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준과 이야기를 하던 변호사는 몸을 떨었다.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못하고 술잔을 들고 저쪽으로 갔다.이지훈이 아무 말 없이 옆으로 와서 앉았다.“어이, 내가 오라고 불렀어. 둘이 언제까지 이럴 거야?”“흥, 주대성에게 불러준 거 아니고?”최하준이 비꼬았다.“거 억울하네.”이지훈이 화를 냈다.“네가 상대도 안 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최하준이 싸늘하게 웃었다.“뭐, 됐어. 저렇게 분수도 모르는 사람이 옆에 앉아봤자 기분만 나쁘지.”이때 두 사람이 들어왔다. 진현일이 진가은과 강여경을 데리고 들어왔다.이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아니, 오늘 무슨 날인가, 온갖 웬수들이 왜 여기 다 모이냐?’속으로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진현일이 쓱 돌아보더니 이지훈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친구들이랑 놀다가 다들 여기서 논다는 얘기가 들려서 한잔하려고 왔지. 이분이 그 유명한 최 변호사시구나.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최하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진가은은 신경 안 써도 그만이지만 진현일은 최근 재벌가에서 떠오르는 인물인 데다 JJ그룹도 요즘 성장세가 빠른 집안이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아이고, 진 대표. 축하드립니다. 이제 JJ그룹을 맡으시게 되었던데.”이지훈이 빙긋 웃으며 강여경을 흘끗 봤다.“그런데 어쩌다 이런 분이랑 노시나?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진현일이 껄껄 웃더니 갑자기 강여경을 감싸 안고 큰 소리로 소개했다.“자자, 소개하겠습니다. 내 여자친구 화신그릅 대주주 강태환 이사의 딸입니다.”룸이 왁자지껄 해졌다. 이지훈과 최하준의 얼굴이 곧 일그러졌다.“그럴 리가. 강태환이 언제 화신의 대주주가 됐습니까?”“거짓말 아니야?”“......”“아유, 적당히 해요.”강여경이 민망한 듯 말했다.“뭘 적당히 해? 우리 자기 신분이면 이제 동성에서 제일가는 신붓감인데.”진현일이 강여경의 볼에 뽀뽀를 쪽 했다.“아오, 어쩌다 요런 귀한 보물 같은 걸
“지훈 씨, 같이 좀 앉을까요? 여기 사람이 없네.”입구까지 걸어온 진현일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아니, 일부러 사람 긁으려고 온 겁니까?”이지훈이 버럭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굳이 내가 긁을 것까지야 있나? 다들 똑똑한 사람들이니 이득 되는 대로 움직이는 거죠.”진현일이 눈썹을 쓱 올렸다.“뭐 얼마 못 가서 그쪽 집안은 이제 동성 제1가문의 지위는 내놓아야 할 겁니다.”“너무 과한 꿈을 꾸시는 거 아닙니까. 저런 여자를 등에 업고 과연 JJ그룹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으려나?”이지훈이 강여경을 가리켰다.“더구나, 지난달까지 다른 남자의 약혼녀였던 분은 더 조심하셔야지.”강여경의 낯빛이 확 바뀌더니 싸늘하게 뱉었다.“지훈 씨, 말 좀 가려서 하시죠. 우리 아빠가 다음 달에 이사장되시고 나서 이성에 손댈지도 몰라요.” 옆에서 듣던 여름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너무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거 아닌가? 다음 달에 강 이사님이 이사장 못 되시면 어쩌시려고?”윤서도 사악하게 웃었다.“그러게. 강 이사님 평판이 과히 좋지 않던데 화신의 브랜드 벨류에도 영향 미치는 거 아니야?”“그러게나 말입니다.”이지훈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지금 실컷 웃어둬. 다음 달에 펑펑 울게 될 거다!”강여경이 싸늘한 얼굴로 진현일을 데리고 룸에서 나갔다.남아있던 진가은이 한껏 끼를 부리며 최하준 곁으로 갔다.“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으실까?”최하준은 차갑게 쏘아보더니 ‘저리 가시죠’하고 말았다.진가은은 신경도 안 썼다. 이 남자를 처음 만난 이후로 그보다 멋진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겨우 변호사 직업 정도로는 자신에게 기운다고 생각됐지만, 국내 최고의 변호사라는 걸 알고 나서는 자신에게 어울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 JJ그룹을 잘 모르시나 보다.”진가은이 빙긋 웃었다.“자산 규모 한 10조 정도 되고요, 지금은 요식업, 여행업, 금융, 과학기술 등 영역에 투자하고 있어요. 곧 화신하고도 손잡을 예정이라 전도유망하죠. 앞으로 국내 최
