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벌어온 돈을 받아서 쓰면서 갑질을 당할 바에야 그냥 내가 벌고 말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말을 마친 그녀는 우아하게 남자의 옆을 지나쳤다.혼자 남은 강이한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그녀는 능력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박연준과의 협력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시킨 것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인정을 받은 걸까?유영과 박연준은 강이한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등지고 앉았다.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두 사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스테이크가 올라오자 그는 넉살 좋게 고기를 한조각씩 잘라 유영에게 건네주었다.유영도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감사해요.”“전에 자주 오던 곳인가요?”“아니요. 전에는 외식을 거의 안 했어요.”물론 맛집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나와서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시어머니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할 일 없을 때면 책을 읽는 게 그녀의 유일한 취미였다.지금 생각해 보면 유영은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던 것 같았다.유영은 조금씩 고기를 잘게 썰어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육집은 부드러웠지만 안 그래도 얼굴이 작아 볼이 빵빵하게 부풀려졌다. 그럼에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사랑스러운 게 더 신기했다.“왜 그렇게 봐요?”박연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유영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먹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랑은 좀 달라서요.”유영이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다르다는 표현보다는 별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먹어서인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요조숙녀에 비하면 그녀는 먹을 때 내숭을 떨지 않는 편이었다.매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먹을 때면 품위 떨어진다고 진영숙에게 지적을 받았었다.그래서 본가로 가서 식사할 때는 일부러 더 늦게 먹었다.남자가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냥 보기 좋다는 얘기였어요.”“저도 이게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안 좋게
그리고 배준석의 말은 안 그래도 참고 있는 강이한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쨍그랑!잡고 있던 와인잔 손잡이가 그대로 부러졌다.배준석이 화들짝 놀라며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이한과 박연준이 학교 다닐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렇다면 유영과 박연준 사이에 접점이 없어야 맞는데 어떻게 둘이 같이 앉아서 밥을 먹게 되었는지 궁금했다.게다가 강이한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라니!“최근에 둘이 같이 협업하고 있어.”“협업?”“그래!”“형수 일 안하고 집에만 있지 않아? 아니면 형이 주는 용돈이 적은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와서 일할 이유가 없잖아.”안 그래도 표정이 안 좋은 강이한의 얼굴이 그 말을 듣자 더 퍼렇게 굳었다.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이한은 입맛이 없는지 음식에 수저를 거의 대지 않았다. 반면 유영은 맛있게 먹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박연준이 이미 계산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유영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산다고 했잖아요.”이렇게 좋은 기회를 준 사람인데 밥은 열기라도 더 사줄 수 있었다.박연준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여자한테 밥 얻어먹는 건 불편해서요.”그 말에 오히려 유영이 당황했다.레스토랑을 나오자 이미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박연준은 부드러운 얼굴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타요. 사무실까지 데려다줄게요.”“여보!”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 다 할 말을 잃었다.씩씩거리며 다가온 강이한이 고집스럽게 유영을 품에 안았다.유영이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우악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유영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다망한 박 대표한테 운전기사 노릇까지 부탁할 건 아니지?”유영은 난감한 얼굴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돌아가서 주변 시설들 설계 도면을 요구하신 대로 수정하고 보내드릴게요. 점심은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그거 그냥 메일
