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말리려는데 양유진이 바로 말을 끊었다.“병원 수속이 복잡해서 혼자서 하려면 정신없을 거예요. 오빠가 여동생 일에 나 몰라라 할 수 있나요? 지금 이거저거 가릴 때인가요?”여름은 너무나 급해서 더 거절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하니 응급실 입구에서 누군가 소리치고 있었다.“여기 방현주 씨 보호자 되시는 분, 수납처에서 진료비 납부하시고 약 받아가세요!”“저예요, 저!”여름이 후다닥 달려갔다.“선생님, 이분 상태가 어떠신가요?”“급성 뇌경색입니다. 바로 수술받으셔야 하니, 바로 수속 밟아주세요.” 간호사가 그녀의 손에 명세서를 쥐여주었다.여름이 아래층에서 수납하고 올라오니 수술은 이미 시작돼 있었다. “내가 이 병원 과장을 알아요. 방금 전화해서 일찍 수술 시작하게 했어요.”“고맙습니다.”정말 고마웠다. 세 시간 후, 수술은 끝났다. 수술실에서 나온 현주 이모의 모습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예전에 할머니 댁에서 일하던 현주 이모는 건강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건 물론이고 뺨도 움푹 패어 있었다.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오후 5시, 이모님이 깨어났다. 이모님은 여름을 보자마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아이고 아가씨,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이제 아가씨라고 안 부르셔도 돼요.”여름은 씁쓸히 웃었다. “아니에요, 아가씨는 영원히….”“이모, 저도 다 알아요. 저 강 씨 집안 자식 아니잖아요. 저 입양됐다면서요. 이모는 할머니를 수십 년 간 모셨으니 다 아실 거 아녜요?”“누가 그래요?!”현주 이모는 감정이 격해졌다.“아가씨는 강 씨 집안 사람이에요!”여름은 멍해졌다. “강여경이 그랬어요. 그리고 제가 친딸이라면 차마 그런 짓은 못 했겠죠.”“아이고, 불쌍한 아가씨, 정말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네.”현주 이모는 연달아 기침했다.“날 내쫓은 것도 모자라서 아가씨한테 그렇게 얘기하다니, 할아버님 할머님께 약속한 것도 잊었나 봐요.”“이모, 쫓겨나셨다
여름은 너무 놀라 털썩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그러니까 TH가 도산하니 얼른 손을 써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하고 화신의 지분을 차지했다는 거야?’“그, 그럴 리가요. 친어머니를 어떻게….”양유진이 말했다.“강태환 회장은 평생을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진 걸 잃지 않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여름 씨는 잘 모르나 보네요. 역사에서 권력 계승을 위해 친형제끼리 상잔을 벌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어요. 할머니께선 중풍까지 앓고 계셨으니 그 사람에겐 그저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현주 이모가 끄덕였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중풍에 걸리신 것도 우연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날 여경 씨가 플럼가든에 왔는데 위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돼서 할머니께서 갑자기 계단 아래로 떨어지셨단 말예요. 여경 씨는 실족하신 거라고 그랬지만 어르신이 얼마나 건강하셨는데요.”여름이 고개를 홱 들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악독할 수가 있는 걸까, 할머니한테마저 마수를 뻗쳤다니!’“아마 어디선가 아가씨랑 화신 관계에 대해 들은 거겠죠. 강 회장 친딸이 아니란 것도요.”“저한테 좀 일찍 얘기해 주지 그러셨어요.”“그러고 싶었죠. 하지만 최근에 그 집안 사람들이 사람 풀어 날 찾으려고 혈안이었어요. 아마 나머지 30퍼센트 지분 때문이거나 내 입을 막으려는 걸 거예요. 그래서 내내 죽은 듯이 숨어 지냈죠.”현주 이모가 여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화신 주주 중에 정호중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강신희 회장이 도움을 크게 준 사람이에요. 그 사람 찾아가면 무언가 줄 거예요.”여름은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아버지가 누군지 아세요?”이모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에휴, 그건 잘 몰라요. 하지만 서울 사람인 것 같았고 집안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요.”여름의 눈이 빛났다.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하지만 왜 엄마와 나를 버린 걸까? 아마 지금은 결혼해 아이도
