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 알아봤어. 이거면 충분할 거야. 여름아, 난 네가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 전에는 내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배신했지만 앞으로 내가 널 지켜줄게.”최근 한선우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여름이 다른 남자에게 매여있지만 탓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 자신이 못난 탓이니까.여름은 복잡한 표정으로 카드를 돌려줬다.“오빠 돈 필요 없어.”“여름아.”한선우는 초조해졌다. “설마 계속 그 사람 옆에 있으려는 건 아니지?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날 그 인간 얼굴 너도 봤잖아. 널 존중하지도 않고 그냥 소유물 취급하는 거야.”“안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날은 그냥 화가 많이 났던 것뿐이야.”“그 녀석 편을 드는 거야?!”놀란 한선우의 말투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아직 나한테 화가 나 있는 거지? 복수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아니야. 내 말 들어. 그 사람이랑 관계 끊고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야. 난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 갈 수도 있어, 여름아.”“한선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미쳤어?!”양수영이 갑자기 뛰어와 여름이 손에서 카드를 뺏고는 ‘철썩’ 한선우의 등을 때렸다.“지금 우리 상황 뻔히 알면서 쟤한테 그 큰 돈을 줘? 정말 미쳤니?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네가 재기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엄마”한선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여름이야말로 저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에요.”“쟤 이제 빈털터리잖니, 너한테 도움이 안 돼.”양수영이 울며 말했다.“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올 생각은커녕 허구한날 그 불여우 같은 여자한테 가 있고, 너는 회사에서 인정도 못 받고, 내가 무슨 낙으로 사니! 너 쟤랑 결혼하면 이제 일어설 기회는 다시 없는 거야!”한선우는 주먹을 꼭 쥐었다. 괴로움에 얼굴은 일그러졌다. “한주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택하는 삶은 이제 원치 않아요.”“흥, 너 전에 여경이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결혼하려고 했잖니?”
로펌 대표인 이지훈이 못마땅한 듯 비꼬았다.“최 변, 일찍 오십니다?”최하준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네.”잠긴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반어법인 거 모르냐? 로펌 변호사들 다 있는 자리에서 꼭 그래야겠냐?’“회의 계속하시죠.”최하준이 거만하게 턱을 살짝 들어 올리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꺼내어 보니 여름에게서 톡이 와있었다.-회사 도착했어요?최하준의 입이 귀에 걸렸다.-네.춘 사월 봄바람이라도 맞는 듯 최하준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사무실 안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헐!’늘 차갑고 근엄한 최 변호사가 누구랑 대화하길래 저렇게 입이 귀에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이지훈도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OK, 이번 주 회의는 여기까지! 다음 주 계속 열심히 합시다!” “…….”분명 방금 실적 올릴 방안을 논의하자더니, 정말 책임감이라곤 없는 대표였다.변호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최하준도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이지훈이 앞을 막아 섰다.“누구랑 얘기하는데 그렇게 웃으면서 좋아 죽어?”‘좋아 죽어???’최하준이 얼굴을 찡그렸다.‘내가 그렇게 웃었다고? 그럴 리가!’“설마 여름 씨는 아니겠지?”이지훈이 눈에 힘을 줬다.“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생긴 것 같은데.”최하준이 쏘아보았다. 모처럼 기분 좋은데 이 녀석하고 말다툼이라니.“응, 어제 나한테 고백했어.”“고백은 매일 하지 않았어?”이지훈은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고백이라니, 그런 여친 하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 싶었다.최하준은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응,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안 들어주면 그만 안 둘 태세여서 어쩔 수 없이 받아줬지.”이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맙소사, 최하준, 네 그 우쭐한 표정 어쩔래? 아주 신나 죽는구나.’“드디어, 축하축하! 나한테 감사하라고. 내가 널 동성으로 안 불렀음 여름 씨를 만날 수나 있었겠어?”“감사해?”최하준이 정색했다.“다
