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문이 열리고, 이유영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키는 평균보다 작았지만, 그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비율이 좋았다. 거기에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까지, 진영숙은 자신이 알던 이유영이 많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고부지간으로 있을 때도 살가운 대화라고는 나눠본 적 없는 두 사람이었다. 침묵 속에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이유영이 여유로운 자세로 맞은편 소파에 앉아 물었다. 진영숙은 너무나 달라진 이유영의 태도에 큰 혼란에 휩싸였다.“대표님, 여기 커피요.”이때 비서가 쟁반에서 커피잔을 이유영과 진영숙 앞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마워요.”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이유영은 그제야 회의로 인해 쌓였던 피로가 조금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진영숙도 얼떨결에 함께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이혼하더니 잘 사는가 보네.”“그럼 못 살길 바라셨어요?”이유영이 평온하지만 비꼼이 들어간 말투로 답했다. 진영숙은 그 말투에 잠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밖으로 표출하진 않았다.“아직도 날 원망해?”진영숙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제가 그 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라도 하길 바랐어요?”과거 이유영이 아직 세강의 며느리로 있을 때, 강이한이 집을 비우기만 하면 진영숙이 찾아왔다. 이유는 다양했느나, 목적은 하나였다. 진영숙은 사사건건 모든 것에 태클을 달아 이유영을 괴롭혔다. 그렇게 진영숙이 한번 찾아오면 이유영은 강이한이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벗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그 세월을 버텼는지,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그때는 내가 좀 너무했지? 하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봐. 그럴 수밖에 없었어.”진영숙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유영은 무려 그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였으니까!크리스탈 가든이 어디 평범한 회사인가? 처음
끝까지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깜빡 속을 정도로 아주 노련한 연기였다. 이유영도 회귀를 겪지 않았다면, 진영숙이 변한 것이라 생각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강이한과 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원망은 무슨, 가당치도 않았다. 지금 이유영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바로 무관심이었다. 그토록 무시하고 멸시하던 존재가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것만큼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이유영은 진영숙이 순간 말문이 막혀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매우 통쾌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 억눌렸던 체기가 단번에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영숙이 아무리 온화한척 굴어도, 속은 화를 참느라 아주 죽을 맛일 테니까. “유영아.”진영숙이 입에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호칭이 나왔다. 이유영은 기가막혔지만, 진영숙이 도대체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굴더니 결국 더 강한 힘 앞에선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구나! 재벌들의 세상이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너의 둘이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야.”“….”“둘이 아주 잘 어울렸는데, 내가 모든 걸 망쳐버렸어.”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진영숙은 매우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떻게든 이유영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전혀 흔들림이 없이, 오히려 전보다 더 싸늘하고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진영숙을 바라보고 있었다.진영숙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넘어올 기색조차 없는 이유영의 태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내가 이러는 거 너의 삼촌 때문이 아니야.”“하! 아니라고요?”이유영이 코웃음 치며 진영숙을 몰아붙였다. 이유영은 강이한과 이혼한 것으로 더는 강씨 집안 사람들과 볼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강씨 집안 사람들과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굳이 거기까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진영숙이 제 발로 찾아온 마당에 굳이 봐줄 이유는 없었다. 둘의 입장은 이제 완전히 뒤
이유영의 얘기만 하면, 강이한은 항상 저기압이었다. 진영숙은 그것 때문에 아들과 말다툼 했던 적이 몇 번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의 입장에선 강이한이 항상 이유영의 편을 들어줬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온 세상이 강이한과 한지음의 사이를 아는데, 포장한다 한들 의미 없어요!”“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진영숙이 얼른 받아쳤다. 그녀에게 한지음은 은인의 동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경원하고도 아무 사이 아니야. 이한이가 걔를 어떻게 대했는지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잖아?”부모는 자기 자식을 객관화되게 볼 수 없다. 진영숙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입장에선 강이한은 항상 옳은 존재였고, 잘못한 것은 이유영이었다. 둘이 이렇게 이혼하게 된 것도 그녀의 입장에선 언제까지 이유영의 문제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유영만 생각을 바꾼다면 해결 될 문제라고 여겼다.“내 말이 틀렸니?”“….”“우리 아들은 그 둘한테 마음 주지 않았어! 너한테 일편단심이었다고!”전에 진영숙이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둘의 사이가 더 나빠지길 바라며 움직였으니까.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천하의 진영숙이 그토록 무시하던 이유영을 다시 며느리로 들이기 위해 이토록 비굴해질 수 있을 줄이야!“한지음은 그냥 은혜를 입은 사람의 동생이니까 챙겨주는 것뿐이야. 너도 내 성격 알잖아?”진영숙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한지음도, 유경원도, 모두 세강의 며느리가 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못 둬!”역시나 이유영의 예상했던 대로였다. 진영숙이 조급해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리라!“나도 이런 것까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이제 한지음이 마냥 착하지만 않다는 걸 알아. 그러니 너희 둘 재결합하는 거, 다시 한번 생각해봐.”