귀뺨을 맞은 강이한은 멍한 얼굴로 잠자코 유영을 바라보았다.박연준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한 건지, 곧이어 그의 얼굴이 서슬퍼렇게 굳었다.“내가 방해해서 화가 난 거야? 말해! 둘이 차 타고 또 어딜 가려고 했었어? 리조트? 아니면 호텔?”이성을 잃은 그의 입에서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어떻게 다른 남자 때문에 날 칠 수가 있지?그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유영은 한치 두려움 없는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강이한, 내가 경고했지? 얌전히 있으라고. 자꾸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나도 이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방해라는 말에 강이한이 헛웃음을 지었다.“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하네.”그렇지 않고서야 박연준처럼 까다로운 인간이 유영을 디자인 파트너로 고용할 리 만무했다.수많은 원고가 퇴짜 맞았는데 그녀의 설계도만 통과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강성건설에는 전국의 에이스들만 모아놓은 건축 디자인 부서가 따로 있었다.디자인팀에서 내놓은 방안이 유영의 것만 못해서 채용한 걸까?게다가 박연준은 친히 부족한 부분을 꼬집어 주며 꼼꼼하게 피드백까지 해주었다고 들었다.둘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오가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됐다고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분노한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이유영, 내가 그렇게 만만해?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밖에서 대놓고 남자를 홀리고 다니는 거야?”이성이 사라진 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유영과 박연준 사이의 추악한 거래만 생각하고 있었다.어떻게 여자가 이 정도로 타락할 수 있지?할 말을 잃은 유영이 뒤돌아섰다.자신을 버려두고 혼자 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강이한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잠시 걸음을 멈춘 유영이 말했다.“옷 갈아입으러 가는 거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와. 늦으면 나 안 가.”강이한은 순간 당황했다.할머니 칠순잔치에 같이 가겠다는 말인가?둘이 전에 그렇게 싸워댔으니 당연히 코빼기도 안 비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다.
해외 저택에 있는 그녀의 방도 외숙모가 꾸며준 것이었다. 아침에 외삼촌이랑 출근하기 전에는 꼭 외숙모가 친히 준비한 아침을 먹고 출근했다.유영은 거기 살면서 가족의 따뜻함을 느꼈다.신분의 격차나 이런 것들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 그게 가족이었다. 그녀가 세강의 안주인으로 살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이었다.“액세서리도 몇 세트 주문했어.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담다 보니 좀 가짓수가 많아졌네. 그리고 디자이너한테 따로 주문 제작을 맡겼는데 그건 디자인이 완성되면 네가 한번 확인해 봐.”“외숙모, 저 액세서리 많아요.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아니, 필요해. 외모를 잘 꾸미고 다녀야 무시도 안 당하는 법이야. 외숙모 말 들어.”유영은 또 다시 가슴이 뭉클했다.“유라 말인데… 남자로 태어날 애가 여자로 태어난 것 같아. 유라가 네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니?”“내가 걔 여자 만든다고 공들여서 산 옷들이랑 액세서리에 먼지가 다 끼었더라!”외숙모는 일에만 몰두하는 딸 얘기를 꺼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외삼촌 내외는 딸을 공주처럼 키우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다.그래서 첫째가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엄청 기뻐했다고 한다.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유라는 어릴 때부터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더니 커서는 운동에 취미를 들이면서 공주풍 드레스는 입지도 않고 모두 옷장에 처박았다.외숙모와 통화를 마친 뒤, 유영은 순정동 집사에게서 온 연락을 받았다. 집에 드레스가 도착했는데 와서 확인해 보라는 내용이었다.이미 그녀의 방에 있는 옷장으로는 다 수납할 수 없었기에 옷방을 따로 꾸몄다고 했다.그 말을 들은 유영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부탁했더니 외숙모가 과도하게 쇼핑을 한 모양이었다.집사와 간단한 통화를 마친 뒤, 드디어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사무실로 들어온 조민정이 말했다.“강성건설에서 요구한 초안인데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유영은 서류를 받아 일일이 확인했다.조민정이
전에 본가에서 가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유영은 주방 담당이었기에 지금처럼 신경 써서 꾸민 적이 없었다. 그가 사준 드레스들도 전부 옷장에서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그녀와 10년이나 함께 살면서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지금 보니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천상의 아름다움이었다.강이한은 저도 모르게 위기감을 느꼈다.차에 오른 유영이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빤히 봐?”“드레스 참 잘 어울리네.”정신을 차린 강이한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한집에서 살면서 이렇게 예쁜 사람인 것을 모르고 살았다니.한때는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자신한 적 있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모두 오만한 착각이었다. 성격도 그가 알던 것과는 달랐고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이처럼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있었다.유영은 오늘 새로 한 네일아트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밖에서 만나고 다닌 여자들보다 내가 더 예뻐?”“그 입만 다물면 완벽했을 거야.”강이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이 여자는 입 다물고 있을 때 정말 예쁜데 입만 열면 얄미웠다.유영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흘기며 말했다.“내가 이런 말하는 거 듣기 싫어?”“오늘만큼은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보자. 나도 최대한 맞출 테니까.”강이한이 정색하며 말했다.“그건 당신이 하는 거 봐서.”강이한은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그 난리를 부린 게 다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자 유영은 눈을 감고 뒷좌석에 머리를 기댔다.강이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간곡히 말했다.“이제 싸움은 그만하면 안 될까?”