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했어도 그럴 참이었다.보답의 의미로 그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준비했다.식사 준비를 하며 인터넷 뉴스를 잠시 들여다봤다.좋았어! 지금 인터넷은 온통 TH를 욕하는 여론으로 뒤덮였다. 이번에 강태환은 조사 대상이 아니었지만 네티즌들은 그룹 총수인 강태환이 무고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게다가 TH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TH는 끝이다!여름을 오해하던 사람들도 모두 이제는 동정하고 있었다.예전에 몇천 명정도이던 팔로워 수가 지금은 수십만 명이 되었다. 웬만한 인플루언서 못지않았다.이모님이 화려하게 차려진 칠첩반상을 보고 감탄했다. “어머나, 사모님 음식 솜씨가 이렇게 훌륭하시니 내가 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던 거군요.”여름도 안다. 하준이 말은 안 해도 이미 자신의 음식에 길들어 있다는 걸.“다음에 음식할 때는 레시피를 알려드릴게요. 그럼 제가 없어도 이모님이 해주실 수 있잖아요.”“좋죠. 하지만 사모님이 안 계실 일이 있겠어요? 평생 함께하는 게 부부인걸요.”이모님은 웃으며 청소를 계속했다. 여름의 말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이제 재판도 끝났겠다, 여름은 이제 돈 버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이렇게 애매한 상태로 하준 옆에 묶여있을 수는 없었다.식사 준비를 마치고 보니 이모님이 바빠서 하는 수 없이 여름이 직접 이층에서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수영장으로 가 최하준을 불렀다.온수 풀장 안에서 돌고래처럼 움직이고 있는 건장한 남자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수영장 가에 서서 그 모습을 보던 여름은 살짝 넋이 나갔다. 자신이 보았던 수영선수들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 이 사람이 수영까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 최하준이 맹렬히 여름이 있는 쪽의 수면을 뚫고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젖은 채로 이마에 붙어 있어 물방울이 머리카락을 따라 뺨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높은 콧날을 지나 새빨간 입술, 쇄골까지…여름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먹는데 몸은 어떻게 이
다시 앞으로 돌아와 얼굴을 닦으려고 할 때 두 눈이 마주쳤다. 최하준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여름의 얼굴도 빨개졌다. 서둘러 눈을 내리깔았지만,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최하준은 머리 속에 팽팽했던 한 줄기 줄이 끊어진 것 같았다. 돌연 여름의 허리를 잡고 물었다.“그거, 끝났습니까?”여름은 머리가 멍해져서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곧, 여름의 몸이 들어 올려졌다. “뭐 하는 거예요?”여름이 놀라서 최하준의 목을 껴안았다.“강여름 씨, 당신 유혹 기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군요.”최하준은 여름을 안고 위층 침실로 갔다.여름은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유혹했냐고, 저기요, 당신이 나더러 닦으라 그래 놓고. 자제력 갑인 사람 아니었어? 언제는 역겹다며?”침대에 던져질 때까지 여름은 옴 몸이 떨렸다.계약서에 사인한 날, 이런 날이 오게 되리란 걸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겁났다. 지난번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었다.최하준이 그녀의 코끝을 손끝으로 꼬집었다.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잠깐만요.”여름이 최하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눈가가 빨겠다. 원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쭌, 우리 이러면 안 돼요. 난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주제 파악이 빠르군요.”최하준이 주춤하더니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말문이 막힌 여름은 억지로 계속 괴로운 척했다.“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 알아버려서…. 당신은 정상급 변호사고 나는 빽 없는 일개 디자이너잖아요. 이렇게 평범한 내가 신계에 있는 거나 다름없는 당신을 잡고 늘어지는 건 신성 모독 같은 거죠.”“내 침대에 올라오지 못해 안달 아니었습니까?”“…….”‘그땐 한선우 외삼촌인 줄 알고 그랬지.’하지만 사실을 얘기할 순 없었다.“그땐 뭘 잘 몰라서, 당신 몸을 차지하면 마음도 차지하게 될 줄 알았죠. 나중에야 틀렸단 걸 깨달았어요.”“틀렸습니다.”최하준은 여름의 턱을 쓰다듬더니 그윽하
