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강이한이 도착했을 때, 병실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핏자국들이 가득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피 묻은 시트를 정리하는 간호사를 노려보았다.강이한을 본 간호사가 움찔하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한지음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강이한이 이를 갈며 물었다.겁에 질린 간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한지음 씨는 지금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이한은 응급실로 달려갔다.여기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 찰과상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면 병실이 그 지경이 되었을까?강이한은 갑갑함에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 이때, 응급실 밖에서 대기하던 조형욱이 그에게 다가왔다.“어떻게 됐어?”강이한이 물었다.“들어간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안 나오네요. 아까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그 말에 강이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다쳤으면 의사가 그런 말까지 했을까?“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이한이 물었다.조형욱은 어두운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성질 급한 강이한이 차갑게 재촉했다.“그냥 한지음 씨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쾅!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이한이 다리를 들어 조형욱을 걷어찼다.“내가 그런 말이나 듣자고 조 비서를 비싼 돈 주고 고용한 것 같아?”조형욱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강이한이 말했다.“자초지종을 모르면 조사를 했어야지!”“사모님이십니다.”강이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이유영이?”조형욱이 말했다.“대표님 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사모님께서 병실에 오셨더라고요. CCTV 영상을 확인한 결과 사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한지음 씨는 멀쩡한 상태였습니다. 시간을 대조했을 때….”조형욱은 결국 말끝을 흐렸다.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강이한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유영, 또 너야?
“강이한 씨 쪽에서 아마 손을 쓸 겁니다. 회장님이 나서주시지 않으면 저희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조민정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한지음의 납치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모든 화살은 유영을 향했다.다른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강이한이 유영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심지어 나서원을 통해 조작된 증거까지 확보한 것만 봐도 그랬다.병실을 나가기 전 한지음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참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분명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강이한이 자신을 감방에 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했다.“알았어요. 잘하셨어요.”이미 이혼한 마당에 외삼촌의 개입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전생에 비해서 많은 것을 가졌지만 어쩐지 따스함은 느껴지지 않고 마음은 점점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었다.병원.강이한은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결국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그는 수화기에 대고 오늘 당장 그 여자를 구치소로 끌고 가라고 말했다.조형욱은 말없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숨막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한지음이 드디어 수술실에서 나왔다. 하얗게 질린 여자의 얼굴이 강이한의 분노를 자극했다.그가 그렇게 지켜주고 싶었던 유영이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계속해서 깨우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내가 그 여자를 너무 좋게만 생각했어!”그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조형욱의 눈빛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사모님께서는 참….”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강이한은 유영을 천하에 나쁜 년이라고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어쩌면 10년 동안 그의 앞에서 보였던 온순한 모습은 허상이었을 수도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감정을 수습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형사들이 곧 그쪽에 도착할 겁니다.”조형욱이 말했다.강이한은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더 이상 그런 악인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게 할 수 없었다.그날 밤, 강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어!’이건 강이한의 생각이었다.그는 자신의 애정이 유영을 비열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지금의 강이한은 최근 벌어진 모든 비극이 유영이 주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그는 자신이 이런 악녀와 10년이나 같은 침실을 썼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아니야.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을 거야. 내가 너무 예쁘다고 싸고만 돌았어!’‘거기서 고생 좀 하면 다시 예전에 착했던 이유영으로 돌아올 거야!’그는 유영이 정신만 차리면 자신에게 찾아와서 잘못을 사과할 거라고 믿었다.한참이나 유영에 대한 비난을 퍼붓던 진영숙은 이번에는 강이한에게 한소리 했다.“이제 걔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지?”강이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너 더 이상 걔만 감싸고 돌면 안 돼!”진영숙은 과거 아들이 유영의 편만 들던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진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지금쯤 경찰서에서 조사 받고 있을 거예요.”