그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과거의 온순하던 유영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유영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이 싸움의 근원이 누구한테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어차피 말해 봐야 또 피곤해질 것 같았기에 그녀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강이한은 할 수만 있다면 유영을 홍문동 저택에 감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녀가 이혼 얘기를 꺼낸 그날부터 그녀의 세상에는 수많은 거슬리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정국진과의 스캔들이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박연준이라는 변수까지 나타난 상황.그녀에게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를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위험한 기운이 유영을 포위했다.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할머니 생신이라며. 계속 싸울 거야?”강이한은 그제야 멈칫하며 정신을 차렸다.그랬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화목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였다.최근 보였던 유영의 기행으로 보아 기분이 나쁜 채로 본가에 돌아간다면 또 무슨 난동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안 그래도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은데 여기서 더 악화되는 건 그들의 미래에도 좋지 않았다.결국 강이한은 혼자 화를 삭였다.“내일 다시 얘기하지.”본가에서는 진영숙이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경원을 옆에 애지중지 끼고 다니며 손님들에게 소개했다.손님들 모두 유경원을 미래의 세강 사모님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그런데 이때, 강이한이 유영과 함께 입장했다. 같이 들어오는 둘의 모습을 본 손님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진영숙의 얼굴도 음침하게 굳었지만 손님들 앞이라 화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힐끗 쳐다본 뒤, 작은 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쟤는 왜 데려왔어? 또 무슨 창피를 당하려고?”조금 전까지 유경원을 극찬하는 손님들의 반응을 보고 흐뭇해하던 진영숙이었다.그런데 유영이 강이한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전에 흉흉하게 퍼졌던 불화설을 일축해 버렸다.유경원의 표정도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하지만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표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했다.“집사람이랑 같이 온 게 뭐가 잘못됐나요?”“이한이 너….”말문이 막힌 진영숙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유영의 얼굴만 보면 짜증이
강이한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저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왜 여기 인간들은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기 좋아하는 걸까?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적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고고한 자태로 그녀에게 명령하는 진영숙이었다.전에는 저런 모습이 보기 싫어 주방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그곳이 당연히 그녀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영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디저트는 힘들 것 같네요, 어머님. 고용인들도 있는데 굳이 저까지 나설 필요가 없잖아요. 누가 뭐래도 지금은 제가 세강의 안주인인걸요?”“뻔뻔한 년!”“그만하세요!”유영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강이한이 짜증스럽게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그는 어미 새가 새끼를 보호하듯, 유영을 감싸 안았다.남자는 단호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이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어머니가 돈 주고 고용한 고용인이 아니라고요. 그러니 주방 일을 할 이유가 없어요.”“너 지금 사람들도 있는데 누구 편을 드는 거야!”진영숙이 더는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당장 유영의 저 얄미운 얼굴에 싸대기를 날렸을 것이다.강이한은 더 말하지 않고 유영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떴다.“할머니께 인사부터 드리고 오자.”홀로 남겨진 진영숙은 상실감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사람들 눈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폭발했을 것이다.그녀는 잔치가 끝나면 유영을 따로 불러서 혼내야겠다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유영과 강이한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유영이 하고 있는 목걸이를 알아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둘이 이혼하는 거 아니었어? 저거 이번 년도 록스 작품인데? 하나뿐이라 나도 못 산 걸 저 여자가 하고 있네?”“보기엔 평범해 보이는걸?”“그건 네 안목이 별로라서 그런 거야. 자세히 봐봐.”록스 작품에 열광하는 팬 중 한 명이 불만을 토로했다.올해 작품이 유난히 심플하긴 하지만 이 디자인에
