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원래 눈 좀 붙일 생각이었으나 이모님 말에 닭살이 돋아 잠이 확 깼다.‘울 애기는 무슨….’하지만 최하준이 자신에게 관심 갖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확실히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준다는 느낌은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다음에는 집에 안 들어올 상황이면 선생님께 분명하게 얘기해요. 안 그럼 이상한 생각한다고요.”“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어제도 강여경에게 당할 뻔했다.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구하러 와주는 행운이 늘 따르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하지만 최하준이 한밤중에 도와줄 굉장한 실력자까지 붙여줬었는데 설계도가 넘어간 것이 못내 아쉬웠다.“아, 이모님, 어제 아침 서재에서 나오는 사람 보셨어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나이가 어느 정도 돼 보였어요?”그 정도 설계도를 그리려면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인물이어도 밤새 작업해야 했을 거고 분명 아침에 떠났을 거라고 여름은 생각했다.이모님은어리둥절했다.“어제 아무도 안 왔을 텐데요? 아침 6시에 일어났을 때는 변호사님께서 서재에서 나오셨지요.”“그럼 차가 떠나거나 들어오는 소리는요?”“없었어요, 확실해요.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깊이 못 자거든요. 밖에 누가 왔으면 단박에 알죠.”이모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여름은 완전히 멍해졌다. 어제 새벽 집에 온 사람이 없다면 자신에게 설계 도면을 그려준 사람은 최하준밖에 없다는 뜻이다.하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설계도를 그린단 말인가? 보통 내공의 솜씨가 아니었는데!게다가, 하준은 지금 왼손밖에 쓸 수 없지 않은가?왼손도 잘 못 써서 밥도 자신이 먹여주고 있었는데 말이다.그래, 분명 속은 거다.예전 같으면 아마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테지만, 지금은 생각할수록 어쩐지 달달했다.‘그 사람이 이렇게 연기를 잘할 줄은 몰랐네.시중들어주고 밥 먹여주는 게 그렇게 좋았으면 그냥 말을 하지, 어린애도 아니고, 나 참.’“사모님, 왜 그러세요?”이모님은 여름이 눈을 찌푸리다가 바보
“어디 갔었냐고 물었습니다.”최하준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아주 대담하군요. 내가 하룻밤 자리 비운다고 그새 외박을 하다니 말입니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은 잔뜩 독기가 올라 있었다.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바짝 물러났다.“설마 또 의심하는 거예요?”최하준이 얼어붙더니 쌀쌀맞게 말했다.“지난번에 내가 의심을 안 했으면 지금 당신이 온전히 침대에 누워있을 수 있겠습니까?”여름은 고개를 떨궜다.“어젯밤에 윤서랑 쇼핑하다가 늦어져서 뭘 좀 먹었어요. 그리고 노래방 갔는데 노래하다 지쳐서 소파에서 그대로 잤어요. 깨어난 뒤 바로 온 거구요.”“다 사실입니까?”최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미안할 짓 한 거 없어요, 뭐”여름은 입을 삐죽이 내밀고 불쌍한 척을 했다.“너무 답답해서 그래요. 이제 겨우 스물넷인데 쭌이랑 결혼한 뒤로 노래방 한 번 못 가지, 맛난 거 먹으러 나가지도 못하지, 맨날 퇴근하면 칼같이 집에 와 밥했잖아요. 이게 뭐야?”최하준은 불쾌해 보였다.“그러니까 지금 사는 게 재미없다고 나한테 불평하는 겁니까?”“아,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여름은 재빨리 대답했다.“하지만 사람이 숨 쉴 틈은 좀 있어야죠. 지훈 씨한테 한 번 물어봐요, 내 말이 틀리나.”“내가 왜 그 녀석한테 물어봐야 합니까? 이지훈이 당신을 그렇게 잘 압니까?”“그런 게 아니라, 그분도 노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여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역시 우리 쭌 같은 사람을 만나야지. 생활 습관이 얼마나 반듯해요? 그냥 교과서 같잖아.”“진심입니까?”최하준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흠잡을 데 없이 준수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다가왔다.최하준의 시선에 여름은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해 얼른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난 거짓말을 못 해요, 원래.”“눈감아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최하준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름의 볼을 꼬집었다. 이 여자 앞에서는 자꾸만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리곤 했다.여름은 얼얼한 코
