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무척 당황했다.“어디 봐요. 내가 한 번 볼게요.”“의사도 아니면서, 보면 압니까?”여름은 말문이 막혔다. 최하준의 등을 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름은 미칠 것 같았다.“등에서 피가 나요!”“그만, 난 괜찮아요”여름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는 건 구급차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전화를 하는 것뿐이었다.천만 다행히 몇 분 후 구급차가 도착했다.구급차에 타자마자 대원이 능숙하게 최하준의 옷을 가위로 자르고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등에 보이는 커다란 상처와 핏자국, 그리고 얼룩진 피멍이 드러나자 여름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상처가 만약 여름의 몸에 생겼다면 아파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준은 이렇게 상처가 깊은데도 앓는 소리는커녕 여름을 안고 걸어 나왔다.‘이 사람 어쩔 거야….’ 여름은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끓어올랐다.최하준이 모욕을 줄 때면 미칠 듯이 미웠다. 그런데 벼랑 끝에 몰렸을 때마다 자신을 구해주는 건 다름 아닌 최하준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이번에는 스스로 부상까지 입으면서...여름은 알고 있었다. 오늘 만약 최하준이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울지 마세요. 남자분은 등에 외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대원이 위로해주었다.“……”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여름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최하준은 울고 있는 여름을 보고는 가슴이 시리다가도 한편으로 좀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정말 날 좋아하나 보군. 조금 다친 걸 보고 이렇게 울다니 정말 바보지만 사랑스럽잖아.’“하지만 어깨 쪽은 인대가 끊어졌을 것 같은데,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대원이 말했다.마지막 한 마디에 여름은 절망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요. 결국 엄청 심하단 말이네.’어릴 적 발을 삐었을 때 아파서 죽을뻔한 기억이 고스란히 있는데, 인대가 끊어졌다니 그 고통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의료진이 물었
“손아귀?”최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이고, 말이 헛 나왔네.”이지훈이 자신의 입을 때렸다.“어쨌든 화신그룹이 감히 널 건드리다니. 적절한 해명이 없으면 너네 어르신이 그쪽을 가만 두지 않으시겠다.”이지훈이 말했다.“불과 십 수년 만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서 화신그룹이 이렇게 순조롭게 운영 되는 데는 그 뒤에 뭔가 믿을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지 않겠어.”김상혁이 덧붙였다.“서울 쪽에서 누가 힘쓰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최하준의 입술이 굳어졌다.“그래, 이지훈이 말에 동의해. 한 번 알아봐. 오늘 이 일이 우연인지 조작인지.”강여름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우연이겠죠. 저는 화신그룹에 밉보인 게 없어요. TH그룹이랑 가은이나 시아가 아니고서는 저한테 그럴만한 사람이 없는데…”“……”“밉보인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네요.”이지훈이 놀리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치열한 전쟁터 한 가운데 있는 최하준에 비하면 강여름 정도야 뭐…여름은 부끄러웠다.최하준이 여름을 힐끗 쳐다보더니 거들먹거렸다.“무조건 내 옆에만 딱 붙어 있어요. 다른 사람들 다 뭐라 해도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최하준이 하는 말이 과장인 걸 알지만 그래도 내심 감동했다.여름은 최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히고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러고만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이지훈과 김상혁은 할 말을 잃었다.여친 없는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나.“컥, 우리는 그만 가자. 도저히 못 봐주겠다.”“제수씨 구하다가 이렇게 다쳤으니까 옆에서 잘 좀 돌봐주세요. 아시겠죠?”“네네, 그럴게요.”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김상혁과 이지훈이 나가자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혼자서 최하준을 돌보다니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을 터였다그러나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다행히 VIP병실은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취사도 가능하고 아파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배 고파요? 나가서 뭐 좀 사올게요.”“많이 고파요. 돼지불고기 먹고 싶습
