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강서희는 당연히 그녀가 이유영이 아닌 다른 집안을 찾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진영숙은 자존심보다 욕심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알겠어.”강서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느덧 파랗던 하늘도 서서히 석양이 지고 있었다.한편, 크리스탈 가든에서.이유영은 사무실로 돌아와 핸드폰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지현우가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대표님!”“내일 일정 어떻게 돼요?”“청하 쪽에서 이 대표님이 오신다는데, 만나보실래요?”지현우가 일정표를 확인하며 말했다.“그건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그렇게 중요한 일정 없으면 내일은 좀 따로 움직일게요.”“알겠어요.”지현우가 나가자, 이유영은 서랍에서 전시회 티켓을 꺼냈다. 이 티켓은 전에 정국진이 주고 간 것이었다. 그녀는 오늘 진영숙과의 만남으로 다시한번 정국진의 위상을 깨달았다. 어쩌면 앞으론 이런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유영은 심난해지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박연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유영이 주동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일 시간 있어요?”“네?”“전시회가 있는데, 같이 갈래요?”“좋아요.”“그럼 내일 오전 10시, 순정동에서 출발할까요? 회사로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잠깐만요.”전화 너머 박연준이 비서에게 스케줄을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그가 답했다.“아침에 회의가 있어서, 바로 전시장에서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주소 보내주면 거기서 만나요.”“좋아요.”통화를 마친 후, 이유영은 전시회 티켓에 적힌 주소를 찍어 박연준에게 보냈다. 하지만 바쁜지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오후가 되었고 이유영은 슬슬 손에 있던 서류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 다음 뒤에 일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어, 유영아.”“같이 밥 먹을까?”“좋아, 나도 일 곧 끝나. 데리러 갈게.”“아니야, 내가 갈
“계속 여기서 얘기할 거야?”강서희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나도 일정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중요한 일 아니라면 차리라 내일, 아니 모레 오던가.”“바쁘긴 많이 바쁜가 봐? 하긴, 무려 그 오로라 스튜디오의 창립자이자 이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이사가 되었으니, 당연하겠지!”강서희는 자신보다 한 뺨이나 작은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이유영이 강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강이한으로부터 시작된 것, 둘이 이혼한 뒤로는 강서희가 이유영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좀 전에 받았던 전화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유영이 위세가 강씨 가문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10분이면 돼?”“그 정도면 되지.”결국 두 사람은 로비 한쪽에 있는 휴게실로 갔다. 강서희는 우아하게 직원이 놓고 간 커피를 마셨다. 입양아이긴 하지만 얼마나 진영숙이 정성을 들어 키웠는지 보이는 순간이었다.“오늘 엄마가 찾아왔다며?”강서희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날카롭게 이유영을 쳐다보았다. 전에 강씨 가문에 있을 때도 많이 보여주던 모습이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그토록 두터운 선입견을 가지게 된 이유여도 강서희였다. 이유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과거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이유영이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강서희가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외모로 봐서는 강서희는 결코 이유영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엄한 데에 정력을 쏟는 모습에 이유영은 안타까웠다. 강서희는 이유영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핸드폰을 이유영 앞으로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엔 한 영상이 틀어져 있었다.“이게 뭔데?”“한지음. 너도 궁금할 것 같아서, 우리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강서희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뭔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이유영은 화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답했다.“관심 없어.”“한지음 때문에
강서희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강서희의 본모습을 강씨 집안 사람들에게 알린다고 한들, 반감을 사면 샀지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서희를 향한 진영숙과 강이한의 믿음은 맹목적이었기 때문이다.“하! 참 너도 불쌍하다!”이유영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서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나와 이혼했다고 해도, 한지음을 아무리 괴롭힌다고 해도! 넌 결코 강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수 없어!”진영숙이 오늘 찾아온 이유, 이유영은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정확히 유경원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또 강서희가 중간에 뭔가를 했을 테니.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유경원에게 호의적이었던 진영숙이 하루 아침에 태도를 돌변할 이유가 없었다. 강씨 가문에 있을 때 강서희 때문에 이유영도 자주 겪어본 일이었다.“네가 백날 노력해봤자, 강이한이 네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아?”“….”“너도 알고 있잖아? 강이한이 널 아끼긴 하지만, 언제까지나 동생으로서의 마음이라는 거. 넌 절대로 그 선을 넘지 못해!”“그만해!”강서희가 격분하며 외쳤다. 하지만 이유영은 멈출 기색이 없이 계속해서 강서희의 아픈 곳을 찔러댔다.“찔리니까 화가 나? 그래도 걱정 마. 어차피 여긴 우리 둘 뿐이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강씨 가문에 들어갈 일은 없을 거야. 조급해하지 마.”“너…!”“시간 다 됐어. 난 가볼게.”그녀는 강서희가 오늘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진영숙이 찾아온 것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진 것이다. 이유영은 떠나기 전 한 번 비웃음을 지어 보이며 강서희를 약올렸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점차 멀어졌고 강서희는 점점 더 큰 불안에 휩쌓였다. 한편, 회사를 나온 이유영은 곧바로 소은지를 만나러 갔다.소은지의 오피스 룩을 본 이유영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뭐가 웃겨?”기분 좋아 보이는 이유영의 모습에 소은지가 물었다.처음 이유영이 강이한과 이혼한다고 했을때만 해도 소은지 살짝 걱정됐었다. 하지