당근과 채찍의 적절한 사용, 진영숙은 이 전략으로 이유영을 회유하려 들고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진영숙이 할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세강은 체면과 명성에 매우 신경 쓰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일에 휘말리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진영숙은 물론 그녀의 시어머니, 유혜정 또한 모두 굉장히 보수적인 노인이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이 상황은 도무지 받아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아무리 이유영과 강이한이 이혼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한때 부부였던 사이 아닌가? 그런데 둘이 갈라졌음에도 그 동생이 세강 본가에 머물고 있다? 이보다 황당한 얘기는 없을 것이다!“그것까지 설명할 정도로 한가진 않네요.”이때, 손목 시계를 잠시 쳐다보던 이유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이유영이 응접실을 나가려던 찰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영숙이 뒤에서 불렀다. 이유영이 살짝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또 무슨 일인데요?”“그럼 너는 걔를 어떻게 생각하는데?”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진영숙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너무 혼란스러웠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한 질문이었다.“제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이유영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답했다. 한지음은 처음부터 이유영을 노리고 세강에 접근했다. 그러니 당연히 좋게 생각할 리 없었다.“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게. 우리 아들한테 다시 한번 기회 주면 안 될까?”이 순간에도 진영숙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진영숙은 이유영이 이 사실을 이 시점에 알려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지음과의 관계를 처리해 명확한 태도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영숙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이유영이 조롱 섞인 표정으로 진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기회요? 하!”이유영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기회는 아직 미련이 남은 사이나 할 수 있는 얘기였다. 이미 끝이 난 사이에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강씨 본가에서.강서희는 침대에 누워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
복수한다고 했던 일들이 도리어 이유영에게 날개를 달아 준 꼴이 되어버린 격이 아닌가? 한지음은 너무나도 억울했다. 제 발로 이유영 대신 지옥에 들어오게 되어버렸으니까!”오빠를 만나게 해달라고? 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니? 너랑 오빠가 단 둘이 만날 일은 앞으로 절대로 없을 거야!”그 말과 함께 강서희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 한지음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강이한과 단 둘이 있지 못하게 하겠다는 건, 그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이 느껴졌다. “강서희!”“꿈 깨!”“말했잖아! 난 오빠한테 이성적인 관심 없어!”“거짓말인 게 뻔히 보이는데, 누가 믿을 줄 알고?”한지음이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한순간에 나락에 떨어진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부족함이 하나 없지만, 자신의 의사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형신세가 되어버렸다!“어디 청하시 뿐만인줄 알아? 그 밖에서도 오빠랑 인연 맺고 싶어서 다 안달 이었어! 내가 그 년들을 떼어낸다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한지음이 채 말을 하기도 전에 강서희가 계속했다. “….”“너 같은 년 내가 제일 잘 알아!”“강서희!”“처음엔 다 너처럼 순진한 얼굴로 접근하지, 그런데 뒤집어보면 다 속들이 똑같아! 흥! 결국 오빠한테 꼬리치기 바쁘지!”강서희가 한지음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흉내 내며 조롱했다.한지음은 강서희가 마치 악마처럼 느껴졌다. 이 호화스러운 저택이 지옥으로 느껴지게 만든 진짜 악마!“그러니까 이유영이 이 강씨 집안에서 괴롭힘 당했던 것도 결국 네 짓이었단 말이야?”“우리 오빠한테 흑심 품은 여자들은 다 좋게 안 끝나게 되어 있어!”강서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한지음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 집안으로 들어선 것이 악몽의 시작이 될 줄은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지음은 강서희의 말들을 통해 이유영이 이곳에서 얼마나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지 실감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도 깨달았다.“
한지음은 힘겹게 아픈 다리를 이끌고 옷장으로 향했다. 옷장엔 전에 조형욱이 가져다 놓은 그녀의 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석구석 어디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곳을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핸드폰이 잡히지 않았다.“한지음 씨, 약 드실 시간이에요. 왜 이렇게 방을 어지럽혔어요!”방으로 들어온 도우미가 방의 모습을 보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제 핸드폰 어디 있어요?”그녀는 당장 강이한한테 연락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감옥을 벗어나야만 했다. 한지음은 강서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너무나 두려웠다. 강이한을 향한 강서희의 집착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강서희는 자신이 자길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고 있었다. 강이한의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아야 자신에게 올 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사모님이 가져가셨어요. 눈도 불편하니 사용할 수 없을 거라 하셨죠. 그러니 용무가 있으면 저희한테 말씀하면 된다고 하셨어요.”도우미가 조금의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아주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 것에 손을 대!”그 말에 한지음은 더 분노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방음이 잘 되어 있는 방밖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한지음 씨, 욕심 적당히 부리세요. 이미 그쪽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 사모님이 다 대주고 있다는 거 잊으면 안 돼요. 그러니 지금은 잘 먹고, 잘 쉬는 것에만 전념하세요.”목숨만 붙어있으면 된다. 도우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지음은 날개가 잘린 채 철창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되었다. 앞도 볼 수 없는데, 손과 발이 달려 있어도 주변이 꽉 막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디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도우미는 말없이 옆에 약을 아무렇게 내려 놓고 방을 나왔다. 방이 어질러 있던 말던, 전혀 뒤처리를 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향한 곳은 강서희가 있는 곳이었다.“한지음 씨가 대표님과 통화하고 싶다고 하네요.”“흥!