“오늘은 안 되고, 나중에.”최하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놀랍게도 수락했다. ‘까짓거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한다면 한 번 가주지 뭐.’******저녁 5시 반.여름이 내려와 흰색 승용차에 올랐다.최하준은 차 안에서 소송자료를 보는 중이었다. 옆에서 보니 기다란 속눈썹에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까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여름은 잘생긴 사람이 좋았다.아니었다면 한선우와 사귀지도 않았을 거다. 한선우는 동성에서 손에 꼽히는 훈남이었다. 다만 최하준과 비교하면 분위기든 비주얼이든 조금씩 밀릴 뿐이다. 갈수록 한선우가 눈에 안 들어오고 양유진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도 그럴 만했다. “쭌, 나 좀 봐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여름이 다가가 최하준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업무 중입니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여름은 차에 타자마자 코트를 벗었다. 타이트한 베이직 상의를 입고 있었다. 너무 타이트한 핏에 순간 당황한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방해했구나. 계속 일 봐요.” “…….” ‘이미 집중 안 되게 만들어 놓고 뭘 보라는 거야?’그냥 서류를 내려놓고 여름을 안아 무릎에 앉혔다. 여름의 머리가 차 천장에 닿았다. “차를 바꿔야겠군.”최하준이 찡그리며 말했다.김상혁이 기회를 놓칠새라 물었다.“어떤 차로 바꾸시게요?”“뒷좌석 천장 높은 거면 돼. 내일 바로 사 와.”“…….”여름은 말문이 막혔다. 있는 사람들이란! ‘나 불편할까 봐 차를 바꾼대! 갈수록 더 맘에 들잖아!’“저녁에 뭐 먹겠습니까?”최하준이 물었다.“날씨가 추워지니 마라탕이 땡기네요. 내가 맛집 하나 알아요.” 최하준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자 여름은 얼른 덧붙였다.“커플 세트로 먹어요, 오늘은”최하준이 여름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마라탕도 무슨 커플을 따져야 합니까? 참.”여름이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음료수까지 나오는 2인용 세트를 커플 세트라고 해요, 매 맛, 안 매운맛 2인분 따로 선택할 수도
“에이, 자기는 가만있어, 내가 건져 줄게.”여름은 속으로 울고 싶었다.‘부럽다.’최하준이 힐끗 보니 예쁜 입술이 불만스러운 듯 살짝 삐죽이고 있었다.“부럽습니까?”“…….”‘다 내 팔자지, 그냥 해주자, 해줘.’음식이 나오자 최하준은 가만히 앉아 여름이 건져주는 걸 집어먹기만 했다.‘마라탕도 먹을 만하군. 다음에 또 와야겠어.’식사를 마치고 여름은 잠시 화장실에 갔다.막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바깥에서 여자 둘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방금 봤어? 26번 테이블 앉아 있던 남자 존잘이야.”“대~박, 웬만한 아이돌 저리 가라야. 난 몰래 사진도 찍음.”“근데 여친은 그냥 평범하던데?”“내 말이, 완전 비굴 모드. 계속 남자한테 음식 집어주고. 그런데 남자는 별로 반응이 없더라?“하긴 저렇게 잘생겼으면 매달릴 만도 하다.”듣고 있던 여름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내가? 평범해? 비굴 모드? 매달려? 선 넘네, 진짜!’여름이 화장실 문을 뻥 차며 나오자 두 여자는 놀라 얼어붙었다.여름은 두 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잘 생겼네, 평범하네, 나 참.”태연하게 예쁜 입술을 칠하고는 도도하게 위아래 입술을 맞부딪히는 여름의 모습은 요염함이 흘러넘쳤다. 두 여자는 순간 난처함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여름이 그런 둘에게 말했다.“멀쩡한 분들이 남 얼평이라니 부끄럽지 않아요?”“아니, 우리끼리 그냥 얘기한 것 같고 뭘 그래요? 사람마다 미적 기준이 다른 거고 평가하는 건 우리 자유인데.”그중 한 사람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 말했다.“당신들 평가랑 상관없이 나랑 내 남친은 완전 잘 지내. 그냥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데, 뭐 문제 있니?”여름은 손을 다 씻고 페이퍼타월로 손을 닦은 뒤 ‘흥’ 하고 나갔다.할 말은 다 하고 나왔지만, 기분은 이미 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였다.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이게 다 최하준 때문이야. 맨날 대접받으려고만
