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전연우는 종래로 다른 사람의 일에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다. 그게 강지훈이라면 더더욱 관여치 않는다.전연우는 침대 옆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아직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조명이 환히 켜져 있는 성세 그룹 안, 직원들은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엔 기성은도 포함되어 있었다.“대표님.”전연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사람을 보내 소현아를 지켜보게 해. 절대 강지훈과 어떠한 접촉도 생기게 해선 안 돼.”소현아와 강지훈?기성은은 소현아가 강지훈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강지훈은 극도로 위험한 인물이다. 주변에 여자가 끊일 줄을 모르는 그에게 소현아는... 그저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아이일 뿐일 것이다.정말 그에게 찍혔다면 분명 고초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기성은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늘 효율을 중요시한다. 그는 빠르게 강지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비밀 조직에 연락해 얼마 되지 않아 답을 찾았다.그는 조사 결과를 전연우의 메일에 보냈다.핸드폰 진동 소리를 듣고 살펴본 전연우의 이마가 곧바로 찌푸려졌다.특히 강지훈의 차가 소현아를 따라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본 순간...전연우가 옆방에 가보았을 때, 장소월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남자는 아이를 아기침대에 눕혀놓고는 깊게 잠든 여자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전연우는 그녀를 깨우지 않고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오늘 밤 빚진 거 내일 다시 갚아야 해.”바깥 하늘이 밝아왔을 때, 장소월은 전연우의 괴롭힘 때문에 깼다가, 끝나고 나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전연우는 그녀를 깨끗이 씻기고 난 뒤 침대에 눕히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차를 몰고 성세 그룹에 도착하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성은이 앞으로 걸어가 전연우의 뒤를 따랐다.“매체에 공개할 보도 자료는 이미 준비했습니다. 대표님, 정말 그렇게 하실 겁니까?”“너한테 한 번 더 중복해줘야 해?”“현재
송시아가 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에 가져갔다. 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남자가 손목을 낚아채고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남자의 몸에서 일어나 와인 두 잔을 따랐다.“나보다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전연우는 진심으로 장소월을 사랑하고 있어요.”“당신은 그 사람을 형제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 사람은 아닐 수도 있어요.”“당신이 아직 모르는 게 있어요...”“뭔데?”송시아가 와인잔을 손에 들고 다가가자 강지훈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앉힌 뒤 와인을 한 모금 홀짝 마셨다.송시아가 말을 이어갔다.“전연우가 해외로 떠나려고 하는 이유는 장소월과 결혼을 하기 위함이에요. 지금의 전연우는 장소월에 관한 일이라면 못할 게 없어요.”“전연우는 심지어 장소월을 곁에 두기 위해 바깥에서 아기까지 데려왔어요.”강지훈의 이마가 서서히 찌푸려졌다. 그가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이렇게까지 타락했다고?이어 강지훈은 한 손으로 송시아의 얼굴을 움켜쥐고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전연우 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으면서 잠자리도 하지 못한 거야?”“지금 내 여자가 된 기분 어때?”송시아가 말했다.“당연히 전연우는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교할 가치도 없어요.”본체 겉과 속이 다른 게 바로 여자다. 잠자리를 하기 전엔 울며불며 반항하다가도,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환상을 맛보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된다.강지훈은 돌연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송시아의 가슴에 쏟아부었다. 붉은색 액체가 옷을 적시고 깊은 골짜기를 타고 내려갔고, 나머지 액체는 새하얀 피부를 수놓았다. 송시아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고 자신의 가장 풍만하고 관능적인 곳을 남자의 눈앞에 가져갔다.강지훈은 곧바로 여자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에 엎드려 놓고는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했다....천하 일성 야간 업소.강지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느릿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는 사
전연우가 말했다.“넌 내가 싫증 나 버린 여자만 거두어 놀잖아. 아직도 한 명 더 필요해?”송시아는 모욕적인 그 한 마디에 심장에 저릿한 고통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차갑게 돌아서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기성은은 바깥에서 기다리다가 생각보다 빨리 나온 전연우를 보고는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강지훈이 아가씨한테 관심을 가진 겁니까?”강지훈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다. 한 여자를 갖겠다고 결심한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손에 넣고야 만다.전연우는 어두워진 얼굴로 업소를 나갔다.“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남원 별장에 접근하게 하지 마.”“평소 아가씨와 왕래가 있는 사람은 소씨 가문 아가씨뿐입니다. 그럼 소현아 씨도...”전연우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난 조금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길 원해.”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현재 송시아는 강지훈의 여자다. 강지훈에게 버려진 이후, 대표님은 절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강지훈이 여자를 교체하는 주기는 일반적으로 2주를 넘기지 않는다.아가씨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건 이미 송시아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걸지도 모른다.