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흐릿한 달빛 아래. 하늘에서 예고도 없이 돌연 눈이 쏟아졌다. 하얀 눈송이가 바닥에 떨어져 녹아내렸다.강지훈은 깊이 잠든 소현아를 안아 들었다. 며칠 안 본 사이에 살이 더 붙은 것 같았다.강지훈 주위 다른 여자들은 모두 쭉쭉 빵빵 S 라인 몸매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녀만은... 돌돌 굴린 눈사람처럼 통통하기 그지없었다.그는 소현아처럼 자신의 몸매에 신경 쓰지 않는 여자는 종래로 본 적이 없다.머지않은 곳에서 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차 번호판을 본 순간 소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에서 낯익은 사람이 내렸다.정말 그 사람이다!여기엔 무슨 일로 왔단 말인가?기성은이 자신을 이용했던 일이 떠오른 소민아는 곧바로 못 본 척 고개를 숙였다.기성은이 걸어왔다.“강 소장님.”강지훈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전연우가 보냈어?”기성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대표님께선 소장님과 소씨 가문의 일엔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오늘은 다른 일 때문에 왔습니다.”강지훈이 그의 옆을 지나가자 소민아를 데려가려 했던 경호원들도 그녀를 놓아주고 강지훈의 뒤를 따라 자리를 떴다.살을 엘듯한 찬 바람에 소민아는 몸을 감싸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기성은 역시 효율만 중요시하는 냉정한 사람이다. 그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차에 타요.”소민아가 말했다.“쳇, 누가 비서님 차에 앉는대요?”기성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일기예보에 따르면 두 시간 뒤에 폭설이 내린대요. 현재 비행기도 모두 결항된 상황이고요. 이곳에서 걸어가려면 다섯 시간 정도 걸릴 텐데, 길바닥에서 얼어 죽고 싶지 않으면...”“전...”소민아는 운전기사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둘러보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기성은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소민아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안에 쏙 들어가 안전벨트까지 착용했다.“기 비서님 말씀이 맞아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그 기회를 놓치게 해서는
기성은이 눈을 내리뜨리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쳐다보다가 다시 의사에게 시선을 돌렸다.“선생님, 이 일은 잠시 비밀로 해주세요. 병원 쪽에도 제가 사람을 보낼게요.”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앞으로 치료가 더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세요.”“수고하셨어요”사람들이 떠난 뒤, 기성은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지금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내가 이미 차 불렀으니까 사모님과 먼저 서울에 가 있어요. 그 후 치료는 내가 책임질게요”소민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숙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얘기해주지 않았어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 소씨 가문이 무사하길 바란다면 내가 말한 대로 해요. 얼마 후 서울에서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텐데 오늘처럼 운이 좋을지 나도 장담 못 하니까.”“대체 누가 숙모한테 이런 짓을 한 건지 말해주셔야 해요. 또한... 기 비서님이 한 건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기성은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성적이지 못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바보 멍청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다.“대체 어떻게 서울대를 졸업한 거예요? 내가 알려준다고 해도 소민아 씨가 할 수 있는 게 뭔데요?”“이렇게 시간 낭비하는 것보단 빨리 짐 싸서 로즈 가든에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기성은이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차를 몰고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날이 밝기 전 반드시 회사에 돌아가야 한다.그때 마침 명세진의 의식이 돌아왔다.“여... 여기 어디예요?”소민아가 소리쳤다.“숙모! 깨어나셨네요!”“기 비서님?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 민아? 현아랑 같이 공항에 간 거 아니었어? 현아는?”“사모님 편히 쉬세요. 전 일이 있어 가보겠습니다.”소민아는 그가 정말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기성은은 집에서 나선 뒤 이어폰을 끼고 전화를 걸었다.“...네. 송시아 씨가 소씨 가문에 손을 썼습니다. 다음은... 회사일 겁니다.”새벽 한 시 반.서울
사모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도우미들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또 대표님과 싸우는 건가?매번 싸울 때마다 사모님은 분노하며 젓가락을 내동댕이치고 밥도 먹지 않은 채 위로 올라가 버린다. 사모님이 화가 나면 대표님이 아무리 달래도 무용지물이다.하지만 이제 대표님은 경험이 생겼는지 밥 먹을 때 트러블이 생기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하며 사모님이 화를 다 분출해낼 때까지 기다린 뒤 다시 밥을 먹는다.그녀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내는 듯 전혀 개의치 않은 채 한 손에 금융 신문을 들고 읽으며 다른 한 손으론 느긋하게 밥을 먹었다. 그 중간중간에 장소월에게 음식을 집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녀는 전연우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오자 더더욱 화가 치밀어올랐다.“전연우, 내가 말하고 있잖아. 내 목소리 안 들려?”전연우는 늘 입던 잠옷 차림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응. 듣고 있어.”“이 치마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 번 입어 볼래?”이제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최근 약을 복용한 덕분인지 예전보다 감정 기복이 훨씬 줄어들었다.신문은 흑백이라 전연우가 예쁘다고 말하는 원피스는 디자인만 보일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장소월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말 좀 돌리지 마!”전연우는 인내심 있게 차근차근 그녀에게 설명했다.“여긴 회사에서 새로 만든 광고 전문 구역이야. 매일 다른 고급 브랜드 여성 의류와 액세서리를 걸어놔. 금융 일보를 챙겨보는 사람은 대부분 경제적 기초가 있는 남성일 테니 광고를 보면 분명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주고 싶을 거야. 또한 매일 올라오는 사진이 여성들의 관심도 끌 테니 앞으로 이 신문의 주문 대상은 남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겠지.”자신을 칭찬하는 것인지, 남을 칭찬하는 것인지 모를 말이었다.장소월은 컬러도 잘 보이지 않는 그 원피스를 쳐다보았다. 500달러나 되는 가격이었다.그 점이 확실히 장소월의 화제를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녀가 신문에 실린 그 옷을