-이지훈: ‘그날’일 거야.-송영식: 여자들이란 정말, 화낼 거리가 왜 그렇게 많냐고.-이주혁: 그냥 닥치고 쇼핑 고고고!최하준은 더욱 답답해졌다.쇼핑몰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름은 쇼핑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 대충 훑어보고 또 아무거나 몇 벌 집어 대충 본 뒤 다시 내려놓곤 했다.최하준이 판매원에게 말했다.“저 사람이 건드렸던 옷 다 주십시오.”여름이 놀라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 그냥 보기만 한 건데.”“괜찮아 보이면 다 사요.”거절이나 반박을 원천봉쇄하는 말투였다.“사고 싶은 건 다 사야 합니다.” 판매원이 부러워하며 말했다.“와, 남자친구 분 정말 좋으세요.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통 크신 분은 처음 봐요.”여름도 멍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훤칠한 이 남자를 보니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방금까지 화가 나 있던 감정도 미안하게 느껴졌다.그렇다. 최하준이 무뚝뚝하고 다른 사람 눈에 그녀가 비굴해 보일지 몰라도 남녀 사이의 일은 마음으로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다.“됐어요. 몇 벌만 고르면 돼요.”여름은 고개를 흔들고는 결국 진지하게 몇 벌을 골랐다. 몸매가 여리여리하고 피부가 하얘서 뭘 입어도 예뻤다.최하준은 결국 몽땅 계산해버렸고, 여름은 옷을 갈아입고 나온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여기 옷 다 엄청 비싼데.’여름은 최하준의 팔을 붙들고 말렸다.“그렇게 많이 살 필요 없어요.”“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면 됐습니다.”최하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감동한 여름은 까치발을 하고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자신도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주혁이 녀석 의견이 효과가 있는 거였군. 여자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무조건 다 사주면 되는 거였어.’******다음 날.여름은 새로 산 옷을 입고 W팰리스 공사 현장에 갔다.공사는 벌써 시멘트 작업 단계까지 진전돼 있었다. 한 번 둘러본 후 현장 작업자와 이야기하는데 양유진이 걸어왔다. “여름 씨, 옷 새로 샀어요? 예쁘네요.”“네.”최
여름이 말리려는데 양유진이 바로 말을 끊었다.“병원 수속이 복잡해서 혼자서 하려면 정신없을 거예요. 오빠가 여동생 일에 나 몰라라 할 수 있나요? 지금 이거저거 가릴 때인가요?”여름은 너무나 급해서 더 거절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하니 응급실 입구에서 누군가 소리치고 있었다.“여기 방현주 씨 보호자 되시는 분, 수납처에서 진료비 납부하시고 약 받아가세요!”“저예요, 저!”여름이 후다닥 달려갔다.“선생님, 이분 상태가 어떠신가요?”“급성 뇌경색입니다. 바로 수술받으셔야 하니, 바로 수속 밟아주세요.” 간호사가 그녀의 손에 명세서를 쥐여주었다.여름이 아래층에서 수납하고 올라오니 수술은 이미 시작돼 있었다. “내가 이 병원 과장을 알아요. 방금 전화해서 일찍 수술 시작하게 했어요.”“고맙습니다.”정말 고마웠다. 세 시간 후, 수술은 끝났다. 수술실에서 나온 현주 이모의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예전에 할머니 댁에서 일하던 현주 이모는 건강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건 물론이고 뺨도 움푹 패어 있었다.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오후 5시, 이모님이 깨어났다. 이모님은 여름을 보자마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아이고 아가씨,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이제 아가씨라고 안 부르셔도 돼요.”여름은 씁쓸히 웃었다. “아니에요, 아가씨는 영원히….”“이모, 저도 다 알아요. 저 강 씨 집안 자식 아니잖아요. 저 입양됐다면서요. 이모는 할머니를 수십 년 간 모셨으니 다 아실 거 아녜요?”“누가 그래요?!”현주 이모는 감정이 격해졌다.“아가씨는 강 씨 집안 사람이에요!”여름은 멍해졌다. “강여경이 그랬어요. 그리고 제가 친딸이라면 차마 그런 짓은 못 했겠죠.”“아이고, 불쌍한 아가씨, 정말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네.”현주 이모는 연달아 기침했다.“날 내쫓은 것도 모자라서 아가씨한테 그렇게 얘기하다니, 할아버님 할머님께 약속한 것도 잊었나 봐요.”“이모, 쫓겨나셨다