진영숙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강서희는 당연히 그녀가 이유영이 아닌 다른 집안을 찾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진영숙은 자존심보다 욕심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알겠어.”강서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느덧 파랗던 하늘도 서서히 석양이 지고 있었다.한편, 크리스탈 가든에서.이유영은 사무실로 돌아와 핸드폰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지현우가 들어와 그녀를 불렀다. “대표님!”“내일 일정 어떻게 돼요?”“청하 쪽에서 이 대표님이 오신다는데, 만나보실래요?”지현우가 일정표를 확인하며 말했다.“그건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그렇게 중요한 일정 없으면 내일은 좀 따로 움직일게요.”“알겠어요.”지현우가 나가자, 이유영은 서랍에서 전시회 티켓을 꺼냈다. 이 티켓은 전에 정국진이 주고 간 것이었다. 그녀는 오늘 진영숙과의 만남으로 다시한번 정국진의 위상을 깨달았다. 어쩌면 앞으론 이런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유영은 심난해지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박연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유영이 주동적으로 그에게 전화를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일 시간 있어요?”“네?”“전시회가 있는데, 같이 갈래요?”“좋아요.”“그럼 내일 오전 10시, 순정동에서 출발할까요? 회사로 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잠깐만요.”전화 너머 박연준이 비서에게 스케줄을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그가 답했다.“아침에 회의가 있어서, 바로 전시장에서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주소 보내주면 거기서 만나요.”“좋아요.”통화를 마친 후, 이유영은 전시회 티켓에 적힌 주소를 찍어 박연준에게 보냈다. 하지만 바쁜지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오후가 되었고 이유영은 슬슬 손에 있던 서류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 다음 뒤에 일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어, 유영아.”“같이 밥 먹을까?”“좋아, 나도 일 곧 끝나. 데리러 갈게.”“아니야, 내가 갈
“계속 여기서 얘기할 거야?”강서희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나도 일정이 있는 사람이야. 그렇게 중요한 일 아니라면 차리라 내일, 아니 모레 오던가.”“바쁘긴 많이 바쁜가 봐? 하긴, 무려 그 오로라 스튜디오의 창립자이자 이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이사가 되었으니, 당연하겠지!”강서희는 자신보다 한 뺨이나 작은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이유영이 강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사실이 미치도록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강이한으로부터 시작된 것, 둘이 이혼한 뒤로는 강서희가 이유영을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좀 전에 받았던 전화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유영이 위세가 강씨 가문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10분이면 돼?”“그 정도면 되지.”결국 두 사람은 로비 한쪽에 있는 휴게실로 갔다. 강서희는 우아하게 직원이 놓고 간 커피를 마셨다. 입양아이긴 하지만 얼마나 진영숙이 정성을 들어 키웠는지 보이는 순간이었다.“오늘 엄마가 찾아왔다며?”강서희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날카롭게 이유영을 쳐다보았다. 전에 강씨 가문에 있을 때도 많이 보여주던 모습이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그토록 두터운 선입견을 가지게 된 이유여도 강서희였다. 이유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과거가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이유영이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강서희가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외모로 봐서는 강서희는 결코 이유영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엄한 데에 정력을 쏟는 모습에 이유영은 안타까웠다. 강서희는 이유영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핸드폰을 이유영 앞으로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엔 한 영상이 틀어져 있었다.“이게 뭔데?”“한지음. 너도 궁금할 것 같아서, 우리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강서희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뭔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이유영은 화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답했다.“관심 없어.”“한지음 때문에
무언가 생각난 듯, 송연미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송연미의 눈빛은 단순히 차가운 것을 넘어 얼음처럼 날카로웠다.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인지 너도 알고 있겠지?”“...”“우리 아버지의 지지가 현우에게 굉장히 중요해.”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송연미를 차지했기 때문이다.결혼 후, 엔데스 운빈이 아무리 송연미를 존중했어도, 송연미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수년 동안, 송연미는 엔데스 운빈의 곁을 떠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최근에야 드디어 아버지를 설득해 아버지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 결과가 송연미를 이렇게까지 괴롭게 만들 줄은 몰랐다.“소은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소은지가 침묵하자, 송연미는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껏 방법을 찾지 못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왜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걸까?그 이유는 단 하나, 소은지 때문이었다.소은지가 느낀 현우의 변화를 송연미도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둘이 느낀 대상은 완전히 달랐다. 송연미의 눈에는 엔데스 현우의 변화가 모두 소은지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그렇기에 송연미는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이대로 두면 상황은 더욱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치달을 것이었다.송연미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소은지에게 단호하게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소은지는 그런 송연미를 비웃으며 조소 섞인 미소를 지었다.소은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네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면 어떡할 건데?”소은지는 자신이 하는 말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하는 게 분명했다.소은지는 송연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송연미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그 이유는 명백했다. 송연미는 이미 상황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엔데스 현우도 결