유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노부인이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무시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 강이한이 유영의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잡으며 말했다.“저 그 사람이랑 별로 안 친해요.”그 말에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노부인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기분이었기 때문이다.유영이 미소 지으며 이어서 입을 열었다.“강이한 씨, 엄연히 임자가 있는 몸이에요. 유경원 씨처럼 귀한집 따님을, 이 시기에 단둘이 만난다? 그녀의 명성에 해가 되지 않을까요?”“…”“찾아간다고 해도 연회가 끝난 후에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어요?”무심히 던진 듯한 말한마디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중에서 안색이 가장 나빠진 건 다름 아닌 유경원의 아버지였다. 그는 마침 선물을 건넨 뒤, 노부인에게 말을 건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좀 전에 강이한의 말투에서 그의 의중을 눈치채고 말았다.그는 무엇보다 지금 좀 전에 유영이 한 말이 신경 쓰였다. 지금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연회가 끝나고 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그럼 지금 내 딸이 상간녀처럼 몰래 강이한을 만나야 한다는 것인가?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안 좋아졌다.그러나 오히려 이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인 유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 당하는 입장에선 더 약이 올랐다.노부인은 잡아먹을 듯이 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강이한, 네가 아주 얘 버릇을 제대로 잘못 굳혀 났구나!”평이한듯 보이는 목소리였으나, 유영은 그 속에 담긴 분노를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대응했다. 예전의 그녀였으면 몰랐을까, 지금의 유영은 이정도로 주눅들지 않았다.과거에 그녀는 겨우 연회장 주방을 맴도는 신세였으나, 지금 그녀는 당당히 강이한 옆에서 빛나고 있었다.“나 좀 배고픈데.”유영이 강이한에게 말했다.강이한은 간단하게 노부인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한 뒤, 유영과 함께 식사 자리로 갔다.“성질 좀 죽여!”강이한이 작게 유영의 귀에다가 대고 속삭였다.그도 유영이 이 집안
처음엔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데려갔다니, 그는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아이가 그의 딸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생명이었다. 강이한에겐 그 아이에게 손댈 자격조차 없었다.그 며칠은 아이와 이유영 모두에게 끔찍한 악몽이었다.이유영은 지금도 병원을 헤매며 미친 듯 아이를 찾았던 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밤낮없이 걱정하며 엄마로서 견딜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이유영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결국, 당신은 아이가 당신 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온유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를 이용하려고 했어.”어떤 이유를 들어도 강이한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결국, 마지막 순간에야 강이한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과 모든 진실을.하지만 그런데도 강이한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 그래서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그때, 그 아이가 울면서 밥도 먹지 않고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을 때... 강이한, 정말 그 순간조차도 넌 아무런 동정심도 못 느꼈어?”“...”그 말은 강이한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왔다.숨이 턱 막히며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동정심이 없었을까?사실 그도 동정심을 느꼈다.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강이한이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그 아이가 소중했고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졌다. 그러나 이온유의 위급한 상태는 강이한을 잔인한 선택의 기로로 몰아넣었다.“이유영, 나는...”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이유영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했다.그 사건은 지금도 강이한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강이한 역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물었다.“
두 사람은 전통 사옥으로 돌아왔다.빗물이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이유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곳의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이유영에게 잔잔한 평온을 안겨주었다.“아가씨, 점심으로 탕을 끓였습니다.”우지가 말했다. 병원에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이유영에게 보양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건강도 되찾았으니 이제 든든하게 먹어야 했다.“네.”우지가 조용히 이유영에게 속삭였다.“아가씨, 아까 강 선생님께서 통화 중이셨는데, 전기봉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 같았습니다.”“...”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을 거라 오랫동안 확신해 왔다.“네, 알겠어요.”어두운 방. 이유영은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이유영은 전기봉 문제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강이한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음에도 이유영은 여전히 강이한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유영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했다.만약 이유영이 외부와 연결될 수 있었다면, 이미 세상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조용히 문이 열리며 강이한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우지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이제 방 안에는 이유영과 강이한만 남았다.“우지가 네게 모든 걸 말했나 보군.”강이한의 목소리는 깊고 무거웠다.“...”우지를 우연히 본 걸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소식을 전한 걸까? 하지만 이유영이 표정은 평온했다. 이유영은 그의 질문에 흔들림 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당장 퍼뜨릴 거야.”“...”“네 약점을 당장 적들에게 넘겨버릴 거야!”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는 그 말에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매우 아팠다.박연준의 말처럼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제 대놓고 그를 배신하려 했다.그것도 강이한의
