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 씨 쪽에서 아마 손을 쓸 겁니다. 회장님이 나서주시지 않으면 저희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조민정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한지음의 납치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모든 화살은 유영을 향했다.다른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강이한이 유영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심지어 나서원을 통해 조작된 증거까지 확보한 것만 봐도 그랬다.병실을 나가기 전 한지음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참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분명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강이한이 자신을 감방에 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했다.“알았어요. 잘하셨어요.”이미 이혼한 마당에 외삼촌의 개입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전생에 비해서 많은 것을 가졌지만 어쩐지 따스함은 느껴지지 않고 마음은 점점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었다.병원.강이한은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결국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그는 수화기에 대고 오늘 당장 그 여자를 구치소로 끌고 가라고 말했다.조형욱은 말없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숨막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한지음이 드디어 수술실에서 나왔다. 하얗게 질린 여자의 얼굴이 강이한의 분노를 자극했다.그가 그렇게 지켜주고 싶었던 유영이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계속해서 깨우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내가 그 여자를 너무 좋게만 생각했어!”그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조형욱의 눈빛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사모님께서는 참….”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강이한은 유영을 천하에 나쁜 년이라고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어쩌면 10년 동안 그의 앞에서 보였던 온순한 모습은 허상이었을 수도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감정을 수습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형사들이 곧 그쪽에 도착할 겁니다.”조형욱이 말했다.강이한은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더 이상 그런 악인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게 할 수 없었다.그날 밤, 강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어!’이건 강이한의 생각이었다.그는 자신의 애정이 유영을 비열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지금의 강이한은 최근 벌어진 모든 비극이 유영이 주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그는 자신이 이런 악녀와 10년이나 같은 침실을 썼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니야.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을 거야. 내가 너무 예쁘다고 싸고만 돌았어!’‘거기서 고생 좀 하면 다시 예전에 착했던 이유영으로 돌아올 거야!’그는 유영이 정신만 차리면 자신에게 찾아와서 잘못을 사과할 거라고 믿었다.한참이나 유영에 대한 비난을 퍼붓던 진영숙은 이번에는 강이한에게 한소리 했다.“이제 걔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지?”강이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너 더 이상 걔만 감싸고 돌면 안 돼!”진영숙은 과거 아들이 유영의 편만 들던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쯤 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있을 거예요.”“뭐라고?”“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죠.”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가슴 속 아픔을 감추었다.사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유영을 매몰차게 몰아붙일 때마다 가슴 속 한 구석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앞으로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계속 누군가가 말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은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믿고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게 되었다.‘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면 처벌을 받는 게 당연해!’여기까지 오게 된 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유영이 한발 한발 이렇게까지 오게 만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진영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재차 물었다.“너 방금 뭐라고 했니?”강이한이 답이 없자 진영숙이 다그치듯 그에게 물었다.“그게 사실이야? 네가 걔를 경찰서에 보냈어?”“네.”“그래. 진작에 이랬어야 했어.”진영숙이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음이 납치됐을 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그랬으면 우리 지음이도 이렇게까지
