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들어가자 긴장된 분위기가 겉돌았다. 사용인들 모두 바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이런 그들을 보며 정국진은 이리저리 손짓하며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삼촌.”이유영의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사용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이유영은 모시기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쉬운 편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에 이토록 긴장할 일이 없었다. 정국진이 이유영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비록 중년에 접어들며 나이가 들었지만, 그 특유의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젊은 시절 그는 분명 여러 여자를 홀리고 다녔으리라!이유영은 비록 작은 체구지만, 아주 힘찬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삼촌, 뭐 하세요? 오신 김에 아주 집을 뒤엎으려고요? 밤도 늦었는데, 사람들 힘들어해요.”“뒤엎다니! 내가 언제? 너야말로 집안 꼴이 이게 뭐니?”“….”“가구들끼리 톤도 안 맞고, 엉망이잖아!”“됐어요, 됐어. 로열 그룹 회장님이 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요!”“네가 불편할까 봐 그러지!”“여기 정말 편해요! 그리고 전 이런 거 신경 안 써요!”강이한과 함께 있던 시절 그녀는 나름 자신이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정국진 앞에 서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괜히 대기업 회장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사에 모든 사람, 모든 것에 철처하고 깐깐한 사람이었다. 이유영은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여긴 어쩐 일이예요?”“회사에 여기에도 지사가 있는데, 요즘 좀 문제가 있어서 확인 좀 하러 왔지.”“지사요?”“그래.”“….”로열 글러벌 그룹이 청하시에도 지사가 있다는 얘기는 처음이었다!놀란 그녀의 표정을 본 정국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괜히 불필요한 소리가 나올까 봐 우리 회사 이름을 쓰지 않았어. 여기 사람들은 그 지사가 우리 로열 글로벌 그룹 거라는 것도 모를걸.
”강이한과의 일은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마. 진짜 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널 전적으로 믿을 테니까!”전적으로 믿는다. 이유영은 순간 마음이 찌릿했다.“저 이제 신경 안 써요.”이 말 할 때, 이유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이때 정국진이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입을 열었다.“전에 알아보라고 했던, 그 한지음이랑 연관된 일 말이야, 결과 나왔어!”“진짜요?”“하지만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닐 거야.”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정국진은 이유영에게 말하지 말지 고민했었다.하지만 전에 조민아가 이유영이 개인 탐정까지 고용해서 조사하고 있다는 얘기들 듣고 마음을 굳혔다. 얼마나 이 일이 이유영에게 절실한지 느꼈기 때문이다.그리고 정국진이 말해주지 않아도, 언젠간 이유영이 알아낼 일이었다.이유영이 침을 꼴깍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정국진이 앞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사실 한지음이 미워하는 건 너의 엄마야.”“….”‘엄마를 미워한다고?’“삼촌.”그녀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딱딱해졌다.이유영을 바라보는 정국진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스쳤다.이 소식은 절대 이유영에게 좋은 얘기가 될 수 없었다.“내 생각에 이 일은….”“말씀해 주세요!”정국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유영이 입을 열었다.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이유영에게 알리지 않고 일을 처리하고자 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한지음이 그녀에게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렸다. 회귀 전에 한지음한테 빼앗긴 망막은 그렇다 쳐도, 마지막 순간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그 화재도 한지음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이유영과 한지음 사이엔 씻을 수 없는 악연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 그 근원의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유영아.”“말씀해 주세요. 저 강해요. 잘 버틸 수 있어요!”이유영은 어쩌면 한지음과의 관계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이 그 깊은 내막을 알게 되고 견디지 못할까 봐
“그만해!” 강서희는 그의 화난 목소리에 순간 멍해졌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오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한테 어떻게 화를 내....'강이한은 평소 강서희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영이 강씨 집안의 며느리로 있을 때도 그랬다.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그는 항상 강서희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번 상황은 강서희에게 충격이었으며, 그녀는 강이한의 변화된 태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넌 이만 돌아가.”강이한의 짜증은 강서희의 서운한 표정을 보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과거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강서희를 예전처럼 바라볼 수 없었다. 여전히 동생으로서의 애정은 있지만,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인내심은 소진되었다. 강이한은 강서희가 이유영에게 저지른 일을 알고 있었다.강서희는 강이한의 눈빛에서 분노를 감지하고 억울함을 느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 표정을 통제하며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나 엄마 옆에 있을래.”강서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누구라도 연민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애처로웠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녀의 감정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강이한의 무반응은 강서희를 더욱 흔들었다.그녀는 강씨 집안에 처음 입양되었을 때의 두려움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매일 밤 버림받을지, 상처받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했다. 현재는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씨 집안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이 항상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강이한의 냉담한 태도는 강서희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럼 넌 여기 있어. 난 지음의 병실에 좀 다녀올게.”강이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서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마음속은 폭풍이 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강이한이 한지음에게 부드럽게 ‘지음’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며, 강서희는 자신의 가슴