진가은이 기가 살아서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들었냐? 나가란다!”여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당신 말입니다. 나가시라고.”최하준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진가은을 밀었다.다들 놀라서 얼어붙었다. 진가은이 소리를 빽 질렀다.“뭐 이런 게 다 있어? 날 밀어? 너, 가만 안 둬!”최하준이 티슈를 한 장 뽑더니 방금 진가은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더러운 오물이라도 닦아내듯 싹싹 닦아냈다. “뭐, 그러시던지.”보고 있던 여름은 끓어오르던 분노가 많이 가라앉았다.최하준이 분위기를 파악했기 망정이지 평생 꼴도 보기 싫었을 뻔했다.“최하준!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언젠가는 울면서 나한테 매달리게 될 거다!”모욕에 치를 떨며 진가은이 벌컥 문을 열고 나갔다.“......”이지훈이 화를 냈다.“저가 뭐라고 하준이가 매달려? 쯧쯧.”윤서와 주대성이 동시에 ‘푸흡’하고 웃어버렸다.여름과 최하준만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었다.“넌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불러 놓고 뭔 할 말이 있냐?”최하준이 이지훈을 보고 비아냥거렸다.이지훈은 민망했다.“겨우 JJ그룹이잖아. 화신이랑 손잡는 대도 난 신경도 안 써. 자자, 한 잔들 하자고. 놀아보자. 이제 우리 진짜 놀 사람들만 남았네, 뭐.”곧 이지훈이 나서서 부를 노래를 골랐다. 윤서도 노래를 골랐다.갑자기 긴 소파가 텅텅 비었는데 여름은 하필 딱 두 남자 사이에 앉게 되었다. 한쪽은 주대성, 한쪽은 최하준이었다.슬슬 뻘쭘해지기 시작했다. 아까는 흥분해서 기세좋게 최하준에게 손도 대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긴 했는데, 커흡….“이쪽으로 앉으십시오.”최하준이 별안간 자기 옆자리를 툭툭 쳤다.할 수 없이 여름이 그리고 가 앉자 최하준이 한 손을 여름 뒤쪽 등받이에 올리고 한 손으로는 여름의 턱을 슥 당겼다.“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한테 손도 대지 말라고?”“…….”여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깊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봐도 대체 최하준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그러나 최하준이 꼼짝도 않고
최하준은 그 말을 듣고 속이 시원해진 것이 아니라 되려 실망했다.“일이 생겼을 때 날 찾아오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를 찾아가는군요. 내가 한동안 너무 잘해주니까 이제 만만한가?”“아니, 나랑 양 대표는 진작에 다 설명했잖아요, 양 대표님이...”“그래서 지금은 양유진이 강여름 씨를 그저 친구로 여긴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최하준이 비웃었다.“나도 날 따라다니던 여자랑 친구 하면 되겠네요?”“......”여름이 흠칫했다.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니 확실히 좀 부적절한 데가 있었다.“미안해요.”여름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제일 먼저 쭌을 찾아갈게요. 양 대표 도움은 안 받을게요. 내 마음속에는 쭌 뿐이에요”최하준이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아 당기더니 후 뱉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여름은 최하준의 옆 모습을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답답했다.윤서의 발라드가 끝나가고 있었다.여름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얼른 노래를 한 곡 고르더니 우선 예약을 걸었다.곧 누구에게나 익숙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다들 곧 무슨 노래인지 알아차리고 기대에 차서 여름을 돌아보았다.여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이런 짓을 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래도 최하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조그맣게 말했다.“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노래를 바칠게요.”말을 마치고 얼른 하준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최하준은 눈썹을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조명이 여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갈 때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것이 보였다. 눈은 별이 가득 찬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심장이 욱신거렸다.지훈은 휘파람을 불며 박수까지 쳐댔다.“와우, 제수씨! 대단하네. 하준아, 들었냐? 너에 대한 사랑 고백이란다!”최하준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다리를 꼬고는 여름을 바라보았다.여름이 마이크를 잡았다.얼마나 사랑하냐고?내 마음 아마도
