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이른 새벽.여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최하준은 이미 일어나 침대 옆에 앉아 여름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뭐 하려고 합니까?”“아침밥 하려고요.”최하준이 살짝 찡그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침밥 챙길 정신이나 있겠어?’“안 해도 됩니다.”최하준이 여름의 팔을 잡았다.“그러기 싫어요. 아침 식사를 챙기는 건 내 의무니까.”여름이 고분고분한 하인처럼 행동했다.그런 모습에 슬며시 짜증이 올라왔다.“안 먹을 겁니다. 옷 갈아입어요. 갈 데가 있어요.”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 집에서 나갈 수 있다면 출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도 물 건너 간 것 같다.“네.”준비를 마치고 최하준은 직접 차를 운전해 여름을 어느 교외 지역으로 데리고 갔다.여름은 최하준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묻지도 않았다. 이 사람과 말을 섞기도 싫었다.눈앞에 묘지가 나타났다. 여름은 이제야 알았다. 이곳이 할머니가 안장된 묘소라는 것을.“왜 여길 데려왔어요?”“추모의식을 치르려고 합니다”최하준이 차에서 내렸다. 여름은 멍하니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이미 장례는 치렀어요. 이럴 필요 없어요. 당신과는 상관없어요.”여름은 할머니 죽음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한선우만 장례식에 가고 나는 못 가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도 할 일은 해야겠습니다. 최소한 서류상 남편이니까.”최하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나를 언제 와이프로 대해주기나 했나, 뭐.”여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가족은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가족 장례식에도 안 가겠다고는 한 적 없습니다.”최하준이 여름을 안아서 차에서 내려주었다.이어서 대형 트럭 한 대가 오더니 두 사람 앞에서 멈췄다. 김상혁이 차에서 뛰어 내렸다.“할머니 생전에 입으셨던 의복이랑 물건입니다.”여름이 트럭을 올려다 보았다. 물건들이 가득 차 있는 걸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이게 다 뭐….”김상혁은 최하준이 뭐라고 할까 봐 지레 걱정이 되어 설명을 덧붙였다.
불꽃이 모두 꺼지자 최하준이 할머니 무덤 앞에 섰다. 정성을 다해 절을 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여름은 조금 놀랐다. 할머니 장례에 이렇게까지 최하준이 정성을 쏟을지 몰랐다.뭔지 모를 감정으로 혼란스러워졌다.“할머니께 뭐라고 했어요?”최하준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강여름이 내 곁에 있는 한 내가 꼭 지킬 테니 안심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여름이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됐거든요. 조금만 나를 더 믿어주기만 해도 좋겠네요.”산에서 내려오면서 또 다른 무덤을 지나쳤다. 특이하게도 묘비에 사진이 있었다. 최하준이 사진을 보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이 분은?”“아, 우리 고모예요.”여름은 무덤 앞에서 절을 했다.“여름 씨랑 많이 닮았군요.”최하준이 말했다.“그래요. 우리 할머니도 내가 고모랑 많이 닮았다고 했어요.”여름이 어깨를 으쓱했다.“어쩐지 어머니하고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더라니. 고모 딸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여름이 순간 얼떨떨했다. 고개를 급히 저었다.“그럴 리가요. 우리 고모는 결혼도 안 했는 걸요. 젊을 때 돌아가셨어요. 어떻게 딸이 있을 수 있겠어요. 아휴, 괜히 말해서 사람 이상하게….”최하준이 침묵했다.두 사람은 말없이 산을 내려왔다. 여름이 한참을 주저하며 말했다.“저, 오늘은 출근하고 싶은데, 가도 될까요?”최하준이 찡그렸다.“거리감 느껴지게 그렇게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냥 다른 남자들과 가까이 지내지만 않았으면 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전화는 반드시 받으십시오.”“그럴게요.”여름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빨리 돈을 벌어야 당당하게 이혼할 수 있지.’******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여름은 화신그룹 방 팀장에게 연락했다. 약속시간을 잡은 후 오후에 화신그룹 분양 현장에 나가보았다. 1층 분양 모델하우스에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여름은 평면도를 들여다보며 구조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2층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는 줄 전혀 모른 채.그 사람은 강여경이었
