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이 넘는 기자회견에서 유영은 자신이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과 이상을 설명했다. 기자들이 민감한 질문을 던질 때, 유영이 초라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모든 잘못의 근원을 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돌리고 혼자 유유히 빠져나갔다.“넌 네 오빠랑 저 여자가 이혼하면 목표를 이룬 거겠지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한지음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이제 그 사과마저 저 여자는 네 오빠가 강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어. 더 깊게 파고 들면 내가 여우짓을 해서 네 오빠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 얘기한 거나 다름없다고!”아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한지음은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유영이 이토록 완벽한 반격을 준비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전에는 그냥 나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고단수가 따로 없었다.강서희가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여우 같은 년!”기나긴 악플과 택배 폭탄에 반쯤 미쳐버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여론을 뒤집을 줄은 몰랐다.이제 유영은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갔다.그녀는 무능한 전업주부 이미지를 철저히 벗어던졌다. 예전에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은 능력도 없고 남편에게 기대어 사는 기생충으로 알았다.하지만 이제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냈다.기자들마저 그녀를 대표님으로 호칭하지 않았던가?이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확고히 자신의 영역을 다졌다.한지음의 두 눈은 증오로 가득했다.대체 뭐가 잘나서? 왜 이렇게 된 걸까?세강과 관련된 모두에게 커다란 엿을 선사한 유영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무실로 돌아갔다.사무실 문을 여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수시로 그녀를 곁눈질하는 직원들도 있었다.그런데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청객이 와 있었다.언제 온 건지, 강이한이 그녀의 자리에 앉아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과거에 그는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언제 봐도 몸에서 담배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당신한테 사과하라고 강요했어. 하지만 기자들한테 그걸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한지음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질지 생각해 봤어? 대체 왜 한지음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쾅!유영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강이한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과격한 모습이었다.그녀의 주변으로 진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강이한은 분노도 잊고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이한 씨,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한지음한테 뭘 했어? 내가 한지음 납치하는 거 당신이 봤어? 내가 그 여자 눈을 멀게 하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 봤냐고?”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당신이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나한테 갖다 뒤집어씌운 거잖아!”“납치범들한테 돈을 준 건 당신이야. 당신 계좌에서 돈이 흘러나갔다고!”“하!”유영은 냉소를 지었다.남자는 그 증거를 아직까지 믿고 있었단 말인가?결국 쟁점은 그 은행 카드의 입금 기록으로 돌아왔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나가!”그와 이야기하는 매 순간이 지치고 괴로웠다.자리에서 일어선 강이한이 말했다.“이유영, 적당히 해. 오늘 같은 일은 다시없었으면 좋겠어.”“그럼 시비가 생길 일을 하지 말든가! 또 나한테 협박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그녀는 혼자서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보살이 아니었다.강성건설과의 계약 때문에 처리가 늦어지긴 했지만 기자회견도 예정된 수순이었다.시간적 여유가 되면 자신에게 해코지했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안겨줄 생각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자 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전에는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부터 명심해. 난 당한 만큼 갚아주는 사람이야.”온순하고 순종적인 현모양처?사랑이 사라진 지금 그런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사람마다 참을 수 있는 한계점이
강성건설과의 협약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오로라 스튜디오도 괜찮은 명성을 얻었다.아직도 강이한의 영향력은 유효하지만 앞으로 의뢰가 더 많아질 것이다.물론, 외삼촌의 개입으로도 받을 수 있는 의뢰는 충분했다.조민정이 일정을 확인하고 말했다.“오후에 고객 미팅이 있어요. 남안시에서 온 고객이에요.”남안시?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남안시까지 퍼진 걸까?“외삼촌과 친분이 있는 고객인가요?”그녀의 질문에 조민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어제 입찰 때 공개한 설계 도면이 전국에 퍼진 것 같아요.”강이한에게 패배를 선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화제성은 충분했다.그래서 많은 기업인들이 이 작은 스튜디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전에는 작은 작업실들이 생존하기 힘든 이유가 좋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참, 문 비서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박 대표님이 점심을 같이 하고 싶어한다고 하셨어요.”“나야 좋죠.”안 그래도 박연준에게 밥 한번 살 생각이었다. 강이한이 그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렸다.그와 이혼하기 전에 조용히 살기는 그른 것 같았다.지금 강이한을 보고 있으면 막다른 골목에 갇히자 무분별하게 사람을 물어대는 개 같았다.“세강 노부인 칠순잔치 행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아침에 정국진이 한번 언급한 적 있었기에 조민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은 당연히 가기 싫었다.하지만 강이한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대던 진영숙, 그리고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는 유경원을 생각하면 고민이 깊어졌다.한참 고민하던 유영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저녁 일정은 다 비워두세요. 아직은 이혼하기 전이니까 얼굴이라도 비춰줘야 명분이 설 것 같네요.”절대 웃어른을 공경해서 가려는 모양새는 아니었다.조민정은 왠지 연회가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강이한도 잘한 건 없지만 유영 역시 받은 만큼 돌려주었다.둘이 연회에서 싸워대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민정은 저도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렸다.“제가
하지만 배준석도 만만치 않았다.그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형,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형이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해서 이 자리를 만든 거거든?”그는 젊은 나이에 골든아워로 불릴 정도로 성공한 의사였다.강이한과는 전부터 알고 지낸 후배였는데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금을 들여 그를 국내로 부른 것이었다.한지음의 시력 때문에 부른 것인데 하필 식사 자리에서 유영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 천천히 먹고 저녁에 내가 술 살게.”“나 술 안 마시는 거 알잖아!”강이한이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배준석은 자유분방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기관리가 똑 부러진 사람이었다. 의사의 길을 걷기로 한 뒤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강이한은 음침한 눈빛으로 후배를 노려보다가 결국 외투를 다시 의자에 던져놓았다.“그럼 화장실 좀 다녀올게.”“아니, 이 사람이 정말!”