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유영이 싸늘하게 물었다.이 여자는 그녀가 무릎을 꿇을 가치가 없는 여자였다.그녀는 가슴에 사무치는 실망감을 안고 남자를 바라봤다.예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한지음도 여자의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하지만 속으로는 유영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꿇고 있었다.넌 뭐가 그렇게 잘났지?너도 기댈 곳 하나 없는 고아잖아!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지?유영과 강이한은 팽팽하게 대치했다.병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저기압이 되었다.“이한 오빠.”한지음이 강이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런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더욱 동정심을 유발하게 만들었다.유영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강이한은 여자가 옷깃을 단단히 잡고 있는데도 뿌리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유영과 결혼한 뒤로 강이한은 다른 여자들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그런 의미에서 한지음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유영은 입가에 진한 비웃음을 머금었다.“꿇으라고 했어!”강이한은 피식거리고 있는 유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다시 소리쳤다.“그만해요.”한지음은 더 힘을 주어 강이한을 잡아당겼다.하지만 강이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부러 강이한의 몸을 더듬으며 유영을 도발하고 있었다.‘저건 고의야!’한지음은 유영이 강이한 앞에서 이성을 잃고 추악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랐다.하지만 유영은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유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 모든 동작들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그 표정이 강이한의 분노를 자극했다.“너 감방 가고 싶어?”남자가 끝내 숨겨둔 패를 드러냈다.그의 손에는 나서원이 가져다 준 증거가 있었다.예전에는 그녀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롭고 긴장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지금은 당장 유영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유영이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한지음에게 사과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유영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그는 눈앞에 있는 전처가 얼마나 자존심 강
언론에 그런 영상을 뿌리기까지 했으면서, 이제 와서 뻔뻔하게 모른 척하다니! 강이한은 기가 막혔다. 그는 한때 그 누구보다 선했던 이유영을 떠올리며 너무나 변해버린 모습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사람 본이 눈이 없나?“한지음이 진짜 아픈 거라고 쳐, 그게 내가 공개한 영상이 가짜라는 증거가 돼?” “너 정말!”이유영의 말을 들을 한지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이유영이 불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듯 강하게 밀어붙이는 이유영의 모습에 한지음은 속이 타들어 갔다.안 그래도 지금 한지음은 시력을 잃은 탓에 모든 것을 청각과 촉감으로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이런 제한적인 상황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자신이 유리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시력을 잃은 탓에 그녀는 다른 감각들이 더 발달하게 되어 목소리와 감촉만으로도 다른 이의 감정이 추측되었다. 한편 이유영의 말을 들은 강이한은 분노에 몸이 딱딱히 굳었다.“오빠!”그의 변화를 눈치챈 한지음이 강이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로 인해 강이한의 주의력이 한지음한테 쏠렸다. 그녀의 교활한 의도를 눈치챈 이유영이 입가에 비웃음을 띄며 말했다.“강이한, 정말 언론이 틀렸다고 생각해? 한지음은 억울한 사람이고? 넌 왜 매번 한지음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내가 사람들한테 확인되지 않은 사실 때문에 욕먹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뭐의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강이한의 눈엔 한지음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나올 수 있는 반응이라고 이유영은 생각했다. 이유영과 강이한의 시선이 강력하게 허공에 부딪혔다. 반면 한지음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상대하느라 자신한테 관심을 주지 않자,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옷깃을 잡아당겼다.“저는 괜찮아요. 이제 그만해요, 네?”이대로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이유영은 그만큼 상대하기에 까다로운 존재였다. 한지음은 한시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운 좋게
이유영이 떠나자, 병실엔 강이한과 한지음만 남게 되었다. 그는 자리에 일어나 한지음에게 다정히 이불을 덮어주며 미안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내려고 했는데.”강이한도 이유영이 이토록 강하게 나올 줄 몰랐다. 눈 앞에 자신이 저지른 짓 때문에 한지음이 이 지경이 된 걸 보고도 이토록 뻔뻔하게 나올 줄은! 도대체 어쩌다가 이유영이 이토록 냉혈한 여자가 되었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한지음이 말했다.“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언제나 오빠의 행복을 바래요.”그녀는 진심을 가득 담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지음은 자신이 강이한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이유영을 더 증오하게 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저 여자와 난 이제 가망이 없어!”한지음의 말을 들은 강이한이 완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때 그도 이유영과 이혼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후회가 되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 알 수 없는 저릿함이 느껴졌다. 강이한은 이런 자신이 싫어 더욱 증오심에 감정을 집중시켰다.한편 이유영도 강이한을 떠올리며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한지음의 본모습을 까발리고 모든 오해를 풀어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가증스러운 한지음의 연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강이한과 얽히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유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때 강씨 본가에선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노분인의 생일 잔치 이후로 연락도 안 되고 모습도 드러내지 않던 유경원이 찾아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녀는 꽤 수척해져 있었다. 유경원을 강이한의 짝으로 맺어주고 싶다는 마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진영숙은 아주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였다. “우리 경원이,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진영숙이 유경원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말했다.유경원의 눈가가 빨개졌다.“저희 엄마, 아빠를 대신해 사과드려요.”그녀가 매우 속상한 듯한 목소리로