“그렇다는 건 결국 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거잖아.”강이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불확실한 정보와 추측에 기반한 정보는 강이한이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기업의 총수로서 활동하며, 그는 불확실성이 어떻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몸소 경험했다. 그러한 정보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확실하고 검증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원칙은 그의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전화를 끊은 강이한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그는 한지음이 어떻게 시력을 잃게 되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한지음의 깊은 아픔이 느껴져 가슴이 저렸다. 그 아픔은 이유영에 대한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병실로 돌아온 그는 한지음이 자신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상처는 이미 새로운 붕대로 다시 감싸져 있었다. 강이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미안함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일어났어...” 강이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한지음은 약간 힘겨워 보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빠가 전화하는 소리에 깨어났어요. 오랜만에 듣는 소리라서...”그녀의 말에 강이한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한지음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물 마실래?”“아니요, 괜찮아요.” 한지음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강이한은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한지음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없어, 그는 마치 불안한 물결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심란해진 그는 담배를 찾으려 했으나, 한지음의 모습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강이한의 복잡한 마음을 눈치챈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곧 수술이 가
강이한이 한지음을 바라보며 말했다.“곧 좋아질 거야. 나 믿지?”곧이라고 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누가 아는가?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렇게 있는 것도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어둠도 생각만큼 그리 무섭지 않고… 오빠, 저….”“한지음!”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끼어든 강이한, 그는 이런 한지음의 모습이 너무나도 속상했다.“일단, 잘 쉬고 있어.”강이한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가 병실문을 나가기 직전, 뒤에서 한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오빠, 지금 낮이에요? 아니면 밤이에요?”강이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번 상황은 그에게도 너무나 버거웠다. 어둠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한지음을 생각하며, 그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평범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한지음이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은 상황, 그 고통의 크기가 그는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한지음에게 이제 밤과 낮의 차이가 느껴질까? 그런 생각이 들며, 강이한의 마음은 먹먹해졌다. “약속할게,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좋아질 거야.”강이한은 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한지음의 귀에 닿자, 조금 마음의 안정이 되찾아졌다. “오빠만 믿을게요.”한지음은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며 강이한의 감정을 교묘하게 조종했다. 그녀의 계획대로, 강이한은 점차 그녀의 함정에 빠져 뜻대로 움직이게 되었다.강이한은 병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지음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병실 앞에 경호원 두 명을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보도의 출처를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누구든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면, 책임을 피할 수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대표님.”조형욱이 전화 너머에서 답했다.단 몇 분 만에 강이한은 한지음에게 견고한 보호막을 구축했다. 이유영이 위험에 처했을 때보다 훨씬 빠른 행동이었다. 한편, 병실 안에서 한지음은 강이한이 남긴 말을 곱씹고 있었다.
한지음은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자 점점 더 초조해졌다.한편, 순정동에서 이유영은 정국진으로부터 조사 결과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때로는 놀라움, 때로는 분노, 때로는 두려움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마침내 모든 사실을 들은 이유영은 큰 혼란에 빠졌다. 깊은숨을 내쉰 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정국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한지음이 아빠가 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거예요?”“그래.”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엄마가 돌아가시게 된 것도 결국 이것 때문이에요?”“그렇지.”이유영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의 죽음이 아빠를 잃은 슬픔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드러난 진실은 충격적이었다가족을 모두 잃고 남겨진 이유영은 홀로 남겨진 재산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녀는 부모님의 사랑을 믿으며 외로움과 고난을 이겨냈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폭풍우처럼 격동하는 그녀의 감정을 앞에 두고, 조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안 그래도 너의 숙모가 알리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했는데, 나는 네 고집을 아니까….”정국진은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유영은 너무 어렸고, 별도의 조사가 없었다면 평생 이 진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컸다.이유영은 멍하니 정국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는 충격과 혼란이 서려 있었고,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외도한 건 아빠인데. 겨우 엄마가 그 여자한테 따졌다고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마음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정국진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의 대한 남은 이야기를 계속 들려줬다. 그는 이유영이 어차피 직접 조사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기로 결정했다.이유영의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상대는 과부였다. 그 과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
그녀가 깊은 고민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자,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유영아!”“네.”“너무 이 일에 대해 생각하지 마. 내 쪽에서 어떻게 해결해 볼게.”“아니에요!”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정국진이 전한 소식은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그녀는 이러한 개인적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모든 것을 천천히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준비가 되면, 이유영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해결할 계획이었다.이전까지는 이토록 복잡한 배경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지음을 동생으로 받아들일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한지음과 같은 피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유영은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이유영은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속으로 치솟는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유영아.”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정국진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유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굴이 조금이나마 평정을 되찾은 기색이었다. "괜찮아요." 비록 그녀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정국진은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한지음은 복수를 계획하며 처음에는 이유영의 엄마를 대상으로 삼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자, 다시 타킷을 이유영에게로 돌린 것이다. “조사한 바에 인하면, 한지음은 성인이 되자마자 곧바로 너의 아버지 재산을 조사했다더라고.”“재산이요?”“그래.”정국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이유영이 기가 찬 듯 웃었다.“혼외자도 상속권을 누릴 수는 있으니까, 그걸로 엄마를 괴롭히려는 심산이었겠죠! 아주 헛다리 짚었네요!”이유영이 어렸을 적,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채고 재산 명의를 자신에게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이유영의 부모님 재산은 모두 어머니의 명의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 불행하게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그 모든