메뉴가 올라오고, 식사가 시작되었다.“그래도 너무 방심하진 마.”소은지가 앞에 놓여져 있던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에게 말했다. 소은지는 처음부터 진영숙이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예견했었다. 이유영이 정국진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도 절대로 가만히 있을 진영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이토록 빠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진영숙 여사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돼, 알겠지?”그녀의 말대로 진영숙이 조금이라도 이유영을 마음에 들어 했다면, 강이한과 이유영이 이혼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진영숙 여사가 날 찾아온 건 한지음 때문이야!”“한지음?”“한지음, 이번에 완전히 실명했잖아. 한지음이 강이한을 구해준 한지석의 동생이라는 게 재벌들 사이에 퍼졌나 봐. 그래서 이미지 지키려고 한지음을 강씨 본가에 들여놓았나 보더라고!”“진영숙은 그런 지금 둘이 엮일까 봐 걱정돼서 온 거란 말이야?”“응!”“미친 거 아니야?”“그리고 유경원 쪽하고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정말 난장판이네!”강이한과 한지음이 엮이지 않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유경원과 약혼하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진영숙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 반대하고 나섰다. 이것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진영숙의 입장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이유영이었을 것이다. 이유영의 뒤엔 정국진이 있었으니까.“강서희가 바라던 대로 됐네.”과거, 강서희의 위험성을 느낀 이유영이 강이한에게 경고를 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불같이 화내는 모습에 다시는 말을 꺼내지 않았었다.“그래 봤자 의미 없어.”이유영이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진영숙의 성격대로라면 차라리 한지음을 선택할지언정 강서희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그래도 조심해. 강서희가 강이한한테 얼마나 병적으로 집착하는지 너도 알잖아.”소은지가 말했다. 강서희가 이유영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얼마나 악랄하게 굴었는지 옆에서 봐 왔기 때문에 당연한 걱정이었다
뿌린대로 거둔다, 지금 한지음은 딱 그 꼴이었다. 이유영은 아주 속이 시원했다.“당연하지! 내가 그쪽에 신경 쓸 새가 어디 있어? 나 아주 바쁜 사람이야!”“암요, 아주 공사다망하시죠!”소은지가 장난스레 맞장구 쳤다. 그녀는 이유영이 잘 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강이한과 이혼할 때만해도 고생할 게 뻔해 참 걱정이었는데,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없던 가족이 생긴 것도 모자라, 그 가족이 어마 무시한 재벌이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만약 정국진을 못 만났다면, 이유영은 오늘 이 자리에 없었을 지도 몰랐다. 한편, 강씨 본가.집에 도착한 강서희가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진영숙이 한지음과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른 들고 있던 가방과 외투를 왕숙에게 넘기고 둘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비록 모든 밑작업을 마쳤지만, 한지음은 항상 조심해야 할 존재였다. “너 이유영의 이복동생이라며?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강서희가 방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은 것은 진영숙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솔직하게 말해. 너 설마 청하시에 온 이유, 이유영한테 복수하기 위해서였어?”진영숙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조되었다. “이한 오빠 만나게 해주세요. 이한 오빠….”한지음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 입 다물지 못해?”그 말을 들은 진영숙은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럼 먹고 쓰는데 부족함 없이 챙겨줄 테니. 안 그러면, 내가 널 가만히 안 둬!”이 말과 함께 진영숙은 한지음을 쏘아본 후, 방을 나섰다. 한지음은 떨리는 몸으로 어떻게든 그런 진영숙을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건 허공밖에 없었다.그녀는 어둠 속에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언제 왔어?”방에서 나온 진영숙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강서희였다. “방금.”“너 나랑 어디 좀 가자!”진영숙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강서희는 순종적인 딸의 모습을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
한지음이 이유영의 이복동생이었다니, 강서희는 충격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진영숙은 즉시 강이한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연락했다. 잠시 후, 강이한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얼른 거실로 향했다.“빨리 처리해야 해. 너부터 일단 강주로 가 있어!”“알겠어!”강서희는 고분고분 답했지만, 지금 당장 움직일 생각은 없는지 소파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곧이어 뒤를 떠미는 진영숙의 손길에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지체하지 말고 바로 가!”“알겠다니까.”강서희가 아쉬운 눈길로 집을 나섰다. 강이한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진영숙은 그런 강이한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한지음, 강주에 가서 살게 할까 해.”진영숙이 앞뒤 설명도 없이 말했다. “갑자기 왜요?”강이한이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넌 이미 알고 있었지? 한지음과 이유영의 사이.”그 말을 들은 강이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영숙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너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니?”“….”“이게 얼마나 큰 일인데, 왜 말을 안 했어!”진영숙이 흥분에 숨을 거칠게 쉬었다. 만약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진영숙이 한지음을 집까지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 소문이 아직 밖에 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역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면, 강씨 가문은 얼마나 우스워졌을까?“이쯤 되면 한지음이 널 구해준 한지석의 동생이라는 것도 걔가 직접 퍼트린 게 아닌가 싶다. 그래야 우릴 압박해 집으로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강이한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그건 아니에요!”강이한이 단호히 말했다.“그래, 누가 그랬든 지금 중요하진 않지. 일단 한지음은 강주로 보내야 해, 알겠어?진영숙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날카롭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침묵했다. 얼마 전에 이유영과의 다툼에서 그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고 답했었다. 어떻게 눈도 보이지 않는 사람
