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은 할 수만 있다면 유영을 홍문동 저택에 감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녀가 이혼 얘기를 꺼낸 그날부터 그녀의 세상에는 수많은 거슬리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정국진과의 스캔들이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박연준이라는 변수까지 나타난 상황.그녀에게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를 꺾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위험한 기운이 유영을 포위했다.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할머니 생신이라며. 계속 싸울 거야?”강이한은 그제야 멈칫하며 정신을 차렸다.그랬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화목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였다.최근 보였던 유영의 기행으로 보아 기분이 나쁜 채로 본가에 돌아간다면 또 무슨 난동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안 그래도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은데 여기서 더 악화되는 건 그들의 미래에도 좋지 않았다.결국 강이한은 혼자 화를 삭였다.“내일 다시 얘기하지.”본가에서는 진영숙이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경원을 옆에 애지중지 끼고 다니며 손님들에게 소개했다.손님들 모두 유경원을 미래의 세강 사모님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그런데 이때, 강이한이 유영과 함께 입장했다. 같이 들어오는 둘의 모습을 본 손님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진영숙의 얼굴도 음침하게 굳었지만 손님들 앞이라 화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힐끗 쳐다본 뒤, 작은 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쟤는 왜 데려왔어? 또 무슨 창피를 당하려고?”조금 전까지 유경원을 극찬하는 손님들의 반응을 보고 흐뭇해하던 진영숙이었다.그런데 유영이 강이한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전에 흉흉하게 퍼졌던 불화설을 일축해 버렸다.유경원의 표정도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하지만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표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했다.“집사람이랑 같이 온 게 뭐가 잘못됐나요?”“이한이 너….”말문이 막힌 진영숙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그녀는 유영의 얼굴만 보면 짜증이
강이한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저런 얘기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왜 여기 인간들은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기 좋아하는 걸까?하지만 그녀의 가장 큰 적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고고한 자태로 그녀에게 명령하는 진영숙이었다.전에는 저런 모습이 보기 싫어 주방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그곳이 당연히 그녀의 자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영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디저트는 힘들 것 같네요, 어머님. 고용인들도 있는데 굳이 저까지 나설 필요가 없잖아요. 누가 뭐래도 지금은 제가 세강의 안주인인걸요?”“뻔뻔한 년!”“그만하세요!”유영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강이한이 짜증스럽게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그는 어미 새가 새끼를 보호하듯, 유영을 감싸 안았다.남자는 단호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이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어머니가 돈 주고 고용한 고용인이 아니라고요. 그러니 주방 일을 할 이유가 없어요.”“너 지금 사람들도 있는데 누구 편을 드는 거야!”진영숙이 더는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사람들이 보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 당장 유영의 저 얄미운 얼굴에 싸대기를 날렸을 것이다.강이한은 더 말하지 않고 유영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떴다.“할머니께 인사부터 드리고 오자.”홀로 남겨진 진영숙은 상실감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사람들 눈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폭발했을 것이다.그녀는 잔치가 끝나면 유영을 따로 불러서 혼내야겠다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유영과 강이한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유영이 하고 있는 목걸이를 알아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둘이 이혼하는 거 아니었어? 저거 이번 년도 록스 작품인데? 하나뿐이라 나도 못 산 걸 저 여자가 하고 있네?”“보기엔 평범해 보이는걸?”“그건 네 안목이 별로라서 그런 거야. 자세히 봐봐.”록스 작품에 열광하는 팬 중 한 명이 불만을 토로했다.올해 작품이 유난히 심플하긴 하지만 이 디자인에
유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노부인이 아무리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무시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때 강이한이 유영의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잡으며 말했다.“저 그 사람이랑 별로 안 친해요.”그 말에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노부인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기분이었기 때문이다.유영이 미소 지으며 이어서 입을 열었다.“강이한 씨, 엄연히 임자가 있는 몸이에요. 유경원 씨처럼 귀한집 따님을, 이 시기에 단둘이 만난다? 그녀의 명성에 해가 되지 않을까요?”“…”“찾아간다고 해도 연회가 끝난 후에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어요?”무심히 던진 듯한 말한마디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중에서 안색이 가장 나빠진 건 다름 아닌 유경원의 아버지였다. 