최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쪽이 아니면 여름 씨 끌고 들어간 녀석은? 그 놈은 전혀 다치질 않았어.”“그 사람 진술로는 강여름 씨랑 현장실측 하려고 간 것뿐이랍니다. 가면서 너무 대화에 몰입해서 안전모 씌워주는 걸 깜박했다고 합니다.”“몰입?”최하준이 갑자기 ‘픽’하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김상혁은 등줄기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저 놈의 질투심 때문에 또 미친듯이 노발대발하는 건 아닌지 지레 겁부터 났다.“영업하는 사람들은 다 그 모양이라니까. 하여간 아무나 붙들고 떠들기 바빠서.어쨌거나 이번 일에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될 거야.”최하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일단 소장 보내. 화신 측 배상이 흡족하지 않을 경우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네.”이때 여름이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김상혁을 보더니 멈칫했다.“어떡해요. 오실 줄 모르고 2인분만 만들었어요.”“괜찮습니다. 저녁도 먹었고, 지금 막 가려던 참입니다.”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김상혁이 놀랐다. 최하준이 입원해서 이렇게 소박하게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보통은 십여 가지 반찬을 준비해야 했었다.음식도 음식이지만 그걸 보고도 화를 내지 않는 최하준을 보니 더욱 놀라웠다.여름은 요리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 최하준의 왼손을 한 번 봤다. 아직 왼손은 쓸만한 듯 했다.“내가 먹여줘요, 아니면 혼자 먹을래요?”“당연히 먹여줘야죠. 왼손으로 어떻게 밥을 먹습니까?”최하준이 어린아이처럼 뾰로통해졌다.‘아니, 왼손을 더 잘 쓰시잖아요?’김상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아직 안 갔어?”최하준이 아래 위로 눈을 부라리며 김상혁을 노려보았다.“네, 갑니다.”김상혁이 쌩하니 사라졌다.“상혁 씨한테 왜 그러세요? 좋은 사람인데.”여름이 불쌍하다는 말투로 편을 들었다.“좋다고?”최하준의 눈에 어두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나보다 더 좋습니까?”여름이 흠칫하더니, 갑자기 눈빛이 이상하게 빛났다.“쭌, 지금 질투하는 거 맞죠?”“……”질투?최하준의
여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최하준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손이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렸다. 볼 수가 없으니 더듬기만 할 뿐 계속 실패했다.“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최하준도 얼굴이 붉어져서 여름을 노려보았다.여름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이불 속으로 들이 밀었다.바로 이때,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들어왔다.“최하준 님, 좀 어떠신가요?”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의사 선생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타이밍을 잘 못 맞춰 들어왔나 봅니다. 아, 저… 지금 나갑니다!”여름이 잽싸게 얼굴을 빼냈다. ‘망했다! 선생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그런 게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그냥…”“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계속 하세요.”의사가 얼굴이 벌게져서 시선을 피하며 나갔다입구까지 가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두 분이 혈기가 넘치는 건 알겠습니다만, 환자 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그게 아니라…”여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사는 급히 나가버렸다.여름은 울기 직전이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화가 나서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을 힘껏 노려보았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나 때문이라고?”최하준이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렇군요, 내가 괜히 사람 구한다고 나서서 이렇게 되었네. 지금쯤 영안실에 누워있든 말든 그냥 둘 걸. 뭘 한다고 나서서 화장실 가는 것도 도움 받는 지경이 되었는지…”“됐어요. 그만 해요.”여름이 몸서리쳤다.“당신 때문 아니에요. 날 구해준 은인인 걸요.”“이제야 알아듣는 것 같군요.”그러더니 말했다.“이제 치워주십시오.”여름은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입이 바싹 말라 목을 축이려고 물 한잔을 따랐을 때 최하준이 또 불렀다.“내 몸을 좀 닦아줄 수 있습니까?”“……”물잔을 들고 쏟을 뻔했다. 뒤돌아 최하준을 바라보는