“유영 씨, 해외지사에 좀 급한 일이 생겨서 출국해야 할 것 같아요. 같이 못 가줘서 정말 미안해요.”전화 너머 박연준이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에요, 일이 더 중요하죠.”“정말 미안해요, 돌아오면 우리 꼭 제대로 데이트해요!”“알겠어요.”이유영은 아쉬웠지만, 받아들였다. 그래야 박연준이 미안함을 잊고 일어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운전을 이어갔다. 비록 박연준의 부재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나온 이상 혼자라도 일단 즐겨 보기로 했다.잠시 후, 전시장에 도착한 이유영이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고급스러운 외제차 한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이한이 차에서 내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이유영은 얼른 다시 자기 차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뒤에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강이한이 그녀를 불러세웠다.“박연준, 최소 삼 년은 못 돌아올 거야. 함께 전시회 볼 사람 없어져서 아쉽게 됐네?”그의 말을 들은 이유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설마?”그녀의 뇌리에 좀 전에 박연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해외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일이 강이한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분노한 표정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내가 대신 같이 관람해 줄게.”이유영이 매섭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분노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끌어올랐다.“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유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해외로 나가게 된 이유가 강이한 때문이라면, 박연준은 어쩌면 상상이상의 위험에 빠질지도 몰랐다. 이유영은 다급한 손길로 박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락은 되지 않았다.“소용없어, 비행기 이미 떠났을 거야.”“너…!”이유영은 분노에 말문이 막혔다. 강이한이 재혼을 제안할 때만해도 그저 잠시 이성을 잃어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상
잠시 후, 카페에서 소은지와 만난 이유영은 오늘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들은 소은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뭐? 박 대표님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나도 모르겠어!”강이한이 무슨 수로 박연준이 청하시를 떠나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지금 상황이 이유영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것! 강이한은 진심으로 재결합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은지는 이유영이 걱정됐다.“은지야, 너도 잠깐 휴직하고 청하시를 떠나 있는 건 어때?”“설마 나한테까지 그러겠어?”소은지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강이한은 청하시에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가 이루자 한다면,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원하는 것을 위해 얼마든지 가혹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에 이유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지음은 정리됐으니, 이제 너랑만 해결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이혼해준 것도 네가 하도 조르니까 임시방편으로 일단 해준 것 인 것 같아.”“네 말은?”“강이한은 처음부터 널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고?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린 이유영은, 그 말이 상당히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너 당분간 여기 좀 떠나 있는 게 낫지 않을까?”“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어!”“….”“지금 내가 맡은 일이 한두 개도 아니고, 어떻게 떠나.”홀몸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이유영의 뒤엔 오로라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자리까지 있었다. 당장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럼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네.”소은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이한이 마음먹은 이상,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카페에서 나온 이유영은 머릿속이 온통 소은지가 했던 말들로 가득했다.“한지음은 정리됐으니, 이제 너랑만 해결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이혼해준 것도 네가 하도 조르니까 임시방
한지음은 강이한에게 너무도 중요한 존재였다. 만약 강이한에게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직 이유영과 아이뿐이었을 것이다.“유영아...”강이한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는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심지어 고통받을 자격조차 없었다.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곁을 지킬 권리도 자격도 없었고 이유영의 말처럼, 강이한은 정말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강이한이 이유영의 곁에서 겪었던 내적 변화를.이유영을 바라볼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으로 아팠다. 그 고통은 뼛속까지 쓰라리고 깊게 파고들었다....점심이 되자 또다시 쓰디쓴 약이 준비되었다.그때 박연준이 찾아왔다.박연준은 강이한과 서재에서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이 서재에서 나왔을 때의 무거운 분위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서주 쪽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우현 씨.”“네, 아가씨.”우현이 이유영의 부름에 공손히 다가왔다.“국물 맛있네요. 한 그릇 더 줘요.”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가 이유영의 마음속에 묘한 위안을 주는 듯 이유영의 말투는 가벼웠다.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유영과 강이한, 그리고 박연준 사이의 관계였다.두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을 때만 이유영의 마음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듯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에서 무겁고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이유영은 두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이번 생에서 두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그들을 미워하며 마주할 때마다 이유영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이건 인과응보와도 같았다.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과거의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아가씨.”우현은 조심
