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 알아봤어. 이거면 충분할 거야. 여름아, 난 네가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 전에는 내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배신했지만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게.”최근 한선우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여름이 다른 남자에게 매여있지만 탓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 자신이 못난 탓이니까.여름은 복잡한 표정으로 카드를 돌려줬다.“오빠 돈 필요 없어.”“여름아.”한선우는 초조해졌다. “설마 계속 그 사람 옆에 있으려는 건 아니지?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날 그 인간 얼굴 너도 봤잖아. 널 존중하지도 않고 그냥 소유물 취급하는 거야.”“안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날은 그냥 화가 많이 났던 것뿐이야.”“그 녀석 편을 드는 거야?!”놀란 한선우의 말투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아직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거지? 복수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내 말 들어. 그 사람이랑 관계 끊고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난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 갈 수도 있어, 여름아.”“한선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미쳤어?!”양수영이 갑자기 뛰어와 여름이 손에서 카드를 뺏고는 ‘철썩’ 한선우의 등을 때렸다.“지금 우리 상황 뻔히 알면서 쟤한테 그 큰 돈을 줘? 정말 미쳤니?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네가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엄마”한선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여름이야말로 저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쟤 이제 빈털터리잖니, 너한테 도움이 안 돼.”양수영이 울며 말했다.“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올 생각은커녕 허구한날 그 불여우 같은 여자한테 가 있고, 너는 회사에서 인정도 못 받고, 내가 무슨 낙으로 사니! 너 쟤랑 결혼하면 이제 일어설 기회는 다시 없는 거야!”한선우는 주먹을 꼭 쥐었다. 괴로움에 얼굴은 일그러졌다. “한주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택하는 삶은 이제 원치 않아요.”“흥, 너 전에 여경이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혼하려고 했잖니?”
로펌 대표인 이지훈이 못마땅한 듯 비꼬았다.“최 변, 일찍 오십니다?”최하준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네.”잠긴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반어법인 거 모르냐? 로펌 변호사들 다 있는 자리에서 꼭 그래야겠냐?’“회의 계속하시죠.”최하준이 거만하게 턱을 살짝 들어 올리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꺼내어 보니 여름에게서 톡이 와있었다.-회사 도착했어요?최하준의 입이 귀에 걸렸다.-네.춘 사월 봄바람이라도 맞는 듯 최하준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사무실 안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헐!’늘 차갑고 근엄한 최 변호사가 누구랑 대화하길래 저렇게 입이 귀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지훈도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OK, 이번 주 회의는 여기까지! 다음 주 계속 열심히 합시다!” “…….”분명 방금 실적 올릴 방안을 논의하자더니, 정말 책임감이라곤 없는 대표였다.변호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최하준도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이지훈이 앞을 막아 섰다.“누구랑 얘기하는데 그렇게 웃으면서 좋아 죽어?”‘좋아 죽어???’최하준이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그렇게 웃었다고? 그럴 리가!’“설마 여름 씨는 아니겠지?”이지훈이 눈에 힘을 줬다.“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긴 것 같은데.”최하준이 쏘아보았다. 모처럼 기분 좋은데 이 녀석하고 말다툼이라니.“응, 어제 나한테 고백했어.”“고백은 매일 하지 않았어?”이지훈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고백이라니, 그런 여친 하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 싶었다.최하준은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응,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안 들어주면 그만 안 둘 태세여서 어쩔 수 없이 받아줬지.”이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맙소사, 최하준, 네 그 우쭐한 표정 어쩔래? 아주 신나 죽는구나.’“드디어, 축하축하! 나한테 감사하라고. 내가 널 동성으로 안 불렀음 여름 씨를 만날 수나 있었겠어?”“감사해?”최하준이 정색했다.“다