화가 나 전화를 걸었다.“강여름 씨, 당장 돌아오지 못하겠습니까? 계약서 내용 다시 짚어줘요? 내가 자선사업 하는 줄 압니까? 필요할 때는 공짜로 도와달라고 하더니, 그깟 음식이 몇백억짜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게다가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순진한 척입니까?”한마디 한마디가 듣고 있는 여름을 때리고 있었다.처음엔 미안하기만 했던 여름도 이제 화가 치밀었다.“무슨 근거로 내가 처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예요?”“한선우랑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다면서 아직 첫 경험이란 게 남아 있다는 겁니까?”최하준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사귈 수도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한 적 없어요.”여름은 위축되어 말했다.“믿거나 말거나.”최하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10분 주겠습니다. 당장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감당 못 할 일 생길지도 모릅니다.”망연자실한 여름은 수영장 가에 잠시 서 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빚진 것 투성이인데 배은망덕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최하준은 현관에 서서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불빛이 가물가물하게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냥 무서워서….”여름은 고분고분하게 곁으로 가 허심탄회하게 사과했다.“아직 원하면, 방으로 돌아갈게요.”최하준이 이를 꽉 물고 물었다.“전에 나한테 술수 쓸 때는 두려워 보이지 않던데?”“그땐… 너무 좋아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거든요!”여름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거짓말을 했다.“거절당하고 나서는 소심해져서, 트라우마가 생겼어요.”“…….”좀 아까 깎인 체면이 조금 회복된 기분이었다.“알겠습니다. 당분간 손 안 대는 걸로 하죠. 밥 먹읍시다.”최하준은 차가운 얼굴로 거실로 돌아갔다.여름은 멍하게 서 있었다. 이렇게 쉽게 자신을 놓아주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TH그룹.회의실에서 강테환은 사장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AB팀에 벌써 디자이너 다섯 명, 건축사 네 명이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걔가 우리 민수도 망가뜨린 거예요! 그 못된 것!”이정희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싸우지 마세요!”강여경이 달려와 두 사람을 제지했다.“아빠, 잊어요. 지금은 좌절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에겐 아직 화신이 있어요. 세계적인 기업이잖아요. TH보다도 크다고요!”“하지만 그건… 네 할머니….”강태환이 주저했다.“살 길을 강구하셔야죠. 변수가 있을지 모르잖아요.”“여경이 말이 맞아요. 전에 줄서서 나한테 아첨하기 바쁘던 부인네들 TH에 일 생기니까 그림자도 안 보이잖아요. TH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이제 동성에 설 자리도 없게 된다고요.”강태환이 잠시 갈등하더니 곧 눈에 독기가 스쳤다.“맞는 말이야!”******여름은 꿈을 꾸었다.플럼가든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다 살아계시던 어릴 적. 두 분은 여름을 무척 아끼셨고, 여름은 자주 플럼가든에 가서 지냈다.그러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할머니는 어느 날 이렇게 말씀하셨다.“여름아, 할머니는 이제 힘들구나. 할아버지 따라가련다.”“안 돼요….”여름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곧 팔 하나가 여름을 다시 뜨거운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중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곧이어 최하준의 입술이 느껴졌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꿈을 꿨어요.”여름은 최하준의 입술을 피하며 조용히 말했다.여름의 눈 밑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최하준은 손을 뻗어 여름의 머리를 안고는 작은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눌렀다. “그냥 꿈일 뿐입니다. 괜찮아요.”“네” 여름이 최하준에게 바짝 붙었다.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다정했던 적이 있었나? 마치 금실 좋은 부부 같았다. 여름은 어색해서 최하준을 살살 밀어냈다.“아침밥 하러 갈게요.”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밥을 먹지 않아서 최하준은 배가 많이 고팠다.밥을 먹고 여름은 출근할 준비를 했다.최하준이 조용히 말했다.“W팰리스 공사 건은 이제 그만 해요. 양유진하고 부딪히는 일 없
