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당신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최하준 씨는 내 행운의 네 잎 클로버~, 나의 구세주~.”여름은 입에서 나오는 데로 뱉었다. 아픈 환자와 다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때, 양유진이 톡을 보냈다.-여름 씨가 일하는 현장에서 사고가 생겼다면서요. 괜찮으십니까? 잠깐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많이 걱정되네요.여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양유진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다.다만 안타까운 것은, 한선우에게 복수할 필요가 없어져서 외삼촌에게 시집온 외숙모라는 타이틀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름이 답장을 보냈다.-신경써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아무 일도 없어요. 별장 인테리어도 이제는 지체 없이 진행될 겁니다.-별장 공사는 급하지 않아요. 여름 씨 건강부터 챙기세요.양유진이 섬세한 마무리 인사를 보냈다.“누구랑 얘기합니까?”최하준이 무덤덤하게 물었다.“윤서요.”여름이 급히 핸드폰을 내려놓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양유진이나 한선우 같은 인간들하고 톡하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한 번 경고하는데 그 사람들하고 연락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습니다.”사뭇 엄격한 말투였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여름은 놀라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대박! 어떻게 알고….’“으으, 이리 와요. 상처 부위가 또 아픕니다.”최하준이 원망하는 눈빛으로 여름을 힐끗 보았다.“……”‘그래서 또 키스해 달라고?’‘아니, 이 인간은 무슨 변덕이야? 전에는 내가 조금만 건드려도 죽일 것처럼 그러더니.’******최하준은 일주일 동안 입원한 후 퇴원을 했다.여름은 그동안 계속 최하준과 같이 지냈다. 직장에 휴가까지 쓰면서.도하건축디자인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근무 중에 큰 일을 당할 뻔했기 때문에 오히려 여름의 의중에 신경을 썼다.“화신그룹 프로젝트를 계속 맡을 거니? 네가 빠지면 디자이너를 바꾸려고.”“제가 해볼게요. 만약 안되면 그때 담당자를 바꾸세요.”여름은 프로젝트를 따내게 되면 얻어질 포상
“아직 잘 모르시나본데, 강여름 씨의 목숨은 내가 결정합니다. 당신은 진작에 결정권이 없어진 거 모릅니까?’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최하준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다치지 않은 팔로 여름을 일으켜 세워 안았다.“쭌!”“싫다는 말은 안 듣는 걸로.”최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경고했다.“그게 아니라, 내가 하려던 말은 날 놔주라는 말이었어요. 제 발로 걸어서 방에 갈 수 있어요. 이렇게 무거운데 한 팔로 안고 있으면 멀쩡한 한 쪽 팔도 남아나질 않겠어요.”여름이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꽤나 영리하게 눈치껏 행동하는 여름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최하준이 여름을 슬쩍 놔주었다. 여름은 얌전하게 그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최하준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서재로 돌아가 일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여름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최하준이 이를 닦고 나와보니 침대 위에 여름이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깊은 잠에 빠졌는지 입가에 침이 흘러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쯧. 최하준이 입을 실룩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내어 몰래 이 모습을 찍었다.‘좋았어. 내일 보여줘야지. 흐흐. 창피해서 난리치겠지.’자신의 계략에 만족해하면서 조심스럽게 옆방 서재로 들어갔다.어쩌다 알아낸 노트북 비밀번호로 컴퓨터를 열어 방금 여름이 했던 작업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복잡하게 얽힌 디자인 원고를 자세히 보았다.최하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디자인들을 살펴보았다. 고작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한 작업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화신그룹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이틀만에 이걸 다 해내라고 했어?’*****아침 아홉 시.침대에서 번쩍 눈을 뜬 여름은 바로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반?! 미치고 팔짝 뛰겠네.완벽한 지각이다.여름은 서재로 총알같이 튀어 들어갔다. 시간이 없다. 아직 남은 작업을 끝내려고 노트북을 열었다.클릭하고 프로그램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러자 곧 여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네 개가 넘는
“…….”최하준의 근사한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아참, 방금 무슨 말 하려고 그랬어요?”여름이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최하준에게 물었다.최하준은 이상한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침을 잘 못 삼켰는데 왜 죽지 않나 갑자기 궁금해져서.”여름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못된 인간과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여기는 최하준의 집이고 이 사람은 분명히 잠을 잤다.“어젯밤에, 누군가 서재에 들어와서 내 컴퓨터를 열었어요. 제 디자인을 누군가 와서 완성해줬어요. 누가 그랬는지 아세요?”“아, 어제 내가 사람 하나 불렀습니다. 강여름 씨가 급사해서 밥 해줄 사람을 새로 구해야 할 상황이 되면 곤란하니까.”최하준은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지나가는 말투로 담담하게 말했다.“급해 보이길래 이번 한번만 불렀습니다. 다음 번에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여름은 완전히 멍해졌다. 어젯밤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야 잠들었는데…‘그런데 그 밤에 다른 사람을 불러?고용주가 고작 밥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잘해준다고?게다가 저번에는 공사현장에서 다치면서까지 나를 구해줬잖아. 하마터면 머리에 중상을 입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야.’여름의 심장이 격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방금 최하준이 기분 나쁘게 한 말도 다 용서가 되었다.어쩌면 겉으로는 저렇게 차갑지만 속은 뜨거운 반전 매력의 소유자? 한참 만에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정말 고마워요. 그 친구 실력이 좋던데 어디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다음에 혹시라도 이런 일이 생길 때 같이 일하면 호흡이 잘 맞을 텐데.”‘픽’하는 가벼운 비웃음이 들렸다.“그럴 일 없어요. 이 정도 시시한 프로젝트에는 별 관심 없을 겁니다.”여름이 개의치 않고 말했다.“그럼, 그분께 식사라도 대접하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요.”“그럴 필요 없습니다.”최하준이 딱 잘라 말했다.“식사는 나한테나 대접하세요.”“좋아요, 뭐. 출장 다녀오면