“오늘은 안 되고, 나중에.”최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놀랍게도 수락했다. ‘까짓거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한다면 한 번 가주지 뭐.’******저녁 5시 반.여름이 내려와 흰색 승용차에 올랐다.최하준은 차 안에서 소송자료를 보는 중이었다. 옆에서 보니 기다란 속눈썹에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까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여름은 잘생긴 사람이 좋았다.아니었다면 한선우와 사귀지도 않았을 거다. 한선우는 동성에서 손에 꼽히는 훈남이었다. 다만 최하준과 비교하면 분위기든 비주얼이든 조금씩 밀릴 뿐이다. 갈수록 한선우가 눈에 안 들어오고 양유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도 그럴 만했다. “쭌, 나 좀 봐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여름이 다가가 최하준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업무 중입니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여름은 차에 타자마자 코트를 벗었다. 타이트한 베이직 상의를 입고 있었다. 너무 타이트한 핏에 순간 당황한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방해했구나. 계속 일 봐요.” “…….” ‘이미 집중 안 되게 만들어 놓고 뭘 보라는 거야?’그냥 서류를 내려놓고 여름을 안아 무릎에 앉혔다. 여름의 머리가 차 천장에 닿았다. “차를 바꿔야겠군.”최하준이 찡그리며 말했다.김상혁이 기회를 놓칠새라 물었다.“어떤 차로 바꾸시게요?”“뒷좌석 천장 높은 거면 돼. 내일 바로 사 와.”“…….”여름은 말문이 막혔다. 있는 사람들이란! ‘나 불편할까 봐 차를 바꾼대! 갈수록 더 맘에 들잖아!’“저녁에 뭐 먹겠습니까?”최하준이 물었다.“날씨가 추워지니 마라탕이 땡기네요. 내가 맛집 하나 알아요.” 최하준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자 여름은 얼른 덧붙였다.“커플 세트로 먹어요, 오늘은”최하준이 여름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마라탕도 무슨 커플을 따져야 합니까? 참.”여름이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음료수까지 나오는 2인용 세트를 커플 세트라고 해요, 매 맛, 안 매운맛 2인분 따로 선택할 수도
“에이, 자기는 가만있어, 내가 건져 줄게.”여름은 속으로 울고 싶었다.‘부럽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예쁜 입술이 불만스러운 듯 살짝 삐죽이고 있었다.“부럽습니까?”“…….”‘다 내 팔자지, 그냥 해주자, 해줘.’음식이 나오자 최하준은 가만히 앉아 여름이 건져주는 걸 집어먹기만 했다.‘마라탕도 먹을 만하군. 다음에 또 와야겠어.’식사를 마치고 여름은 잠시 화장실에 갔다.막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바깥에서 여자 둘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방금 봤어? 26번 테이블 앉아 있던 남자 존잘이야.”“대~박, 웬만한 아이돌 저리 가라야. 난 몰래 사진도 찍음.”“근데 여친은 그냥 평범하던데?”“내 말이, 완전 비굴 모드. 계속 남자한테 음식 집어주고. 그런데 남자는 별로 반응이 없더라?“하긴 저렇게 잘생겼으면 매달릴 만도 하다.”듣고 있던 여름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내가? 평범해? 비굴 모드? 매달려? 선 넘네, 진짜!’여름이 화장실 문을 뻥 차며 나오자 두 여자는 놀라 얼어붙었다.여름은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잘 생겼네, 평범하네, 나 참.”태연하게 예쁜 입술을 칠하고는 도도하게 위아래 입술을 맞부딪히는 여름의 모습은 요염함이 흘러넘쳤다. 두 여자는 순간 난처함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여름이 그런 둘에게 말했다.“멀쩡한 분들이 남 얼평이라니 부끄럽지 않아요?”“아니, 우리끼리 그냥 얘기한 것 같고 뭘 그래요? 사람마다 미적 기준이 다른 거고 평가하는 건 우리 자유인데.”그중 한 사람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말했다.“당신들 평가랑 상관없이 나랑 내 남친은 완전 잘 지내. 그냥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데, 뭐 문제 있니?”여름은 손을 다 씻고 페이퍼타월로 손을 닦은 뒤 ‘흥’ 하고 나갔다.할 말은 다 하고 나왔지만, 기분은 이미 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였다.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게 다 최하준 때문이야. 맨날 대접받으려고만