송시아는 아니다...장소월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전연우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그저 일을 그르치기만 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 불과하다.아무 조건 없이 송시아의 의견을 믿을 순 있지만, 장소월의 말이라면 한 구절, 한 글자도 마음에 새기지 않는 사람이다.장소월은 예전 전연우로부터 이런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회사 일엔 조금도 끼어들지 마. 너랑 송시아는 비할 바가 못 돼.”...성세 그룹 아침 회의는 화상으로 진행되었다.“대표님, 정말 그렇게 하실 건가요? 협력 브랜드 회사에선 이미 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만약 갑자기 계약을 파기한다면 위약금을 지불해야 합니다.”전연우는 심플한 잠옷 차림이었지만 역시나 평소 같은 압도적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사인펜을 돌리며 말했다.“계약 해지하고 계약서에 쓰여 있는 대로 위약금 지불하세요.”“하지만 그 금액이 60억이나 됩니다. 또한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나 이제 와 새로운 브랜드 협력사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전연우가 말했다.“협력사는 내 와이프가 이미 생각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상대방이 어떤 요구를 제기하든 일단 만족시켜줘요.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나중에 보충하고요. 오늘 안에 계약서 작성해서 나한테 보내요.”“회의 끝.”고위급 인사들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로그아웃했다.기획부 임원 한 명이 나가지 않고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대표님, 이런 질문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말해요.”“브랜드 의류의 컬러와 가격 문제는 예전에 이미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왜 오늘에야 생각을 바꾸셨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또한... 미우미우는 대중성도 높고 모두가 인정하는 고급 브랜드입니다. 그들과 손을 잡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아직 나가지 않은 임원들은 모두 기획팀 팀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용감함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확실히 그렇다. 이는 별로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누구보다 현명하고 이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임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떴다. 그때 바깥에서 한동안 기다리고 있던 소피아가 품에 가득 서류를 안고 다급히 들어와 말했다.“기 비서님, 송 부대표님께서 저희에게 분기 보고서를 비롯한 수많은 서류들을 요구하셨습니다. 아직은 무엇을 하려는지 저희도 모릅니다.”기성은은 태연한 얼굴로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회의실을 나섰다. 소민아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나서자 소피아는 그녀를 휙 밀어내고 득의양양하고도 오만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소피아가 기성은과 함께 일을 해결하러 나간 뒤, 소민아는 원래 기성은과 함께 썼던 자리가 다른 사람의 소유로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물건은 임시 책상 위로 옮겨져 있었다. 얼마 후, 소피아가 안에서 걸어 나와 소민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소민아 씨... 대표님께서 소민아 씨는 곧 회사를 떠나야 하니 남은 일을 저한테 넘겨주라고 하셨어요. 한 달 뒤 인사팀 쪽에서 사인하고 나면 떠날 수 있어요.”소피아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참, 원래 쓰던 책상 깨끗이 정리하고 다른 사무실에 빈 책상이 있는지 알아봐요. 한 달 밖에 안 남았으니까 임시로 앉아 일하면 되잖아요.”소민아가 말했다.“알겠어요. 치워놓을게요.”소피아는 기성은이 분부한 일을 처리하려 밖으로 나갔다. 소민아가 몰래 사무실 안을 살펴보니 기성은은 여전히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기성은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들어와요.”소민아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기 비서님, 제 물건 정리하러 왔습니다.”“그래요. 다 정리하고 나갈 때 잊지 말고 문 닫아요.”소민아가 입을 삐죽거렸다.“아, 네.”얼마 후, 기성은은 전화를 받고 자리를 떴다.소민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의 물건을 박스에 넣었다.“감정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라고.”기성은은 듣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까지 갔을 때 마침 기다리고 있는 송시아와 마주쳤다.“기 비서님, 오랜만이에요. 전에
