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기자들은 그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일부는 그녀가 찔려서 그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계속 웃음만 짓고 있던 유영이 갑자기 깊은 슬픔에 잠기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저는 사건이 있던 날 오전에 친구랑 아침을 먹다가 그분을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오후에 그분이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요.”현장이 갑자기 숙연해졌다.“남편은 줄곧 제가 그분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요했어요. 사실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한지음 씨한테 뭘 잘못했는지. 그날 아침에도 저는 한지음 씨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든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항상 냉정하게 취재를 이어가던 기자들마저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유 대표님 말씀은 남편분께서 대표님의 해명을 전혀 믿지 않고 한지음 씨의 말만 들었다는 말씀인가요?”“남편은 항상 저를 믿어주던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번 지음 씨 사건이 너무 잔혹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가 꼭 사과를 해야 그분의 기분이 풀릴 거라고 했어요. 아마 기분이 좋아지면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죠.”유영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대답했다.오늘의 기자회견은 생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플랫폼에서 회견을 시청하던 사람들 중에는 오늘 칠순잔치 때문에 다망한 본가 식구들을 제외하고도 병원에 있는 한지음 일당과 강이한도 있었다.아까 단상에서 조리 정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말하던 아내에게 감탄한 순간에 갑자기 절언 발언이 나오자 그도 순간 당황했다.유영은 자신은 한지음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으며 단지 사건이 잔혹해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가해자로 지목한다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강 대표님은 어떻게 아내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지?”“그러니까. 그러니까 상간녀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자기 와이프한테 하지도 않은 잘못을 사과하라고 강요한 거잖아?”현장의 기자들마저 이렇게 수군대고 있었다.현재 생방송을 보
두 시간이 넘는 기자회견에서 유영은 자신이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과 이상을 설명했다. 기자들이 민감한 질문을 던질 때, 유영이 초라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모든 잘못의 근원을 강이한과 한지음에게 돌리고 혼자 유유히 빠져나갔다.“넌 네 오빠랑 저 여자가 이혼하면 목표를 이룬 거겠지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한지음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이제 그 사과마저 저 여자는 네 오빠가 강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어. 더 깊게 파고 들면 내가 여우짓을 해서 네 오빠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 얘기한 거나 다름없다고!”아마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한지음은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유영이 이토록 완벽한 반격을 준비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전에는 그냥 나약하고 아무 힘도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고단수가 따로 없었다.강서희가 일그러진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여우 같은 년!”기나긴 악플과 택배 폭탄에 반쯤 미쳐버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여론을 뒤집을 줄은 몰랐다.이제 유영은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갔다.그녀는 무능한 전업주부 이미지를 철저히 벗어던졌다. 예전에 사람들은 세강의 안주인은 능력도 없고 남편에게 기대어 사는 기생충으로 알았다.하지만 이제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냈다.기자들마저 그녀를 대표님으로 호칭하지 않았던가?이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확고히 자신의 영역을 다졌다.한지음의 두 눈은 증오로 가득했다.대체 뭐가 잘나서? 왜 이렇게 된 걸까?세강과 관련된 모두에게 커다란 엿을 선사한 유영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사무실로 돌아갔다.사무실 문을 여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수시로 그녀를 곁눈질하는 직원들도 있었다.그런데 자신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청객이 와 있었다.언제 온 건지, 강이한이 그녀의 자리에 앉아 담배까지 피우고 있었다.과거에 그는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언제 봐도 몸에서 담배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당신한테 사과하라고 강요했어. 하지만 기자들한테 그걸 사실대로 말해버리면 한지음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질지 생각해 봤어? 대체 왜 한지음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쾅!유영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강이한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과격한 모습이었다.그녀의 주변으로 진한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강이한은 분노도 잊고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강이한 씨,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한지음한테 뭘 했어? 내가 한지음 납치하는 거 당신이 봤어? 내가 그 여자 눈을 멀게 하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거 봤냐고?”