그는 마침 선물을 건넨 뒤, 노부인에게 말을 건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좀 전에 강이한의 말투에서 그의 의중을 눈치채고 말았다.그는 무엇보다 지금 좀 전에 유영이 한 말이 신경 쓰였다. 지금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연회가 끝나고 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그럼 지금 내 딸이 상간녀처럼 몰래 강이한을 만나야 한다는 것인가?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안 좋아졌다.그러나 오히려 이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인 유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 당하는 입장에선 더 약이 올랐다.노부인은 잡아먹을 듯이 유영을 노려보며 말했다.“강이한, 네가 아주 얘 버릇을 제대로 잘못 굳혀 났구나!”평이한듯 보이는 목소리였으나, 유영은 그 속에 담긴 분노를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듯 대응했다. 예전의 그녀였으면 몰랐을까, 지금의 유영은 이정도로 주눅들지 않았다.과거에 그녀는 겨우 연회장 주방을 맴도는 신세였으나, 지금 그녀는 당당히 강이한 옆에서 빛나고 있었다.“나 좀 배고픈데.”유영이 강이한에게 말했다.강이한은 간단하게 노부인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한 뒤, 유영과 함께 식사 자리로 갔다.“성질 좀 죽여!”강이한이 작게 유영의 귀에다가 대고 속삭였다.그도 유영이 이 집안
강이한은 유영의 팔목을 잡아끌며 강서희에게 말했다.“우린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까 넌 다른 여자들 불러서 같이 가.”현장에 사람도 많은데 굳이 유영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전에는 그녀가 괴롭힘 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방관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그가 모르는 곳에서 이 정도로 심하게 괴롭힘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강서희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전에는 동생이 원하는 건 다 줄 것처럼 행동하던 오빠였다.그런데 그랬던 오빠가 지금은 유영만 감싸고 있었다.“가자.”그의 목소리는 강압적이었지만 그게 강서희 들으라고 한 말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유영도 그가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방식이 조금 거칠기는 했지만 그는 모든 사람에게 그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과거의 유영이었다면 조금은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한지음이 끼어 있는 이상, 이미 벌어진 감정의 구멍은 다시 가까워질 수 없었다.이미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들에 대한 여론은 떠들썩했다.그리고 한지음이 연회장에 나타난 순간, 모든 풍향이 바뀌었다. 유경원이 진영숙이 점찍은 미래의 며느리감이라면 최근 강이한과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였던 한지음은 그녀보다 더 특별한 존재였다.그런 상황에서 강이한은 아내를 대동하고 연회에 참석했다. 그의 의도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유영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은 강이한을 바라보며 눈빛에 비웃음을 머금었다.“나중에 설명할게.”강이한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원래는 차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그녀 때문에 화가 나서 미리 말한다는 것을 깜빡했다.유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빤히 보며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미약한 힘이었지만 강이한은 그 동작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유영.”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유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말했잖아. 오늘은 조용히 얼굴만
대체 언제부터 아들이 이렇게 불손하게 변한 건지, 진영숙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당장 사람 시켜서 쟤 내보내!”진영숙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이것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각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에 반해, 한지음은 흰 붕대로 두 눈을 가린 채, 평온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긴 생머리를 그대로 드리운 모습은 청순하면서도 안쓰러워 보였다.그녀는 참 분위기 미인이었다.순수하고 악의가 없어 보였다.이 처참한 모습이 처음 기사가 났을 때, 왜 네티즌들이 그토록 유영에게 분노한데는 이 외모도 한몫했을 것이다.그녀는 입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형욱을 불렀다.“조 비서님.”“네, 한지음 씨.”“뭐라도 좀 먹고 싶은데 괜찮을까요?”그녀는 목소리마저 고양이처럼 나긋나긋했다.그렇지만 조형욱은 거대한 부담감과 싸우고 있었다.한쪽은 상사의 어머니, 그리고 노부인, 한쪽은 사모님에 한지음까지… 그는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는 상사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를 가족행사에 오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지음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조형욱의 도움을 받아 테이블로 향했다.얼마 가지 앉아 그들은 다가오는 유영과 마주쳤다.그녀의 모습은 모두의 주목을 샀다.진영숙이 뒤에서 소리쳤다.“이유영, 거기 서!”비록 한지음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유영과 둘을 또 싸우게 둘 수는 없었다.게다가 오늘은 유경원의 가족들도 참석했다. 지금 유영이 한지음과 충돌하면 유경원의 이미지도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이다.처음에 유경원은 진영숙을 따라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사람들도 그녀에게 공손히 대해주었다.모두가 그녀를 미래의 세강 안주인으로 인정한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유영뿐이 아니라 한지음까지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입장이 난감한 건 유경원 쪽이었다.유경원의 아버지는 화를 못참고 먼저 돌아가 버렸다.
