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원래 눈 좀 붙일 생각이었으나 이모님 말에 닭살이 돋아 잠이 확 깼다.‘울 애기는 무슨….’하지만 최하준이 자신에게 관심 갖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확실히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준다는 느낌은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다음에는 집에 안 들어올 상황이면 선생님께 분명하게 얘기해요. 안 그럼 이상한 생각한다고요.”“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어제도 강여경에게 당할 뻔했다.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구하러 와주는 행운이 늘 따르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하지만 최하준이 한밤중에 도와줄 굉장한 실력자까지 붙여줬었는데 설계도가 넘어간 것이 못내 아쉬웠다.“아, 이모님, 어제 아침 서재에서 나오는 사람 보셨어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나이가 어느 정도 돼 보였어요?”그 정도 설계도를 그리려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인물이어도 밤새 작업해야 했을 거고 분명 아침에 떠났을 거라고 여름은 생각했다.이모님은어리둥절했다.“어제 아무도 안 왔을 텐데요? 아침 6시에 일어났을 때는 변호사님께서 서재에서 나오셨지요.”“그럼 차가 떠나거나 들어오는 소리는요?”“없었어요, 확실해요.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깊이 못 자거든요. 밖에 누가 왔으면 단박에 알죠.”이모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여름은 완전히 멍해졌다. 어제 새벽 집에 온 사람이 없다면 자신에게 설계 도면을 그려준 사람은 최하준밖에 없다는 뜻이다.하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설계도를 그린단 말인가? 보통 내공의 솜씨가 아니었는데!게다가, 하준은 지금 왼손밖에 쓸 수 없지 않은가?왼손도 잘 못 써서 밥도 자신이 먹여주고 있었는데 말이다.그래, 분명 속은 거다.예전 같으면 아마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테지만, 지금은 생각할수록 어쩐지 달달했다.‘그 사람이 이렇게 연기를 잘할 줄은 몰랐네.시중들어주고 밥 먹여주는 게 그렇게 좋았으면 그냥 말을 하지, 어린애도 아니고, 나 참.’“사모님, 왜 그러세요?”이모님은 여름이 눈을 찌푸리다가 바보
“어디 갔었냐고 물었습니다.”최하준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아주 대담하군요. 내가 하룻밤 자리 비운다고 그새 외박을 하다니 말입니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잔뜩 독기가 올라 있었다.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바짝 물러났다.“설마 또 의심하는 거예요?”최하준이 얼어붙더니 쌀쌀맞게 말했다.“지난번에 내가 의심을 안 했으면 지금 당신이 온전히 침대에 누워있을 수 있겠습니까?”여름은 고개를 떨궜다.“어젯밤에 윤서랑 쇼핑하다가 늦어져서 뭘 좀 먹었어요. 그리고 노래방 갔는데 노래하다 지쳐서 소파에서 그대로 잤어요. 깨어난 뒤 바로 온 거구요.”“다 사실입니까?”최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미안할 짓 한 거 없어요, 뭐”여름은 입을 삐죽이 내밀고 불쌍한 척을 했다.“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이제 겨우 스물넷인데 쭌이랑 결혼한 뒤로 노래방 한 번 못 가지, 맛난 거 먹으러 나가지도 못하지, 맨날 퇴근하면 칼같이 집에 와 밥했잖아요. 이게 뭐야?”최하준은 불쾌해 보였다.“그러니까 지금 사는 게 재미없다고 나한테 불평하는 겁니까?”“아,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여름은 재빨리 대답했다.“하지만 사람이 숨 쉴 틈은 좀 있어야죠. 지훈 씨한테 한 번 물어봐요, 내 말이 틀리나.”“내가 왜 그 녀석한테 물어봐야 합니까? 이지훈이 당신을 그렇게 잘 압니까?”“그런 게 아니라, 그분도 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여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역시 우리 쭌 같은 사람을 만나야지. 생활 습관이 얼마나 반듯해요? 그냥 교과서 같잖아.”“진심입니까?”최하준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흠잡을 데 없이 준수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다가왔다.최하준의 시선에 여름은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해 얼른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난 거짓말을 못 해요, 원래.”“눈감아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최하준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름의 볼을 꼬집었다. 이 여자 앞에서는 자꾸만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리곤 했다.여름은 얼얼한 코