최하준은 화내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였다.그동안 여름을 너무 방임했던 탓이다. 겉으로만 따르는 척하며 밖에선 제멋대로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내가 자기 아니면 안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통화는 그렇게 끝났다.여름이 핸드폰을 보며 멍하니 있는데 양유진이 다가왔다.“최 변 전화 아니에요? 문병 온다고 해요? 그럼 난 먼저 갈게요, 괜히 오해 사지 않게.”“아뇨, 온다는 말 없었어요.”여름은 갑자기 뭔가 꺼림칙하다고 느꼈다. 그렇다, 병문안 온다는 말은 없었다. 양유진 눈이 반짝이더니 웃었다.“하긴, 친인척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죠. 방금 의사 선생님께는 잘 얘기해 놨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고맙습니다.” 여름은 너무 감사했다. 양유진이 없었다면 오늘 다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최하준에게 부탁할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방금 쌀쌀한 태도를 보니 여기 올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괜찮아요. 난 그럼 가볼게요. 저녁에 회식이 있어서요.”양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도움도 적당해야지, 지나치면 경계심만 높아진다는 것을.“네.”여름은 양유진을 입구까지 배웅했다.9시 반이 될 때까지 최하준은 전화 한 통 없었다.간병인이 오자, 여름은 운전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엔 지오가 새끼들과 뒹굴거리고 있었고, 이모님은 TV를 보고 있었다.“하준 씨는요?”이모님이 놀라 말했다.“어머나, 말씀 안 하셨어요? 변호사님이 저녁에 전화해서는 서울에 출장 가신다던데요. 이번에도 며칠 계실 건가 봐요.”여름은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몰랐다.갑자기 화가 났다.‘남친이란 사람이 내 지인이 입원했다는데 관심도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출장 가는 것조차 말을 안 해? 뭐 하자는 거지?’올라가서 전화를 걸었다.전화 연결이 되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주점이나 노래방 같았다.“어디예요? 출장 간 거 아니에요?”-네.목소리가 쌔했다.“출장 간다고 왜 말 안 했어요?”-내가 어디 가는지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합니까?여름은 찬물을 머
”왜 그러는 거야? 네가 오라 그래 놓고.”송영식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냥 좀 내버려 둬.”하준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헐, 이건 대체 무슨 경우야? 이 녀석 강여름 씨랑 사귄 뒤로 갈수록 이상해지네. 그렇게 맘에 안 들면 그냥 헤어….”“한 번 더 말해 봐.”하준이 싸늘하게 쏘아봤다.송영식은 그냥 입을 닫았다.이주혁이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정말 좋아하는 거냐?”“설마.”송영식이 눈을 찌푸렸다. “너 지안이밖에….”순간 담배를 쥐고 있던 최하준의 손이 정지했다. 이주혁이 한숨을 내쉬었다.“야, 지안이 떠난 지가 언젠데, 최하준이가 평생 과거만 붙들고 살 수는 없잖아.”송영식은 어두운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최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여름이 이틀 동안 수소문 끝에 정호중의 주소를 알아내고 보니 주소지가 해주였다.결국 오전 비행기를 타고 해주로 갔다.집 정문에 도착하니 경비원이 문을 열며 물었다.“약속하셨습니까?”“그건 아니지만 정 선생님께 좀 전해주시겠어요? 강신희 씨 딸이라고.”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던 경비가 내선 전화를 걸어 답을 듣더니 극도로 공손하게 문을 열어 여름을 들여보냈다.“들어가시죠.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여름은 안으로 들어갔다.정호중이 육칠십은 된 어르신일 거라 생각했던 여름은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을 보고 살짝 놀랐다.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이 사람은 눈가에 주름이 약간 있긴 했지만 중후함이 넘쳤고 젊은 시절엔 꽤 잘생겼었을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저… 정 선생님이신가요?”그녀를 한참 보던 정호중의 눈빛은 추억에 잠긴 듯했다.“눈 깜짝할 새 20년이 흘렀구나. 꼬맹이가 이렇게 크다니. 정말 엄마를 똑 닮았구나.”“저희 어머니께 도움을 좀 받으셨다고 들었어요.”“그래. 지금은 이렇게 잘 살지만, 예전엔 빈털터리에 빚더미에까지 앉았었지. 정말 운 좋게도 너희 어머니 덕에 지금 이만큼 살게 되었단다.”과거 이야기를 하는 정호중은