“…….”세상에나!감히 귀를 잡아당기다니. 세게 잡아당긴 게 아니었는데도 찌릿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강여름 씨, 뭐 하는 겁니까?”최하준이 무표정하게 노려봤다.여름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여름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내키는 대로 한 번만 해보자. 혹시나 착각이라면 일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연기해야 하면 하는 거지 뭐.’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알아요. 우린 계약 관계라는 거. 하지만 계약 관계면서 당신처럼 상대가 24시간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하고, 위험에 처한다고 구해주고 그러지는 않는 것 같은데. 일이 많다고 몰래 도와주기까지 하고.그리고, 왼손도 멀쩡하면서 밥도 먹여달라고 하지,귀찮으면 그냥 시키면 될 걸 굳이 거짓말까지 하고, 찔린 거죠?”여름이 고개를 들어 최하준을 바라보았다.“날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나도 쭌이 좋아요.”여름의 맑고 깨끗한 눈에 남자의 실루엣이 비췄다.처음엔 그저 민망해서 그랬다. 너무나 민망했다.그동안 속으로만 생각해오던 것들을 이렇게 다 들키게 될 줄은 몰랐다.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자,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여름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왜일까, 오늘 들은 말은 유독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너무나 기뻤다.하지만 최하준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여름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휴우, 아무 반응이 없네. 혼자 착각이었나 봐.’“안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부턴 안 물어볼게요. 난 세수하러 가요.”여름이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최하준은 여름의 가녀린 뒷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사뭇 실망하고 침울한 모습이었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이 사람의 마음이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질 것 같았다.“날 괴롭히려고 하늘에서 보낸 요정입니까?”‘하아’ 괴로운 듯 한숨을 쉬더니 최하준은 여름을 와락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다음 날.아침밥을 먹고 최하준이 출근 준비를 하는데 여름이 팔을 붙들었다.“나 오늘 운전하기 싫어요, 쭌 차 타고 갈래요.”최하준이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 직장은 완전히 반대쪽이었고 오늘은 회의도 있었다.‘정말 귀찮군. 좀 편해졌다 이건가?’“당신 차 있지 않습니까?”“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요.”여름이 최하준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최하준은 ‘아~ 귀찮아’ 눈빛을 시전하더니 말했다.“갑시다.”여름은 신이 났다.사실 그냥 자신을 지하철역 앞에 떨구고 가지 않는 기분을 누리고 싶었을 뿐이다. 엄청난 노력 끝에 마침내 이 사람을 ‘내 남자’로 만들었으니 말이다.최하준은 손을 다쳐서 요즘 김상혁이 계속 운전을 해주고 있었다.아침 출근 시간엔 차가 너무 많이 막혔다.김상혁은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최하준은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최하준은 미간을 문지르며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가며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한 걸 후회하는 중이었다. 그냥 택시나 불러줄걸.“급할 거 뭐 있어요?”여름은 왼손을 최하준이 손등에 올려놓았다.“차가 막히는 바람에 더 오래 같이 있겠네.”장난스럽게 최하준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온통 최하준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초조하던 최하준의 마음이 순식간에 평온해졌다.눈썹이 펴지더니 ‘으흠’ 하며 얼굴을 돌렸지만, 입꼬리는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정말 답 없는 사람이라니까.”‘저저 츤데레 말투.’운전대를 잡은 김상혁이 손이 부들거렸다. 엄근진 최하준이 연애를 시작하니 정말이지 딴 사람 같았다.‘그러고 보니, 두 분 갑자기 사이가 너무 좋아졌잖아!’자신이 훼방꾼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8시 40분, 차가 회사 입구에 섰다.여름이 차 문을 열고 내리려 하는데 최하준이 말했다.“어제 옷 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새 옷을 안 입었습니까?”“…….”‘새 옷은 쇼핑몰에 있겠죠.’여름은 그래도 둘러댈 말을 찾았다.“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요. 마음에 드는 건
