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본가에서 가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유영은 주방 담당이었기에 지금처럼 신경 써서 꾸민 적이 없었다. 그가 사준 드레스들도 전부 옷장에서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그녀와 10년이나 함께 살면서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지금 보니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천상의 아름다움이었다.강이한은 저도 모르게 위기감을 느꼈다.차에 오른 유영이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빤히 봐?”“드레스 참 잘 어울리네.”정신을 차린 강이한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한집에서 살면서 이렇게 예쁜 사람인 것을 모르고 살았다니.한때는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자신한 적 있었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모두 오만한 착각이었다. 성격도 그가 알던 것과는 달랐고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이처럼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있었다.유영은 오늘 새로 한 네일아트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밖에서 만나고 다닌 여자들보다 내가 더 예뻐?”“그 입만 다물면 완벽했을 거야.”강이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이 여자는 입 다물고 있을 때 정말 예쁜데 입만 열면 얄미웠다.유영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흘기며 말했다.“내가 이런 말하는 거 듣기 싫어?”“오늘만큼은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보자. 나도 최대한 맞출 테니까.”강이한이 정색하며 말했다.“그건 당신이 하는 거 봐서.”강이한은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그 난리를 부린 게 다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자 유영은 눈을 감고 뒷좌석에 머리를 기댔다.강이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간곡히 말했다.“이제 싸움은 그만하면 안 될까?”그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과거의 온순하던 유영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유영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이 싸움의 근원이 누구한테 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어차피 말해 봐야 또 피곤해질 것 같았기에 그녀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강이한은 할 수만 있다면 유영을 홍문동 저택에 감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녀가 이혼 얘기를 꺼낸 그날부터 그녀의 세상에는 수많은 거슬리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정국진과의 스캔들이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박연준이라는 변수까지 나타난 상황.그녀에게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를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위험한 기운이 유영을 포위했다.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할머니 생신이라며. 계속 싸울 거야?”강이한은 그제야 멈칫하며 정신을 차렸다.그랬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화목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였다.최근 보였던 유영의 기행으로 보아 기분이 나쁜 채로 본가에 돌아간다면 또 무슨 난동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안 그래도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은데 여기서 더 악화되는 건 그들의 미래에도 좋지 않았다.결국 강이한은 혼자 화를 삭였다.“내일 다시 얘기하지.”본가에서는 진영숙이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경원을 옆에 애지중지 끼고 다니며 손님들에게 소개했다.손님들 모두 유경원을 미래의 세강 사모님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그런데 이때, 강이한이 유영과 함께 입장했다. 같이 들어오는 둘의 모습을 본 손님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진영숙의 얼굴도 음침하게 굳었지만 손님들 앞이라 화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힐끗 쳐다본 뒤, 작은 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쟤는 왜 데려왔어? 또 무슨 창피를 당하려고?”조금 전까지 유경원을 극찬하는 손님들의 반응을 보고 흐뭇해하던 진영숙이었다.그런데 유영이 강이한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전에 흉흉하게 퍼졌던 불화설을 일축해 버렸다.유경원의 표정도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하지만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표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했다.“집사람이랑 같이 온 게 뭐가 잘못됐나요?”“이한이 너….”말문이 막힌 진영숙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유영의 얼굴만 보면 짜증이