“뭐라고?”“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죠.”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가슴 속 아픔을 감추었다.사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유영을 매몰차게 몰아붙일 때마다 가슴 속 한 구석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앞으로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계속 누군가가 말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은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믿고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게 되었다.‘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면 처벌을 받는 게 당연해!’여기까지 오게 된 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유영이 한발 한발 이렇게까지 오게 만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진영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재차 물었다.“너 방금 뭐라고 했니?”강이한이 답이 없자 진영숙이 다그치듯 그에게 물었다.“그게 사실이야? 네가 걔를 경찰서에 보냈어?”“네.”“그래. 진작에 이랬어야 했어.”진영숙이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음이 납치됐을 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그랬으면 우리 지음이도 이렇게까지
하지만 그 시각 유영은 서원그룹 서재욱의 사무실에 있었다. 오늘 디자인 초안을 평가 받는 날이었다.그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수갑을 차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서재욱은 무심한 얼굴로 유영이 내민 초안을 대충 훑어보고는 다시 우아한 몸짓으로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연준이가 추천한 사람이라 그런지 실력 하나는 정말 믿을만하네요. 청하시에 이런 인재가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안 게 한탄스럽군요.”“그럼 통과한 건가요?”유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물었다.과거에 그녀는 강이한이 청하시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연준이나 서재욱을 만난 뒤로는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콩깍지가 벗겨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우아하게 담배연기를 토하며 말했다.“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공개 입찰은 3일 뒤에 시작해요.”“시간이 좀 빠듯하네요.”“윗분들이 성격이 급하니까요. 전에는 시간을 좀 줄 것처럼 말하더니 갑자기 입찰을 시작한다네요.”“참여자가 많으니 꼭 우리가 가져올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유영 씨의 실력을 믿어요. 연준이도 유영 씨를 내세워서 입찰에 성공했잖아요. 안 그래요, 이유영 대표님?”서재욱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유영을 바라봤다.귀티 나는 얼굴에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사실 그는 이유영이라는 여자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키도 작고 유약해 보이는 여자가 무슨 용기로 강이한과 세강을 상대로 싸우는지 궁금했다.하지만 그녀의 막강한 디자인 실력과 온몸으로 풍기는 카리스마에 놀랐다. 그녀에게는 다른 여자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걱정 마세요. 디테일한 부분은 야근을 강행하더라도 수정할게요. 저를 이렇게까지 믿어주셨는데 저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죠.”“내가 유영 씨 과거에 신경 써야 할 일은 없겠죠?”“당연하죠. 과거가 신경 쓰였으면 애초에 박 대표님과의 협력도 없었을 겁니다.”유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색한 분위기
그 시각 강우현은 병원을 나오고 있었다. 한지음의 병실은 진영숙이 지키기로 했다. 그는 이번 동교 옆 상권 개발 프로젝트 준비 때문에 급히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그런데 회사로 가는 길에 길바닥을 질주하는 유영의 포르쉐를 발견했다.거리를 질주하던 차량들은 외제차를 보고 모두 길을 비켜주는 눈치였다.‘이유영?’유영을 떠올린 강이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저 차 좀 따라가!”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운전기사에게 말하자, 운전기사는 곧장 가속페달을 밟았다.잠시 후, 강이한의 차가 유영의 차를 따라잡았다. 강이한은 고개를 돌려 운전 중인 유영을 보고 분노에 몸을 떨었다.“저 차 세워!”“대표님, 그건 좀….”운전기사의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유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 차량은 포르쉐였다. 혹시라도 차를 강제로 세우게 하는 과정에서 두 차량이 충돌사고를 낸다면 일년 연봉을 합쳐도 수리비로 부족했다.“그냥 들이밀어!”강이한이 차갑게 명령했다.명령을 들은 운전기사는 긴장해서 손을 삐끗했다가 그대로 차 머리를 유영의 차를 들이받았다.쾅!유영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다행히 워낙 성능이 좋은 차량이라 큰 사고는 없었다.고개를 든 그녀는 후방 카메라를 통해 강이한의 차량을 확인했다.참 여러모로 끈질기고 귀찮은 상대였다.어제 그가 경찰서에 그녀를 신고한 건 알고 있었다.다행히 외삼촌 쪽에서 인맥을 동원했기에 경찰서에 끌려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잡혀간 줄 알았던 그녀가 멀쩡하게 거리를 주행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것 같았다.유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단화를 신었기에 유난히 키가 작아 보였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강이한의 차량을 노려보았다.강이한도 차에서 내려 유영에게 다가왔다.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당신이 왜 여기 있어?”“실망했나 봐? 경찰서에 있어야 할 내가 왜 바깥을 돌아다니는지 알고 싶은 거지?”유영은 다가가서 그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매주고