이유영은 한지음이 또 무슨 짓거리를 벌일지 짐작되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켠 후, 비장한 눈빛으로 외투를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이때 그녀가 외투를 입은 채 내려오고 있는 모습을 본 집사가 놀라 물었다.“이 시간에, 밖에 나가시게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준비해 주세요.”정국진이 그녀를 위해 보내준 경호원들을 가리킨 말이었다. 청하시는 안전했지만, 그녀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정국진의 조언대로 움직일 때 경원들을 대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연준과 소은지를 만날 때를 제외하곤 어디를 가던 그녀는 앞으로 운전기사와 경호원들은 항시 동행시키기로 결심했다.집사는 빠르게 그녀의 요구에 따라 움직였다.“기사와 경호원,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요.”“알겠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로 향했다.차에 탑승한 그녀는 곧바로 조민정에게 전화했다.“강이한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 줘요. 병원에 있다면 딴 곳으로 유인해 주세요!”“무슨 일이예요?”“저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이유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직접 병원으로 가 한지음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조사를 맡기기엔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번에 병원에서 만남을 가지게 되면서 이유영은 한지음이 또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한지음은 이유영을 단순히 견제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 더 깊은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한지음이 결코 강이한을 빼앗아 가는 것만으로 상황을 끝낼 것 같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한지음은 단순히 이유영을 증오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 어쩌면 죽음까지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러니 이유영은 이번에 말로 한지음이 그토록 자신을 증오하는 이유를 명백히 알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지, 그 원인을.“제 생각엔 안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여자가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잖아요!”그렇다, 지금까지 한지음과 엮여
예상했던 사람이 아닌 뜻밖의 이유영이 나타나자 한지음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두 사람은 서로 냉정한 표정으로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런 둘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어딘가 비슷해 보였다.“왜 왔어?”한지음의 목소리는 싸늘함, 비꼼과 왠지 모를 자신감까지,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이유영을 도발하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에 넘어갈 이유영이 아니었다. 이유영은 여유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얼마나 비참한 꼴을 하고 있을지 구경하러 왔어. 아주 보기 좋네, 딱 내가 원하던 모습이야.”“….”그녀의 말을 들은 한지음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하,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조만간 너도 빛을 잃게 될 테니까!”“내가?”이유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론 왠지 모를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이유영은 강이한이 망막을 내놓으라며 협박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한지음은 정말 여우 같은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계획이 들통났음에도 또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철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지음은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유영의 망막을 노리고 있었다! 한지음은 이유영이 눈이 멀고 모든 사람이 하여금 그녀를 짓밟길 원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적대심이 한지음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강이한의 앞에서 연기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넌 죽어야 해, 이유영!”“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잘못한 거? 그런 거 없어. 난 그냥 네가 싫어! 이유 없이 미치도록 싫을 뿐이야!”한지음이 이를 악문 채 독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이유영은 이런 그녀의 증오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미 한번 죽은 몸이었다. 그녀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이유라도 알아야 회귀 전처럼 그렇게 혼란스러운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말 못 하겠다, 이거야?”이유영이 찬 바람 쌩쌩 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한지음이 채 대꾸도 하
”하, 어디 한 번 해봐!”“못 할 것도 없지!”한지음이 웃으며 답했다.이유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병실을 나갔다.한편 저녁 12시, 강이한은 겨우 회의를 끝마쳤다. 그럼에도 전혀 피곤한 티를 내지 않는 강이한의 모습에 비서가 존경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대표님, 유경원 씨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이 시간에?”“네, 사무실로 모셨습니다.”강이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연회에서 그 창피를 당했으니, 그는 당연히 유경원이 약혼을 포기하고 집착을 멈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찾아오다니 정말로 끈질긴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유경원을 상대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그가 사무실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유경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입가에 부드럽고도 예의 바른 미소를 띠었다.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회의 끝났어요?”유경원이 아주 부드럽고도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러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도시락통을 내밀었다.“간단한 야식거리를 가져왔어요. 한번 맛보시겠어요? 다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강이한은 이런 그녀의 행동에도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유경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미 오기 전, 진영숙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터라 오히려 당연하듯이 그의 반응을 받아들였다.전엔 강이한이 이혼하기 전이라 어느 정도 행동에 제약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영숙한테 강이한과 이유영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두 전달받은 터라 많은 준비를 하고 온 상태였다.유경원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이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이유영과 달리 몸매가 늘씬하며 키도 컸다. 그래서 강이한과 함께 있으면 이유영처럼 보호받아야만 할 것 같은 연약한 느낌은 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부터 유경원은 강이한에게 자신만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했다.“왜 그렇게 봐요?”강이한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먼저 물었