“…….”세상에나!감히 귀를 잡아당기다니. 세게 잡아당긴 게 아니었는데도 찌릿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강여름 씨, 뭐 하는 겁니까?”최하준이 무표정하게 노려봤다.여름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여름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내키는 대로 한 번만 해보자. 혹시나 착각이라면 일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연기해야 하면 하는 거지 뭐.’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알아요. 우린 계약 관계라는 거. 하지만 계약 관계면서 당신처럼 상대가 24시간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하고, 위험에 처한다고 구해주고 그러지는 않는 것 같은데. 일이 많다고 몰래 도와주기까지 하고.그리고, 왼손도 멀쩡하면서 밥도 먹여달라고 하지,귀찮으면 그냥 시키면 될 걸 굳이 거짓말까지 하고, 찔린 거죠?”여름이 고개를 들어 최하준을 바라보았다.“날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나도 쭌이 좋아요.”여름의 맑고 깨끗한 눈에 남자의 실루엣이 비췄다.처음엔 그저 민망해서 그랬다. 너무나 민망했다.그동안 속으로만 생각해오던 것들을 이렇게 다 들키게 될 줄은 몰랐다.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자,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여름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왜일까, 오늘 들은 말은 유독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너무나 기뻤다.하지만 최하준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여름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휴우, 아무 반응이 없네. 혼자 착각이었나 봐.’“안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부턴 안 물어볼게요. 난 세수하러 가요.”여름이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최하준은 여름의 가녀린 뒷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사뭇 실망하고 침울한 모습이었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이 사람의 마음이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 같았다.“날 괴롭히려고 하늘에서 보낸 요정입니까?”‘하아’ 괴로운 듯 한숨을 쉬더니 최하준은 여름을 와락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음 날.아침밥을 먹고 최하준이 출근 준비를 하는데 여름이 팔을 붙들었다.“나 오늘 운전하기 싫어요, 쭌 차 타고 갈래요.”최하준이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 직장은 완전히 반대쪽이었고 오늘은 회의도 있었다.‘정말 귀찮군. 좀 편해졌다 이건가?’“당신 차 있지 않습니까?”“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여름이 최하준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최하준은 ‘아~ 귀찮아’ 눈빛을 시전하더니 말했다.“갑시다.”여름은 신이 났다.사실 그냥 자신을 지하철역 앞에 떨구고 가지 않는 기분을 누리고 싶었을 뿐이다. 엄청난 노력 끝에 마침내 이 사람을 ‘내 남자’로 만들었으니 말이다.최하준은 손을 다쳐서 요즘 김상혁이 계속 운전을 해주고 있었다.아침 출근 시간엔 차가 너무 많이 막혔다.김상혁은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최하준은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최하준은 미간을 문지르며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가며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한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냥 택시나 불러줄걸.“급할 거 뭐 있어요?”여름은 왼손을 최하준이 손등에 올려놓았다.“차가 막히는 바람에 더 오래 같이 있겠네.”장난스럽게 최하준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온통 최하준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초조하던 최하준의 마음이 순식간에 평온해졌다.눈썹이 펴지더니 ‘으흠’ 하며 얼굴을 돌렸지만, 입꼬리는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정말 답 없는 사람이라니까.”‘저저 츤데레 말투.’운전대를 잡은 김상혁이 손이 부들거렸다. 엄근진 최하준이 연애를 시작하니 정말이지 딴 사람 같았다.‘그러고 보니, 두 분 갑자기 사이가 너무 좋아졌잖아!’자신이 훼방꾼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8시 40분, 차가 회사 입구에 섰다.여름이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하는데 최하준이 말했다.“어제 옷 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새 옷을 안 입었습니까?”“…….”‘새 옷은 쇼핑몰에 있겠죠.’여름은 그래도 둘러댈 말을 찾았다.“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요. 마음에 드는 건