다음 날 아침, 이유영은 일찍 눈을 떴다. 하지만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정국진이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이유영을 기다리고 있었다.“잘 못 잤어?” 정국진이 이유영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이유영은 어제저녁에 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되새기며 답했다. 그렇게 놀라운 내용을 하룻밤 사이에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그때 정국진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러니까 너의 숙모가 걱정하지." 그의 목소리에는 이유영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외숙모를 떠올리자 이유영은 마음이 다시 따뜻해졌다. 회귀 전과는 달리, 이제 그녀의 곁에는 정국진과 그의 가족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이유영은 과거와 같은 상황에 다시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느꼈다.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이 정국진에게 말했다. “곧 가셔야죠?”이 말을 들은 정국진이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그러게, 곧 기사가 도착할 시간이네. 너도 같이 가자.”“저요?”“그래.”정국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컵을 쥐고 있던 이유영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청하시는 사방에 눈과 귀가 달린 곳이었고, 그녀는 괜히 새로운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정국진은 오래 머물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로 인해 정국진이 불편한 상황에 휘말릴까 봐 걱정됐다“저는 따로 갈게요.”이유영은 빠르게 사양했다.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우연히라도 강이한과 마주치는 일이었다. 과거 포르쉐와 벤츠를 타고 다닐 때 그와 부딪혀 곤란한 상황에 휘말렸던 경험이 있었다. 만약 오늘 정국진과 함께 있다가 강이한을 만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것이다. 강이한은 여전히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정국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또 화풀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한편, 정국진은 이유영의 거절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설마 강이한 때문에 그래? 너희 이미 이혼했잖아, 뭐가 걱정
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아빠?”“아니야, 가서 쉬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정국진의 눈에 스친 망설임을 이유영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파리와 서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으니까.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이 말했다.“그럼 전 방으로 돌아갈게요.”“응.”이유영이 서재를 나서자 정국진만 남은 공간에는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서주에서 박연준이 돌아왔다.그리고 강이한은...정국진은 사람을 보내 그의 행방을 찾으려 했지만 강이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는 떠날 때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췄다. 마치 세상에서 존재조차 지워버린 듯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수술 후에는 이유영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이유영을 완전히 떠나기 전, 그는 얼마나 깊은 고통을 견뎌야 했을까?...방으로 돌아오자, 유 아주머니와 월이가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이유영을 보자 바비 인형을 월이에게 건네며 공손히 말했다.“아가씨.”“네.”“잠시만요.”이유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유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그 사람, 몇 번이나 왔어요?”강이한을 물어보고 있었다.이제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씨 가문 사람들은 이유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조용히 대답했다.“두 번 왔어요.”두 번.즉, 우천시에서 돌아온 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이유영은 강이한이 아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다.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만약 그가 아이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 세상에 그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일단 나가보세요.”“네, 아가씨.”유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이유영은 조용히 월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임소미는 이유영을 꼭 끌어안으며 마치 텅 비었던 가슴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유영이 돌아오기 전, 임소미는 이미 그녀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여진우가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수술 전까지 모두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만큼, 그 소식은 임소미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엄마, 숨 막혀요.”이유영이 투덜거렸다.“얘가...”임소미는 그녀를 품 안에서 놔줬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눈가를 쓰다듬었다.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임소미의 가슴은 다시 먹먹해졌다.지난 2년 동안, 이유영의 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마지막에 결국 텅 빈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두려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정말 볼 수 있는 거 맞지?”이렇게 맑은 눈동자를 보고도 여전히 불안했던 임소미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 볼 수 있어요. 엄마, 오늘 검은색 원피스 입으셨네요.”“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이유영이 옷 색깔을 정확히 맞추자 임소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도 그 말을 듣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됐어, 보이면 됐어.”“아빠.”“밥 먹자.”이것이 바로 가족이었다.언제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과 뜨끈한 국이 기다리고 있는 곳.여진우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을.정국진과 임소미 앞에서 그도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참 좋았다.재벌 가문에서 이렇게 화목한 가족 분위기를 가진 곳은 드물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식탁에는 여진우가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이유영을 위해 준비된 담백한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이유영은 기꺼이 그 음식을 받아들였다.“엄마, 저거 먹고 싶어요.”월이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을 만나기 전,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순수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앗아갔다. 