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이유영 씨에 대한 소식, 알고 있나요?”“유영이 말인가요?”“네.”“며칠 전에 백산 별장에 갔었는데, 거기서 들은 말로는 유영이의 두 눈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소은지의 마음은 조여드는 듯한 답답함에 사로잡혔다.예전에 정씨 가문에 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이유영의 시력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렇기에 소은지마저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력을 잃는다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강이한에게 끌려간 상태라서 더욱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강이한은 이유영에서 늘 문제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이 말을 들은 순간, 옆에 있던 현우의 몸이 떨렸다.소은지는 현우의 변화를 감지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엔데스 현우는 떠났다. 현우는 늘 그렇듯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아무리 바빠도 엔데스 명우가 이곳에 올 때마다 현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돌아왔다는 점이었다.소은지가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현우는 계약 조건에 따라 소은지를 철저히 보호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소은지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소은지를 철저히 보호했다.소은지는 그에게 필요한 단서를 제공했고 현우도 소은지에게 필요한 보호를 제공했다.현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연미가 찾아왔다.송연미와 소은지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갔다.카페에는 둘만 남아 있었다. 송연미는 앞에 놓인 커피잔을 손에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엔데스 운빈과 어제 이혼했어.”소은지의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잠시 멈췄다.놀란 얼굴로 송연미를 바라보았고 눈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스쳤다.송연미는 그런 소은지를 바라보며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평온함과 해방감이 어렴풋이 비쳤다.하지만 그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 두 사람은 차갑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소은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소은지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소은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하시에서도 오직 이유영만이 유일한 존재였을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이유영이 소은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강이한이 나타난 후로 이유영의 삶은 늘 혼란스러웠다.대부분의 시간 동안, 소은지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유영을 붙잡아주며 지탱해야 했다.파리에 온 이후, 소은지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생각을 더욱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지금...“흥! 현우야, 앞으로 네가 얼마나 더 보호할 수 있을지 지켜볼게.”엔데스 명우는 비웃듯 말하고는 매섭게 돌아섰다.그의 등 뒤로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 나왔다.현우는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방금 전에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 소리에 소은지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겨요?”“당신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게 웃겼어요.”두려움? 그렇다.조금 전, 엔데스 명우 앞에서 어떻게든 힘을 짜내 맞서 싸웠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그 순간, 소은지는 진심으로 두려웠다.그리고 엔데스 명우가 떠난 뒤에도 소은지의 등에선 여전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당신도 알잖아요. 당신 형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란 걸!”소은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미친 사람이죠.”소은지가 엔데스 명우 곁에 있을 때 어떤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었는지, 여러 번 도망쳤다가 결국 어떻게 붙잡혔는지,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현우를 만난 뒤에야 소은지는 반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은지는 모든 것을
한껏 완화된 긴장감은 소은지의 한마디로 다시 불이 붙었다.소은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조롱과도 같았고 어딘가 날카로운 독기를 풍겼다.소은지는 분노로 붉어진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은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생생히 드러냈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담담히 말했다.“병이 그렇게 심각했다면 죽음도 끔찍했겠네.”소은지의 말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욱 후벼팠다.설유나는 죽기 직전까지 엔데스 명우에게 애원했다. 설유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온갖 수단과 계략으로 쟁취한 모든 것을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하지만 설유나가 신처럼 여기던 엔데스 명우조차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그 상황에선 누구도 설유나를 구할 수 없었다.그렇게 설유나는 엔데스 명우의 눈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고 그 절망감은 지금까지도 엔데스 명우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그는 설유나를 구할 방법이 있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한 이유는... 소은지 때문이었다.“이게 진짜...”남자는 이를 악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소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말했다.“설유나는 시작일 뿐이야.”소은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앞으로도 엔데스 명우에게 닥칠 일이 더 많을 텐데, 벌써 이렇게 화를 내면 나중에는 어쩌려고?소은지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도발하듯 엔데스 명우를 바라봤다.분위기는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엔데스 현우가 설유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다.형제 관계가 아무리 냉랭해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엔데스 현우도 예외는 아니었다.역시나, 엔데스 현우가 이곳에 나타났다.“형, 지금 뭐 하는 거야?”엔데스 현우는 한걸음에 다가가 엔데스 명우의 손에서 소은지를 빼내 품에 안았다.엔데스 현우가 소은지를 감싸는 모습을 보자 엔데스 명우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너,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형은 세상이 이미 변했다는 걸 잊었나 보네.”엔데스 현우의 목소리