연서.그 이름은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존재였다. 그 기억은 피처럼 생생하면서도 잔인했다.만약 이유영이 이번에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강이한과 박연준은 평생 서로를 외면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연준, 참 가엾네.”연서… 박연준은 연서에게 흔들린 적이 있었던가? 그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연서를 데려가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었다.“가엾든 말든 상관없어. 그렇게 할 거야, 말 거야?”그가 말하는 것은 서주였다. 강이한은 그의 말을 듣고 조소를 터뜨렸다.“평생 계획하던 일을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과거 박연준의 계획 중심에는 항상 서주가 있었다.처음엔 연서가 그 중심이었고 이후엔 이유영이 그 중심이었다. 박연준의 복잡한 속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강이한조차 박연준의 속내를 완벽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런 박연준이 이제 와서 포기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그 말 뒤에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박연준은 단호히 말했다.“나는 이유영만 있으면 돼.”다른 건 모두 필요 없었다.과거의 교훈은 피로 새겨진 기억처럼 그에게 깊게 남아 있었다. 이번만큼은 무의미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는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웃기지 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놓고 이렇게 대립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이한의 눈에 비친 박연준은 감정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이유영만 원한다고?“이유영은 사람이야. 살아있는 사람!”이유영은 물건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사람의 감정은 상호 존중이 기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이 사실을 강이한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박연준은 냉소적으로 되받아쳤다.“이유영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나 보군.”박연준은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
이유영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지금...”“넌 이미 이유영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 이유영은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평생토록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였다.박연준은 강이한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박연준 자신은?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늘 모든 사람을 조종하던 강이한이 이번에는 스스로 그 틀에 갇힌 셈이었다.이유영의 눈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은 폭풍처럼 요동쳤다.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가 끝나게 된 이유는 강이한의 우유부단함이 컸다.하지만 자신이 꾸민 일과 계산도 분명히 한몫했다.만약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심으로 대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감옥에서 일어난 화재 같은 비극도 이유영의 삶에 없었을 것이다.그 화재만 없었다면, 이유영의 눈은 무사했을 것이다.“하하, 참 우습군!”오랜 침묵 끝에 강이한이 비웃음을 터뜨렸다.“이건 네가 내게 진 빚이야.”진 빚? 그렇다.강이한은 연서와 관련된 일로 박연준에게 진 빚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빚을 갚기 위해 이유영을 이용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박연준이 이유영에게 품은 마음을 오래전부터 알아차렸다.그렇지 않았다면 이유영이 연서에 대해 알아갈 무렵, 박연준이 급히 이유영을 알프산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그 모든 행동은 박연준이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했음을 보여줬다.그리고 그 당황의 이유는 바로 이유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이유영과의 관계를 위해 박연준에게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뜻인가?강이한은 박연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속여왔으면서, 진실이 뭔지 알고나 있어?”진실?오랫동안 사람들을 조종하며 살아오다 보니, 박연준은 자신조차 진실을 혼동하고 있었다.박연준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강이한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박연준, 감정이라는