여름은 너무 놀라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그러니까 TH가 도산하니 얼른 손을 써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하고 화신의 지분을 차지했다는 거야?’“그, 그럴 리가요. 친어머니를 어떻게….”양유진이 말했다.“강태환 회장은 평생을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진 걸 잃지 않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여름 씨는 잘 모르나 보네요. 역사에서 권력 계승을 위해 친형제끼리 상잔을 벌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어요. 할머니께선 중풍까지 앓고 계셨으니 그 사람에겐 그저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현주 이모가 끄덕였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중풍에 걸리신 것도 우연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날 여경 씨가 플럼가든에 왔는데 위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돼서 할머니께서 갑자기 계단 아래로 떨어지셨단 말예요. 여경 씨는 실족하신 거라고 그랬지만 어르신이 얼마나 건강하셨는데요.”여름이 고개를 홱 들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악독할 수가 있는 걸까, 할머니한테마저 마수를 뻗쳤다니!’“아마 어디선가 아가씨랑 화신 관계에 대해 들은 거겠죠. 강 회장 친딸이 아니란 것도요.”“저한테 좀 일찍 얘기해 주지 그러셨어요.”“그러고 싶었죠. 하지만 최근에 그 집안 사람들이 사람 풀어 날 찾으려고 혈안이었어요. 아마 나머지 30퍼센트 지분 때문이거나 내 입을 막으려는 걸 거예요. 그래서 내내 죽은 듯이 숨어 지냈죠.”현주 이모가 여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화신 주주 중에 정호중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강신희 회장이 도움을 크게 준 사람이에요. 그 사람 찾아가면 무언가 줄 거예요.”여름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아버지가 누군지 아세요?”이모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에휴, 그건 잘 몰라요. 하지만 서울 사람인 것 같았고 집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요.”여름의 눈이 빛났다.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하지만 왜 엄마와 나를 버린 걸까? 아마 지금은 결혼해 아이도
최하준은 화내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였다.그동안 여름을 너무 방임했던 탓이다. 겉으로만 따르는 척하며 밖에선 제멋대로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내가 자기 아니면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통화는 그렇게 끝났다.여름이 핸드폰을 보며 멍하니 있는데 양유진이 다가왔다.“최 변 전화 아니에요? 문병 온다고 해요? 그럼 난 먼저 갈게요, 괜히 오해 사지 않게.”“아뇨, 온다는 말 없었어요.”여름은 갑자기 뭔가 꺼림칙하다고 느꼈다. 그렇다, 병문안 온다는 말은 없었다. 양유진 눈이 반짝이더니 웃었다.“하긴, 친인척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죠. 방금 의사 선생님께는 잘 얘기해 놨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고맙습니다.” 여름은 너무 감사했다. 양유진이 없었다면 오늘 다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최하준에게 부탁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방금 쌀쌀한 태도를 보니 여기 올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괜찮아요. 난 그럼 가볼게요.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요.”양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도움도 적당해야지, 지나치면 경계심만 높아진다는 것을.“네.”여름은 양유진을 입구까지 배웅했다.9시 반이 될 때까지 최하준은 전화 한 통 없었다.간병인이 오자, 여름은 운전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엔 지오가 새끼들과 뒹굴거리고 있었고, 이모님은 TV를 보고 있었다.“하준 씨는요?”이모님이 놀라 말했다.“어머나, 말씀 안 하셨어요? 변호사님이 저녁에 전화해서는 서울에 출장 가신다던데요. 이번에도 며칠 계실 건가 봐요.”여름은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몰랐다.갑자기 화가 났다.‘남친이란 사람이 내 지인이 입원했다는데 관심도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출장 가는 것조차 말을 안 해? 뭐 하자는 거지?’올라가서 전화를 걸었다.전화 연결이 되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주점이나 노래방 같았다.“어디예요? 출장 간 거 아니에요?”-네.목소리가 쌔했다.“출장 간다고 왜 말 안 했어요?”-내가 어디 가는지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합니까?여름은 찬물을 머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