여름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셨던 서류다.”정호중이 서류를 집어서 주며 한숨을 내쉬었다.“다행히 그분이 강태환을 제재할 수단을 마련해 놓으시긴 했지만,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셨는데. 후우. 화신의 성공에 강태환은 터럭만큼도 일조한 게 없다. 널 양육한다는 이유로 거저 지분을 얻어놓고 감사한 줄도 모르고.”“맞아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어차피 차지할 수 있는데도 그걸 못 기다리고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했어요.”서류를 쥔 여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게 있으니, 다음 달 주총에서 회장 자리에 앉으려는 꿈은 포기해야 할 거예요.”“걱정 마라, 내가 도울 테니. 회장 자리는 네 거다.”정호중이 웃었다.“감사합니다, 아저씨.”여름은 너무 감사한 마음에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두었다.“저… 계속 제 어머니와 함께 일하셨으면 혹시 제 아버지도 아시나요?”정호중은 어두운 얼굴로 한참 침묵했다.“응, 안다. 너무 속상해 마라. 그 사람은 네 존재를 전혀 모른단다.”여름은 놀랐지만 이내 마음이 놓였다.“잘됐네요. 전 어머니와 제가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거든요.”“사실 화신이 지금처럼 성장한 배경에는 네 아버지 도움도 컸다. 그런데... 그 사람 이미 가정을 이루었단다.”정호중이 동정의 눈길로 여름을 바라보았다.“그렇겠죠. 20년이 흘렀는데요.”정호중은 쓴웃음을 지었다.“강태환이 요즘 회사 고위층과 주주들을 매수하고 있다. 조심해야 해.”“네, 반드시 제 걸 되찾을 거예요.”오후, 여름은 정호중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동성으로 돌아갔다. 비행기에서 내려 핸드폰을 켜 보니 아직 최하준에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씁쓸했다. 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민하다가 톡을 하나 보냈다.-어디예요?한참이 지났지만, 답이 없자 여름은 윤서와 만나 밥을 먹기로 약속을 잡았다.“와, 추카추카! 화신 오너라니, 우와앙~ 대체 자산이 얼마야, 그럼? 난 이제 너만 믿는다.”윤서가 헤헤 웃었다.“
저녁 8시. 두 사람은 노래방 입구에 도착했다. 옆으로 한 커플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말끔한 차림에 준수한 외모의 남자와 브라운색 코트에 웨이브 머리를 흩날리는 귀여운 여자였다.그 순간, 임윤서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분명 조금 아까 회사 일로 바빠 데리러 올 시간이 없다던 사람이 어째서 지금 다른 여자와 함께 여기 있는 것인가!여름은 윤서를 끌고 다가가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다.“어머, 윤 대표, 여기서 뵙네요? 윤서 말로는 회사에서 야근하느라 바쁘셔서 픽업 나올 시간도 없으시다던데.”가시 돋힌 말에 윤상원은 당황했다.“원래는 진짜 야근하려고 했는데 아영이가 천재국이 자기한테 찝쩍댄다고 연락 와서 바로 온 거야. 신아영이 얼른 거들며 징징댔다.“네, 맞아요. 언니도 천재국 알죠? 정말 짜증 나 죽겠어요.”윤서가 입술을 뜯었다. 웃을 수가 없었다.여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정말 부럽다. 이렇게 든든한 오빠가 파티 갈 때 파트너 해줘, 위기 상황 닥치면 제일 먼저 달려와. 근데 이래 가지고 연애하겠어요? 누가 보면 너 남친 있는 줄 알 텐데?”신아영의 얼굴이 불안해 보였다.“언니, 무슨 뜻이에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맨날 의심하고 그래요? 윤서 언니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윤상원도 굳은 얼굴이었다.신아영은 당황해하며 상원에게 말했다.“오빠, 미안해요. 윤서 언니한테 가봐요. 이따 무슨 일 생기면 제가 알아서 피할게요.”“됐어, 그만해.”윤상원은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여름을 보았다.“강여름 씨, 그쪽이 이해하지 못 하는 일도 있는 겁니다. 말 좀 가려 해요.”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전 순수하게 알려주려던 것뿐이에요.”“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그런 오지랖 필요 없어요.”윤상원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래? 근데 오빠가 알아서 하는 것 같지 않네.”윤서는 자신의 친구가 공격당하는 걸 보자 참았던 화가 솟구쳤다.“매번 쟤가 일 생기면 오빠가 제일 먼저 달려가는데,