유영은 그대로 차에 올라 가버렸다.강이한은 멀어지는 그녀의 차량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이유영,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유영은 그 길로 박연준을 찾아갔다.시내의 한 레스토랑.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남자는 우아한 몸짓으로 와인잔을 들었고 유영도 기분 좋게 잔을 들었다.“왜 그렇게 봐요?”박연준이 물었다.유영은 술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서원그룹에 저를 추천해 주신 거, 감사해서요.”유영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유영 씨가 실력으로 따낸 거죠. 서재욱은 아주 까다로운 인간이에요. 나도 한번에 통과할 줄은 몰랐어요.”서재욱이 까다로운 사람이라고?디자인 초안이 한번에 통과되었으니 유영은 당연히 서재욱의 까다로움을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까다로운 거로 치면 박연준이 더 까다롭게 느껴졌다.“무슨 생각해요?”“서 대표님을 뵙기 전에 김 비서님을 만났었어요. 저는 김 비서님의 제안대로 디자인을 그렸고요.”어쨌든 순조롭게 통과했다는 게 중요했다.박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랬군요.”까다롭기로 유명한 서재욱이 단번에 통과를 시켜줄 정도면 유영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설명했다.둘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은 어느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외부에 전해졌다.병실에서 한지음을 한참 위로해 주고 나온 진영숙은 강서희와 함께 상류층 사모님들과 식사 시간을 가졌다.강서희도 이제 결혼할 나이였다.애지중지 키운 양녀이니 당연히 좋은 짝을 찾아주고 싶었다.그런데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다정하게 함께 식사 중인 유영과 박연준을 발견했다.“엄마, 왜 그래?”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보고 강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야. 일단 들어가자!”진영숙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이유영 쟤 경찰서에 불려간 거 아니었어? 왜 멀쩡히 돌아다니는 거지?’그녀는 유영이 밉고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귀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세강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결국 진영숙은 강서희를 앞세우고 안
진영숙은 혐오에 찬 눈빛으로 유영을 노려보며 거침없이 말했다.“내가 널 너무 얕잡아봤네. 너 원래 이렇게 악랄한 애였어?”“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이런 류의 말은 유영은 요즘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많이 들었다.“너 지음이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왜 한 아이의 인생을 망친 거야?”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내가 전에 널 어떻게 가르쳤니? 넌 정말 우리 집에 시집와서 배운 게 하나도 없구나!”진영숙은 말할수록 화가 치밀었다.처참한 모습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한지음을 생각하면 당장 달려들어 유영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진영숙은 유영의 예쁜 눈망울을 빤히 바라보았다.만약 저 눈을 지음이에게 이식할 수만 있다면…유영은 손을 씻다 말고 흠칫하며 거울을 바라봤다.그리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진영숙에게 물었다.“언제부터 한지음을 그렇게 친절하게 대했어요?”“지금 네 얘기를 하고 있잖아!”“가르침이요?”유영은 차갑게 진영숙의 말을 자르며 손을 닦았다.그리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미소를 지었다.“당신이 뭔데 날 가르쳐요?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쓰다 만 휴지조각을 진영숙에게 확 던졌다.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나갔다.진영숙의 얼굴이 분노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유영이 변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무례하게 대할 줄은 몰랐다.앞서가던 유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셨나 본데, 당신 이제 내 시어머니도 아니잖아요!”그러니 쓸데없이 불러내지 말라는 경고였다.진영숙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유영을 싫어하지만 과거 유영의 온순한 태도에 이미 적응이 되어버린 진영숙이었다.그래서 언제든 마음대로 욕을 하고 비난해도 되는 대상이었다.그런데 갑작스러운 유영의 태도 변화에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그리고 분노가 치밀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
“야, 강이한!”진영숙이 소리쳤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뒤였다.진영숙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화장실에서 나온 유영은 담담한 얼굴로 자리로 가서 앉았다. 박연준이 고개를 돌리자 유영을 따라 나오는 진영숙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우아한 몸짓으로 와인잔을 들었고 유영도 따라서 잔을 들었다.“세강과는 잘 정리가 됐나요?”박연준이 물었다.“이미 이혼 도장까지 찍었는걸요.”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말했다.마치 강이한을 떠난 게 오히려 홀가분한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사실 이혼 도장을 찍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아픔을 곱씹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쪽에서 자꾸 유영 씨 귀찮게 하는 거 같아서요.”그 말에 유영의 손이 흠칫 떨렸다.하지만 잠깐이었고 그녀는 이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그 사람들이 저를 괴롭히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진영숙은 여전히 그녀를 자기 아랫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정말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짐작이 갔다.뭐라고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너무 사적인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유영 씨는 참 대단해요.”결국 박연준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밖에 없었다.유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참 많은 여자들이 이혼하고 한 동안 슬픔에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스스로 먹고 살 힘도 없어서 이혼을 못하고 있는 여자들도 많았다.그런 여자들은 자신을 사랑해 주지도 않는 남편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평생을 살아간다.하지만 양보만 한다고 상대가 그 마음 씀씀이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이건 유영이 그 동안 세강의 며느리로 살면서 종합해낸 결론이었다.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서희가 울며 룸에서 뛰쳐나왔다.진영숙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룸에서 무슨 불쾌한 일이 있었던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