병원 맞은편의 카페.박연준은 강이한을 깊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놀랍네. 이런 상황에서도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지금 서주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강이한의 차가운 눈빛에는 점점 더 날 선 위협이 깃들었다.“아무래도 엔데스 회장은 이번 달을 넘기지 못할 것 같네.”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진실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었다.“이번 달은 못 넘긴다고?”엔데스 가문이 어떤 상황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강이한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박연준이 이어서 말했다.“게다가 지금까지도 엔데스 회장의 유언장은 나오지 않았다고 해.”따라서 이 시점에 작은 사고라도 발생하면, 그 결과는 대단히 끔찍할 수 있었다.서주는 지금 아주 중요하 시기를 맞고 있었다.엔데스 회장이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문서는 핵심 열쇠로 작용할 거였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기봉...”그 세 글자를 뱉어내며 강이한은 이를 악물었다.전기봉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지만, 모두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박연준은 전기봉을 찾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박연준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냉소를 띤 채 말했다.“전기봉, 네가 데리고 있지?”“박연준!”강이한은 이를 갈며 말했다.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모두 박연준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돌린 것이 분명했다.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모든 걸 넘길게.”“...”그 뜻밖의 말에 강이한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모두 넘겨준다니?“전기봉의 행방을 찾는 즉시, 너에게 넘길게.”“무슨 뜻이야?”강이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연준은 대답 대신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 눈빛에 결연한 의지를 담았다.박연준은 강이한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염 선생이 그러더라고. 석 달 후에도 약이 아무 효과가 없다면... 이유영의
염 선생의 눈빛에는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전남편이든 현재 남편이든, 두 분 모두 이유영 씨를 아꼈다면 어째서 이유영 씨의 눈을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했나요?”눈은 사람의 창밖을 비추는 창문과도 같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체 부위였다. 하지만 이유영의 눈은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특히 이유영이 정국진의 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비극은 더욱 납득하기 어려웠다.“석 달 후, 이유영 씨는 어떻게 되나요?”그 순간, 박연준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만약 석 달 후에도 아무런 개선이 없다면... 이유영 씨의 눈은 아마...”염 선생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잠시 박연준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졌고 이어서 염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이유영 씨의 두 눈은... 아마 복구가 불가능할 겁니다."“...”복구 불가능. 그 단어가 박연준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졌다. 박연준의 머릿속은 갑자기 울리는 폭발음으로 가득 찼다.복구가 불가능하다는 끔찍한 결과가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조차 너무 끔찍했다.만약 이유영의 눈에 희망이 없다면, 이유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반드시 회복시켜야 합니다!”박연준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결의와 위협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염 선생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저를 협박하는 겁니까?”박연준은 차갑게 말했다.“선생님의 아들, 염명훈 말입니다.”“뭐라고요?”“이유영 씨의 눈이 회복된다면, 선생님의 아들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염명훈. 염 선생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이자 동시에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이었다. 염 선생이 은퇴를 결심한 이유도 상당 부분이 아들 때문이었다.“좋습니다.”현재 염명훈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거래를 승낙하는 순간, 염 선생의 눈에는 깊은 체념과 결심이 스쳐 지나갔다.박연준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렇다면 잘 부탁드립니다.”설득만으
지난밤은 단지 짧은 하룻밤이었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정말로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우지가 이유영에게 이불을 더 덮어주었지만,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그 추위는 마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이 유난히 불편했다.결국 링거를 맞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이유영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과거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올 때마다, 이유영은 항상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무서워하지 마.”박연준은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유영을 달랬지만, 이유영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이유영은 마치 모든 감각이 사라진 듯 무기력했다.연서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더욱 단단해진 듯 보였다.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벽이 느껴졌다.병실 침대에서.“물 좀 마셔.”박연준은 컵에 빨대를 꽂아 이유영의 입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나 이유영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목마르지 않아.”