모두가 아이가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했다.왜냐하면 아이가 건강해져야 이유영도 비로소 괜찮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유영의 차분한 말이 이어질수록 강이한의 가슴은 점점 더 답답하게 조여 왔다.“그 아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까지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야.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는 거야?”이유영은 이런 이야기를 지금껏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그러나 지금, 강이한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이유영이 월이를 이용해 이온유를 구하지 못하게 막았는지를.그 아이는 이유영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언제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던 아이였으니, 이유영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강이한, 너 알아? 난 한 번도 너를 이렇게까지 미워해 본 적이 없었어.”“알아, 나도 알아.”강이한은 이유영을 끌어안으며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이유영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게 되었는지를.이유영은 단지 아이와 함께 평온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는 단순한 바람이 전부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원한을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 단순한 바람마저 결국 강이한의 손으로 모두 부숴버렸다. 그래서 이유영은 더 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두려움 속에 갇혀버렸다.그렇게 이유영은 강이한과의 싸움을 이어가며 아이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미안해. 내가 잘못했어...”강이한은 더 이상 이유영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그가 직접 겪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고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었다.어디에도 즐거운 기억은 없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심장은 항상 불타고 있었다.그 누구도, 월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지 못했다.“그만해.”“이게 네가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 아니었어?”“...”“이게 바로 그 아이를 키우며 우리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
“그때 소군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이를 낳지 말라고 했어.”그때 이유영의 주변 사람들은 이유영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며 설득하려 했다.하지만 아무리 주변에서 말려도 이유영은 끝까지 버텨냈다.“화상이 심했던 부위는 살을 도려내야 했어. 지금 내 몸에 남아 있는 움푹 패인 흉터들은 그때 생긴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긴 거야.”“...”“마취를 할 수도 없었어.”마취를 할 수 없었다는 이 말 한마디는 강이한처럼 강인한 사람마저 몸을 떨게 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몸에 남아 있는 흉터들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상처의 넓은 면적을 직접 본 그는 이유영이 겪었을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취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했다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사람들이 그러더라. 아이는 여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존재라고. 전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는데 월이를 통해 그 뜻을 알게 됐어.”그때 이유영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배 속의 아이를 지키겠다는 결심만큼은 굳건했다.이유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조차 어려웠다.“아무리 조심해서 약을 써도 내 몸 상태 탓에 결국 월이는 조산하게 됐어.”이유영은 마치 별일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강이한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유영이 겪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무겁고 가혹하게 느껴졌다.“유영아...”강이한은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목구멍은 점점 더 조여 오는 듯했고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알고 있어? 월이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거.”아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고통과 불안이 시작되었다.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물며 조산아를 키우는 데는 그보다 훨씬