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당신이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나한테 갖다 뒤집어씌운 거잖아!”“납치범들한테 돈을 준 건 당신이야. 당신 계좌에서 돈이 흘러나갔다고!”“하!”유영은 냉소를 지었다.남자는 그 증거를 아직까지 믿고 있었단 말인가?결국 쟁점은 그 은행 카드의 입금 기록으로 돌아왔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나가!”그와 이야기하는 매 순간이 지치고 괴로웠다.자리에서 일어선 강이한이 말했다.“이유영, 적당히 해. 오늘 같은 일은 다시없었으면 좋겠어.”“그럼 시비가 생길 일을 하지 말든가! 또 나한테 협박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그녀는 혼자서 모든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보살이 아니었다.강성건설과의 계약 때문에 처리가 늦어지긴 했지만 기자회견도 예정된 수순이었다.시간적 여유가 되면 자신에게 해코지했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안겨줄 생각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자 유영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전에는 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부터 명심해. 난 당한 만큼 갚아주는 사람이야.”온순하고 순종적인 현모양처?사랑이 사라진 지금 그런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다.사람마다 참을 수 있는 한계점이
강성건설과의 협약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오로라 스튜디오도 괜찮은 명성을 얻었다.아직도 강이한의 영향력은 유효하지만 앞으로 의뢰가 더 많아질 것이다.물론, 외삼촌의 개입으로도 받을 수 있는 의뢰는 충분했다.조민정이 일정을 확인하고 말했다.“오후에 고객 미팅이 있어요. 남안시에서 온 고객이에요.”남안시?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남안시까지 퍼진 걸까?“외삼촌과 친분이 있는 고객인가요?”그녀의 질문에 조민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어제 입찰 때 공개한 설계 도면이 전국에 퍼진 것 같아요.”강이한에게 패배를 선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화제성은 충분했다.그래서 많은 기업인들이 이 작은 스튜디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전에는 작은 작업실들이 생존하기 힘든 이유가 좋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참, 문 비서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박 대표님이 점심을 같이 하고 싶어한다고 하셨어요.”“나야 좋죠.”안 그래도 박연준에게 밥 한번 살 생각이었다. 강이한이 그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렸다.그와 이혼하기 전에 조용히 살기는 그른 것 같았다.지금 강이한을 보고 있으면 막다른 골목에 갇히자 무분별하게 사람을 물어대는 개 같았다.“세강 노부인 칠순잔치 행사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아침에 정국진이 한번 언급한 적 있었기에 조민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은 당연히 가기 싫었다.하지만 강이한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대던 진영숙, 그리고 갑자기 적극적으로 나오는 유경원을 생각하면 고민이 깊어졌다.한참 고민하던 유영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저녁 일정은 다 비워두세요. 아직은 이혼하기 전이니까 얼굴이라도 비춰줘야 명분이 설 것 같네요.”절대 웃어른을 공경해서 가려는 모양새는 아니었다.조민정은 왠지 연회가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강이한도 잘한 건 없지만 유영 역시 받은 만큼 돌려주었다.둘이 연회에서 싸워대는 모습을 상상하니 조민정은 저도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렸다.“제가
하지만 배준석도 만만치 않았다.그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형,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형이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해서 이 자리를 만든 거거든?”그는 젊은 나이에 골든아워로 불릴 정도로 성공한 의사였다.강이한과는 전부터 알고 지낸 후배였는데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금을 들여 그를 국내로 부른 것이었다.한지음의 시력 때문에 부른 것인데 하필 식사 자리에서 유영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오늘은 급한 일이 있어. 천천히 먹고 저녁에 내가 술 살게.”“나 술 안 마시는 거 알잖아!”강이한이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배준석은 자유분방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기관리가 똑 부러진 사람이었다. 의사의 길을 걷기로 한 뒤로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강이한은 음침한 눈빛으로 후배를 노려보다가 결국 외투를 다시 의자에 던져놓았다.“그럼 화장실 좀 다녀올게.”“아니, 이 사람이 정말!”배준석이 뒤에서 불만을 토로했지만, 강이한은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시각 배연준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영은 어딘가에서 풍기는 찬 기운을 느끼고 걸음을 멈추었다.하얀 셔츠에 정장 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강이한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에도 그는 최근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그를 발견한 유영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눈치 빠른 박연준이 그녀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먼저 들어갈게요.”“네.”말을 마친 박연준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강이한을 지나치면서도 그에게 시선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매사에 진중한 박연준에 비해 강이한은 지금 온몸으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박연준이 안으로 들어가자 유영을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도 더 차게 식었다. 조금 전 박연준과 함께 차에서 내리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둘이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전에 그와 같이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나빴는데 사적으로 둘이 만나는