사람들은 열이 나면 몸이 뜨겁고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곤 했다.그러면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시려고 하는데 이유영은 그런 느낌 대신 온몸이 춥기만 했다.병원에서 제공한 얇은 담요는 추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고 링거를 맞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각이 팔 전체로 번졌다.“박연준.”“응?”“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이유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이 왜 염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예전에 강이한이 이유영을 병원에 데리고 왔을 때, 진료 후의 협상은 모두 강이한과 염 선생이 나섰기 때문에 이유영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박연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염 선생은 왜 만나려고 해?”박연준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유영이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강이한은 이
파리 지역에서는 엔데스 회장과 관련된 소문이 계속 퍼졌지만, 신뢰할 만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그 문서가 핵심이 될 것이다.“잘 감시해!”강이한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뒷모습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 같았다. 강이한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신시욱은 강이한의 단호한 결심에 자신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이번에 강이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유영의 편에 서겠다는 굳은 결심을 내리고 있었다.그것이 바로 강이한이었다. 과거에 이유영 곁에 머물지 못했던 자신을 대신해, 이제 어떤 일이 생겨도 이유영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었다....우천시.날씨는 변덕스럽고 험난했다.“콜록콜록...”이유영은 기침을 멈추지 못했고 코도 막혀 있었다. 이유영의 모습은 몹시 기운 없어 보였다.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의 쇠약해진 상태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여기 공기가 좋긴 하지만, 기후가 너무 험난하네요.”우지는 걱정스레 말했다.이유영은 지금 감기에 걸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증상이 시작된 것 같았다.더욱이 이유영은 이미 많은 약을 복용 중이었고 약기운 탓에 어지럼증까지 호소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의 힘겨운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이유영을 가로로 들어 올렸다.“병원으로 가자.”“박 선생님! 박 선생님!”이유영을 안고 밖으로 나가려는 박연준을 보고 우지가 급히 그를 막아섰다.지금 밖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병원은 안 가!”이유영은 힘없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나약한 목소리에서 현재 이유영의 건강 상태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잘 버티는 듯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한 것이다.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이유영은 더욱 힘들었을 거였다.이유영의 몸 상태는 원래도 좋지 않았고 파리에 있을 때는 임소미가 세심히 돌봤지만 이제 임소미도 곁에 없었다.이유영의 건
이유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사람이 날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도 다르지 않을 거야.”강이한은 연서 때문에 이유영에게 접근했고 박연준은 강이한과 연서 때문에 이유영에게 접근했다.그 말이 끝나자, 박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박연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이유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희 두 사람은 서로 무엇 때문에 대립하든, 하나의 공통점은 분명해.”“유영아!”“연서는 너와 강이한에게 똑같이 특별한 사람이잖아.”박연준은 연서로 인해 강이한을 증오했고 그 감정은 이유영까지 복잡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연서라는 여자가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명백히 알 수 있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응시했다.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박연준은 따뜻한 손바닥으로 이유영의 차가운 손등을 감쌌지만, 이유영은 즉각 손을 빼냈다.“유영아.”“이럴 필요 없잖아.”이유영은 냉소를 띤 채 다시 말했다.그 한마디는 박연준의 가슴을 옥죄며 숨이 막히게 했다.그는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유영이 진실을 알아버린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이 두려워했던 악몽이 현실이 되었다. 이유영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한편, 강이한 쪽.강이한이 서주에 도착한 후, 신시욱의 말을 듣고 아이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가씨는 단순히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을 뿐이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단순한 감기라니?“게다가 지금은 이식 거부 위험 기간도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겁니다.”신시욱은 강이한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강이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었다.“박연준은 지금 어디에 있어?”아이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강이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박연준이었다.신시욱은 대답했다.“박연준 씨는 며칠째 서주에 계시지 않았습니다.”서주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