“난 당신이 함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최하준이 격하게 여름을 놓고 떠났다. 더는 여름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 이렇게 넘어가겠구나.’하고 여름은 한시름 놓았다. 보아하니 아직 애정 작전이 통하는 듯싶었다.******오전 9시.여름은 회사에 도착하자 곧장 도재하를 찾아갔다.지난번에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면서 휴가를 내고 내내 출근을 하지 않았었다.사람들이 갑론을박으로 도재하를 곤란하게 하는 것도 걱정되었고 온갖 풍문에 시달리는 자신이 도재하의 명예에 손상을 입힐까도 걱정되었다.이번 소송은 지나갔지만 도재하에 대해서는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정말 죄송합니다. 회사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여러 가지로 폐만 끼쳤어요.”도재하가 여러 가지로 압박이 있었을 텐데도 자신을 내쫓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괜찮아. 난 언제나 널 믿고 있었으니까.”도재하가 웃으며 커피를 따라 주었다.“그리고 이번 일은 전화위복이 될 거야. 내가 동성에 진출해서 TH가 가장 큰 경쟁 상대였는데 이제는 강 회장님이 TH를 매각하려고 하더라고.”여름은 흠칫 놀랐다. TH가 이번에 큰 손해를 본 것은 알았지만 강 회장이 그렇게 쉽게 포기할 리는 없었다.TH를 잃고 나면 동성에서 강태환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데 과연 매각할까?“그렇게 놀라지 마. 이민수 스캔들이 너무 커져서 TH의 명성이 크게 무너졌어. 최소한 2년 안에는 아무도 TH와 일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고위급 간부들과 디자이너들이 다른 곳으로 다 이직해 버려서 강 회장이 버틸 수 없었을 거야.”도재하가 설명했다.“아무도 그 위험을 안고 투자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나중에 재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강태환이 지금 TH를 매각하고 나면 남는 돈도 있을 것이고 더 큰 손실을 막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할 수도 있는 것이다.“이번 일에 네 공이 크다.”재하가 건배라도 하듯 머그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여름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일 많이 시켜
오후. 여름이 막 엘리베이터를 나서는데 한선우가 나타나 여름을 막아섰다.“적당히 해! 전에 알아듣게 설명했잖아”여름이 피해서 가려고 했다.“여름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어!”한선우가 갑자기 팔을 잡았다.“모르고 있었어?”휘청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천히 돌아보았다.“거짓말이지!?”“아니라니까. 위로해주려고 계속 전화했던 거야. 그런데 너희 집에서 너한테는 아예 말도 안 해줬나 보네. 나도 이제야 들었어.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여름은 한선우를 와락 밀치고 차에 올랐다.그러나 손이 너무 떨려서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이래서 어떻게 운전을 해. 내가 데려다 줄게. 어딘지 알아.”한선우가 차 키를 가져가면서 여름에게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여름이 차에 타자 안전벨트까지 해주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여름은 차에서 내리더니 비틀거리며 식장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영정을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약혼식에서 뵌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니!불효한 손녀로서 너무나 죄송했다.“누가 오라고 했어!”상복을 입은 강태환이 여름을 보자 버럭 화를 내더니 여름을 입구로 밀어냈다. “당장 여기서 나가!”“내가 왜 못 와요? 나도 할머니 친손녀인데요.”여름이 미친 듯 맞섰다.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섰다.“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줘요? 왜 할머니 임종을 지킬 권리마저 빼앗아 가시는데요?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감히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해!”강태환이 마구 소리를 지르자 한선우가 와서 막아서며 소리쳤다.“여름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여름이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얼마나 아끼셨는데요. 가시는 길도 지키지 못하게 하면 할머니께서 눈도 못 감으실 겁니다.”‘눈도 못 감는다’는 말에 강태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름이 급히 물었다.“왜 할머니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나요? 지난번에 뵈었을 때 마비가 있어도 식사는 제대로 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리가 없잖아요?