“내가 다 알아봤어. 이거면 충분할 거야. 여름아, 난 네가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 전에는 내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배신했지만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게.”최근 한선우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여름이 다른 남자에게 매여있지만 탓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 자신이 못난 탓이니까.여름은 복잡한 표정으로 카드를 돌려줬다.“오빠 돈 필요 없어.”“여름아.”한선우는 초조해졌다. “설마 계속 그 사람 옆에 있으려는 건 아니지?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날 그 인간 얼굴 너도 봤잖아. 널 존중하지도 않고 그냥 소유물 취급하는 거야.”“안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날은 그냥 화가 많이 났던 것뿐이야.”“그 녀석 편을 드는 거야?!”놀란 한선우의 말투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아직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거지? 복수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내 말 들어. 그 사람이랑 관계 끊고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난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 갈 수도 있어, 여름아.”“한선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미쳤어?!”양수영이 갑자기 뛰어와 여름이 손에서 카드를 뺏고는 ‘철썩’ 한선우의 등을 때렸다.“지금 우리 상황 뻔히 알면서 쟤한테 그 큰 돈을 줘? 정말 미쳤니?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네가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엄마”한선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여름이야말로 저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쟤 이제 빈털터리잖니, 너한테 도움이 안 돼.”양수영이 울며 말했다.“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올 생각은커녕 허구한날 그 불여우 같은 여자한테 가 있고, 너는 회사에서 인정도 못 받고, 내가 무슨 낙으로 사니! 너 쟤랑 결혼하면 이제 일어설 기회는 다시 없는 거야!”한선우는 주먹을 꼭 쥐었다. 괴로움에 얼굴은 일그러졌다. “한주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택하는 삶은 이제 원치 않아요.”“흥, 너 전에 여경이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혼하려고 했잖니?”
로펌 대표인 이지훈이 못마땅한 듯 비꼬았다.“최 변, 일찍 오십니다?”최하준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네.”잠긴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반어법인 거 모르냐? 로펌 변호사들 다 있는 자리에서 꼭 그래야겠냐?’“회의 계속하시죠.”최하준이 거만하게 턱을 살짝 들어 올리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꺼내어 보니 여름에게서 톡이 와있었다.-회사 도착했어요?최하준의 입이 귀에 걸렸다.-네.춘 사월 봄바람이라도 맞는 듯 최하준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사무실 안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헐!’늘 차갑고 근엄한 최 변호사가 누구랑 대화하길래 저렇게 입이 귀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지훈도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OK, 이번 주 회의는 여기까지! 다음 주 계속 열심히 합시다!” “…….”분명 방금 실적 올릴 방안을 논의하자더니, 정말 책임감이라곤 없는 대표였다.변호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최하준도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이지훈이 앞을 막아 섰다.“누구랑 얘기하는데 그렇게 웃으면서 좋아 죽어?”‘좋아 죽어???’최하준이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그렇게 웃었다고? 그럴 리가!’“설마 여름 씨는 아니겠지?”이지훈이 눈에 힘을 줬다.“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긴 것 같은데.”최하준이 쏘아보았다. 모처럼 기분 좋은데 이 녀석하고 말다툼이라니.“응, 어제 나한테 고백했어.”“고백은 매일 하지 않았어?”이지훈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고백이라니, 그런 여친 하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 싶었다.최하준은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응,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안 들어주면 그만 안 둘 태세여서 어쩔 수 없이 받아줬지.”이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맙소사, 최하준, 네 그 우쭐한 표정 어쩔래? 아주 신나 죽는구나.’“드디어, 축하축하! 나한테 감사하라고. 내가 널 동성으로 안 불렀음 여름 씨를 만날 수나 있었겠어?”“감사해?”최하준이 정색했다.“다