“염려마십시오. 제가 즉시 가서 알아서 잘 해보겠습니다.”******여름은 로비에서 30분을 기다려 방 팀장을 만나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 팀장은 여름에게 커피를 권했다. 두 사람이 앉아서 막 이야기를 나누려는 순간, 방 팀장의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방 팀장이 전화를 끊고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강여름 씨, 기술팀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20분이 지나도 방 팀장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다섯 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여름은 조금 짜증이 났다. 오늘 아무래도 늦게 들어갈 것 같다.최하준이 또 의심할까 싶어 여름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오늘 늦을 것 같아요.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시작하지도 못했어요.”여름이 먼저 전화를 걸어주자 최하준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여름 혼자 계속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졌다.“거기 어딥니까?”“화신그룹이오.”최하준은 밖을 보았다. 지금 있는 곳이 화신과 멀지 않았다.“그렇군요.”여름은 최하준이 더는 캐묻지 않자 얼른 전화를 끊었다.조금 더 기다리니 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안녕하십니까. 강여름 씨 맞으시죠? 방 팀장이 지금 좀 급한 일이 생겨서요, 모시고 가서 현장 실측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명함에는 왕동민 이사로 적혀 있었다.“실내 공간에 직접 들어가볼 수 있습니까?”조금 이상했다.“지붕은 덮었지만 외벽은 시공 전이라 지금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왕동민이 친절하게 말했다.“회사는 이번 인테리어에 매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왔던 인테리어 회사들은 모두 직접 공간을 측정했습니다.”여름은 호기심이 생겼다.“다른 인테리어 회사에서도 왔단 말씀이시죠?”“그렇습니다. 어떤 인테리어 회사는 우리 회사 이사님 중 한 분과 친분이 있다고 합니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밖으로 나왔다. 경쟁 회사의 소식을 더 많이 들으려고 애쓰다 보
여름은 무척 당황했다.“어디 봐요. 내가 한 번 볼게요.”“의사도 아니면서, 보면 압니까?”여름은 말문이 막혔다. 최하준의 등을 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름은 미칠 것 같았다.“등에서 피가 나요!”“그만, 난 괜찮아요”여름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할 수 있는 건 구급차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전화를 하는 것뿐이었다.천만 다행히 몇 분 후 구급차가 도착했다.구급차에 타자마자 대원이 능숙하게 최하준의 옷을 가위로 자르고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등에 보이는 커다란 상처와 핏자국, 그리고 얼룩진 피멍이 드러나자 여름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상처가 만약 여름의 몸에 생겼다면 아파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준은 이렇게 상처가 깊은데도 앓는 소리는커녕 여름을 안고 걸어 나왔다.‘이 사람 어쩔 거야….’ 여름은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끓어올랐다.최하준이 모욕을 줄 때면 미칠 듯이 미웠다. 그런데 벼랑 끝에 몰렸을 때마다 자신을 구해주는 건 다름 아닌 최하준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이번에는 스스로 부상까지 입으면서...여름은 알고 있었다. 오늘 만약 최하준이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울지 마세요. 남자분은 등에 외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대원이 위로해주었다.“……”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여름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고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최하준은 울고 있는 여름을 보고는 가슴이 시리다가도 한편으로 좀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정말 날 좋아하나 보군. 조금 다친 걸 보고 이렇게 울다니 정말 바보지만 사랑스럽잖아.’“하지만 어깨 쪽은 인대가 끊어졌을 것 같은데, 당장 수술을 해야 합니다.”대원이 말했다.마지막 한 마디에 여름은 절망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니잖아요. 결국 엄청 심하단 말이네.’어릴 적 발을 삐었을 때 아파서 죽을뻔한 기억이 고스란히 있는데, 인대가 끊어졌다니 그 고통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의료진이 물었