최하준의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요즘 거의 매일 밤 했던 입맞춤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하지만 오늘은 몸이 먼저 최하준의 키스에 화답을 하고 있었다.심장이 전보다 더 요동을 치는 것 같다. 입 속으로 파고드는 달달한 키스의 농밀함이 점점 짙어졌다.지금까지 여름의 입맞춤은 최하준의 입술을 늘 애타게 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좀 더….“꼬르륵!”여름의 뱃속에서 갑자기 또 다른 본능이 소리를 내고 말았다.뻘쭘해진 여름은 슬며시 최하준의 품에서 빠져나와 주방으로 쪼르르 달렸다.그 뒷모습을 보며 최하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름은 방 팀장에게 연락을 했다. 디자인 기획안은 완벽히 준비된 상태다.방 팀장이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호텔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마침 윗분도 동석할 수 있으니 함께 회의를 하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이런 접대는 전에도 자주 있었다. 이런 식, 정말 싫지만 거절할 수 없다.저녁 여덟 시. 여름은 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내부는 고급스럽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는데 무척이나 호화롭고 넓었다.최고급 밍크 코트를 걸친 여경이 소파 가운데 앉아 있었고 그 옆에서 방 팀장이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고 있었다. 여름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바로 그때, 문 앞에 서있던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달려들어 여름을 제압했다. 여름의 손에 들려있던 기획안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날 속였군요.”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여름은 분노에 치를 떨며 앞을 노려보았다.“이제 알겠어. 공사현장 사고, 너희가 꾸민 짓이지?”방 팀장은 겁에 질려 강여경 눈치를 슬슬 보았다. 그 사고는 방 팀장도 일이 벌어진 후에야 알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말단 직책부터 시작해서 가까스로 오늘 같은 위치에 올라온 그였다.도하 같은 일개 하청업체를 위해서 여경의 눈 밖에 난다면 그 동안의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된다. “역시 일머
강여경이 한 말이 귓가에 박혔다.여름은 의외로 담담했다.‘그랬구나.’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여름에게 차갑고 엄했다. 그저 성격이 상냥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강여경이 온 후로 이 여사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사실 진작부터 의심은 했었다. 다만 자신이 천애 고아란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진실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비참했다.‘친부모한테 버림받았다니, 후우.’“전부터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알아?”강여경이 여름의 뺨을 손으로 톡톡 쳤다. “난 납치돼서 그 고생을 했는데 너는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호강했잖아. 한선우 같이 잘난 남자도 꿰차고.”“하지만 지금 내겐 아무것도 안 남았어. 네 걸 뺏을 생각도 없고.”인제 보니 강여경은 단순히 청순한 척하는 여우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사이코패스 같았다.“계속 날 망신 줬지, 파혼하게 만들었지, TH도 팔렸어. 내가 이대로 당하고 있을 줄 알아?”강여경은 싸늘하게 웃었다.“네가 이런 데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보고서도 최하준이 널 도와줄까? 양유진, 한선우가 널 싸고돌까?”“강여경, 너 미쳤구나! 그러다 벌 받아.”여름이 욕을 퍼부으며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뒤에서 누군가 붙들고 있어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벌?”강여경이 개의치 않고 말했다.“내가 이제 화신 오너 딸인데, 누가 감히 날 건드려? 그깟 최하준? 흥, 기다리라 그래, 내가 천천히 손봐줄 테니.”그렇게 말하더니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여름은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얼굴이 빨개지도록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양손은 이미 묶여 있었다.여경은 바닥에 있던 설계도를 한 장 한 장 주워 들여다보더니 씨익 웃었다.“디자인 괜찮네? 고마워, 이건 내가 접수할게.”“넌 남의 것 빼앗아 가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 내가 가져가겠다는데, 네가 뭘 어쩌려고?”강여경은 두 사람에게 눈짓을 보내고 방 팀장과 함께 나갔다.“잘 모셔."문이 다시 닫히고 여름은 머리
지난번 사건으로 TH가 도산했으니 강여경 같은 악마가 여름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양유진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강여경이 나온 룸으로 들어갔다. 손잡이를 힘껏 눌러보았지만,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었다.문에 바짝 귀를 대보았다. 희미하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강여름이었다.젠장!마침 지나가던 메이드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급하게 프론트와 연락해서 키를 얻어 방으로 뛰어들었다. 안에는 한 남자가 손이 묶인 여름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었고, 여름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격렬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누구야!”남자가 당황한 틈을 타, 양유진이 달려들어 바닥에 때려눕혔다.안 되겠다 싶었는지 남자는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그 사람을 쫓을 새는 없었다. 바로 뛰어가 쓰러져 있던 여름을 안아 올렸다.익숙한 향기에 안심한 여름은 양유진의 품에 안겼다.비서가 들어왔다가 이 장면을 보고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문을 닫고 후다닥 나갔다.