“오늘은 안 되고, 나중에.”최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놀랍게도 수락했다. ‘까짓거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한다면 한 번 가주지 뭐.’******저녁 5시 반.여름이 내려와 흰색 승용차에 올랐다.최하준은 차 안에서 소송자료를 보는 중이었다. 옆에서 보니 기다란 속눈썹에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까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여름은 잘생긴 사람이 좋았다.아니었다면 한선우와 사귀지도 않았을 거다. 한선우는 동성에서 손에 꼽히는 훈남이었다. 다만 최하준과 비교하면 분위기든 비주얼이든 조금씩 밀릴 뿐이다. 갈수록 한선우가 눈에 안 들어오고 양유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도 그럴 만했다. “쭌, 나 좀 봐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여름이 다가가 최하준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업무 중입니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여름은 차에 타자마자 코트를 벗었다. 타이트한 베이직 상의를 입고 있었다. 너무 타이트한 핏에 순간 당황한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방해했구나. 계속 일 봐요.” “…….” ‘이미 집중 안 되게 만들어 놓고 뭘 보라는 거야?’그냥 서류를 내려놓고 여름을 안아 무릎에 앉혔다. 여름의 머리가 차 천장에 닿았다. “차를 바꿔야겠군.”최하준이 찡그리며 말했다.김상혁이 기회를 놓칠새라 물었다.“어떤 차로 바꾸시게요?”“뒷좌석 천장 높은 거면 돼. 내일 바로 사 와.”“…….”여름은 말문이 막혔다. 있는 사람들이란! ‘나 불편할까 봐 차를 바꾼대! 갈수록 더 맘에 들잖아!’“저녁에 뭐 먹겠습니까?”최하준이 물었다.“날씨가 추워지니 마라탕이 땡기네요. 내가 맛집 하나 알아요.” 최하준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자 여름은 얼른 덧붙였다.“커플 세트로 먹어요, 오늘은”최하준이 여름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마라탕도 무슨 커플을 따져야 합니까? 참.”여름이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음료수까지 나오는 2인용 세트를 커플 세트라고 해요, 매 맛, 안 매운맛 2인분 따로 선택할 수도
“에이, 자기는 가만있어, 내가 건져 줄게.”여름은 속으로 울고 싶었다.‘부럽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예쁜 입술이 불만스러운 듯 살짝 삐죽이고 있었다.“부럽습니까?”“…….”‘다 내 팔자지, 그냥 해주자, 해줘.’음식이 나오자 최하준은 가만히 앉아 여름이 건져주는 걸 집어먹기만 했다.‘마라탕도 먹을 만하군. 다음에 또 와야겠어.’식사를 마치고 여름은 잠시 화장실에 갔다.막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바깥에서 여자 둘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방금 봤어? 26번 테이블 앉아 있던 남자 존잘이야.”“대~박, 웬만한 아이돌 저리 가라야. 난 몰래 사진도 찍음.”“근데 여친은 그냥 평범하던데?”“내 말이, 완전 비굴 모드. 계속 남자한테 음식 집어주고. 그런데 남자는 별로 반응이 없더라?“하긴 저렇게 잘생겼으면 매달릴 만도 하다.”듣고 있던 여름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내가? 평범해? 비굴 모드? 매달려? 선 넘네, 진짜!’여름이 화장실 문을 뻥 차며 나오자 두 여자는 놀라 얼어붙었다.여름은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잘 생겼네, 평범하네, 나 참.”태연하게 예쁜 입술을 칠하고는 도도하게 위아래 입술을 맞부딪히는 여름의 모습은 요염함이 흘러넘쳤다. 두 여자는 순간 난처함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여름이 그런 둘에게 말했다.“멀쩡한 분들이 남 얼평이라니 부끄럽지 않아요?”“아니, 우리끼리 그냥 얘기한 것 같고 뭘 그래요? 사람마다 미적 기준이 다른 거고 평가하는 건 우리 자유인데.”그중 한 사람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말했다.“당신들 평가랑 상관없이 나랑 내 남친은 완전 잘 지내. 그냥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데, 뭐 문제 있니?”여름은 손을 다 씻고 페이퍼타월로 손을 닦은 뒤 ‘흥’ 하고 나갔다.할 말은 다 하고 나왔지만, 기분은 이미 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였다.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게 다 최하준 때문이야. 맨날 대접받으려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