그러나 그 세 글자는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쓰디쓴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을 떨리게 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표정과 떨리는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약을 삼킬 때마다 점점 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처마 아래 놓인 흔들의자는 이유영이 특히 애착을 가지는 자리였다.강이한이 말했다.“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들어가자.”“대나무 향이 나.”은은하고 차분한 대나무 향기가 이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넌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돼.”강이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인내심이 담겨 있었다.“비는 언제쯤 그칠까?”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우천시에 대한 기억은 끝없이 내리는 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 온 후로 비가 그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다음 주 내내 비가 온대.”“...”참으로 기묘한 날씨였다. 어떻게 이토록 비가 쉴 새 없이 내릴 수 있을까?우천시 사람들은 모두 이 기후에 익숙해졌을지 이유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우지 씨에게 수건 잘 말리라고 전해줘. 아침에 보니 수건에서 냄새가 나더라고.”사실 매일 수건을 잘 말리려 했지만 이곳의 습한 기후는 번번이 우지를 난처하게 했다.우지는 매일 정성을 다해 수건을 세탁하고 말렸지만 밤새 뽀송했던 수건도 아침이면 눅눅해지고 냄새가 배어 있었다.결국 매번 건조기에 넣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뽀송하지는 않았다.“알겠어.”강이한은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강이한은 이유영이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홍문동에 있었을 때도 이유영은 항상 완벽한 청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유영아.”“응?”“그 아이가 자라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좀 이야기해 줘.”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졌다.“네가 그걸 알 자격이
“기다려야 해!”강이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했다.“...”이유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서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맴돌며 무겁게 울려 퍼졌다.강이한은 이어 말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났어. 지금은 우천시에 머무는 게 더 안전해.”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유영은 이전에 엔데스 명우와 얽혔던 적이 있었고 강이한은 이유영이 다시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하고 있었다.지금 정씨 가문은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 어떤 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이런 시점에서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험 속으로 돌려보낼 리 없었다.이유영은 낮게 읊조리듯 물었다.“돌아가셨어?”이유영도 대충 파리 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그 문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했다. 엔데스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 문제에 깊이 휘말려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유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그렇다면 우리 집은...”“네 아버지는 신중한 분이니까 누군가에게 쉽게 휘둘리진 않을 거야.”강이한의 말을 듣고 이유영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금 이유영이 얼마나 가족을 걱정하고 있는지는 강이한도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잠시 이유영의 얼굴을 살폈다.“그럼, 소은지는?”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이 소은지였다.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와 얽힌 원한뿐만 아니라 엔데스 현우와의 관계에서도 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질 줄은 몰랐다. 엔데스 가문은 이제 완전히 갈라진 듯했고 그 속에서 이유영이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소은지였다.강이한은 미소를 가장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정말 모든 사람을 걱정하는구나.”이유영은 언제나 타인에겐 따뜻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무척 냉정했다.“...”이유영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
끝없는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유영의 마음은 서서히 조여 들었다.이유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길고 막막한 나날들이었다.어둠에 갇힌 사람에게 허락된 일은 너무나도 적었다.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을 마주하는 데에는 누구에게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이유영은 지금 그 말을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이 어둠을 마주할 용기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나를 파리로 돌려보내 줘.”이유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강이한의 마음은 이미 어둠에 억눌린 상태였는데 이유영의 요구를 듣고 나니 더욱 숨이 막혀왔다.“유영아...”“염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잖아. 그런데 약을 먹어도 전혀 좋아지는 기미가 없어.”이유영의 머릿속에는 수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나아질 기미조차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이유영의 말은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막막한지 그대로 드러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말을 들으며 눈에 깊은 고통과 상처가 서렸다.“수술... 생각해 본 적 있어?”만약 정말 수술을 하게 된다면...수술이 성공한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눈 수술은 다른 수술과 달랐다. 한 번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염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 어쩌면 최소한의 희망은 있었다.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다시 수술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지금 당장 수술을 하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한은 두려웠다. 강이한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유영과 관련된 일이었다.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강이한은 그걸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유영아, 나는 두려워.”강이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겁게 말했다.그가 두려운 것은 이유영의 수술이 실패로 끝나는 일이었다.만약 수술이 실패한다면 이유영은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이한은 그 끔찍한 결과를 감당할 자신이