-이지훈: ‘그날’일 거야.-송영식: 여자들이란 정말, 화낼 거리가 왜 그렇게 많냐고.-이주혁: 그냥 닥치고 쇼핑 고고고!최하준은 더욱 답답해졌다.쇼핑몰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름은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 대충 훑어보고 또 아무거나 몇 벌 집어 대충 본 뒤 다시 내려놓곤 했다.최하준이 판매원에게 말했다.“저 사람이 건드렸던 옷 다 주십시오.”여름이 놀라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 그냥 보기만 한 건데.”“괜찮아 보이면 다 사요.”거절이나 반박을 원천봉쇄하는 말투였다.“사고 싶은 건 다 사야 합니다.” 판매원이 부러워하며 말했다.“와, 남자친구 분 정말 좋으세요.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통 크신 분은 처음 봐요.”여름도 멍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훤칠한 이 남자를 보니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방금까지 화가 나 있던 감정도 미안하게 느껴졌다.그렇다. 최하준이 무뚝뚝하고 다른 사람 눈에 그녀가 비굴해 보일지 몰라도 남녀 사이의 일은 마음으로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다.“됐어요. 몇 벌만 고르면 돼요.”여름은 고개를 흔들고는 결국 진지하게 몇 벌을 골랐다. 몸매가 여리여리하고 피부가 하얘서 뭘 입어도 예뻤다.최하준은 결국 몽땅 계산해버렸고, 여름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여기 옷 다 엄청 비싼데.’여름은 최하준의 팔을 붙들고 말렸다.“그렇게 많이 살 필요 없어요.”“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면 됐습니다.”최하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감동한 여름은 까치발을 하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자신도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주혁이 녀석 의견이 효과가 있는 거였군. 여자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무조건 다 사주면 되는 거였어.’******다음 날.여름은 새로 산 옷을 입고 W팰리스 공사 현장에 갔다.공사는 벌써 시멘트 작업 단계까지 진전돼 있었다. 한 번 둘러본 후 현장 작업자와 이야기하는데 양유진이 걸어왔다. “여름 씨, 옷 새로 샀어요? 예쁘네요.”“네.”최
여름이 말리려는데 양유진이 바로 말을 끊었다.“병원 수속이 복잡해서 혼자서 하려면 정신없을 거예요. 오빠가 여동생 일에 나 몰라라 할 수 있나요? 지금 이거저거 가릴 때인가요?”여름은 너무나 급해서 더 거절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하니 응급실 입구에서 누군가 소리치고 있었다.“여기 방현주 씨 보호자 되시는 분, 수납처에서 진료비 납부하시고 약 받아가세요!”“저예요, 저!”여름이 후다닥 달려갔다.“선생님, 이분 상태가 어떠신가요?”“급성 뇌경색입니다. 바로 수술받으셔야 하니, 바로 수속 밟아주세요.” 간호사가 그녀의 손에 명세서를 쥐여주었다.여름이 아래층에서 수납하고 올라오니 수술은 이미 시작돼 있었다. “내가 이 병원 과장을 알아요. 방금 전화해서 일찍 수술 시작하게 했어요.”“고맙습니다.”정말 고마웠다. 세 시간 후, 수술은 끝났다. 수술실에서 나온 현주 이모의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예전에 할머니 댁에서 일하던 현주 이모는 건강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건 물론이고 뺨도 움푹 패어 있었다.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오후 5시, 이모님이 깨어났다. 이모님은 여름을 보자마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아이고 아가씨,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이제 아가씨라고 안 부르셔도 돼요.”여름은 씁쓸히 웃었다. “아니에요, 아가씨는 영원히….”“이모, 저도 다 알아요. 저 강 씨 집안 자식 아니잖아요. 저 입양됐다면서요. 이모는 할머니를 수십 년 간 모셨으니 다 아실 거 아녜요?”“누가 그래요?!”현주 이모는 감정이 격해졌다.“아가씨는 강 씨 집안 사람이에요!”여름은 멍해졌다. “강여경이 그랬어요. 그리고 제가 친딸이라면 차마 그런 짓은 못 했겠죠.”“아이고, 불쌍한 아가씨, 정말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네.”현주 이모는 연달아 기침했다.“날 내쫓은 것도 모자라서 아가씨한테 그렇게 얘기하다니, 할아버님 할머님께 약속한 것도 잊었나 봐요.”“이모, 쫓겨나셨다