배준석이 뒤에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강이한은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시각 배연준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영은 어딘가에서 풍기는 찬 기운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하얀 셔츠에 정장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이한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도 그는 최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그를 발견한 유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눈치 빠른 박연준이 그녀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먼저 들어갈게요.”“네.”말을 마친 박연준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강이한을 지나치면서도 그에게 시선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매사에 진중한 박연준에 비해 강이한은 지금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박연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유영을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도 더 차게 식었다. 조금 전 박연준과 함께 차에서 내리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둘이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전에 그와 같이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나빴는데 사적으로 둘이 만나는
“남이 벌어온 돈을 받아서 쓰면서 갑질을 당할 바에야 그냥 내가 벌고 말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말을 마친 그녀는 우아하게 남자의 옆을 지나쳤다.혼자 남은 강이한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그녀는 능력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박연준과의 협력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시킨 것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인정을 받은 걸까?유영과 박연준은 강이한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등지고 앉았다.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두 사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스테이크가 올라오자 그는 넉살 좋게 고기를 한조각씩 잘라 유영에게 건네주었다.유영도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감사해요.”“전에 자주 오던 곳인가요?”“아니요. 전에는 외식을 거의 안 했어요.”물론 맛집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나와서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시어머니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할 일 없을 때면 책을 읽는 게 그녀의 유일한 취미였다.지금 생각해 보면 유영은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던 것 같았다.유영은 조금씩 고기를 잘게 썰어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육집은 부드러웠지만 안 그래도 얼굴이 작아 볼이 빵빵하게 부풀려졌다. 그럼에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사랑스러운 게 더 신기했다.“왜 그렇게 봐요?”박연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유영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먹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랑은 좀 달라서요.”유영이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다르다는 표현보다는 별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먹어서인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요조숙녀에 비하면 그녀는 먹을 때 내숭을 떨지 않는 편이었다.매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먹을 때면 품위 떨어진다고 진영숙에게 지적을 받았었다.그래서 본가로 가서 식사할 때는 일부러 더 늦게 먹었다.남자가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냥 보기 좋다는 얘기였어요.”“저도 이게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안 좋게
그리고 배준석의 말은 안 그래도 참고 있는 강이한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쨍그랑!잡고 있던 와인잔 손잡이가 그대로 부러졌다.배준석이 화들짝 놀라며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이한과 박연준이 학교 다닐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렇다면 유영과 박연준 사이에 접점이 없어야 맞는데 어떻게 둘이 같이 앉아서 밥을 먹게 되었는지 궁금했다.게다가 강이한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라니!“최근에 둘이 같이 협업하고 있어.”“협업?”“그래!”“형수 일 안하고 집에만 있지 않아? 아니면 형이 주는 용돈이 적은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와서 일할 이유가 없잖아.”안 그래도 표정이 안 좋은 강이한의 얼굴이 그 말을 듣자 더 퍼렇게 굳었다.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이한은 입맛이 없는지 음식에 수저를 거의 대지 않았다. 반면 유영은 맛있게 먹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박연준이 이미 계산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유영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산다고 했잖아요.”이렇게 좋은 기회를 준 사람인데 밥은 열기라도 더 사줄 수 있었다.박연준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여자한테 밥 얻어먹는 건 불편해서요.”그 말에 오히려 유영이 당황했다.레스토랑을 나오자 이미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박연준은 부드러운 얼굴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타요. 사무실까지 데려다줄게요.”“여보!”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 다 할 말을 잃었다.씩씩거리며 다가온 강이한이 고집스럽게 유영을 품에 안았다.유영이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우악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유영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다망한 박 대표한테 운전기사 노릇까지 부탁할 건 아니지?”유영은 난감한 얼굴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돌아가서 주변 시설들 설계 도면을 요구하신 대로 수정하고 보내드릴게요. 점심은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그거 그냥 메일
귀뺨을 맞은 강이한은 멍한 얼굴로 잠자코 유영을 바라보았다.박연준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한 건지, 곧이어 그의 얼굴이 서슬퍼렇게 굳었다.“내가 방해해서 화가 난 거야? 말해! 둘이 차 타고 또 어딜 가려고 했었어? 리조트? 아니면 호텔?”이성을 잃은 그의 입에서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어떻게 다른 남자 때문에 날 칠 수가 있지?그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유영은 한치 두려움 없는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강이한, 내가 경고했지? 얌전히 있으라고. 자꾸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나도 이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방해라는 말에 강이한이 헛웃음을 지었다.“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하네.”그렇지 않고서야 박연준처럼 까다로운 인간이 유영을 디자인 파트너로 고용할 리 만무했다.수많은 원고가 퇴짜 맞았는데 그녀의 설계도만 통과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강성건설에는 전국의 에이스들만 모아놓은 건축 디자인 부서가 따로 있었다.디자인팀에서 내놓은 방안이 유영의 것만 못해서 채용한 걸까?게다가 박연준은 친히 부족한 부분을 꼬집어 주며 꼼꼼하게 피드백까지 해주었다고 들었다.둘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오가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됐다고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분노한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이유영, 내가 그렇게 만만해?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밖에서 대놓고 남자를 홀리고 다니는 거야?”이성이 사라진 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유영과 박연준 사이의 추악한 거래만 생각하고 있었다.어떻게 여자가 이 정도로 타락할 수 있지?할 말을 잃은 유영이 뒤돌아섰다.자신을 버려두고 혼자 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강이한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잠시 걸음을 멈춘 유영이 말했다.“옷 갈아입으러 가는 거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와. 늦으면 나 안 가.”강이한은 순간 당황했다.할머니 칠순잔치에 같이 가겠다는 말인가?둘이 전에 그렇게 싸워댔으니 당연히 코빼기도 안 비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다.