여름은 너무 부끄러웠다.간신히 키스를 끝내고 급히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들 저쪽으로 몰려가서 술 게임을 하고 노래 부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이지훈이 헤헤거렸다.“뽀뽀 끝났으면 어여 와요. 우린 벌써 몇 판 놀았지.”난감해하며 돌아보자 최하준이 나른하게 툭 던졌다.“난 싫습니다.”그러더니 얼굴을 찰랑찰랑한 여름의 머리에 묻었다.“집에나 가죠.” “아니, 윤서 술 마셔서 데려다 줘야 해요.”“대리 불러줘요.”잠시 망설이던 여름이 고개를 잘레잘레 저었다.“남친이랑 싸웠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잔하면 내가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래요?”최하준은 다시 기분이 안 좋아졌다.“무슨 뜻입니까? 난 친구보다 못하다는 뜻입니까?”“......”‘당연하지. 친구가 더 중요하지, 이 양반아!’그러나 속마음은 꿀꺽 삼키고 귀염을 떨었다.“아잉, 그런 말이 어딨어요? 오랜만에 나오기도 했고, 쭌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아주 거짓말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요즘 현주 이모에게 들은 이야기를 최하준에게 해야 할 판이었다.최하준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 빛났다.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었다.“지난번에 공사현장에서 다친 게 사고가 아니라 강태환 일가의 짓이군요. 어디, 날 건드리시겠다?”그때 최하준을 다치게 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강태환 모녀는 정말이지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었다.최하준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김상혁의 번호를 눌렀다.“뭐 하게요?”여름이 물었다.“손 봐야지요.”헉헉, 무슨 이런 대범한 짓을! 여름이 황급히 최하준의 핸드폰을 손으로 눌러 막았다.“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덤비지 말아요. 요즘 그 집안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집이에요. 진현일이랑 강여경이 결혼이라도 하면 이제 동성 제1재벌이라는 지훈 씨네도 발밑으로 내려다보게 될 거라고요.”“......”‘내가 그따위를 겁내야 하나?’최하준이 속으로 웃었다.“뭐, 걱정하지 말아요. 복수는 내가 해줄게요.”여름이 호언장담했다.“내가 화신
그 소릴 들은 여름은 술이 확 깨서 벌떡 일어났다.“어우야, 너 걸을 수 있겠냐? 내가 잡아줄까?”“아뉘야. 이 언니 안 취예따. 이 언니는 10병 먹어도 안 취얀다니까!”윤서는 쿨하게 손을 젓더니 휘적거리며 들어가 버렸다.“삼촌?”최하준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여름은 놀라서 몸이 떨렸다.“쭌이 쟤 외삼촌이랑 닮았나 봐요. 그래서 우리끼리 있을 때는 쭌을 삼촌이라고 부르거든요.”“다 큰 아가씨 삼촌이라니 별로군요. 그렇게 부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최하준이 다시 시동을 걸자 여름은 겨우 한숨 돌렸다. 아직 안 들킨 모양이다.돌아가는 길에 술기운도 올라오겠다 피곤해서 여름은 졸음이 쏟아졌다.얼마나 지났는지 누군가가 여름을 안아 들었다.몽롱한 채 눈을 떠보니 최하준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꿈인가 싶었다. 통통한 아랫입술을 쭉 내밀더니 최하준의 목을 감쌌다.“쭈운, 나한테 자꾸 화내지 마요. 요 며칠 동안 쭌 보고 싶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다고. 엄청나게 많은 일이 벌어져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나한테는 이제 쭌밖에 없어요.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 줄 거죠?”그러더니 최하준을 꼭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여름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최하준의 목덜미까지 흘러들었다.최하준이 흠칫 놀랐다. 아마도 여름이 아직 잠에 취했나 싶었다.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왔다.‘며칠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연약한 사람에게 그 많은 일이 벌어졌는데 곁에 있어 주지도 못했으니….’“그럼요. 내가 꼭 당신 곁에 있을게요.”최하준이 여름의 귀에 속삭였다.따스한 목소리가 진정제 역할을 했는지, 차츰 진정되더니 최하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다.최하준은 여름을 안고 올라가서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았다. 말랑한 여름의 뺨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이번엔 정말 당했군.’며칠 동안 여름이 곁에 없으니 전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막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눈 밖에서 조그맣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김상혁이 서 있었다. 김상