병원.강이한이 도착했을 때, 병실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핏자국들이 가득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피 묻은 시트를 정리하는 간호사를 노려보았다.강이한을 본 간호사가 움찔하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한지음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강이한이 이를 갈며 물었다.겁에 질린 간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한지음 씨는 지금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이한은 응급실로 달려갔다.여기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 찰과상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대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면 병실이 그 지경이 되었을까?강이한은 갑갑함에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 이때, 응급실 밖에서 대기하던 조형욱이 그에게 다가왔다.“어떻게 됐어?”강이한이 물었다.“들어간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안 나오네요. 아까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그 말에 강이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대체 얼마나 많이 다쳤으면 의사가 그런 말까지 했을까?“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이한이 물었다.조형욱은 어두운 표정으로 상사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성질 급한 강이한이 차갑게 재촉했다.“그냥 한지음 씨한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쾅!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강이한이 다리를 들어 조형욱을 걷어찼다.“내가 그런 말이나 듣자고 조 비서를 비싼 돈 주고 고용한 것 같아?”조형욱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강이한이 말했다.“자초지종을 모르면 조사를 했어야지!”“사모님이십니다.”강이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이유영이?”조형욱이 말했다.“대표님 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사모님께서 병실에 오셨더라고요. CCTV 영상을 확인한 결과 사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한지음 씨는 멀쩡한 상태였습니다. 시간을 대조했을 때….”조형욱은 결국 말끝을 흐렸다.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강이한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유영, 또 너야?
“강이한 씨 쪽에서 아마 손을 쓸 겁니다. 회장님이 나서주시지 않으면 저희의 힘만으로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조민정이 괜한 걱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한지음의 납치사건이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모든 화살은 유영을 향했다.다른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강이한이 유영을 범인으로 의심하고 심지어 나서원을 통해 조작된 증거까지 확보한 것만 봐도 그랬다.병실을 나가기 전 한지음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 참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분명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강이한이 자신을 감방에 보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했다.“알았어요. 잘하셨어요.”이미 이혼한 마당에 외삼촌의 개입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전화를 끊은 뒤, 유영은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전생에 비해서 많은 것을 가졌지만 어쩐지 따스함은 느껴지지 않고 마음은 점점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었다.병원.강이한은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결국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그는 수화기에 대고 오늘 당장 그 여자를 구치소로 끌고 가라고 말했다.조형욱은 말없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숨막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한지음이 드디어 수술실에서 나왔다. 하얗게 질린 여자의 얼굴이 강이한의 분노를 자극했다.그가 그렇게 지켜주고 싶었던 유영이 이 여자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계속해서 깨우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내가 그 여자를 너무 좋게만 생각했어!”그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조형욱의 눈빛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사모님께서는 참….”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강이한은 유영을 천하에 나쁜 년이라고 속으로 욕하고 있었다.어쩌면 10년 동안 그의 앞에서 보였던 온순한 모습은 허상이었을 수도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감정을 수습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형사들이 곧 그쪽에 도착할 겁니다.”조형욱이 말했다.강이한은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더 이상 그런 악인이 활개 치고 돌아다니게 할 수 없었다.그날 밤, 강
현우는 송연미가 소은지를 괴롭혀 왔다고 믿고 있는 걸까?현우는 틀렸다. 소은지는 현우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은지는 깊은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이제 정말로 끝난 건가요?”송연미는 이전에 말했다. 넷째 도련님과의 관계는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고. 왜 그랬을까? 단순히 감정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송연미는 이런 방식으로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 사이의 연을 끊으려 했다.분명한 사실은, 송연미는 강압적인 수단으로 넷째 도련님을 완전히 끊어내면서 넷째 도련님을 심각하게 적으로 돌렸다. 송씨 가문과 넷째 도련님의 관계는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지금 현우가 송씨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그러나 상황은 달랐다.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모든 희망을 회장님의 죽음에 걸었었다.그러나 회장님이 떠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하고 무거워졌다.송연미와 넷째 도련님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현우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그 사람들의 문제라고? 