“됐어요.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타요.”소민아는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부대표님, 혹시 저한테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요?”“전엔 다른 바쁜 일이 있어 민아 씨를 기 비서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어요. 그동안 기 비서가 힘들게 하진 않았죠?”“힘들다 뿐이겠어요. 사람다운 생활도 할 수 없게 쥐어짜냈어요. 부대표님, 제 다크서클 좀 보세요. 연속 며칠 동안 밤새 일한 것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거예요.”송시아가 말했다.“너무 힘들었겠네요. 이만 집에 들어가 쉬세요. 기 비서한텐 내가 말해줄게요.”송시아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소민아는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아니에요. 부대표님, 집에 일이 생겨서 이번 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둘 거예요.”송시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인데요? 내가 도와줄까요?”“괜찮아요. 큰일 아니니까 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민아의 얼굴엔 괴로움이 가득했다.송시아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한정판 가방에서 은행카드 한 장을 꺼냈다.“처음부터 내 비서였던 민아 씨가 힘들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이 돈 가져가서 마음껏 써요. 부족하면 얘기하고요.”소민아는 예의를 차리며 거절했다.“말씀은 고맙지만 전 이 돈 받지 못합니다.”송시아가 말했다.“받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대신 내일부터 내 사무실에 출근해요. 마침 나도 비서가 한 명 필요하던 참이었거든요.”소민아는 결국 돈을 받고 송시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송시아가 전연우의 일정을 묻자 소민아는 별다른 생각 없이 일정표를 그녀에게 보내주었다.소민아는 차에서 내린 뒤 떠나가는 송시아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곧바로 기성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원 별장으로 향하던 기성은이 이어폰을 귀에 가져갔다.“무슨 일이에요? 말해요.”“송시아 씨가 절 찾아와 고모 상황을 물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목소리 들어보니까 기분 좋은가 보네요?”소민아는 손에
“아가씨, 이건 저희 가게에서 가장 비싼 웨딩드레스입니다. 한 벌밖에 없는 디자인이기도 하고요. 위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 모두 한 땀 한 땀 손으로 박아넣은 겁니다. 적잖은 부잣집 아가씨들이 와서 입어 보았지만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송시아 씨가 처음입니다. 정 마음에 안 들면 이틀 뒤 신상 웨딩드레스가 도착하니 그때 다시 와보세요. 저희가 직접 가지고 가도 됩니다.”송시아는 시큰둥한 얼굴로 한 곳을 가리켰다.“저 디자인 마음에 드네요.”종업원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아, 저건...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 드레스는...”“아니, 아가씨...”종업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시아는 성큼 걸어 나갔다. 종업원은 깜짝 놀라며 다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두 방은 벽 하나만 사이에 두고 있었다.돌연 들려온 인기척에 장소월은 고개를 들었다. 화장대 거울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송시아가 비쳤다. 장소월은 순간 전생에서의 송시아가 떠올라 화들짝 놀랐다. 그때에도 그녀는 똑같은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결혼식장에 걸어 들어갔었다. 하늘이 내린 것 같은 완벽한 한 쌍의 부부의 모습으로 말이다.“당신 누구예요?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송시아는 바로 팔을 들어올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뺨을 내리쳤다.“네가 뭔데 내 앞길을 막아!”“장소월 씨, 우리... 오랜만에 만나네요.”그녀의 등장에도 장소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당황스러움은 감추지 못하고 다리에 올려놓은 손을 꽉 말아쥐었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장소월에게로 향했다.송시아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송시아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거울 속 그녀를 보며 말했다.“소월 씨, 웨딩드레스 입어 보러 왔어요? 하지만... 이 드레스 난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거죠? 아! 깜빡할 뻔했네요. 이 드레스는 연우 씨가...”말을 하다가 멈춘 그녀는 어깨를 위로 으쓱
지금 장소월의 눈엔 오히려 송시아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일부러 그녀를 도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순간 송시아가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두 번째 삶이 주어졌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일편단심 전연우를 사랑하고 있다.하지만 이번엔 장소월은 더는 물러서거나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그녀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마침 전연우도 여기에 있으니 차라리 나가서 직접 묻는 게 어때요?”“지금은... 내가 전연우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전연우가 날 놓지 못하는 거예요!”“짝사랑이 힘들다는 거 나도 알아요.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날 찾아와도 이해할 수 있어요!”“하지만 송시아 씨가 일부러 날 도발하는 건 참을 수가 없네요.”“정신병을 부리고 싶으면 전연우한테 가세요!”장소월의 그 말을 들은 종업원들이 중얼거렸다.“뭐라고? 설마요. 비서부터 시작해 부대표 자리까지 꿰찼으면 됐지, 내연녀까지 되려고 하다니요.”“그러니까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예전 신문이나 TV에서 볼 때는 엄청 독립적인 커리어우먼인 줄 알았는데 다 연기였네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남의 남자를 빼앗는 내연녀예요! 정말 역겨워요! 대표님이 사모님과 함께 결혼사진 찍으러 왔는데 이런 난동을 피우다니요.”그 말들은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송시아의 귀에 꽂혔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깊게 일그러졌다.“다들 입 다물어!”“장소월 씨!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그 오만함도 얼마 가지 못할 거예요. 분명 머지않아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울며불며 애원하게 될 거예요!”송시아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방에서 나갔다.송시아에게 서비스하던 종업원은 장소월이 화를 낼까 봐 두려워 다급히 연이어 사과했다. 송시아가 나간 이후엔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장소월의 꽉 쥐었던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마음을 짓누르던 거대한 돌멩이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때 촬영사 조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사모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