최하준이 여름의 볼을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제발 얌전히 내 말 좀 들어요, 난 강여름 씨가 화신을 손아귀에 넣고 날 부양해 주기만 기다리겠습니다.”귀에 착 달라붙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해대니 여름의 방어력이 제로가 되어 버렸다.옆에서 듣고 있던 차윤의 시선이 사뭇 이상했다.여름이 그걸 봐뒀다가 최하준이 출근하자 웃으며 물었다.“원래 쭌을 알았어요?”‘쭌’이란 말을 듣더니 차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다가 황급히 공손한 말투로 고쳐서 대답했다.“네.”여름이 다시 물었다.“그럼 여자친구 있었는지도 알겠네요? 몇 명이나 있었어요?”“변호사님께 여쭤보는 게 좋겠습니다.”차윤이 간단히 말을 돌려버렸다.여름은 지나치게 성실한 이 보디가드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이날부터 여름은 도하건축디자인을 그만두고 화신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강태환의 집.강 회장이 어느 주주의 전화를 받고 매우 기분이 좋았다.“구 이사께서 드디어 날 지지해 주시는군요. 하긴 뭐 이사장 자리를 내가 아니면 누가 맡겠소?”“여보, 축하해요.”이정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최근 강태환이 화신의 대주주 신분이 된 뒤로 자신을 깔보던 사모들이 와서 알랑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득의양양했다.“당신이 이사장 되고, 여경이랑 현일 군이랑 결혼하면 이제 우리가 동성 제일 재벌 되는 거지.”“좋지. 내가 전에는 내내 이성이니, 주화에 주눅이 들었었는데, 이제 우리가 곧 그 그룹들 다 능가하고 동성 제일이 될 거야. 앗하하!”생각할수록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강여경도 웃었다.“아빠, 현주 이모는 찾았어요? 현주 이모를 남겨두면 화근이 될 거예요.”“그러게, 그 여자는 뭘 너무 많이 안단 말이야.”이 여사가 걱정스럽게 답했다.“알면 어쩔 거야? 내 지위가 이렇게까지 올라갔는데, 여름이 고 사기꾼 녀석이 이제는 날 어쩌지 못해.”강태환이 신경 안 쓴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배후에 최하준이 있다고 해도, 그놈도 얼마 안 남았어.”“아빠, 윤정
총회가 시작되었다. 강태환은 곧장 구 이사 오른쪽으로 가서 앉았다.구 이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물었다.“다들 오셨나?”“정호중 이사 빼고는 다들 오셨네요.”천 이사가 답했다.“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정 이사는 주주총회에는 참석을 안 하시고, 회사일에는 일절 간섭도 안 하시고 배당만 받으시죠.”“그럼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구 이사가 입을 열었다.“내가 이제 나이가 일흔이 되었습니다. 몸도 예전 같지 않고 해서 이제 좀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 이사장 직은 능력 있는 분이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올해 강옥경 어르신께서 별세하시고 60%에 해당하는 어르신의 주식이 아드님인 강태환 이사에게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회사의 최대 주주로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방 안에 있던 주주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일시에 강태환에게로 향했다.태환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부러워 해봐야 다 소용없지. 팔자는 타고나는 거야.’류 이사가 웃었다.“강 이사님은 아직 젊으시면서도 진중한 분이니 저는 이사장 자리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그럼, 우리도 찬성합니다.”“강 이사로 하시죠. 이견 없습니다.”“…….”회의실 여기저기서 지지 선언이 나왔다.구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선거니까 정상적인 코스는 밟아야겠죠. 다들 거수로 표결에 부치겠습니다.”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구 이사장이 거수자의 손을 셌다.“주주 15분 가운데 10분이 지지하셨습니다. 이사장 자리는 강 이사가 맡으시는 수밖에 없겠군요. 아니, 이제 강 이사장이시군.”강태환이 으쓱해 하면서 일어섰다.“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제가 이사장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우리 화신을 일류기업으로 키워 여러분의 수익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우린 강 이사장을 믿습니다.”다들 박수치며 환영했다.강태환은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내내 TH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지만 사실 화신에 비교하면 TH는 새 발의 피였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