양유진은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여름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여름을 떼어내고 말했다.“여름 씨, 정신 차려봐요. 병원에 데려다 줄게요.”여름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쓰러진 여름에게서 매혹적인 향기가 풍겼다.양유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그림이 스쳤다. 양유진은 처음부터 여름이 좋았다. 하지만 여름은 계속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허락한다면, 여름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지금이 기회다.인정하기 싫지만 신사적이니 못한 이기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여름 씨, 나와 결혼해요.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양유진은 여름을 안아 소파에 눕히고 여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여름도 본능적으로 양유진을 안았다. 갑자기 바닥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환청인 듯 최하준의 목소리가 들리고 여름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성을 찾은 여름은 양유진을 힘껏 밀어내고 자신의 팔을 세게 물었다.“여름 씨….”양유진은 가슴이 아파왔다.“안
양유진은 카펫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집었다. 놀랍게도 “최하준”이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최하준? 그 사람이 왜?’순간 양유진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혹이 스쳤지만, 가까스로 억누르고 핸드폰을 갖다주었다.응답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갖다 대니 바로 화난 최하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번이나 전화했습니다. 강여름 씨, 한 번 더 안 받으면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습니다.”여름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뭘 그렇게까지요.”“허구헌날 누구한테 당하고 다니니 내가 안 이럽니까?”최하준이 쏘아붙였다.“잠깐만 한눈팔았다가는 저세상 사람 될까 봐 그럽니다.”여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그래, 또 당했지.’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해주에서 부랴부랴 돌아오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화신과 맞서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변호사래도 글로벌 기업인 화신은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괘, 괜찮아요. 윤서랑 노느라고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어둬서 못 들었어요.”“강여름 씨, 목소리가 왜 그렇습니까?” 최하준이 쌀쌀맞게 말했다.“누가 들으면 유혹하는 줄 알겠습니다.”여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최대한 자연스런 목소리를 냈다.“무슨 소리예요. 쇼핑하러 갈 거라고 말했잖아요.”“일찍 집에 들어가요.”“네네.”여름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한쪽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먼저 나가 계실래요?”“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양유진은 복잡한 심경으로 바닥 위의 핸드폰을 힐끗 보고 나서 몸을 돌려 나갔다.머리속엔 온통 여름과 최하준의 대화로 가득했다.‘왜 최하준에게 거짓말하는 거지? 둘이 무슨 관계지?’담배에 불을 붙이고 양유진은 날이 밝을 때까지 밖에 앉아 있었다.아침 7시, 여름은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몸에는 어제 양유진이 비서를 시켜 급히 사 온 옷을 입고 있었다.“병원으로 갑시다.”양유진이 다정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냥 집에 가
“아녜요, 알고 싶지 않아요. 필요가 없어지니 날 버린 사람들이에요. 괜히 과거를 들춰서 다시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여름은 고개를 저으며 의기소침하게 말했다.“세상이 너무 불공평해요. 어째서 그런 사람들이 또다시 하루아침에 높은 자리에 올라 계속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거죠?”자신에게 화신 같은 큰 기업을 상대로 맞설 능력이 없다는 걸 여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양유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원하면 내가 도와….”“괜찮아요.”여름이 말을 끊었다.“여름 씨, 어젯밤 얘기한 건 다 진심입니다. 여름 씨와 결혼하고 싶습니다.”양유진은 진지했다. “여름 씨 적은 내 적이 되는 겁니다.”여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복수한답시고 엉뚱한 사람과 결혼했던 그녀다. 또다시 같은 실수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양유진이 핸들을 몇 번 꽉 쥐었다가 놓고는 힘없이 말했다.“만약 최하준 씨가 같은 말을 했다면 ‘예스’였겠습니까?” 여름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순간 깨달았다. 어젯밤 양유진이 자신과 최하준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두 사람 안 지 꽤 된 거 맞지요?”양유진은 쉴 틈 없이 밀어붙였다. 많은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최하준처럼 콧대 높은 사람이 재판을 도와준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돈도 권력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쉽게 도와줄 리가 없는데.”여름은 가만히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양유진이 모든 걸 눈치챘다 해도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해명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계약서에 사인한 순간 자신을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침묵은 긍정을 의미했다.유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 무능한 내 탓입니다.”“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솔직히 말하자면, 최하준에겐 몰라도 양유진에게까지 신세 지고 싶진 않았다. 아마 최하준과는 어쨌든 혼인 신고를 한 사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 좋아해요?”양유진이 갑자기 여름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여름은 당황해서 얼굴을 돌렸다.유진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