그 후 며칠 동안, 전연우가 남원 별장에 들어간 날은 극히 드물었다. 하여 심지어 어떤 신문사에선 전연우와 홍콩 연예인의 스캔들 기사를 내기도 했다.연예인부터 모델, 심지어 학생까지...한 달 사이에 성세 그룹 안주인 자리는 다양하게 바뀌고 또 바뀌었다.이른 아침, 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있었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별이는 마침 갓 만 한 살이 되었다.별장의 도우미들은 별이에게 열어줄 생일잔치를 준비했다.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음식이 차려졌다.분유를 먹이고 창밖을 바라보니 화창한 날씨였다. 하여 장소월은 별이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기로 했다.마당 안, 정원을 가꾸고 있던 도우미들은 뒤에 장소월이 와 있는지도 모르고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우미는 돌잡이 물품들과 음식들을 한가득 준비해 차려놓았다. 장소월은 별이에게 한복을 입히고 보송한 방울이 두 개 달린 귀여운 모자도 씌워주었다.도우미가 말했다.“사모님, 대표님에게 전화할까요?”장소월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이대로 진행하면 돼요. 준비하느라 힘드셨죠?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은 아주머니만 남으시면 돼요.”도우미들이 모두 물러가자 장소월은 별이를 카펫에 앉혔다. 아이는 눈앞에 가득 차려진 물건들을 보면서도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뒤돌아 장소월에게 기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엄... 엄마...”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옆에 있던 은경애가 웃으며 말했다.“어머, 별이는 정말 아가씨를 좋아하나 봐요.”장소월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아 별이의 코끝을 살살 건드렸다.“별아, 그렇게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별이는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며 아 하고 소리쳤다.장소월은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내려앉았다.그녀는 자신이 줄곧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다.하여 그녀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자신을 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밥 먹죠.”장소월의 행동에 은경애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아이를 이토록 냉정하게 대한단 말인가.그래. 어쩌면 친자식이 아니라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세상 어떤 엄마가 자신의 자식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는가.하지만 비록 이 아이를 낳진 않았지만, 장소월이 아이에게 어떻게 했는지 그녀는 모두 똑똑히 알고 있다.늘 아이에게 지극정성이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냈다.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돌연 소현아가 도착했다.문 앞 경호원들은 소현아를 한바탕 수색하고 난 뒤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으로 들여보냈다.“소월아... 경호원들 왜 저러는 거야? 왜 갑자기 내 몸수색해?”장소월이 대답했다.“미안해. 너한테 실례를 범한 건 아니지?”소현아가
그때 기성은이 대표 사무실로 들어왔다.“대표님, 소아린 씨가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낼까요.”소아린은 현재 전연우의 스캔들 상대였다.전연우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아니.”기성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전화로 지시 사항을 전달받은 프런트 직원이 성세 그룹 앞에서 선글라스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 소아린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소아린 씨,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대표님께선 지금 회사에 안 계신답니다.”소아린이 요염한 빨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없대요? 알겠어요. 그럼 잠시 후에 다시 오죠.”말을 마친 그녀는 풀이 죽어 회사를 나가 차에 올라탔다. 매니저가 조급히 물었다.“어떻게 됐어? 소식 있어?”소아린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회사에 없었어요.”“이건 네 마지막 기회야. 이번 일은 그 사람을 제외하곤 널 도울 수 있는 사람 없어. 아린아, 너 이번엔 너무 경솔했어.”“언니, 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해결할게요.”“이제 보아하니 다른 방법은 없겠네. 내가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으니까 그 사람 소식을 좀 알아볼게. 그땐 꼭 기회를 잡아야 해. 다신 날 실망시키지 마.”“네.”소아린에게 촬영 스케줄이 있어 차는 서울을 떠나 해성으로 향했다. 차가 출발한 지 30분 뒤, 돌연 검은색 승용차 몇 대가 소아린의 벤을 겹겹이 에워쌌다. 이어 한 무리의 건달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다짜고짜 차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소아린은 당황함에 어쩔 줄을 몰라 소리만 질러댔다.운전기사는 이미 사람들에게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고, 뒷좌석에 앉아있던 소아린은 그들에게 끌려 강제로 그들의 차에 올라탔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그들에게 저항하던 도중 소아린이 입고 있던 하늘색 원피스가 찢겨 나갔다. 무언가 코를 감싸자 강력한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더럽고 지저분한 휑한 감옥 안이었다. 자
강지훈은 어이없는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 같았다.“기억해. 넌 이제부터 나 강지훈의 사람이야.”남자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뒤에서 떨고 있는 여자는 전혀 관여치 않고서 말이다.이어 소아린은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감금 생활을 했다. 매일 가만히 갇혀있다가 밤이면 남자의 극악무도한 짓밟음을 견뎌내야 했다.매니저는 상대의 신분을 알아내고는 소아린의 납치 사건을 더는 파헤치지 않았다. 강지훈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그녀가 조사해낸 내용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강지훈의 인맥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고 넓었다. 