계산해 보면 그는 이유영을 2년 동안 지켜왔고 5년을 연애했으며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이유영은 그 감정이 진짜라고 믿었고 온 마음을 다해 화답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이었다.강이한도, 박연준도 모두 거짓이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끝없는 사랑을 선물했지만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가장 큰 보호를 제공했다.한 명은 사랑을 주었지만 보호는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보호를 제공했지만 사랑은 없었다.둘 중 누구든, 이유영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알겠어요.”배준석이 씁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거예요.”“...”“하지만 그들은 저에게...”이유영은 말을 멈췄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냥 보내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끝내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배준석 씨.”“네?”“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생사의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얻을 수 없는 사랑이에요.”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유영은 어땠을까?그녀가 손에 쥔 모든 것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그것은 사랑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그는 이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어요.”배준석이 이유영이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이유영은 비웃음만 나왔다.진심이라고?그 말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진심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가 누구에게 끝까지 진심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한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과거의 자신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순간, 배준석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영원히 용서하
여진우는 이유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배준석이었다.청하시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에서의 배준석은 마치 햇살처럼 밝은 청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는 끝없는 광기와 붕괴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의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상처를 입혔다.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 했고 특히 이유영에게는 더욱 그랬다.지금도 이유영은 그날 밤 순정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배준석은 조형욱과 함께 이유영의 집으로 찾아와 뱃속 아이를 없애려 했다.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배준석은 마치 숱한 풍파를 겪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씁쓸함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여진우는 지쳐 있었다.오랜 시간 이유영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던 탓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자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배준석은 잔에 따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정말 그렇게 미워요?”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요즘 이유영 앞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배준석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영은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 애썼다. 요즘 그녀는 금식 중이었다. 예전에는 죽을 먹으며 다른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는 눈을 위해서라면 한 달 금식은 물론, 1년, 2년도 감수할 수 있었다.술은 절대 마실 수 없었다.배준석의 질문에, 이유영은 조용히 되물었다.“준석 씨는 누구를 미워해요?”이유영은 생각했다.배준석이 자신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에 약혼녀를 해쳤던 진짜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준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 희미했다.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마침내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눈앞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이유영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모두가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지와 우현은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듯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두 아이는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만약 그녀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터였다.“이유영 씨.”“보여요.”배준석은 이유영에게 복수하지 않았다.그 사실을 깨닫자,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 배준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온몸이 긴장했고 심지어 공포감에 휩싸였었다.의사는 평소 만날 일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존재다. 환자가 되는 순간, 결국 그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유영아.”여진우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온몸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제는 익숙했다.그래서 여진우가 자신을 안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온기를 느끼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하지만 이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감각에만 의존했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정말 보여?”여진우는 그녀를 품에서 놔주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보여.”진짜였다. 정말 볼 수 있었다.여진우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보여? ““파란색.”“...”“됐어. 너 수염 난 것도 다 보여.”태연한 이유영의 말에, 여진우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아침 면도를 깜빡했는데 그녀가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병실 안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수술은 성공했다.붕대를 풀고 눈
그 순간, 이유영과 여진우의 숨이 가빠졌다.이유영은 눈을 감은 채,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마지막 순간이었다.이제 눈을 뜨는 순간, 무엇을 마주하든 그것이 앞으로 남은 삶 동안 마주해야 할 현실이 될 터였다.“눈 떠보세요!”의사의 목소리가 한층 강해졌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그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였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배준석이었다.강이한과 싸운 뒤, 완전히 사라졌던 그 사람.그가 여기에 있다고?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때, 여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준석아, 너 때문에 유영이가 놀랐잖아.”배준석의 묵직한 목소리보다 여진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병실에 울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여진우가 배준석을 그렇게 부르는 걸 듣자, 이유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려 했다.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눈을 뜰 수가 없어.”병실은 고요해졌다.그때, 차가운 손끝이 피부를 스쳤다. 배준석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닦아냈다.보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유영은 자신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이 바로 배준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믿을 수 없었다.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휘몰아쳤다.왜냐하면 배준석이 바로 한지음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였다.그때 청하시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왜 강이한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받아들이라고 했을까?어떻게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 씨.”배준석이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제 기억 속의 이유영 씨는 나약한 주부가 아니었어요.”그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그렇다. 그녀는 한때 평범한 주부였다.그런