강이한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저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왜 여기 인간들은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기 좋아하는 걸까?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적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고고한 자태로 그녀에게 명령하는 진영숙이었다.전에는 저런 모습이 보기 싫어 주방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그곳이 당연히 그녀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영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디저트는 힘들 것 같네요, 어머님. 고용인들도 있는데 굳이 저까지 나설 필요가 없잖아요. 누가 뭐래도 지금은 제가 세강의 안주인인걸요?”“뻔뻔한 년!”“그만하세요!”유영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강이한이 짜증스럽게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그는 어미 새가 새끼를 보호하듯, 유영을 감싸 안았다.남자는 단호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이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어머니가 돈 주고 고용한 고용인이 아니라고요. 그러니 주방 일을 할 이유가 없어요.”“너 지금 사람들도 있는데 누구 편을 드는 거야!”진영숙이 더는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당장 유영의 저 얄미운 얼굴에 싸대기를 날렸을 것이다.강이한은 더 말하지 않고 유영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떴다.“할머니께 인사부터 드리고 오자.”홀로 남겨진 진영숙은 상실감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사람들 눈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폭발했을 것이다.그녀는 잔치가 끝나면 유영을 따로 불러서 혼내야겠다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유영과 강이한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유영이 하고 있는 목걸이를 알아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둘이 이혼하는 거 아니었어? 저거 이번 년도 록스 작품인데? 하나뿐이라 나도 못 산 걸 저 여자가 하고 있네?”“보기엔 평범해 보이는걸?”“그건 네 안목이 별로라서 그런 거야. 자세히 봐봐.”록스 작품에 열광하는 팬 중 한 명이 불만을 토로했다.올해 작품이 유난히 심플하긴 하지만 이 디자인에
유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노부인이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무시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 강이한이 유영의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잡으며 말했다.“저 그 사람이랑 별로 안 친해요.”그 말에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노부인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기분이었기 때문이다.유영이 미소 지으며 이어서 입을 열었다.“강이한 씨, 엄연히 임자가 있는 몸이에요. 유경원 씨처럼 귀한집 따님을, 이 시기에 단둘이 만난다? 그녀의 명성에 해가 되지 않을까요?”“…”“찾아간다고 해도 연회가 끝난 후에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어요?”무심히 던진 듯한 말한마디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중에서 안색이 가장 나빠진 건 다름 아닌 유경원의 아버지였다. 그는 마침 선물을 건넨 뒤, 노부인에게 말을 건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좀 전에 강이한의 말투에서 그의 의중을 눈치채고 말았다.그는 무엇보다 지금 좀 전에 유영이 한 말이 신경 쓰였다. 지금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연회가 끝나고 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그럼 지금 내 딸이 상간녀처럼 몰래 강이한을 만나야 한다는 것인가?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안 좋아졌다.그러나 오히려 이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인 유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 당하는 입장에선 더 약이 올랐다.노부인은 잡아먹을 듯이 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강이한, 네가 아주 얘 버릇을 제대로 잘못 굳혀 났구나!”평이한듯 보이는 목소리였으나, 유영은 그 속에 담긴 분노를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대응했다. 예전의 그녀였으면 몰랐을까, 지금의 유영은 이정도로 주눅들지 않았다.과거에 그녀는 겨우 연회장 주방을 맴도는 신세였으나, 지금 그녀는 당당히 강이한 옆에서 빛나고 있었다.“나 좀 배고픈데.”유영이 강이한에게 말했다.강이한은 간단하게 노부인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한 뒤, 유영과 함께 식사 자리로 갔다.“성질 좀 죽여!”강이한이 작게 유영의 귀에다가 대고 속삭였다.그도 유영이 이 집안
강이한은 유영의 팔목을 잡아끌며 강서희에게 말했다.“우린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까 넌 다른 여자들 불러서 같이 가.”현장에 사람도 많은데 굳이 유영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전에는 그녀가 괴롭힘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방관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그가 모르는 곳에서 이 정도로 심하게 괴롭힘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강서희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동생이 원하는 건 다 줄 것처럼 행동하던 오빠였다.그런데 그랬던 오빠가 지금은 유영만 감싸고 있었다.“가자.”그의 목소리는 강압적이었지만 그게 강서희 들으라고 한 말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유영도 그가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방식이 조금 거칠기는 했지만 그는 모든 사람에게 그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과거의 유영이었다면 조금은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한지음이 끼어 있는 이상, 이미 벌어진 감정의 구멍은 다시 가까워질 수 없었다.이미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들에 대한 여론은 떠들썩했다.그리고 한지음이 연회장에 나타난 순간, 모든 풍향이 바뀌었다. 유경원이 진영숙이 점찍은 미래의 며느리감이라면 최근 강이한과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였던 한지음은 그녀보다 더 특별한 존재였다.그런 상황에서 강이한은 아내를 대동하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의 의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유영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은 강이한을 바라보며 눈빛에 비웃음을 머금었다.“나중에 설명할게.”강이한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원래는 차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미리 말한다는 것을 깜빡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빤히 보며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미약한 힘이었지만 강이한은 그 동작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유영.”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말했잖아. 오늘은 조용히 얼굴만