현우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린 것일까?아니면 과거에 소은지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던 걸까? 그래서 현우가 송연미와 엔데스 운빈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걸까?만약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현우가 지금처럼 냉담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소은지는 혼란스러웠다. 현우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그럼, 여섯째 도련님 쪽은 어떻게...”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언급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소은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에게 남긴 심리적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가 보였다.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소은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요. 소은지 씨는 반산월에 잘 머물기만 하면 돼요. 알겠죠?”현우는 소은지에게 더 이상 많은 걸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
하지만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정말 귀하고도 소중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을.소은지는 한 걸음 다가서서 현우의 넥타이를 정성껏 매만졌다. 그녀의 숨은 막히듯 답답했고 가슴은 아팠다. 이런 불편함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저는 여전히 예전의 삶이 더 좋아요.”그때의 삶은 엔데스 명우에게 망가지기 전의 삶이었다.그때의 소은지는 자유로웠고 거침없었다.소은지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이었고 어떠한 방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 깊은 나락 속에서 이런 절망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소은지 씨!”“엔데스 가문 자체가 심연과 같은 존재예요. 그리고 이 파리도 제게는 심연과 같아요.”소은지는 단호하게 말했다.소은지가 이렇게까지 파멸에 이른 건 파리 땅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였다.아프냐고?너무 아팠다.숨이 막히냐고?너무도 답답했다. 예전의 소은지는 한 번도 인생에 이렇게까지 기복이 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소은지는 조심스레 현우의 넥타이를 정리한 뒤 말했다.“유영이의 세계는 이미 너무 흔들리고 있어요. 유영이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현우는 침묵했고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소은지가 보기에 이유영은 정말 불쌍했다. 이유영은 강이한을 떠나려고 애쓰고 박연준을 떨쳐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하지만, 이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유영을 얽어맸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이유로 이유영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만약 강이한과 박연준이 없었다면, 이유영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당당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높은 위치에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강이한과 박연준 때문에 이유영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지금은 어둠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이유영이 안타까울 뿐이었다.“소은지 씨!”현우의 목소리가 더욱 단호해졌다. 소은지를 바로 보는 현우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현우가 소은지를 지키는 이유가 이유영 때문이라는 건가?“파리를 떠나고 싶어요.”현우의 표정은 굳어졌고 목소리는
결국 송연미는 사람들에 의해 떠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송연미의 눈빛은 무거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소은지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송연미가 차갑고 냉정한 가면 뒤에 감춰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닿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진실이었다.여자의 운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특히 자신의 미래조차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현우는 묵묵히 소은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소은지를 놓아주던 현우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현우가 서류를 찢으려는 찰나, 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잠깐만요.”“...”현우는 동작을 멈추고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서류를 천천히 빼앗으며 말했다.“어차피 서명해야 할 서류잖아요.”“소은지 씨!”“엔데스 가문의 상황이 어떨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회장님의 죽음조차 이 싸움의 끝을 맺지 못했다는 걸 보면 일이 간단치 않다는 건 분명해요.”소은지는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소은지의 가슴은 짓눌린 듯 아려왔다.현우는 소은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당신...”“엔데스 명우가 지금 당신과 맞서고 있는 거잖아요, 맞죠?”그 말이 떨어지자, 현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송연미가 소은지에게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다.그리고 소은지는 그로 인해 자유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엔데스 회장은 끝내 어떤 결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가문은 단번에 분열되었고 문서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전기봉은 행방불명 상태였고 나머지 서류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
송연미에게는 더 이상 고귀함도 우아함도 냉정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인내심은 그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지금의 송연미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현우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몸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만이 흘렀다. 오늘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이 그 원인이었음은 분명했다.송씨 가문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기에 송연미가 이곳에 나타난 순간 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두 여자의 생각을 단숨에 현실로 끌어냈다.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현우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오더니 탁자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보자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송연미의 가슴은 긴장으로 꽉 조여졌고 소은지의 얼굴도 금세 창백해졌다.