“의사를 불러 뭐하게요? 그렇다고 통증이 없어지지도 않을 텐데요.”최하준이 눈을 감았다. 통증 때문에 속눈썹이 움찔거리며 떨렸고 급기야 꽉 다문 입술로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창백한 얼굴로 애써 통증을 참는 최하준의 모습에 여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손을 꽉 잡았다.“내,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뭐든 할 수 있어요?”최하준의 두 눈이 더 깊어졌다.“네.”여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최하준이 눈에 힘을 주고 열심히 고민하는 척 하다가 가볍게 툭 내뱉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줘요. 다른데 집중하면 통증을 잊어버릴 거 같은데.”“……”여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런가?’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다분히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안 되면 할 수 없고.”최하준이 고개를 돌렸다. 계속 아파서 끙끙거렸다.“아니, 아니. 할게요.”이 사람은 내 생명의 은인이야.여름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의 얼굴을 잡고 천천히 얼굴을 숙여 최하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병원 약 때문인지 그의 입술에선 약 냄새가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 감미로움에 묻혀버렸다.이렇게 키스를 리드하는 건 처음이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전등이 꺼져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최하준의 몸도 바로 반응했다. 심장이 요동 치기 시작했다.뜨거운 입술에 제대로 응답하기도 전에 여름이 갑자기 입술을 떼었다. 그러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이러면 돼요?”“조금 효과가 있네요. 근데 당신이 떨어지니까 다시 통증이….”최하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그렇지만 키스를 너무 오래하다 혹시나 눌려서 아프게 할까 봐 걱정이 돼요.”여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이쪽으로 와요.”최하준이 자신의 왼쪽 빈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여름이 주저하며 빈 자리에 걸터 앉았다가 그 옆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처음에는 수줍게 입을 맞추던 여름은 최하준이 키스를 돌려주기 시작하자 어느새 그에게 점점 밀착했다. 오로지
방금 다녀갔던 의사들의 표정이 왜 그렇게 이상야릇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잠시 후 여름은 세수물을 들고 울분을 토하며 욕실에서 걸어나왔다.“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이거 봐요. 내 입술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다니. 이제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봐요!”여름의 얼굴을 보고 최하준은 속으로 무척 흡족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아픈 기색을 잔뜩 드러냈다.“미안합니다. 이렇게 될 줄 미처 몰랐네요. 어젯밤에 너무 아파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밤에는 혼자 꾹꾹 참아볼게요. 강여름 씨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미남자가 약한 모습으로 꼬리를 내리자 여름은 자신이 한 말을 곧바로 후회했다.그래, 사람이 아프다는데. 어쩔 수 없지.오전 아홉 시쯤, 김상혁과 이지훈이 방문했다. 여름이 마스크를 한 모습을 보더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 여름 씨. 웬 마스크 입니까?”“병원에는 환자들이 많으니까 마스크를 하는 것이 감염 예방에 좋을 것 같아서요.”여름이 진지하게 말했다.“요즘 바이러스성 감기가 유행이라더군요.”“아, 그럼 저도 하나 주세요. 저도 예방차원에서 써야겠군요.”이지훈이 황급히 마스크로 입을 가렸다.침대에 있는 최하준은 그저 속으로 웃기만 했다.******화신그룹 사무실.고소장이 날아오자 강태환은 여경을 호출했다. 다짜고짜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일을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내가 겨우겨우 그 늙은 노인네들한테서 분양 건을 빼앗아 네 손에 쥐어주었더니 이렇게 일을 그르쳐?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내가 얼마나 고군분투 하는 줄 알긴 아는 거냐? 부임 하자마자 대형 사고나 치고! 연말에 이사장 자리를 놓고 또 경쟁해야 하는데 이번 사고가 내 발목을 잡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죄송해요. 