대체 언제부터 아들이 이렇게 불손하게 변한 건지, 진영숙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당장 사람 시켜서 쟤 내보내!”진영숙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이것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각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에 반해, 한지음은 흰 붕대로 두 눈을 가린 채, 평온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긴 생머리를 그대로 드리운 모습은 청순하면서도 안쓰러워 보였다.그녀는 참 분위기 미인이었다.순수하고 악의가 없어 보였다.이 처참한 모습이 처음 기사가 났을 때, 왜 네티즌들이 그토록 유영에게 분노한데는 이 외모도 한몫했을 것이다.그녀는 입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형욱을 불렀다.“조 비서님.”“네, 한지음 씨.”“뭐라도 좀 먹고 싶은데 괜찮을까요?”그녀는 목소리마저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했다.그렇지만 조형욱은 거대한 부담감과 싸우고 있었다.한쪽은 상사의 어머니, 그리고 노부인, 한쪽은 사모님에 한지음까지… 그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는 상사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를 가족행사에 오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지음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조형욱의 도움을 받아 테이블로 향했다.얼마 가지 앉아 그들은 다가오는 유영과 마주쳤다.그녀의 모습은 모두의 주목을 샀다.진영숙이 뒤에서 소리쳤다.“이유영, 거기 서!”비록 한지음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유영과 둘을 또 싸우게 둘 수는 없었다.게다가 오늘은 유경원의 가족들도 참석했다. 지금 유영이 한지음과 충돌하면 유경원의 이미지도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다.처음에 유경원은 진영숙을 따라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사람들도 그녀에게 공손히 대해주었다.모두가 그녀를 미래의 세강 안주인으로 인정한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유영뿐이 아니라 한지음까지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입장이 난감한 건 유경원 쪽이었다.유경원의 아버지는 화를 못참고 먼저 돌아가 버렸다.
진영숙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강이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준수한 얼굴에는 온통 유영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전에는 어떻게 난리를 피우든 기사에 나도 그녀가 직접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지 않은 이상 되돌릴 기회가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그렇게나 그와 선을 긋고 싶었던 걸까? 이런 극단적인 방식을 택할 정도로?강이한이 보기에 유영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이혼을 말한 건 일부러 한짓이다.그녀는 한지음에 대해서 줄곧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에게 실망하고 심지어 절망한 아내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그녀의 그런 행동은 그를 조강지처 두고 바람을 피운 나쁜 남자로 몰아가고 있었다.강이한은 주먹을 꽉 쥐고 여자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이유영, 안으로 들어가!”이 순간에도 그는 애써 분노를 자제했다.“이혼하자고!”그의 입장에서는 많이 양보한 거였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유영은 이혼 소송을 길게 끌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양 변호사의 실력을 믿기는 하지만 이곳은 강이한의 본진인 청하시였다.그가 끝까지 협의를 해주지 않으면 그들의 관계는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유경원이 진영숙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가족 행사에 참석하고 한지음의 참석을 강이한이 방관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착잡했다.더 이상 표면적인 관계도 유지할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줄곧 신경을 끄고 싶었지만 그들의 지속되는 자극에 그녀는 마지막 인내심마저 사라져 버렸다.“이혼해!”강이한이 분노에 치를 떨며 어떻게든 유영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뒤에서 노부인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노부인은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전통적인 사상을 가진 노인은 이혼을 하더라도 남자가 먼저 여자를 내쳐야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인 유영이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낸데
“요즘 시대에는 불륜녀들이 더 당당하다니까요?”“누가 아니래요? 생긴 건 참 순하고 참해 보이는데 속은 아주 시커멓네요.”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한지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그녀의 뒤에 서 있던 조형욱은 상사의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그 시각, 유영은 강이한과 대치하고 있었다.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지난 날의 추억들이 그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같이 여행 갔던 일, 같이 손을 잡고 지는 해를 감상했던 일,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하지만 마지막은 차갑게 이혼을 말하던 유영의 모습이었다.대체 언제부터 그들 사이에 이토록 깊은 곬이 생겼던 걸까? 무엇이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걸까?유영의 눈에 비친 증오의 감정이 강이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래요, 이럴 거면 차라리 이혼하세요!”