소은지의 냉정한 태도와 엔데스 명우의 거칠고 격렬한 분노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소은지는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고 무관심해 보였다.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해 온 엔데스 명우조차도 지금 소은지가 풍기는 차가움에 섬뜩해질 정도였다.“정말 냉정한 사람이네.”남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내뱉으며 목소리에는 위험이 가득했다.소은지는 차분히 답했다.“미안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나 일에 대해선 공감이 잘 안돼.”일이 직접 자신의 삶에 닥치지 않는 한, 그 감정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이건 냉정함이나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은지는 설선비, 설유나와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그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해도 결코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러니 설선비와 설유나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소은지는 그저 냉정했을 뿐이다.더군다나,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면, 설선비와 설유나가 겪은 일에 어떠한 연민이나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그 순간, 갑자기 목덜미에 강렬한 힘이 느껴졌다. 엔데스 명우의 손은 마치 소은지의 목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조였다.분명한 건, 엔데스 명우는 설선비와 설유나의 죽음이 모두 소은지의 탓이라고 믿고 있었다.설선비는 소은지의 고소로 궁지에 몰려 죽게 된 것이었고 설유나는 소은지의 외면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소은지, 너 같은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잔혹했다.팍!뺨을 세게 내려치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공간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엔데스 명우가 손을 놓는 순간, 소은지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았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소은지는 흔들림 없는 고요한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은지에게는 조금의 동요도, 당황스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숨을 삼켰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엔데스 명우의 사람들에게 통제당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소식이 진짜든 가짜든 간에 상대방은 긴장하기 마련이다.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박연준의 사람들은 이온유가 강이한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강이한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아마도 강이한은 그의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의심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박연준은 강이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이한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소식을 흘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명심하겠습니다!”문기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박연준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이를 강이한의 곁에 둘 순 없다.”강이한을 찾을 수 없다면, 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그동안 서주가 강이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유영을 서주의 소용돌이에 더 깊이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유영을 그곳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박연준은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유영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의 주변은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알겠습니다.”문기원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박연준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박연준은 말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문기원은 오랜 세월 박연준의 곁에서 함께하며 박연준이 이유영을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사람은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박연준 역시 그랬다.그리고 강이한 또한 마찬가지였다....현재 서주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된 상태였다. 많은 이들이 강이한을 찾고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보였다.한편, 파리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졌다.설유나는 엔데스 명우가 적합한 기증자를 찾기도 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반산월.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소은지를 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유영의 곁에 머물러 있겠다고?이것은 이유영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결국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심지어 보름이 지나도 강이한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저 말없이 이유영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이한의 존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파리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었고 서주의 상황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강이한은 매일 외출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의사는 고집이 워낙 세서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우천시에서 보름이 지나도록 이유영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의사들로부터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강이한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사를 데려오겠다는 각오로 노력하고 있었다....