하지만 그 시각 유영은 서원그룹 서재욱의 사무실에 있었다. 오늘 디자인 초안을 평가 받는 날이었다.그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서재욱은 무심한 얼굴로 유영이 내민 초안을 대충 훑어보고는 다시 우아한 몸짓으로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연준이가 추천한 사람이라 그런지 실력 하나는 정말 믿을만하네요. 청하시에 이런 인재가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안 게 한탄스럽군요.”“그럼 통과한 건가요?”유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물었다.과거에 그녀는 강이한이 청하시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연준이나 서재욱을 만난 뒤로는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콩깍지가 벗겨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우아하게 담배연기를 토하며 말했다.“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공개 입찰은 3일 뒤에 시작해요.”“시간이 좀 빠듯하네요.”“윗분들이 성격이 급하니까요. 전에는 시간을 좀 줄 것처럼 말하더니 갑자기 입찰을 시작한다네요.”“참여자가 많으니 꼭 우리가 가져올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유영 씨의 실력을 믿어요. 연준이도 유영 씨를 내세워서 입찰에 성공했잖아요. 안 그래요, 이유영 대표님?”서재욱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유영을 바라봤다.귀티 나는 얼굴에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사실 그는 이유영이라는 여자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키도 작고 유약해 보이는 여자가 무슨 용기로 강이한과 세강을 상대로 싸우는지 궁금했다.하지만 그녀의 막강한 디자인 실력과 온몸으로 풍기는 카리스마에 놀랐다. 그녀에게는 다른 여자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걱정 마세요. 디테일한 부분은 야근을 강행하더라도 수정할게요. 저를 이렇게까지 믿어주셨는데 저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죠.”“내가 유영 씨 과거에 신경 써야 할 일은 없겠죠?”“당연하죠. 과거가 신경 쓰였으면 애초에 박 대표님과의 협력도 없었을 겁니다.”유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색한 분위기
그 시각 강우현은 병원을 나오고 있었다. 한지음의 병실은 진영숙이 지키기로 했다. 그는 이번 동교 옆 상권 개발 프로젝트 준비 때문에 급히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그런데 회사로 가는 길에 길바닥을 질주하는 유영의 포르쉐를 발견했다.거리를 질주하던 차량들은 외제차를 보고 모두 길을 비켜주는 눈치였다.‘이유영?’유영을 떠올린 강이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저 차 좀 따라가!”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운전기사에게 말하자, 운전기사는 곧장 가속페달을 밟았다.잠시 후, 강이한의 차가 유영의 차를 따라잡았다. 강이한은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유영을 보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저 차 세워!”“대표님, 그건 좀….”운전기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유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 차량은 포르쉐였다. 혹시라도 차를 강제로 세우게 하는 과정에서 두 차량이 충돌사고를 낸다면 일년 연봉을 합쳐도 수리비로 부족했다.“그냥 들이밀어!”강이한이 차갑게 명령했다.명령을 들은 운전기사는 긴장해서 손을 삐끗했다가 그대로 차 머리를 유영의 차를 들이받았다.쾅!유영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다행히 워낙 성능이 좋은 차량이라 큰 사고는 없었다.고개를 든 그녀는 후방 카메라를 통해 강이한의 차량을 확인했다.참 여러모로 끈질기고 귀찮은 상대였다.어제 그가 경찰서에 그녀를 신고한 건 알고 있었다.다행히 외삼촌 쪽에서 인맥을 동원했기에 경찰서에 끌려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잡혀간 줄 알았던 그녀가 멀쩡하게 거리를 주행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것 같았다.유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단화를 신었기에 유난히 키가 작아 보였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강이한의 차량을 노려보았다.강이한도 차에서 내려 유영에게 다가왔다.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실망했나 봐? 경찰서에 있어야 할 내가 왜 바깥을 돌아다니는지 알고 싶은 거지?”유영은 다가가서 그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매주고
유영은 그대로 차에 올라 가버렸다.강이한은 멀어지는 그녀의 차량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이유영,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유영은 그 길로 박연준을 찾아갔다.시내의 한 레스토랑.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남자는 우아한 몸짓으로 와인잔을 들었고 유영도 기분 좋게 잔을 들었다.“왜 그렇게 봐요?”박연준이 물었다.유영은 술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서원그룹에 저를 추천해 주신 거, 감사해서요.”유영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유영 씨가 실력으로 따낸 거죠. 서재욱은 아주 까다로운 인간이에요. 나도 한번에 통과할 줄은 몰랐어요.”서재욱이 까다로운 사람이라고?디자인 초안이 한번에 통과되었으니 유영은 당연히 서재욱의 까다로움을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까다로운 거로 치면 박연준이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무슨 생각해요?”“서 대표님을 뵙기 전에 김 비서님을 만났었어요. 저는 김 비서님의 제안대로 디자인을 그렸고요.”어쨌든 순조롭게 통과했다는 게 중요했다.박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랬군요.”까다롭기로 유명한 서재욱이 단번에 통과를 시켜줄 정도면 유영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설명했다.둘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은 어느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외부에 전해졌다.병실에서 한지음을 한참 위로해 주고 나온 진영숙은 강서희와 함께 상류층 사모님들과 식사 시간을 가졌다.강서희도 이제 결혼할 나이였다.애지중지 키운 양녀이니 당연히 좋은 짝을 찾아주고 싶었다.그런데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다정하게 함께 식사 중인 유영과 박연준을 발견했다.“엄마, 왜 그래?”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보고 강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야. 일단 들어가자!”진영숙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이유영 쟤 경찰서에 불려간 거 아니었어? 왜 멀쩡히 돌아다니는 거지?’그녀는 유영이 밉고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귀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세강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결국 진영숙은 강서희를 앞세우고 안