“강 대표님이 먼저 잘못한 거고 사모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이한아, 오늘 당장 쟤랑 이혼 절차 밟아!”“사모님이 불쌍하네요.”모두가 그들을 이혼하라고 권유하는 가운데, 유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강이한은 언제부터 유영이 그의 옆에 있는 것 자체로 사람들의 동정을 사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그녀의 눈에 가득 담긴 불신과 증오를 본 순간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래, 원하는 대로 해줄게!”“이혼하자, 이유영!”강이한은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지르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는 결국 이혼에 동의하고 말았다.유영은 그 자리에 서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든 부담감을 벗어 던진 것처럼 온몸이 가벼웠다.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고역이었다.강이한이 병원으로 그녀를 끌고 갈 때, 그녀는 혹시라도 그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자신을 수술대에 올릴까 봐 노심초사했다.마치 지난 생처럼….그때 수술 동의서
이유영의 차가운 떨림이 전해지는 순간, 박연준의 마음속을 지배하던 집착이 산산이 무너졌다.“네 말이 맞아. 만약 그 약이 효과가 없다면 넌 괜히 3일 동안 고생하는 거잖아.”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결국 그 약이 이유영에게 효과가 없다면 그녀는 수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그와 강이한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고 강이한은...강이한의 얼굴이 떠오르자, 박연준의 심장은 거칠게 요동쳤다.이유영은 박연준의 말에 온몸의 긴장이 풀린 듯했다.박연준은 그 약이 이유영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또다시 깨닫게 되었다.밤이 깊어지자 이유영은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박연준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언제 파리로 돌아갈지는 말하지 않았다.우지가 이유영에게 담요를 하나 더 덮어주며 말했다.“아가씨, 이렇게 하면 좀 따뜻해질 거예요.”“네.”그러나 이유영은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었고 여전히 싸늘했다.우천시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였다.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견뎌내기 힘든 혹독한 추위였다.“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여기 너무 추워요.”이곳의 추위는 그녀가 알프산에서 느꼈던 한기보다 더 혹독했다. 알프산은 눈이 전부 덮여 있었지만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이렇게 춥지 않았다.그러나 이곳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도 서늘했고 비가 내리면 뼈마저 얼어붙을 만큼 냉혹했다.“우지 씨.”“네, 아가씨.”“아니네요, 나가 보세요. 자야겠어요.”이유영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우지는 이유영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깊이 탄식했다.“그럼 아가씨, 푹 주무세요.”우지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유영은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눈을 떴다.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공허와 끝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유영은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 보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암흑이었고 이유영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서재에서.희미한 조명 아래,
이유영이 어떻게 버텨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박연준도 강이한도 그녀가 그 약 때문에 온몸을 떨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석 달 동안 끼니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이제 며칠 안 남았어.”박연준은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말했다.마지막 3일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다.“앞으로 내가 어떤 고통을 감당해야 할지, 네가 알기나 해?”이유영은 박연준을 향해 물었다.보이지 않았지만 이유영의 그 텅 빈 눈동자에서 박연준은 고통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수술이 사람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무슨 의미일까? 너무도 많았다.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다.하지만 어떤 고통이든, 그녀는 빛을 되찾아야 했다. 마음속의 증오가 아무리 크더라도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후에 그 감정을 표출하기로 했다.잘못에 대한 사과나 돈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걸, 박연준은 처음 깨달았다.그는 자신의 잘못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는지 몰랐고 이제야 그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어떤 고통이든, 내가 함께 견딜게.”오랜 침묵 끝에, 박연준이 말했다.이유영은 대답하지 않았다.이유영이 반응할 틈도 없이 박연준은 그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며 쓴 약을 삼키게 했다.한 모금, 또 한 모금.이유영은 자신을 꽉 잡고 있는 박연준의 떨리는 손을 느꼈다.박연준 역시 이유영이 그 쓴맛을 들이킬 때의 고통스러운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박연준에게는 약의 쓴맛보다 이유영이 느낄 고통이 훨씬 더 쓰라렸다.약 한 그릇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약 한 그릇이 사람을 얼마나 무너뜨릴 수 있는지, 박연준은 뼈저리게 깨달았다.단순히 한 모금 맛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한 그릇의 약은 세상에서 가장 쓴 맛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을 꼭 안고 그녀의 작은 코끝에 입술을 부드럽게 댔다.