한편, 서주에서 박연준이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이유영의 두 눈이 완전히 실명했을 수도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정국진 쪽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 원인은 알프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아직도 소식이 없니?”서재 안, 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문기원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없습니다.”이유영의 소식은 단 한 마디도 들려오지 않았다.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박연준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주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데리고 사라질 줄은.게다가 벌써 보름 가까이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대체 어디로 데려간 걸까?”박연준은 미간을 짙게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이 소식을 들은 일주일 동안, 박연준은 밤마다 뒤척이며 이유영의 걱정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이유영의 시력이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만약 알프산의 사건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더 나빠진 것이라면...박연준은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점점 조여 왔다.“찾아볼 곳은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박
강이한은 알아챘다. 이유영이 일부러 강이한을 자극하고 있다는 걸.강이한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일부러 화를 돋워 강이한을 떠나보내려는 의도였다.이유영은 더 이상 강이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싶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강이한이 설마 다 알아챈 건가?“10년이란 세월이야.”강이한은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는 어떤 관계도 서로를 모를 수 없다고 말했다.10년이었다.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든 강이한은 이유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유영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점심 식사.무거운 침묵 속에서 점심시간이 흘렀다. 이유영이 가장 좋아하던 우천시의 지역 요리였지만 강이한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음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말을 너무 많이 했던 걸까? 이유영은 오후 내내 강이한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강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철저히 강이한을 무시하고 있었다.강이한은 우천시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우천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음식을 내밀었지만, 이유영은 한 입도 손대지 않았다.“유영아.”강이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강이한도 알고 있었다.이유영과 얽힌 수많은 일들만으로도 이유영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지금은 연서의 사건까지 얽혀 있으니...이유영의 마음속 상처는 단시간에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었다.“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눈도 빨리 낫지 않을 거야. 그러면 내 곁에서 빨리 벗어나지도 못할 거야. 잘 생각해 봐.”“...”강이한은 말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강이한과 잘 지내지 않으면 강이한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인 건가?아니면 이유영의 눈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곁에 있겠다는 뜻인 건가?“흥!”이유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웃는 듯한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럴 시간이 있긴
이 정도도 못 견디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유영은? 이유영은 이전에 강이한의 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고 참아내야 했던가? 강이한은 그런 기억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유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손 놔!”“네 상태가 나아지기만 하면, 네가 뭘 말하든 다 받아들일게!”강이한은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모든 것은 이유영의 눈이 나아진 뒤로 미루어야 했다. 지금 이유영의 감정이 더 격해지면 안 됐다. 강이한은 진심으로 이유영이 걱정되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이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강이한은 답답했다. 이유영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이 손 놓으라고!”이유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강이한은 이유영의 완강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유영의 단호하고 강한 의지는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가장 진실된 이유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강이한의 머릿속에 지난 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한 건 아마 이유영이 실명한 이후였던 것 같았다.실명하기 전까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강이한을 믿었다. 그때를 떠올릴수록 강이한의 마음은 점점 더 쓸쓸해졌다. 이유영이 말했듯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주었었다. 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이 준 기회들을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었다.강이한 스스로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유영을 조금도 탓할 수 없었다.“유영아!”강이한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떼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강이한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유영이 다칠까 봐 강이한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이유영은 더듬거리며 숟가락을 잡으려 했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을 돕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이유영은 냉랭하게 말했다.“모두 나가줘.”“아가씨!”“나 혼자 할 수 있어요.”이유영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여전히 차가웠다. 우지와 우현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