“남이 벌어온 돈을 받아서 쓰면서 갑질을 당할 바에야 그냥 내가 벌고 말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말을 마친 그녀는 우아하게 남자의 옆을 지나쳤다.혼자 남은 강이한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그녀는 능력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박연준과의 협력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시킨 것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인정을 받은 걸까?유영과 박연준은 강이한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등지고 앉았다.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두 사람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스테이크가 올라오자 그는 넉살 좋게 고기를 한조각씩 잘라 유영에게 건네주었다.유영도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감사해요.”“전에 자주 오던 곳인가요?”“아니요. 전에는 외식을 거의 안 했어요.”물론 맛집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나와서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시어머니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할 일 없을 때면 책을 읽는 게 그녀의 유일한 취미였다.지금 생각해 보면 유영은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했던 것 같았다.유영은 조금씩 고기를 잘게 썰어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육집은 부드러웠지만 안 그래도 얼굴이 작아 볼이 빵빵하게 부풀려졌다. 그럼에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고 사랑스러운 게 더 신기했다.“왜 그렇게 봐요?”박연준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유영이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먹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랑은 좀 달라서요.”유영이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다르다는 표현보다는 별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먹어서인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요조숙녀에 비하면 그녀는 먹을 때 내숭을 떨지 않는 편이었다.매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먹을 때면 품위 떨어진다고 진영숙에게 지적을 받았었다.그래서 본가로 가서 식사할 때는 일부러 더 늦게 먹었다.남자가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그냥 보기 좋다는 얘기였어요.”“저도 이게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안 좋게
그리고 배준석의 말은 안 그래도 참고 있는 강이한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쨍그랑!잡고 있던 와인잔 손잡이가 그대로 부러졌다.배준석이 화들짝 놀라며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강이한과 박연준이 학교 다닐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그렇다면 유영과 박연준 사이에 접점이 없어야 맞는데 어떻게 둘이 같이 앉아서 밥을 먹게 되었는지 궁금했다.게다가 강이한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라니!“최근에 둘이 같이 협업하고 있어.”“협업?”“그래!”“형수 일 안하고 집에만 있지 않아? 아니면 형이 주는 용돈이 적은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나와서 일할 이유가 없잖아.”안 그래도 표정이 안 좋은 강이한의 얼굴이 그 말을 듣자 더 퍼렇게 굳었다.식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이한은 입맛이 없는지 음식에 수저를 거의 대지 않았다. 반면 유영은 맛있게 먹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박연준이 이미 계산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유영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제가 산다고 했잖아요.”이렇게 좋은 기회를 준 사람인데 밥은 열기라도 더 사줄 수 있었다.박연준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여자한테 밥 얻어먹는 건 불편해서요.”그 말에 오히려 유영이 당황했다.레스토랑을 나오자 이미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박연준은 부드러운 얼굴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타요. 사무실까지 데려다줄게요.”“여보!”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 다 할 말을 잃었다.씩씩거리며 다가온 강이한이 고집스럽게 유영을 품에 안았다.유영이 발버둥 쳤지만 그럴수록 남자는 우악스럽게 그녀를 껴안았다.유영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다망한 박 대표한테 운전기사 노릇까지 부탁할 건 아니지?”유영은 난감한 얼굴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돌아가서 주변 시설들 설계 도면을 요구하신 대로 수정하고 보내드릴게요. 점심은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그거 그냥 메일