두 사람의 숨결이 뒤섞였고 박연준은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박연준은 손끝이 허전해지는 순간, 마음까지 텅 빈 듯 가라앉았다.“네 말이 맞아. 우리는 자격이 없어.”“포기해!”“뭐?”“저녁 약은 가져오지 마.”“유영아.”이유영이 약을 거부하자 박연준의 가슴이 더욱 세차게 조여왔다.이제 모든 희망은 염 선생에게 걸려 있었다. 그는 오전에 염 선생을 찾아가 약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실제로 약이 바뀌었고 마지막 3일 치는 이전과 달랐다.박연준은 약이 바뀌었으니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이유영이 저녁 약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대로 포기하려는 건가?어떻게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유영아, 포기하지 마!”박연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은 침묵했고 박연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연준은 이유영의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침묵 속에 결연함을 읽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오랫동안 한약을 먹어서 그런지 이유영의 몸은 항상 차가웠다.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차가운 마음까지 덥힐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손을 빼내려 하자 박연준은 더욱 세게 잡았다.“유영아...”박연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이유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의 침묵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안 돼!”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허무함이 스며 있었다.그는 절대 여기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과거에 그가 이유영에게 저지른 일들을 떠올리면, 안 된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었다.저녁.우지와 우현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결국 박연준의 말을 따라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쓴 약을 가져왔다.3일!마지막 3일이었다.사실 그들도 약이 이유영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연준은 마지막 3일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약을 먹였다.“아가씨?”우지가 이유영 앞으로 다가와 약을 가져다 놓았다.“치워요.”박연준은 말없이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오후에 이유영에게 했던 말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을까? 그녀는 듣
이유영은 처마 밑 긴 의자에 누워 밖에서 스며드는 대나무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좋아할 수 있는 것이었다.빗방울이 대나무잎에 부딪치는 소리, 그 울림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들어가. 춥잖아.”“서주는 지금 어때?”오전에 신지수에게 전화가 와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하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요즘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면 대체 누가 그의 것을 박연준에게 넘긴 걸까?신지수의 조사 결과, 강이한과 박연준 사이의 격렬했던 싸움이 모두 박연준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강이한은 도대체 왜 그런 걸까?“아직도 못 잊는 거야?”박연준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억눌린 고통을 삼켰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못 잊는다고? 박연준은 분명 강이한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박연준은 이유영이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다. 서주는 이유영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그녀가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강이한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눈이 보였다면, 박연준에게 어떻게 복수를 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이유영은 원래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분노는 깊고도 거셌다.“못 잊는다고?”이유영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차가웠다. 한겨울의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디찬 미소였다.토끼털로 장식된 옥색 한복은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옷을 입은 이유영은 차가웠다.그녀의 평온함은 한때 그의 다정함 속에 묻혀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다정했던 모습은 언제였던가.강이한에게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달았다.그녀는 완벽한 전업주부, 완벽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단지 대역일 뿐이었다니.“이유영.”“박연준, 너와 강이한은 한 번이라도 내가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 있어?”박연준은 말이 없었다.독립적인 존재? 그렇다. 이유영은 살아있