해외 저택에 있는 그녀의 방도 외숙모가 꾸며준 것이었다. 아침에 외삼촌이랑 출근하기 전에는 꼭 외숙모가 친히 준비한 아침을 먹고 출근했다.유영은 거기 살면서 가족의 따뜻함을 느꼈다.신분의 격차나 이런 것들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것, 그게 가족이었다. 그녀가 세강의 안주인으로 살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이었다.“액세서리도 몇 세트 주문했어. 너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담다 보니 좀 가짓수가 많아졌네. 그리고 디자이너한테 따로 주문 제작을 맡겼는데 그건 디자인이 완성되면 네가 한번 확인해 봐.”“외숙모, 저 액세서리 많아요.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요.”“아니, 필요해. 외모를 잘 꾸미고 다녀야 무시도 안 당하는 법이야. 외숙모 말 들어.”유영은 또 다시 가슴이 뭉클했다.“유라 말인데… 남자로 태어날 애가 여자로 태어난 것 같아. 유라가 네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니?”“내가 걔 여자 만든다고 공들여서 산 옷들이랑 액세서리에 먼지가 다 끼었더라!”외숙모는 일에만 몰두하는 딸 얘기를 꺼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외삼촌 내외는 딸을 공주처럼 키우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다.그래서 첫째가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엄청 기뻐했다고 한다.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유라는 어릴 때부터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더니 커서는 운동에 취미를 들이면서 공주풍 드레스는 입지도 않고 모두 옷장에 처박았다.외숙모와 통화를 마친 뒤, 유영은 순정동 집사에게서 온 연락을 받았다. 집에 드레스가 도착했는데 와서 확인해 보라는 내용이었다.이미 그녀의 방에 있는 옷장으로는 다 수납할 수 없었기에 옷방을 따로 꾸몄다고 했다.그 말을 들은 유영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부탁했더니 외숙모가 과도하게 쇼핑을 한 모양이었다.집사와 간단한 통화를 마친 뒤, 드디어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사무실로 들어온 조민정이 말했다.“강성건설에서 요구한 초안인데 한번 확인해 보시겠어요?”유영은 서류를 받아 일일이 확인했다.조민정이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소은지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과 턱을 스친 붉은 흔적을 본 남기는 조금 전 상황이 심상치 않았음을 곧장 눈치챘다.하지만 소은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남기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 괜찮으니까.”“네.”남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걱정이 남아 있었다.이건 시작에 불과했다.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피하려 하고 아무리 그와의 악연을 끊으려 해도 엔데스 가문은 그녀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것을.일단 엔데스 명우를 몰아냈지만 이건 단지 서막에 불과했다.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서둘러야 해요.”소은지는 조용히 남기에게 말했다.지금 그녀는 현우의 행방을 최대한 빨리 알아내야 했다.물론 이유영의 말처럼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좋은 소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이곳은 파리다. 이 도시에서 현우는 어떤 존재였던가?이곳은 그가 살아온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잔인하리만큼 차가운 현실을 안겨주고 있었다.누가 보아도 가슴 아픈 상황이었다.“네.”남기는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연미가 반산월로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그녀의 방문은 소은지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요즘 송연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 소은지는 그녀를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고 소은지는 앞에 놓인 물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히 말을 꺼냈다.“현우 씨가 너한테 말했겠지?”그 말을 하며 소은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연미를 바라봤다.송연미도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고 눈빛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현우 씨는 네가 반산월로 날 찾아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현우는 더 이상 날 만나지 않으려고 해.”송연미는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알도 하지 않았다.“내 전화도 받지 않아.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