“손아귀?”최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이고, 말이 헛 나왔네.”이지훈이 자신의 입을 때렸다.“어쨌든 화신그룹이 감히 널 건드리다니. 적절한 해명이 없으면 너네 어르신이 그쪽을 가만 두지 않으시겠다.”이지훈이 말했다.“불과 십 수년 만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서 화신그룹이 이렇게 순조롭게 운영 되는 데는 그 뒤에 뭔가 믿을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지 않겠어.”김상혁이 덧붙였다.“서울 쪽에서 누가 힘쓰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최하준의 입술이 굳어졌다.“그래, 이지훈이 말에 동의해. 한 번 알아봐. 오늘 이 일이 우연인지 조작인지.”강여름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우연이겠죠. 저는 화신그룹에 밉보인 게 없어요. TH그룹이랑 가은이나 시아가 아니고서는 저한테 그럴만한 사람이 없는데…”“……”“밉보인 사람들이 아주 많지는 않네요.”이지훈이 놀리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치열한 전쟁터 한 가운데 있는 최하준에 비하면 강여름 정도야 뭐…여름은 부끄러웠다.최하준이 여름을 힐끗 쳐다보더니 거들먹거렸다.“무조건 내 옆에만 딱 붙어 있어요. 다른 사람들 다 뭐라 해도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최하준이 하는 말이 과장인 걸 알지만 그래도 내심 감동했다.여름은 최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을 붉히고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지 몰라 그냥 그러고만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이지훈과 김상혁은 할 말을 잃었다.여친 없는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나.“컥, 우리는 그만 가자. 도저히 못 봐주겠다.”“제수씨 구하다가 이렇게 다쳤으니까 옆에서 잘 좀 돌봐주세요. 아시겠죠?”“네네, 그럴게요.”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김상혁과 이지훈이 나가자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혼자서 최하준을 돌보다니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을 터였다그러나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다행히 VIP병실은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서 취사도 가능하고 아파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배 고파요? 나가서 뭐 좀 사올게요.”“많이 고파요. 돼지불고기 먹고 싶습
최하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쪽이 아니면 여름 씨 끌고 들어간 녀석은? 그 놈은 전혀 다치질 않았어.”“그 사람 진술로는 강여름 씨랑 현장실측 하려고 간 것뿐이랍니다. 가면서 너무 대화에 몰입해서 안전모 씌워주는 걸 깜박했다고 합니다.”“몰입?”최하준이 갑자기 ‘픽’하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김상혁은 등줄기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저 놈의 질투심 때문에 또 미친듯이 노발대발하는 건 아닌지 지레 겁부터 났다.“영업하는 사람들은 다 그 모양이라니까. 하여간 아무나 붙들고 떠들기 바빠서.어쨌거나 이번 일에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될 거야.”최하준이 담담하게 말했다.“일단 소장 보내. 화신 측 배상이 흡족하지 않을 경우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네.”이때 여름이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김상혁을 보더니 멈칫했다.“어떡해요. 오실 줄 모르고 2인분만 만들었어요.”“괜찮습니다. 저녁도 먹었고, 지금 막 가려던 참입니다.”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김상혁이 놀랐다. 최하준이 입원해서 이렇게 소박하게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보통은 십여 가지 반찬을 준비해야 했었다.음식도 음식이지만 그걸 보고도 화를 내지 않는 최하준을 보니 더욱 놀라웠다.여름은 요리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 최하준의 왼손을 한 번 봤다. 아직 왼손은 쓸만한 듯 했다.“내가 먹여줘요, 아니면 혼자 먹을래요?”“당연히 먹여줘야죠. 왼손으로 어떻게 밥을 먹습니까?”최하준이 어린아이처럼 뾰로통해졌다.‘아니, 왼손을 더 잘 쓰시잖아요?’김상혁의 입가가 씰룩거렸다.“아직 안 갔어?”최하준이 아래 위로 눈을 부라리며 김상혁을 노려보았다.“네, 갑니다.”김상혁이 쌩하니 사라졌다.“상혁 씨한테 왜 그러세요? 좋은 사람인데.”여름이 불쌍하다는 말투로 편을 들었다.“좋다고?”최하준의 눈에 어두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나보다 더 좋습니까?”여름이 흠칫하더니, 갑자기 눈빛이 이상하게 빛났다.“쭌, 지금 질투하는 거 맞죠?”“……”질투?최하준의