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송연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내가 경고했지. 반산월에 오지 말라고.”현우의 말투는 냉혹하기 그지없었다.송연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핏기 없던 송연미의 얼굴은 그의 말에 더욱 하얗게 질려 갔다. 마치 얼어붙은 듯 멍하니 현우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걸까? 오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엔데스 가문의 모든 이가 참석했음에도 현우는 소은지를 가지 못하게 했다. 소은지를 보호하기 위해 송연미조차 반산월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인가? 모든 것이 변했다.현우는 이제 소은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은지는 현우에게 이토록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안긴 소은지를 보며 송연미의 눈에는 깊은 고통과 실망이 서려 있었다.“이봐.”“일곱째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넷째 사모님을 집으로 바래다줘.”현우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소은지를 더욱 단단히 품에 안았다.그 무심한 행동이 송연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졌다.숨이 멎을 듯 아팠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
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 파리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소은지는 명우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현우와의 관계도 본래부터 경쟁적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소은지의 일이 여섯째 도련님과 엮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가능성이 컸다.“소은지, 넌 무슨 자격으로 현우에게 보호받고 있는 거야?”송연미는 이성을 잃은 듯 소은지를 향해 소리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상호 관계가 현우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섯째 도련님은 원한을 쉽게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일은 점점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보호한다고? 소은지를? 현우는 대체 왜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는지,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송연미는 몰랐다. 그러나 송연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두면 안 됐다.“소은지,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이라도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한 번 해를 입었어. 더 이상 현우까지 그들에게 해를 입게 할 순 없어...”송연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온몸이 떨렸다.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의 결혼에서 받았던 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갑자기, 이 여자가 보여주는 히스테리가 그렇게 미워 보이지만은 않았다.송연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너와 여섯째 도련님 사이의 일은 나는 다 알고 있어. 소은지, 여섯째 도련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파리에서 멀리 떠나줘, 안 될까?”송연미의 관점에서는 소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송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는 한, 그건 현우에게도 큰 상처가 될 터였다.“내가 떠난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원한이 사라질 것 같아?”“하지만 네가 현우 곁에 있으면, 여섯째 도련님은 모든 책임을 현우에게 돌릴 거야. 이걸 정말 모른단 말이야? 그들은 이미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소은지는 그저 얼어붙은 듯한 눈빛으로 송연미를 바라보고 있었다.송연미는 그런 눈빛에도 전혀 압박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히 말했다.“네가 진심으로 현우를 사랑한다면, 지금 무엇이 그를 위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텐데.”“처음 너를 봤을 때, 꽤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소은지가 갑자기 말했다.“...”침착?그때는 위화영이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사실 그때는 반박할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았다. 막상 반박할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송연미의 말은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울 것이었다.송연미는 그저 차갑게 소은지를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널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날 너무 몰아붙이지 마, 알겠어?”몰아붙인다니!소은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연미를 바라보았다.송연미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넌 파리의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이 파리의 이면에 어떤 흐름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잖아.”“...”“여기서 헛되이 상처받을 필요 없잖아.”강경하게 나왔더니 소용이 없다고 여겨 이제는 부드럽게 나오는 건가?하지만 아마도 송연미는 소은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설령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가 그런 관계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도발당하면 마음속에 약간의 불쾌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너 착각하지 마.”결국 소은지는 송연미에게 그렇게 답했다.어떤 것들은 변한다. 특히 사람의 마음은 더 쉽게 변한다.하지만 송연미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오히려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고 있었다.“서명하지 않겠다는 거야?”송연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왜? 더 강한 수를 쓸 생각이야?”소은지는 태연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런 소은지의 태연함은 분명 송연미를 더욱 격분하게 했다.“소은지, 난 네가 파리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렇게 곱게 설득하려는 거야. 그런데 너는 정말로 고마운 줄