여름은 너무 놀라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그러니까 TH가 도산하니 얼른 손을 써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하고 화신의 지분을 차지했다는 거야?’“그, 그럴 리가요. 친어머니를 어떻게….”양유진이 말했다.“강태환 회장은 평생을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진 걸 잃지 않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여름 씨는 잘 모르나 보네요. 역사에서 권력 계승을 위해 친형제끼리 상잔을 벌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어요. 할머니께선 중풍까지 앓고 계셨으니 그 사람에겐 그저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현주 이모가 끄덕였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중풍에 걸리신 것도 우연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날 여경 씨가 플럼가든에 왔는데 위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돼서 할머니께서 갑자기 계단 아래로 떨어지셨단 말예요. 여경 씨는 실족하신 거라고 그랬지만 어르신이 얼마나 건강하셨는데요.”여름이 고개를 홱 들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악독할 수가 있는 걸까, 할머니한테마저 마수를 뻗쳤다니!’“아마 어디선가 아가씨랑 화신 관계에 대해 들은 거겠죠. 강 회장 친딸이 아니란 것도요.”“저한테 좀 일찍 얘기해 주지 그러셨어요.”“그러고 싶었죠. 하지만 최근에 그 집안 사람들이 사람 풀어 날 찾으려고 혈안이었어요. 아마 나머지 30퍼센트 지분 때문이거나 내 입을 막으려는 걸 거예요. 그래서 내내 죽은 듯이 숨어 지냈죠.”현주 이모가 여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화신 주주 중에 정호중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강신희 회장이 도움을 크게 준 사람이에요. 그 사람 찾아가면 무언가 줄 거예요.”여름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아버지가 누군지 아세요?”이모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에휴, 그건 잘 몰라요. 하지만 서울 사람인 것 같았고 집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요.”여름의 눈이 빛났다.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하지만 왜 엄마와 나를 버린 걸까? 아마 지금은 결혼해 아이도
최하준은 화내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였다.그동안 여름을 너무 방임했던 탓이다. 겉으로만 따르는 척하며 밖에선 제멋대로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내가 자기 아니면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통화는 그렇게 끝났다.여름이 핸드폰을 보며 멍하니 있는데 양유진이 다가왔다.“최 변 전화 아니에요? 문병 온다고 해요? 그럼 난 먼저 갈게요, 괜히 오해 사지 않게.”“아뇨, 온다는 말 없었어요.”여름은 갑자기 뭔가 꺼림칙하다고 느꼈다. 그렇다, 병문안 온다는 말은 없었다. 양유진 눈이 반짝이더니 웃었다.“하긴, 친인척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죠. 방금 의사 선생님께는 잘 얘기해 놨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고맙습니다.” 여름은 너무 감사했다. 양유진이 없었다면 오늘 다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최하준에게 부탁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방금 쌀쌀한 태도를 보니 여기 올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괜찮아요. 난 그럼 가볼게요.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요.”양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도움도 적당해야지, 지나치면 경계심만 높아진다는 것을.“네.”여름은 양유진을 입구까지 배웅했다.9시 반이 될 때까지 최하준은 전화 한 통 없었다.간병인이 오자, 여름은 운전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엔 지오가 새끼들과 뒹굴거리고 있었고, 이모님은 TV를 보고 있었다.“하준 씨는요?”이모님이 놀라 말했다.“어머나, 말씀 안 하셨어요? 변호사님이 저녁에 전화해서는 서울에 출장 가신다던데요. 이번에도 며칠 계실 건가 봐요.”여름은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몰랐다.갑자기 화가 났다.‘남친이란 사람이 내 지인이 입원했다는데 관심도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출장 가는 것조차 말을 안 해? 뭐 하자는 거지?’올라가서 전화를 걸었다.전화 연결이 되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주점이나 노래방 같았다.“어디예요? 출장 간 거 아니에요?”-네.목소리가 쌔했다.“출장 간다고 왜 말 안 했어요?”-내가 어디 가는지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합니까?여름은 찬물을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