귀뺨을 맞은 강이한은 멍한 얼굴로 잠자코 유영을 바라보았다.박연준 때문에 맞았다고 생각한 건지, 곧이어 그의 얼굴이 서슬퍼렇게 굳었다.“내가 방해해서 화가 난 거야? 말해! 둘이 차 타고 또 어딜 가려고 했었어? 리조트? 아니면 호텔?”이성을 잃은 그의 입에서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어떻게 다른 남자 때문에 날 칠 수가 있지?그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유영은 한치 두려움 없는 얼굴로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강이한, 내가 경고했지? 얌전히 있으라고. 자꾸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나도 이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방해라는 말에 강이한이 헛웃음을 지었다.“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분명하네.”그렇지 않고서야 박연준처럼 까다로운 인간이 유영을 디자인 파트너로 고용할 리 만무했다.수많은 원고가 퇴짜 맞았는데 그녀의 설계도만 통과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강성건설에는 전국의 에이스들만 모아놓은 건축 디자인 부서가 따로 있었다.디자인팀에서 내놓은 방안이 유영의 것만 못해서 채용한 걸까?게다가 박연준은 친히 부족한 부분을 꼬집어 주며 꼼꼼하게 피드백까지 해주었다고 들었다.둘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오가지 않고 정상적인 절차대로 진행됐다고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분노한 강이한이 입을 열었다.“이유영, 내가 그렇게 만만해?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밖에서 대놓고 남자를 홀리고 다니는 거야?”이성이 사라진 강이한의 머릿속에는 유영과 박연준 사이의 추악한 거래만 생각하고 있었다.어떻게 여자가 이 정도로 타락할 수 있지?할 말을 잃은 유영이 뒤돌아섰다.자신을 버려두고 혼자 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강이한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잠시 걸음을 멈춘 유영이 말했다.“옷 갈아입으러 가는 거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와. 늦으면 나 안 가.”강이한은 순간 당황했다.할머니 칠순잔치에 같이 가겠다는 말인가?둘이 전에 그렇게 싸워댔으니 당연히 코빼기도 안 비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다.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
전기봉.지금은 아주 중요한 때다.‘전기봉’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때, 이유영의 눈빛에 살벌한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그 차가움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듯 날카로웠고 그 서늘한 기운은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전기봉.서주에 있을 때, 이유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박연준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이유영이 박연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기봉이 박연준의 손에 있었다면 지금쯤 강이한을 상대로 이미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서주에 머물렀던 그 시간 동안, 박연준은 강이한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이는 전기봉이 아직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전기봉은 결정적인 인물이 분명했다. 이유영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모든 것이 뒤엉켜 버렸다.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서주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유영은 지금 백산 별장에 머물고 있었지만, 결코 한가롭게 있을 수가 없었다.특히 엔데스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문서의 절반이 강이한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엔데스 명우와 엔데스 현우뿐만 아니라 엔데스 가문의 다른 몇몇 주요 인물들, 예를 들어 엔데스 운빈조차도 강이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박연준은 아직 전기봉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박연준은 전기봉을 찾는 와중에도 강이한과 엔데스 가문을 예의주시해야 했다.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영이 신지수에게 대체 무엇을 줬길래 강이한 곁에 있기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이한은 문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신씨 가문까지 경계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주 전체가 떠들썩했다.신씨 가문의 아가씨가 곧 강이한과 결혼할 거라고.크리스탈 별장의 서재.신시욱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전기봉을 찾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찾더라도...”신시욱은 말을 차마 끝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그 의미를 충
월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얌전한 아이였다.임소미는 월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의 보물인 월이는 집안 사람들과도 무척 친하게 지냈고 말투까지 귀엽기 그지없어 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아침 식사 후.여진우는 이유영을 서재로 데려갔다.두 사람 사이에는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앞으로 무슨 계획이야?”여진우가 입을 열었다.계획. 그 한마디에 이유영은 고요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이유영은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유영의 마음도 변화하기 시작했다.변화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이유영의 인식 전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기 때문이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이유영이 차분히 여진우의 물음에 답했다.“난 계획이 있어.”이 일은 이유영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그게 박연준의 일이든, 아니면 강이한의 일이든.여진우의 얼굴에 순간 심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유영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차분함 속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오빠.”“응?”“오빠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강이한은 예전에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박연준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정씨 집안으로 돌아오고 여진우는 또다시 한번 이유영에게 경고했었다. 강이한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고.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경고 뒤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과 음모가 숨겨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10년... 그 오랜 시간 동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치밀한 계획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진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 사람들이 한 여자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나도 몰랐어.”여진우는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사실, 모두가 서주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서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만났었다면 박연준과 강이한의 정체는 의심받았을 거고 두 사람에 대한 이유영의 믿음 또한 계속 유