그는 덜컥 겁이 났다.더 큰 대가가 두려웠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차라리 그 대가를 키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강이한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는 듯한 아픔에 휩싸였다.염 선생의 의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정도였고 문제는 운명, 아니 그 대가가 이유영에게 재앙처럼 닥친 것이다.석 달의 고된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다.만약 이 모든 고난의 대가를 누군가가 짊어져야 한다면, 강이한은 기꺼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녀의 빛을 되찾아주고 이유영에게 고요한 미래를 선물하고 싶었다....우천시.마지막 3일째가 되자 박연준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늘 평정심을 지키던 그도 이유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문기원이 돌아왔다.“선생님.”박연준은 묵묵부답이었다.기다림만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남은 3일은 마지막 희망을 바라는 간절한 시간이 되었다.박연준은 연서의 죽음이 회장의 치밀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그날부터 그의 밤은 끝없는 불면으로 채워졌다.그와 강이한은 모두 함정에 빠졌고 이제 와서 강이한이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걸 볼 수는 없었다.점심 식탁은 평소와 다름없었다.박연준은 남은 이틀 동안, 이유영이 약을 삼키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는지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한 방울의 약이라도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을 것처럼.“펑!”이유영은 빈 그릇을 세게 내려놓았다.박연준은 텅 비어 있는 그릇을 확인하고 평소처럼 물었다.“다른 느낌은 없어?”그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없어.”이유영의 말 한마디에 박연준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슬픔이 서렸다.“한 그릇 더 마셔야 해?”박연준은 말없이 침묵했고 우지와 우현은 이유영이 이미 체념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영은 이미 약이 소용없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이해하지 않으면 더 고통스러울 거라니?소은지는 비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넌 한지음과의 관계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거야?”소은지는 강이한의 뻔뻔한 대답에 또다시 놀랐다.이유영을 위해 희생하는 강이한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답변을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소은지, 넌 몰라.”“그래, 모르겠어.”소은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날카로워졌고 강이한을 향한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소은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이 내뱉었다.“한지음을 돌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어. 굳이 곁에 두어서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어?”“...”“강이한, 이유영에게 마음이 흔들린 건 네 응보야!”만약 강이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이유영은 아마 강이한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소은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노려보았다.강이한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응보라고? 그래, 강이한도 그것이 응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똑같이 한지음을 곁에 둘 거야?”한지음은 이유영 비극의 시작이었다. 소은지는 지금까지도 강이한이 그 일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이런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일까?소은지의 물음에 강이한은 눈을 크게 뜨고 깊은 고통이 서린 눈빛으로 답했다.“물론이지.”“...”소은지는 한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를 느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고 강이한의 얼굴에 뿌렸다.예전에 우천시 서재에서 '수술 동의서'를 보았을 때, 강이한이 마음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우스웠다.사람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소은지는 분노에 찬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강이한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씁쓸한 고통이 가득했다.후회할까? 물론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전생과 현생을 거치면서 강이한은 한가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운명은 바꾸려고 한다면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강이한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강이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쓰라린 마음이었던 것이다.“유영이를 기다리고 있을게요.”강이한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정국진은 알고 있었다. 그 기다림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이유영을 만나고 이제 영원히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것.“사실...”“제가 빚진 거예요.”정국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이한이 말을 잘랐다.그는 정국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고 강이한도 역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결국 이유영의 눈에 다른 사람의 빛이 비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휴...”정국진은 한숨을 쉬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사람은 한 번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순간, 그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깨달음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인데 지금의 강이한은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는 깨달았고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가 짊어지게 된 것이다....소은지는 강이한이 파리에 왔다는 것을 알고 오후에 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유영과 강이한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은지였기 때문이다.“후회해?”소은지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강이한에게 물었다.