현우는 송연미가 소은지를 괴롭혀 왔다고 믿고 있는 걸까?현우는 틀렸다. 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지는 깊은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요?”송연미는 이전에 말했다. 넷째 도련님과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송연미는 이런 방식으로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 사이의 연을 끊으려 했다.분명한 사실은, 송연미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넷째 도련님을 완전히 끊어내면서 넷째 도련님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렸다.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지금 현우가 송씨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그러나 상황은 달랐다.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모든 희망을 회장님의 죽음에 걸었었다.그러나 회장님이 떠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졌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현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일까?아니면 과거에 소은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우가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걸까?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현우가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지는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 어떻게...”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은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가 보였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은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소은지 씨는 반산월에 잘 머물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현우는 소은지에게 더 이상 많은 걸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
하지만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귀하고도 소중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소은지는 한 걸음 다가서서 현우의 넥타이를 정성껏 매만졌다. 그녀의 숨은 막히듯 답답했고 가슴은 아팠다. 이런 불편함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저는 여전히 예전의 삶이 더 좋아요.”그때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게 망가지기 전의 삶이었다.그때의 소은지는 자유로웠고 거침없었다.소은지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이었고 어떠한 방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 깊은 나락 속에서 이런 절망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소은지 씨!”“엔데스 가문 자체가 심연과 같은 존재예요. 그리고 이 파리도 제게는 심연과 같아요.”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소은지가 이렇게까지 파멸에 이른 건 파리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였다.아프냐고?너무 아팠다.숨이 막히냐고?너무도 답답했다. 예전의 소은지는 한 번도 인생에 이렇게까지 기복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소은지는 조심스레 현우의 넥타이를 정리한 뒤 말했다.“유영이의 세계는 이미 너무 흔들리고 있어요. 유영이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현우는 침묵했고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소은지가 보기에 이유영은 정말 불쌍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을 떠나려고 애쓰고 박연준을 떨쳐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하지만,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유영을 얽어맸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이유로 이유영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만약 강이한과 박연준이 없었다면, 이유영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당당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강이한과 박연준 때문에 이유영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지금은 어둠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이유영이 안타까울 뿐이었다.“소은지 씨!”현우의 목소리가 더욱 단호해졌다. 소은지를 바로 보는 현우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현우가 소은지를 지키는 이유가 이유영 때문이라는 건가?“파리를 떠나고 싶어요.”현우의 표정은 굳어졌고 목소리는
결국 송연미는 사람들에 의해 떠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송연미의 눈빛은 무거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소은지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송연미가 차갑고 냉정한 가면 뒤에 감춰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닿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진실이었다.여자의 운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특히 자신의 미래조차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현우는 묵묵히 소은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소은지를 놓아주던 현우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현우가 서류를 찢으려는 찰나, 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잠깐만요.”“...”현우는 동작을 멈추고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서류를 천천히 빼앗으며 말했다.“어차피 서명해야 할 서류잖아요.”“소은지 씨!”“엔데스 가문의 상황이 어떨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회장님의 죽음조차 이 싸움의 끝을 맺지 못했다는 걸 보면 일이 간단치 않다는 건 분명해요.”소은지는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소은지의 가슴은 짓눌린 듯 아려왔다.현우는 소은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당신...”“엔데스 명우가 지금 당신과 맞서고 있는 거잖아요, 맞죠?”그 말이 떨어지자, 현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송연미가 소은지에게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다.그리고 소은지는 그로 인해 자유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엔데스 회장은 끝내 어떤 결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가문은 단번에 분열되었고 문서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전기봉은 행방불명 상태였고 나머지 서류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