진영숙은 혐오에 찬 눈빛으로 유영을 노려보며 거침없이 말했다.“내가 널 너무 얕잡아봤네. 너 원래 이렇게 악랄한 애였어?”“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이런 류의 말은 유영은 요즘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많이 들었다.“너 지음이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왜 한 아이의 인생을 망친 거야?”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전에 널 어떻게 가르쳤니? 넌 정말 우리 집에 시집와서 배운 게 하나도 없구나!”진영숙은 말할수록 화가 치밀었다.처참한 모습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한지음을 생각하면 당장 달려들어 유영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진영숙은 유영의 예쁜 눈망울을 빤히 바라보았다.만약 저 눈을 지음이에게 이식할 수만 있다면…유영은 손을 씻다 말고 흠칫하며 거울을 바라봤다.그리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진영숙에게 물었다.“언제부터 한지음을 그렇게 친절하게 대했어요?”“지금 네 얘기를 하고 있잖아!”“가르침이요?”유영은 차갑게 진영숙의 말을 자르며 손을 닦았다.그리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미소를 지었다.“당신이 뭔데 날 가르쳐요?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쓰다 만 휴지조각을 진영숙에게 확 던졌다.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나갔다.진영숙의 얼굴이 분노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유영이 변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무례하게 대할 줄은 몰랐다.앞서가던 유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셨나 본데, 당신 이제 내 시어머니도 아니잖아요!”그러니 쓸데없이 불러내지 말라는 경고였다.진영숙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유영을 싫어하지만 과거 유영의 온순한 태도에 이미 적응이 되어버린 진영숙이었다.그래서 언제든 마음대로 욕을 하고 비난해도 되는 대상이었다.그런데 갑작스러운 유영의 태도 변화에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그리고 분노가 치밀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
“야, 강이한!”진영숙이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진영숙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화장실에서 나온 유영은 담담한 얼굴로 자리로 가서 앉았다. 박연준이 고개를 돌리자 유영을 따라 나오는 진영숙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와인잔을 들었고 유영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세강과는 잘 정리가 됐나요?”박연준이 물었다.“이미 이혼 도장까지 찍었는걸요.”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말했다.마치 강이한을 떠난 게 오히려 홀가분한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사실 이혼 도장을 찍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아픔을 곱씹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쪽에서 자꾸 유영 씨 귀찮게 하는 거 같아서요.”그 말에 유영의 손이 흠칫 떨렸다.하지만 잠깐이었고 그녀는 이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그 사람들이 저를 괴롭히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진영숙은 여전히 그녀를 자기 아랫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정말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짐작이 갔다.뭐라고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너무 사적인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유영 씨는 참 대단해요.”결국 박연준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밖에 없었다.유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참 많은 여자들이 이혼하고 한 동안 슬픔에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스스로 먹고 살 힘도 없어서 이혼을 못하고 있는 여자들도 많았다.그런 여자들은 자신을 사랑해 주지도 않는 남편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평생을 살아간다.하지만 양보만 한다고 상대가 그 마음 씀씀이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이건 유영이 그 동안 세강의 며느리로 살면서 종합해낸 결론이었다.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서희가 울며 룸에서 뛰쳐나왔다.진영숙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룸에서 무슨 불쾌한 일이 있었던 것 같
그 시각.강이한은 사무실에서 싸늘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회의 들어갔던 부장들이 단체로 욕을 먹고 쫓겨난 건 당연했다.조형욱은 조용히 상사의 뒤를 따랐다.“조사는 어디까지 됐어?”강이한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조형욱은 조심스럽게 상사의 눈치를 보았다.이미 등은 식은땀에 푹 젖은 상태였다.고개를 돌린 강이한이 싸늘한 눈빛으로 조형욱을 노려보았다.조형욱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어제 정국진 쪽에서 움직인 것 같습니다. 형사 측에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철저한 조사에 착수하겠답니다.”“뭘 조사해?”“그쪽에서 그렇게 요구했다고 합니다.”강이한이 인상을 찌푸렸다.정국진이 조사에 관여한다고?상황은 점점 재미 있어지고 있었다.“그럼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제대로 조사하라고 해.”“네.”그런 사건이 벌어졌으니 조사하는 건 당연했다.정국진이 유영을 그렇게까지 믿는다면 그에게 그녀의 본모습이 얼마나 추악한지 조사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일이었다.그때가 돼서 정국진이 그녀의 편에 설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한지음 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조형욱이 조심스레 물었다.최근 강이한이 정서가 아주 불안정한 것도 전부 유영과 한지음 때문이었다.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부하직원을 노려보았다.“내가 알아서 할게.”한지음에게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시간을 확인한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려다가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조형욱이 따라오자 강이한은 차갑게 그를 제지했다.“따라올 거 없어.”“네, 대표님.”조형욱은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멀어지는 상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는 싸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한편, 유영이 사무실에 돌아오자 직원들이 공손히 일어서서 그녀에게 인사했다.“대표님 오셨어요?”“네. 일들 하세요.”유영은 그대로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디자인 초안은 이미 통과했지만 3일이라는 시간은 빠듯했다.그녀에게는 준비할 시간이 얼마 없었다.김연우에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