“네, 유영이가 전한 바로는 그래요.”“...”그렇다면 지금 이유영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과거에는 알 수 없던 진실이 눈앞에 명확히 드러난 지금, 그 혼란스러움이 어찌 가슴을 뒤흔들지 않을 수 있을까? 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강이한과 백연준, 이유영에게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그 10년 동안 소은지는 늘 궁금했다. 강이한이 이유영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왜 그의 곁에 있을 때 이유영은 늘 그렇게 힘들어 보였는지.당시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상황을 이제야 모두 알게 되었을 때, 소은지의 마음 또한 고통스러웠다.강이한은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10년이라는 세월은 단지 한 사람만을 위해 흘러간 게 아니었을 거야.”현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어조로 답했다.“아니라고요?”“그러기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에요.”만약 단지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소은지는 아마 지금과 다른 상황을 목격했을 것이다.강이한은 한지음을 위해 이유영에게 상처 줬고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잘해줬지만, 이유영과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그렇다.정말로 사랑했다면 어떻게든 이유영과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 몇 년간 파리에 머물렀던 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결혼하려고 했을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연준은 결혼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백연준은 이유영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모든 의미가 변했다.이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무 의미도 없었다.단지 이유영을 대체품으로 여겼기에 박연준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는 이유영이 연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유영과 결혼하려하지 않은 것이었다.“맞아요, 10년은 너무 긴 시간이죠. 그동안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강이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영이한테 상처를 줄 수 있었던 거예요.”한지음을 위해서, 한
전화기를 내려놓은 후.배천명은 불안한 눈길로 엔데스 명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나며 더없이 어두웠다.스피커폰으로 통화하며 권수미의 말을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여섯째 도련님!”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그는 손에 담배를 물고 연달아 깊은 연기를 내뿜었다. 설유나의 상태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다다랐지만, 소은지를 제외하고는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상황은 이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소은지는 차를 몰아 반산월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엔데스 현우의 차는 넓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소은지는 차 문을 힘차게 닫고 밖으로 내려섰다.집 안으로 들어가자, 엔데스 현우가 잠이 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집에 있었던 모양이었다.소은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얼굴에 드리웠던 표정을 조금 거둬들이며 말했다.“왔어요?”“네.”“아침은 먹었어요?”“아직이에요.”소은지는 고개를 흔들며 엔데스 현우 쪽으로 걸어갔다.자연스레 현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집사들은 서둘러 소은지 앞에 식기를 차려냈다.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바라보던 소은지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자신이 없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이미 습관적으로 소은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엔데스 현우는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현우가 아무리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를 풍겨도 소은지는 그에게 겁을 내지 않았다. 엔데스 명우와는 달랐다.2년간 엔데스 명우와 대립하며 소은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은지는 단 한 번도 엔데스 명우 앞에서 그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래서 매번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를 보며 이를 갈아도 결국 실패로 끝나곤 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미워하는 만큼 마찬가지로 엔데스 명우도 소은지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설유나는 어때요?”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소은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