여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최하준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손이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렸다. 볼 수가 없으니 더듬기만 할 뿐 계속 실패했다.“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최하준도 얼굴이 붉어져서 여름을 노려보았다.여름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이불 속으로 들이 밀었다.바로 이때,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들어왔다.“최하준 님, 좀 어떠신가요?”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의사 선생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타이밍을 잘 못 맞춰 들어왔나 봅니다. 아, 저… 지금 나갑니다!”여름이 잽싸게 얼굴을 빼냈다. ‘망했다! 선생님,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그런 게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그냥…”“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계속 하세요.”의사가 얼굴이 벌게져서 시선을 피하며 나갔다입구까지 가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두 분이 혈기가 넘치는 건 알겠습니다만, 환자 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그게 아니라…”여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사는 급히 나가버렸다.여름은 울기 직전이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화가 나서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을 힘껏 노려보았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나 때문이라고?”최하준이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렇군요, 내가 괜히 사람 구한다고 나서서 이렇게 되었네. 지금쯤 영안실에 누워있든 말든 그냥 둘 걸. 뭘 한다고 나서서 화장실 가는 것도 도움 받는 지경이 되었는지…”“됐어요. 그만 해요.”여름이 몸서리쳤다.“당신 때문 아니에요. 날 구해준 은인인 걸요.”“이제야 알아듣는 것 같군요.”그러더니 말했다.“이제 치워주십시오.”여름은 가까스로 숨을 돌렸다. 입이 바싹 말라 목을 축이려고 물 한잔을 따랐을 때 최하준이 또 불렀다.“내 몸을 좀 닦아줄 수 있습니까?”“……”물잔을 들고 쏟을 뻔했다. 뒤돌아 최하준을 바라보는
“의사를 불러 뭐하게요? 그렇다고 통증이 없어지지도 않을 텐데요.”최하준이 눈을 감았다. 통증 때문에 속눈썹이 움찔거리며 떨렸고 급기야 꽉 다문 입술로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창백한 얼굴로 애써 통증을 참는 최하준의 모습에 여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손을 꽉 잡았다.“내, 내가 어떻게 해줄까요?”“뭐든 할 수 있어요?”최하준의 두 눈이 더 깊어졌다.“네.”여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최하준이 눈에 힘을 주고 열심히 고민하는 척 하다가 가볍게 툭 내뱉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줘요. 다른데 집중하면 통증을 잊어버릴 거 같은데.”“……”여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런가?’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다분히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안 되면 할 수 없고.”최하준이 고개를 돌렸다. 계속 아파서 끙끙거렸다.“아니, 아니. 할게요.”이 사람은 내 생명의 은인이야.여름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의 얼굴을 잡고 천천히 얼굴을 숙여 최하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병원 약 때문인지 그의 입술에선 약 냄새가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 감미로움에 묻혀버렸다.이렇게 키스를 리드하는 건 처음이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전등이 꺼져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최하준의 몸도 바로 반응했다. 심장이 요동 치기 시작했다.뜨거운 입술에 제대로 응답하기도 전에 여름이 갑자기 입술을 떼었다. 그러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이러면 돼요?”“조금 효과가 있네요. 근데 당신이 떨어지니까 다시 통증이….”최하준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그렇지만 키스를 너무 오래하다 혹시나 눌려서 아프게 할까 봐 걱정이 돼요.”여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이쪽으로 와요.”최하준이 자신의 왼쪽 빈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여름이 주저하며 빈 자리에 걸터 앉았다가 그 옆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처음에는 수줍게 입을 맞추던 여름은 최하준이 키스를 돌려주기 시작하자 어느새 그에게 점점 밀착했다. 오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