“...”한지음 일로 후회하냐는 것이었다. 소은지는 강이한과 한지음의 관계를 가장 혐오했다. 소은지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기에 수많은 부부의 파탄을 목격하면서 자연히 불륜을 가장 혐오하게 되었다.그런 소은지가 강이한에게 후회하느냐고 묻자, 강이한은 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런 질문, 몇 번이나 해봤어?”“...”소은지의 머릿속에 설선비가 떠올랐다.당시 그 사건은 청하시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고 만약 소은지의 변호가 없었다면 설선비의 명성은 더욱 추락했을 것이다.소식은 철저히 숨겨졌지만 우연히 식당에서 설선비를 만난 소은지는 그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후회하니?”설선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소은지 씨, 평생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절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지금 강이한의 가슴속에서 어떤 절망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절망은 마치 끝없이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강이한에게 이유영을 기다리는 것보다 가혹한 절망은 없었다.조용히 서서 아이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는 깊은 상처와 슬픔이 서려 있었다.“강 선생님, 이만 가주세요. 선생님을 보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요.”사람은 누구나 마음속 악몽과 마주할 때 쉽게 맞설 수 없다. 어린 월이도 마찬가지였다.오는 길 내내 마음을 다잡았지만 눈앞의 월이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찢어지는 고통을 억누른 채 망연히 서 있었다.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었다.결국, 그는 돌아가기로 했다.돌아서는 순간, 유 아주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요. 아가씨, 이제 괜찮아요.”“으흑, 으흑...”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소리에 강이한의 마음은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그저 아이를 보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아이를 겁먹게 하고 말았다. 강이한은 그저 아이 곁에 있고 싶었고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고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하지만 아이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세상에 이보다 더 처참한 아버지가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복도 끝에 정국진이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을 보니 강이한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듯했다.상처 입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정국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아이가 아직도 너를 무서워해?”“...”‘무서워한다'는 단어가 강이한의 심장을 깊이 찔렀다.과거의 강이한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서 이토록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줄은.“다 제 잘못이에요.”그는 깊은 슬픔을 담아 말했다.“...”강이한의 잘못이 확실했다.하지만 마냥 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강이한은 월이의 마음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에게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강이한은 아이가 정씨 가문에서 얼마나 소중히 자라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최고의 스승이셨고 외삼촌 또한 훌륭한 삼촌이었으며 엄마 역시 다정한 어머니였다.하지만 강이한은 이유영의 삶에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웠고 결국, 그는 좋은 아버지조차 되지 못했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강이한의 가슴은 숨이 막힐 듯한 고통에 짓눌렸다. 마치 쇳덩이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유씨 할머니, 유씨 할머니?”아이는 강이한을 발견하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소중한 바비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 인형은 이유영을 똑 닮아 있었다. 이유영을 볼 수 없는 아이는 온 마음을 그 인형에 의지하고 있었다.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아는 아이와 달리, 그는 무엇을 지켜냈던가?아이의 경계심 어린 눈빛에 강이한의 가슴은 다시금 깊은 고통에 잠겼다.아이를 돌보는 유 아주머니가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아가씨.”“나쁜, 나쁜 사람!”유 아주머니도 강이한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곳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정 선생님과 사모님의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정씨 가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이한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국진과 임소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아이에게 그토록 상처를 준 사람을 왜 다시 만나게 하는 거냐고, 차라리 바깥 여자의 아이와 함께 살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수군거렸다.“아가씨, 무서워하지 마세요.”유 아주머니는 아이를 꼭 껴안고 강이한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한은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그의 가슴속에서 어떤 고통이 끓어오르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가장 가까운 딸에게 원수처럼 취급받는 것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월이를 통해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뼛속까지 깨닫고 있었다.그는 아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