔한 기억이 고스란히 있는데, 인대가 끊어졌다니 그 고통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의료진이 물었
“손아귀?”최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이고, 말이 헛 나왔네.”이지훈이 자신의 입을 때렸다.“어쨌든 화신그룹이 감히 널 건드리다니. 적절한 해명이 없으면 너네 어르신이 그쪽을 가만 두지 않으시겠다.”이지훈이 말했다.“불과 십 수년 만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서 화신그룹이 이렇게 순조롭게 운영 되는 데는 그 뒤에 뭔가 믿을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지 않겠어.”김상혁이 덧붙였다.“서울 쪽에서 누가 힘쓰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최하준의 입술이 굳어졌다.“그래, 이지훈이 말에 동의해. 한 번 알아봐. 오늘 이 일이 우연인지 조작인지.”강여름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우연이겠죠. 저는 화신그룹에 밉보인 게 없어요. TH그룹이랑 가은이나 시아가 아니고서는 저한테 그럴만한 사람이 없는데…”“……”“밉보인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네요.”이지훈이 놀리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치열한 전쟁터 한 가운데 있는 최하준에 비하면 강여름 정도야 뭐…여름은 부끄러웠다.최하준이 여름을 힐끗 쳐다보더니 거들먹거렸다.“무조건 내 옆에만 딱 붙어 있어요. 다른 사람들 다 뭐라 해도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최하준이 하는 말이 과장인 걸 알지만 그래도 내심 감동했다.여름은 최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히고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러고만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이지훈과 김상혁은 할 말을 잃었다.여친 없는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나.“컥, 우리는 그만 가자. 도저히 못 봐주겠다.”“제수씨 구하다가 이렇게 다쳤으니까 옆에서 잘 좀 돌봐주세요. 아시겠죠?”“네네, 그럴게요.”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김상혁과 이지훈이 나가자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혼자서 최하준을 돌보다니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을 터였다그러나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다행히 VIP병실은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취사도 가능하고 아파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배 고파요? 나가서 뭐 좀 사올게요.”“많이 고파요. 돼지불고기 먹고 싶습
최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쪽이 아니면 여름 씨 끌고 들어간 녀석은? 그 놈은 전혀 다치질 않았어.”“그 사람 진술로는 강여름 씨랑 현장실측 하려고 간 것뿐이랍니다. 가면서 너무 대화에 몰입해서 안전모 씌워주는 걸 깜박했다고 합니다.”“몰입?”최하준이 갑자기 ‘픽’하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김상혁은 등줄기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저 놈의 질투심 때문에 또 미친듯이 노발대발하는 건 아닌지 지레 겁부터 났다.“영업하는 사람들은 다 그 모양이라니까. 하여간 아무나 붙들고 떠들기 바빠서.어쨌거나 이번 일에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될 거야.”최하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일단 소장 보내. 화신 측 배상이 흡족하지 않을 경우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네.”이때 여름이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김상혁을 보더니 멈칫했다.“어떡해요. 오실 줄 모르고 2인분만 만들었어요.”“괜찮습니다. 저녁도 먹었고, 지금 막 가려던 참입니다.”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김상혁이 놀랐다. 최하준이 입원해서 이렇게 소박하게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보통은 십여 가지 반찬을 준비해야 했었다.음식도 음식이지만 그걸 보고도 화를 내지 않는 최하준을 보니 더욱 놀라웠다.여름은 요리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 최하준의 왼손을 한 번 봤다. 아직 왼손은 쓸만한 듯 했다.“내가 먹여줘요, 아니면 혼자 먹을래요?”“당연히 먹여줘야죠. 왼손으로 어떻게 밥을 먹습니까?”최하준이 어린아이처럼 뾰로통해졌다.‘아니, 왼손을 더 잘 쓰시잖아요?’김상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아직 안 갔어?”최하준이 아래 위로 눈을 부라리며 김상혁을 노려보았다.“네, 갑니다.”김상혁이 쌩하니 사라졌다.“상혁 씨한테 왜 그러세요? 좋은 사람인데.”여름이 불쌍하다는 말투로 편을 들었다.“좋다고?”최하준의 눈에 어두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나보다 더 좋습니까?”여름이 흠칫하더니, 갑자기 눈빛이 이상하게 빛났다.“쭌, 지금 질투하는 거 맞죠?”“……”질투?최하준의
여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최하준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손이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렸다. 볼 수가 없으니 더듬기만 할 뿐 계속 실패했다.“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최하준도 얼굴이 붉어져서 여름을 노려보았다.여름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이불 속으로 들이 밀었다.바로 이때,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들어왔다.“최하준 님, 좀 어떠신가요?”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의사 선생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타이밍을 잘 못 맞춰 들어왔나 봅니다. 아, 저… 지금 나갑니다!”여름이 잽싸게 얼굴을 빼냈다. ‘망했다! 선생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그런 게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그냥…”“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계속 하세요.”의사가 얼굴이 벌게져서 시선을 피하며 나갔다입구까지 가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두 분이 혈기가 넘치는 건 알겠습니다만, 환자 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그게 아니라…”여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사는 급히 나가버렸다.여름은 울기 직전이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화가 나서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을 힘껏 노려보았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나 때문이라고?”최하준이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렇군요, 내가 괜히 사람 구한다고 나서서 이렇게 되었네. 지금쯤 영안실에 누워있든 말든 그냥 둘 걸. 뭘 한다고 나서서 화장실 가는 것도 도움 받는 지경이 되었는지…”“됐어요. 그만 해요.”여름이 몸서리쳤다.“당신 때문 아니에요. 날 구해준 은인인 걸요.”“이제야 알아듣는 것 같군요.”그러더니 말했다.“이제 치워주십시오.”여름은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입이 바싹 말라 목을 축이려고 물 한잔을 따랐을 때 최하준이 또 불렀다.“내 몸을 좀 닦아줄 수 있습니까?”“……”물잔을 들고 쏟을 뻔했다. 뒤돌아 최하준을 바라보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