여진우는 조용히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매일 의사가 소독하면서 검사도 하고 있는데 아무 문제 없대요.”적어도 현재로서는 의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그래도 걱정돼.”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눈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큰 문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무엇보다도 아무 일 없이 잘 회복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내일까지 아무 문제 없으면 집으로 돌아올 거지?”“네.”“그러면 됐어. 맛있는 음식 준비해 둘게.”임소미는 여진우와 이유영이 수술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녀의 말에, 여진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좋아.”임소미도 부드럽게 대답했다.그 따뜻한 목소리에 여진우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엄마한테서 온 전화야?”“응, 맛있는 음식 준비해 줄 거래.”여진우가 웃으며 말했지만 이유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임소미가 해주는 음식을 떠올리자 이유영의 마음에 갑자기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그래?”“엄마를 외숙모로 알고 있을 때부터 나한테 정말 잘해줬어.”이유영은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람은 복을 쌓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그때 임소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유영을 친딸처럼 아껴주었다.여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했다.“좋은 사람이야.”“응.”이유영도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임소미는 좋은 사람이었다.강이한이 임소미 앞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건, 그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도 강이한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내일 붕대를 풀 거야. 무서워?”여진우가 이유영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물었다.이유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무서워. 당연히 무섭지.”이유영은 진심으로 두려웠다. 예전에도 한지음도 같은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했었다.수술이란 절대 백 퍼센트 성공
그 남자는 박연준이었다.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왜 그 시점에 우천시에서 그녀와 혼인 신고를 했는지.하지만 박연준의 그 호의를 이유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다정함 뒤에는 강이한처럼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의 호의가 단순한 호의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박연준과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자 여진우가 가만히 웃었다.그의 눈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짙은 걱정도 비쳤다.여진우는 느낄 수 있었다. 이유영이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고 있다는걸.강이한과 박연준을 겪은 후, 그녀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가 다가와 호의를 베풀면 그 안에 반드시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기에, 여진우는 강이한이 떠나면서 박연준을 그녀 곁에 남겨둔 이유를 깨달았다. 이유영와 박연준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애초에 박연준 말고는 이유영이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미래에 아무리 진심으로 이유영을 대하는 사람을 만나도 이유영은 똑같이 진심을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점심시간이야?”이유영이 물었다.수술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우천시나 모이산에 있을 때, 주변의 기운만으로도 밤과 낮을 가늠할 수 있었다.심지어 조명의 밝기만으로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그녀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소독약 냄새였다.그것은 불쾌하게 모든 감각을 방해했다.게다가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죽만 먹었으니 음식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도 힘들었다.여진우가 답했다.“점심이야.”“저녁에는 다른 걸 먹을 수 있을까?”죽만 먹은 지 너무 오래되었고 입안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이유영이 투덜거렸다.여진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
정국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유영이는 곧 돌아올 거예요. 현우가 수술이 성공했다고 했어요.”그제야 임소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대답했다.“네.”“여보!”“네?”임소미는 강이한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제대로 알게 됐겠지?”그녀의 목소리엔 묘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줬는지...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알겠지.”특히 월이가 강이한을 바라보던 눈빛.그 순간, 강이한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임소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아이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깊은 경계심을 읽어냈을 때,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안겨준 그 모든 고통을, 이번에 뼈저리게 맛보았을 것이다.그러나 정국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래서 기뻐요?”기쁘냐고?과거에 이유영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알았을 때 그녀는 강이한을 찢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었다.그런데 막상 이 순간이 오고 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찌르듯이 아팠다.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임소미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기쁘든 기쁘지 않든, 그와 유영이가 여기까지 온 것도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이런 끝을 맞이하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 최선의 결말일지도 모른다.정국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네.”더 이상 미련을 남긴 채 있어 봤자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만 남을 뿐이었다.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결국 서로를 위해서도 나은 일일 터였다.임소미는 여전히 무언가 곱씹듯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그래도 믿기지 않아요.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는 사실을요. 모든 걸 박연준에게 내어주고, 서주 전체까지 내려놨어요.”남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망설일 것도 없이 권력과 지위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