위로 올라간 윤서는 너무 화가 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여름이 부축해주었다.“윤서야, 미안해. 진작 알았으면 그렇게 말 안 했을 텐데.”“나도 늘 하고 싶었던 말이었어.”윤서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넌 딱 두 번 보고도 이상하다고 알아차렸는데 말이지. 생각해 보면 신아영 만난 횟수가 우리 데이트 횟수랑 비슷할 거야.”여름은 너무나 놀랐다. 해외에서 유학했던 터라 친구의 상황을 잘 몰랐다. 윤서가 씁쓸하게 말했다.“내가 상원 오빠랑 데이트할 때면, 열에 일곱 번은 아영이를 데리고 나왔어. 심지어 영화 볼 때도 같이 갔고. 나머지 세 번도 그중 두 번은 신아영 전화 받고 먼저 자리를 떴다고. ““왜 진작 말 안 했어?”여름은 안타깝기도 하고 화나기도 했다.“진작 알았음 방금 그렇게 예의 안 차리고 바로 욕을 퍼부었지.”“너랑 상원 오빠가 등지고 싸우게 되는 건 원치 않았어.”“나 정말 그 사람 좋아하거든, 처음에도 내가 오래 쫓아다녔고. 집에도 얘기했어. 올해 설에 부모님께 인사시킨 것도 정말 결혼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야.”“잘 생각했으면 좋겠어. 늘 다른 사람 옆을 붙어 있는 남자를 믿을 수 있겠어? 그 아영이란 애 한 눈에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상원 오빠더러 분명히 하라 그래. 여친인지 아니면 신아영인지.”여름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있었다.“늘 저렇게 신아영 바라기 하고 있으면 나중에 어찌어찌 결혼하더라도 조만간 이혼하게 될 거라구.”윤서는 멍하니 한참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은 마. 기분 안 좋으면 몇 잔 더 마시고 내가 바래다줄게.”여름은 윤서를 데리고 룸으로 들어갔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끌벅적한 룸 안에 남녀 여럿이 있었다.여름이 아는 사람은 이지훈, 주대성, 그리고 구석에 앉아 있는… 최하준 뿐이었다. 히터가 켜져 있어서 그는 흰색 와이셔츠만을 입고 있었다. 왼손엔 술잔을 쥔 그의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넘쳤다.그는 늘 그렇게 눈에 띄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
최하준과 이야기를 하던 변호사는 몸을 떨었다.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못하고 술잔을 들고 저쪽으로 갔다.이지훈이 아무 말 없이 옆으로 와서 앉았다.“어이, 내가 오라고 불렀어. 둘이 언제까지 이럴 거야?”“흥, 주대성에게 불러준 거 아니고?”최하준이 비꼬았다.“거 억울하네.”이지훈이 화를 냈다.“네가 상대도 안 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최하준이 싸늘하게 웃었다.“뭐, 됐어. 저렇게 분수도 모르는 사람이 옆에 앉아봤자 기분만 나쁘지.”이때 두 사람이 들어왔다. 진현일이 진가은과 강여경을 데리고 들어왔다.이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아니, 오늘 무슨 날인가, 온갖 웬수들이 왜 여기 다 모이냐?’속으로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진현일이 쓱 돌아보더니 이지훈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친구들이랑 놀다가 다들 여기서 논다는 얘기가 들려서 한잔하려고 왔지. 이분이 그 유명한 최 변호사시구나.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최하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진가은은 신경 안 써도 그만이지만 진현일은 최근 재벌가에서 떠오르는 인물인 데다 JJ그룹도 요즘 성장세가 빠른 집안이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아이고, 진 대표. 축하드립니다. 이제 JJ그룹을 맡으시게 되었던데.”이지훈이 빙긋 웃으며 강여경을 흘끗 봤다.“그런데 어쩌다 이런 분이랑 노시나?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진현일이 껄껄 웃더니 갑자기 강여경을 감싸 안고 큰 소리로 소개했다.“자자, 소개하겠습니다. 내 여자친구 화신그릅 대주주 강태환 이사의 딸입니다.”룸이 왁자지껄 해졌다. 이지훈과 최하준의 얼굴이 곧 일그러졌다.“그럴 리가. 강태환이 언제 화신의 대주주가 됐습니까?”“거짓말 아니야?”“......”“아유, 적당히 해요.”강여경이 민망한 듯 말했다.“뭘 적당히 해? 우리 자기 신분이면 이제 동성에서 제일가는 신붓감인데.”진현일이 강여경의 볼에 뽀뽀를 쪽 했다.“아오, 어쩌다 요런 귀한 보물 같은 걸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