“내가 다 알아봤어. 이거면 충분할 거야. 여름아, 난 네가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 전에는 내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배신했지만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게.”최근 한선우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여름이 다른 남자에게 매여있지만 탓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 자신이 못난 탓이니까.여름은 복잡한 표정으로 카드를 돌려줬다.“오빠 돈 필요 없어.”“여름아.”한선우는 초조해졌다. “설마 계속 그 사람 옆에 있으려는 건 아니지?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날 그 인간 얼굴 너도 봤잖아. 널 존중하지도 않고 그냥 소유물 취급하는 거야.”“안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날은 그냥 화가 많이 났던 것뿐이야.”“그 녀석 편을 드는 거야?!”놀란 한선우의 말투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아직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거지? 복수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내 말 들어. 그 사람이랑 관계 끊고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난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 갈 수도 있어, 여름아.”“한선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미쳤어?!”양수영이 갑자기 뛰어와 여름이 손에서 카드를 뺏고는 ‘철썩’ 한선우의 등을 때렸다.“지금 우리 상황 뻔히 알면서 쟤한테 그 큰 돈을 줘? 정말 미쳤니?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네가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엄마”한선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여름이야말로 저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쟤 이제 빈털터리잖니, 너한테 도움이 안 돼.”양수영이 울며 말했다.“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올 생각은커녕 허구한날 그 불여우 같은 여자한테 가 있고, 너는 회사에서 인정도 못 받고, 내가 무슨 낙으로 사니! 너 쟤랑 결혼하면 이제 일어설 기회는 다시 없는 거야!”한선우는 주먹을 꼭 쥐었다. 괴로움에 얼굴은 일그러졌다. “한주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택하는 삶은 이제 원치 않아요.”“흥, 너 전에 여경이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혼하려고 했잖니?”
로펌 대표인 이지훈이 못마땅한 듯 비꼬았다.“최 변, 일찍 오십니다?”최하준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네.”잠긴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반어법인 거 모르냐? 로펌 변호사들 다 있는 자리에서 꼭 그래야겠냐?’“회의 계속하시죠.”최하준이 거만하게 턱을 살짝 들어 올리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꺼내어 보니 여름에게서 톡이 와있었다.-회사 도착했어요?최하준의 입이 귀에 걸렸다.-네.춘 사월 봄바람이라도 맞는 듯 최하준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사무실 안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헐!’늘 차갑고 근엄한 최 변호사가 누구랑 대화하길래 저렇게 입이 귀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지훈도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OK, 이번 주 회의는 여기까지! 다음 주 계속 열심히 합시다!” “…….”분명 방금 실적 올릴 방안을 논의하자더니, 정말 책임감이라곤 없는 대표였다.변호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최하준도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이지훈이 앞을 막아 섰다.“누구랑 얘기하는데 그렇게 웃으면서 좋아 죽어?”‘좋아 죽어???’최하준이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그렇게 웃었다고? 그럴 리가!’“설마 여름 씨는 아니겠지?”이지훈이 눈에 힘을 줬다.“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긴 것 같은데.”최하준이 쏘아보았다. 모처럼 기분 좋은데 이 녀석하고 말다툼이라니.“응, 어제 나한테 고백했어.”“고백은 매일 하지 않았어?”이지훈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고백이라니, 그런 여친 하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 싶었다.최하준은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응,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안 들어주면 그만 안 둘 태세여서 어쩔 수 없이 받아줬지.”이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맙소사, 최하준, 네 그 우쭐한 표정 어쩔래? 아주 신나 죽는구나.’“드디어, 축하축하! 나한테 감사하라고. 내가 널 동성으로 안 불렀음 여름 씨를 만날 수나 있었겠어?”“감사해?”최하준이 정색했다.“다