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사적인 일로 소란 피우지 말아 주세요!”여름이 단호하게 그들을 막아섰다. 그리고 말없이 영정사진 앞에 꿇어앉았다. 꿇어앉는 것 외에 할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동성에 정착해서 기업을 일으켜 세운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TH그룹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는데 부고를 외부에 알리지도 않고 장례식장에는 애도하는 조문객들조차 없다.******날이 저물 무렵.최하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모님 혼자 요리를 하고 있었다.“강여름 씨는요?”“아직 귀가 전입니다.”이모님의 대답을 듣자 얼굴이 구겨졌다.‘의처증인가, 집에 돌아오면 와이프부터 찾는단 말이야.’이모님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손목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이다.차가 막히는 건가? 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젠장. 잘해주려고 했더니 너무 일만 열심히 하는 거 아냐.‘저녁 아홉 시까지 귀가하는 것으로 계약서상에 명시했지만, 전화조차 받지 않는 건 너무하다.“먼저 식사하세요.”이모님이 식사를 차렸다.최하준이 식탁을 보고 멈칫했다.“이거 직접 하셨습니까?”“네, 일전에 사모님께서 저한테 가르쳐주셨어요. 호호.”이모님이 웃으며 말했다.“사모님이 집을 비우게 되면 선생님께 해드리라고 하셨어요. 제가 맛을 봤는데 사모님이 하신 거와…”말을 마치기도 전에 최하준이 요리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언제든 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나 보군.”‘괘씸하게도 날 가지고 장난하는 건 아니겠지? 그저 소송 때문에 날 이용해 먹은 건가?’도우미 이모님은 깜짝 놀랐다. 여름이 이 집에 온 후 집주인은 날이 갈수록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아니에요. 사모님의 의중은 야근할 때를 말하는 거였어요.”최하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여움이 점차 사그라들었다.‘그래, 기다려보자. 아직 아홉 시도 안됐잖아.’최하준이 위층
“둘이 호텔에 갔나?”최하준이 일어났다. 두 눈은 질투심으로 이글거렸다.김상혁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최하준을 오랫동안 보필해 왔지만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강여름이 최하준의 내면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이 틀림없다. 최하준 본인조차도 인식을 못 하는 것 같다.“찾을 필요 없어.”최하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있다 오는지 보지.”김상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장례식장.여름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강태환과 이정희, 그리고 강여경 셋은 자정이 되자 집으로 돌아갔다.커다란 장례식장 안에는 강여름과 한선우만 남아 있었다.“이제 그만 집에 가.”여름은 한선우가 자기 때문에 남아 있는 걸 알았지만 어떤 호의도 받고 싶지 않았다.“난 안 가. 할머니가 살아 생전에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다고. 가시는 길 끝까지 함께 해드려야지.”한선우가 여름의 옆에 떡 버티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여름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한선우 조차도 할머니를 이렇게 대하는데, 명색이 아들이고 딸처럼 사랑 받았던 며느리인데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강태환과 이정희 부부의 태도는 여름의 상식에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깊은 밤, 장례식장 안은 너무나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여름은 향불을 붙이느라 열중한 나머지 한선우가 어깨에 옷을 걸쳐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날이 밝자 강태환과 가족들은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여름의 눈은 하도 울어서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나올 때에도 여전히 크나큰 슬픔에 잠겨 제정신이 아니었다.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던 마지막 단 한 명의 혈육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제 이 세상에 여름은 혼자 남겨졌다.한선우가 여름을 차에 태웠다.“기분 전환 겸 근처로 드라이브나 갈까?”두 사람은 자주 짧은 여행을 갔었다. 한선우는 갑자기 예전에 좋았던 그날들이 떠올랐다.“괜찮아. 출근해야지.”여름이 차갑게 거절했다.“너 지금 상태가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