이유영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그 이름이 나오자 현우의 눈빛에는 더욱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소은지는 그런 현우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그렇다면 송연미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현우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소은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어떤 충격도 견딜 수 없어요.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이 이유영 씨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유영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아마도 유영 씨의 두 눈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유영이 정말로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소은지의 가슴을 짓눌렀다.2년 동안, 엔데스 명우의 학대로 인해 소은지는 일주일 동안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소은지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그 일주일 동안 소은지가 겪었던 무력감과 절망은 평생 따라다닐 상처가 되었다. 소은지는 자신의 삶에서 빛을 볼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그때부터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증오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둠은 공포스럽고 숨 막혔다.“그럴 리가요.”이유영의 두 눈이 시력을 잃어간다는 말을 들은 소은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박연준과 강이한 사이도 이번 한판이 마지막이겠지.”현우의 말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소은지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만약 이유영의 두 눈이 정말로 회복되지 못한다면,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소은지는 암흑 속에서의 무력함이 얼마나 참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해친 원수조차 볼 수 없다는 그 사실은 숨 막히는 고통이었다....엔데스 가문은 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장례식 당일, 엔데스 가문의 모든 사람이 참석했지만, 오직 소은지만은 그 자리에 없었다.반산월에 머물던 소은지는
현우는 망설이다가 말했다.“엔데스 가문은 심연과 같아요. 그 심연의 문턱에 서서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아요.”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심연... 자신의 가문을 심연이라 부르다니. 현우가 생각하는 엔데스 가문은 도대체 얼마나 깊고 어두운 곳일까?소은지는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어두운 방 안에서 현우의 손에 들린 담배의 불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불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그것은 현우의 고독을 의미하고 있었다. 많은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느낀 것은 오직 고독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현우는 과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엔데스 가문을 떠나 황가 국제 그룹에서 단순한 보좌관으로 숨어들었겠는가?그 당시, 현우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아들이 평범한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현우는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며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태생은 결국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심연이라니...”소은지는 그 단어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중얼거렸다.현우야말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두려운 존재처럼 보였다.소은지는 한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가족도 없고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의 모든 것을 망쳐버렸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현우를 보며 소은지는 깨달았다. 가짐으로 인해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현우에게는 거대한 가문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배경 속에서 더 큰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심지어 엔데스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현우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슬픔도 찾아볼 수 없었다.“앞으로는 대저택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피하세요.”현우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말했다.“최근 자주 찾아오더라고요.”소은지가 언급한 사람은 바로 송연미였다.현우가 엔데스 가문으로 돌아온 이후, 송연미는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송연미를 이야기할 때, 현우의 눈빛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관계는 철저히 계약으로 엮여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자리에서도 소은지가 굳이 현우와 동행할 이유는 없었다.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선을 그어 외부의 불필요한 관심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미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현우는 소은지가 예상외로 순순히 나오는 모습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왜 그래요?”“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이 모든 일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싶어요.”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내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곧 새로운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소은지는 그 결과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만약 엔데스 명우가 이긴다면요?”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잡았다.현우는 소은지의 손바닥에 맺힌 차가운 땀을 확연히 느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의 승리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소은지와 현우의 관계는 사실상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대결로 비쳤다. 현우의 말을 듣고 소은지는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출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이렇게까지 와서도 어쩔 수 없는 건가요?”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물었다.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소은지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현우는 미소를 지었다.특히 소은지의 눈빛에 담긴 불만을 보며 현우는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그게 그렇게 쉽겠어요?”현우는 활짝 웃으며 소은지를 안고 안쪽으로 데려갔다.소은지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엔데스 명우를 파리에서 떠나게 만드는 건 쉽지 않지만, 이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그래서 지금 대체 어떤 상황인가요?”소은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눈앞의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소은지는 엔데스 회장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재 남겨진 것은 문서라는 단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