강여름이 하도 설쳐대길래 손 좀 봐주려고 했어요.”강여경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최하준이 뛰어들어와 여름이를 구해줄 줄은 정말 몰랐어요.”“그놈의 최하준!”강태환이 분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공사인부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여기 피해 보상액을 가지고 왔습니다.”여름은 눈을 의심했다. 손에는 오천만 원이 놓여 있었다. 여름은 눈을 깜박깜박하며 최하준의 손에 있는 20억 짜리 수표를 번갈아 보았다.나와 이 사람 사이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거였군.비록 상해를 당하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살아났는데 말이다. ‘하…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구나.’최하준은 손에 있던 수표를 침대 옆 테이블에 보란 듯이 툭 던졌다.“네, 이제 가셔도 됩니다.”“……”“괜찮으시다면, 명함을 교환하고 싶은데요.”부사장 입장에선 이렇게 어마어마한 변호사를 만날 기회를 놓치기 싫은 모양이었다.“제가 좀 피곤합니다. 배웅해 드리세요.”최하준이 지친 듯이 눈을 감았다.부사장은 이런 취급을 받아본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 무척이나 분했지만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여름은 난처해 하며 부사장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이렇게 오셨는데 어쩌죠. 최하준 변호사님은 상처가 깊어서 며칠 간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저, 잠시 화신그룹 인테리어에 관해서 여쭤보고 싶은데요.”“그건 제 업무가 아닙니다. 해당 부서와 연결해 보시지요.”부사장은 귀찮은 듯 짧은 대답을 마치고 가버렸다. 일개 디자이너와는 말도 섞을 필요가 없다는 투로.‘일만 아니면 당신 같은 사람한테 이런 취급을 안 받아도 되거든.’화신그룹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병실로 돌아왔더니 최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버럭했다.“강여름 씨,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겁니까? 화신그룹 인테리어를 정말 하려고요?”“인테리어 건은 이대로 진행하고 싶어요. 일이 잘 성사되면 회사에서 큰 금액을 지급해 준다고 했어요. 공사 후에는 더 벌 수도 있고요.”여름은 수표를 슬쩍 곁눈질했다.“5억이 하준 씨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지만 저같이 보통사람들한테는 평생 벌어도 못 모을 돈이에요.”
“그래요. 당신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최하준 씨는 내 행운의 네 잎 클로버~, 나의 구세주~.”여름은 입에서 나오는 데로 뱉었다. 아픈 환자와 다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때, 양유진이 톡을 보냈다.-여름 씨가 일하는 현장에서 사고가 생겼다면서요. 괜찮으십니까? 잠깐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많이 걱정되네요.여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양유진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다.다만 안타까운 것은, 한선우에게 복수할 필요가 없어져서 외삼촌에게 시집온 외숙모라는 타이틀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름이 답장을 보냈다.-신경써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아무 일도 없어요. 별장 인테리어도 이제는 지체 없이 진행될 겁니다.-별장 공사는 급하지 않아요. 여름 씨 건강부터 챙기세요.양유진이 섬세한 마무리 인사를 보냈다.“누구랑 얘기합니까?”최하준이 무덤덤하게 물었다.“윤서요.”여름이 급히 핸드폰을 내려놓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양유진이나 한선우 같은 인간들하고 톡하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그 사람들하고 연락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습니다.”사뭇 엄격한 말투였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여름은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대박! 어떻게 알고….’“으으, 이리 와요. 상처 부위가 또 아픕니다.”최하준이 원망하는 눈빛으로 여름을 힐끗 보았다.“……”‘그래서 또 키스해 달라고?’‘아니, 이 인간은 무슨 변덕이야? 전에는 내가 조금만 건드려도 죽일 것처럼 그러더니.’******최하준은 일주일 동안 입원한 후 퇴원을 했다.여름은 그동안 계속 최하준과 같이 지냈다. 직장에 휴가까지 쓰면서.도하건축디자인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근무 중에 큰 일을 당할 뻔했기 때문에 오히려 여름의 의중에 신경을 썼다.“화신그룹 프로젝트를 계속 맡을 거니? 네가 빠지면 디자이너를 바꾸려고.”“제가 해볼게요. 만약 안되면 그때 담당자를 바꾸세요.”여름은 프로젝트를 따내게 되면 얻어질 포상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