“오늘은 안 되고, 나중에.”최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놀랍게도 수락했다. ‘까짓거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한다면 한 번 가주지 뭐.’******저녁 5시 반.여름이 내려와 흰색 승용차에 올랐다.최하준은 차 안에서 소송자료를 보는 중이었다. 옆에서 보니 기다란 속눈썹에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까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여름은 잘생긴 사람이 좋았다.아니었다면 한선우와 사귀지도 않았을 거다. 한선우는 동성에서 손에 꼽히는 훈남이었다. 다만 최하준과 비교하면 분위기든 비주얼이든 조금씩 밀릴 뿐이다. 갈수록 한선우가 눈에 안 들어오고 양유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도 그럴 만했다. “쭌, 나 좀 봐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여름이 다가가 최하준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업무 중입니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여름은 차에 타자마자 코트를 벗었다. 타이트한 베이직 상의를 입고 있었다. 너무 타이트한 핏에 순간 당황한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방해했구나. 계속 일 봐요.” “…….” ‘이미 집중 안 되게 만들어 놓고 뭘 보라는 거야?’그냥 서류를 내려놓고 여름을 안아 무릎에 앉혔다. 여름의 머리가 차 천장에 닿았다. “차를 바꿔야겠군.”최하준이 찡그리며 말했다.김상혁이 기회를 놓칠새라 물었다.“어떤 차로 바꾸시게요?”“뒷좌석 천장 높은 거면 돼. 내일 바로 사 와.”“…….”여름은 말문이 막혔다. 있는 사람들이란! ‘나 불편할까 봐 차를 바꾼대! 갈수록 더 맘에 들잖아!’“저녁에 뭐 먹겠습니까?”최하준이 물었다.“날씨가 추워지니 마라탕이 땡기네요. 내가 맛집 하나 알아요.” 최하준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자 여름은 얼른 덧붙였다.“커플 세트로 먹어요, 오늘은”최하준이 여름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마라탕도 무슨 커플을 따져야 합니까? 참.”여름이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음료수까지 나오는 2인용 세트를 커플 세트라고 해요, 매 맛, 안 매운맛 2인분 따로 선택할 수도
“에이, 자기는 가만있어, 내가 건져 줄게.”여름은 속으로 울고 싶었다.‘부럽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예쁜 입술이 불만스러운 듯 살짝 삐죽이고 있었다.“부럽습니까?”“…….”‘다 내 팔자지, 그냥 해주자, 해줘.’음식이 나오자 최하준은 가만히 앉아 여름이 건져주는 걸 집어먹기만 했다.‘마라탕도 먹을 만하군. 다음에 또 와야겠어.’식사를 마치고 여름은 잠시 화장실에 갔다.막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바깥에서 여자 둘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방금 봤어? 26번 테이블 앉아 있던 남자 존잘이야.”“대~박, 웬만한 아이돌 저리 가라야. 난 몰래 사진도 찍음.”“근데 여친은 그냥 평범하던데?”“내 말이, 완전 비굴 모드. 계속 남자한테 음식 집어주고. 그런데 남자는 별로 반응이 없더라?“하긴 저렇게 잘생겼으면 매달릴 만도 하다.”듣고 있던 여름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내가? 평범해? 비굴 모드? 매달려? 선 넘네, 진짜!’여름이 화장실 문을 뻥 차며 나오자 두 여자는 놀라 얼어붙었다.여름은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잘 생겼네, 평범하네, 나 참.”태연하게 예쁜 입술을 칠하고는 도도하게 위아래 입술을 맞부딪히는 여름의 모습은 요염함이 흘러넘쳤다. 두 여자는 순간 난처함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여름이 그런 둘에게 말했다.“멀쩡한 분들이 남 얼평이라니 부끄럽지 않아요?”“아니, 우리끼리 그냥 얘기한 것 같고 뭘 그래요? 사람마다 미적 기준이 다른 거고 평가하는 건 우리 자유인데.”그중 한 사람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말했다.“당신들 평가랑 상관없이 나랑 내 남친은 완전 잘 지내. 그냥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데, 뭐 문제 있니?”여름은 손을 다 씻고 페이퍼타월로 손을 닦은 뒤 ‘흥’ 하고 나갔다.할 말은 다 하고 나왔지만, 기분은 이미 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였다.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게 다 최하준 때문이야. 맨날 대접받으려고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