진영숙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강이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준수한 얼굴에는 온통 유영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전에는 어떻게 난리를 피우든 기사에 나도 그녀가 직접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열지 않은 이상 되돌릴 기회가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그렇게나 그와 선을 긋고 싶었던 걸까? 이런 극단적인 방식을 택할 정도로?강이한이 보기에 유영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이혼을 말한 건 일부러 한짓이다.그녀는 한지음에 대해서 줄곧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에게 실망하고 심지어 절망한 아내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그녀의 그런 행동은 그를 조강지처 두고 바람을 피운 나쁜 남자로 몰아가고 있었다.강이한은 주먹을 꽉 쥐고 여자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이유영, 안으로 들어가!”이 순간에도 그는 애써 분노를 자제했다.“이혼하자고!”그의 입장에서는 많이 양보한 거였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유영은 이혼 소송을 길게 끌수록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양 변호사의 실력을 믿기는 하지만 이곳은 강이한의 본진인 청하시였다.그가 끝까지 협의를 해주지 않으면 그들의 관계는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유경원이 진영숙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가족 행사에 참석하고 한지음의 참석을 강이한이 방관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착잡했다.더 이상 표면적인 관계도 유지할 생각이 없어진 것이다.줄곧 신경을 끄고 싶었지만 그들의 지속되는 자극에 그녀는 마지막 인내심마저 사라져 버렸다.“이혼해!”강이한이 분노에 치를 떨며 어떻게든 유영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뒤에서 노부인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노부인은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전통적인 사상을 가진 노인은 이혼을 하더라도 남자가 먼저 여자를 내쳐야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인 유영이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낸데
“요즘 시대에는 불륜녀들이 더 당당하다니까요?”“누가 아니래요? 생긴 건 참 순하고 참해 보이는데 속은 아주 시커멓네요.”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한지음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그녀의 뒤에 서 있던 조형욱은 상사의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그 시각, 유영은 강이한과 대치하고 있었다.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지난 날의 추억들이 그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같이 여행 갔던 일, 같이 손을 잡고 지는 해를 감상했던 일,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하지만 마지막은 차갑게 이혼을 말하던 유영의 모습이었다.대체 언제부터 그들 사이에 이토록 깊은 곬이 생겼던 걸까? 무엇이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걸까?유영의 눈에 비친 증오의 감정이 강이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그래요, 이럴 거면 차라리 이혼하세요!”“강 대표님이 먼저 잘못한 거고 사모님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이한아, 오늘 당장 쟤랑 이혼 절차 밟아!”“사모님이 불쌍하네요.”모두가 그들을 이혼하라고 권유하는 가운데, 유영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강이한은 언제부터 유영이 그의 옆에 있는 것 자체로 사람들의 동정을 사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그녀의 눈에 가득 담긴 불신과 증오를 본 순간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래, 원하는 대로 해줄게!”“이혼하자, 이유영!”강이한은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지르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는 결국 이혼에 동의하고 말았다.유영은 그 자리에 서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든 부담감을 벗어 던진 것처럼 온몸이 가벼웠다.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고역이었다.강이한이 병원으로 그녀를 끌고 갈 때, 그녀는 혹시라도 그가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자신을 수술대에 올릴까 봐 노심초사했다.마치 지난 생처럼….그때 수술 동의서
강서희의 두 눈에 환희가 스쳤다. 그녀는 표정을 수습하고 다가가서 진영숙을 부축했다.“엄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진영숙은 강서희의 부축을 받으며 한지음에게 다가갔다. 조형욱은 지금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상사는 껄끄러운 상대를 그에게 맡긴 채, 안으로 들어가버린 상황.“당장 여기서 꺼져!”진영숙은 유영을 대했던 것보다 더한 태도로 한지음을 대했다.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은 며느리라도 공식적으로는 세강의 며느리인 유영과 온갖 스캔들을 제조해 낸 한지음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진영숙은 유영에게 참았던 화를 모두 한지음에게 쏟아냈다.“강 대표님도 가셨는데 저 여자는 왜 아직도 여기 있대요?”유영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화살을 한지음에게로 돌렸다.한지음의 안 좋던 안색이 더 하얗게 질리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그녀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은 유영을 망신주기 위해서였다.자신이 나타나기만 하면 강이한은 자신의 옆에 서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 방식으로 유영의 입지를 흔들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당한 쪽은 한지음이었다.그녀는 세강의 가족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라면 대놓고 남의 집안일에 대해 의논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녀가 놓친 점이 있다면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상류층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세강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긴 했으나 참석한 손님들도 누굴 두려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대놓고 의논하지는 않았지만 수군거리는 소리와 조소 섞인 눈빛은 숨기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눈을 가리고 있긴 했지만 자신을 향한 그들의 적의와 혐오감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강이한이 현장을 떠난 지금 한지음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빨리 쟤 안 치우고 뭐 해!”진영숙은 조형욱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언성을 높였다.한지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마치 상처 입은 어린 양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현장에는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알겠습니다….”조형욱이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한지음 씨,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