서울에서 한 가닥 하는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조차 그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연락을 받고 사람을 데리러 간 매니저는 너무 놀라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만신창이가 되어 사람 몰골조차 사라져버린 소아린을 데리고 매니저는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전연우가 없으니 장소월은 오랜만에 평안한 나날을 보냈다.소현아는 더더욱 자주 별장에 드나들었다.심지어 어떤 날은 별장에서 장소월과 함께 자기도 했다.그녀의 다리에 누워 지루한 드라마를 보고 있던 소현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우리 내일 밖에 나가보지 않을래? 계속 이렇게 별장에만 박혀있다간 우울증 올 거야.”“며칠 동안 너랑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까 살쪘어. 전에 가져온 옷들 다 못 입게 됐다니까.”소현아는 확실히 최근 며칠간 적잖게 살이 쪘다. 하지만 늘 예전처럼 통통하고 귀여웠다.“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같이 나가자. 간 김에 별이한테 옷도 몇 벌 사주고.”장소월은 이런 궁전에 갇힌 공주 생활을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다만 지금은 다르다. 옆에 그녀에게 진심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그리고 현아, 별이가 그녀와 함께 있다...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떠나시기 전 절대 별장을 나서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현아 씨에게 입을 옷이 없으면 밖에서 가져다주실 겁니다. 작은 도련님 옷은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옆에 있던 소현아, 그리고 도우미들까지도 이 집 안주인이 전연우와 통화하는 자세가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 깜짝 놀랐다.소현아는 순간 장소월에게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을 이곳에 가둬놓고 다른 여자와 쇼핑하며 옷을 사주고 있다.소현아는 씩씩거리며 장소월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갔다.“퉷, 나쁜 자식.”욕설을 퍼붓고 난 뒤, 소현아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심상치 않은 상황에 은경애는 다른 도우미들을 모두 물렸다.소현아는 측은한 눈동자로 장소월을 바라보며 말했다.“소월아... 나 왠지 네가 너무 가엾고 마음 아파. 너 여기에 있고 싶지 않은 거지?”장소월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지어졌다.“이제 적응됐어. 괜찮아.”“하지만... 지금 네 미소 하나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면서도 항상 우울해 보였어.”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소월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미안해. 너랑 나가자고 하는 게 아니었어.”장소월은 울지 않았다. 도리어 소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울먹거리며 장소월을 끌어안았다.“소월아... 이곳에 있는 게 싫으면서 왜 떠나지 않는 거야!”“서울에서 사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먼 곳으로 가도 돼.”“난 네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연락 두절이 되는 걸 원하지 않지만, 네가 매일매일 행복하길 바라.”소현아는 이미 일찌감치 눈치챘었다.장소월은 이곳에서 늘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정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소현아가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영혼 없는 인형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난 괜찮아, 현아야. 나 잘 지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장소월은 담담히 웃으며 소현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경호원이 되돌아와 장소월에게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나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반드시 저희들의 시야 안에 계셔야 합니다.”소현아가 말했다.“범죄자를 감시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장소월보다 그녀가 더욱 분노했다.“됐어요.”“녹차 설기 만들어줄까?
전연우는 집에 돌아와 복도를 지나가다가 화실 조명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화실 문을 빼꼼 여니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몸에 얇은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장소월은 문 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왔음을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데에만 집중했다.검은색 정장이 장소월의 어깨에 걸쳐졌다. 그녀가 붓을 멈추자, 전연우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쉬고 있어?”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낯설기도, 익숙하기도 했다.장소월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잠에서 깼는데 뭘 할지 몰라서 작업 마무리하려고 왔어.”전연우는 그녀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 뒤 자욱이 안개가 덮인 수림 속, 빗방울이 아직 나뭇잎에 걸려있는 모습이 몽롱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었다.전연우는 그림을 잘 몰랐음에도 장소월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뭘 그린 거야?”장소월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옥수림이야. 선배님이 만든 새로운 게임인데 배경 작업을 3일 안에 해야 해.”그림의 이름을 들은 순간, 전연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공기 중에 풍겨나갔다. 외투엔 알코올 냄새를 제외하고 향수 냄새도 깃들어 있었다.장소월은 몸에 덮여 있는 정장을 벗어 그에게 돌려주었다.“씻고 쉬어. 별이는 아기방에 있으니까 깨우지 말고.”전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돌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소월은 몸의 중심을 잃고 붓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거야!”옆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떠올린 그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허공에서 잡힌 팔목을 보니 이미 시뻘겋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고통에 눈썹을 찌푸렸다.전연우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잔해 보였지만, 폭풍전야처럼 옅게 일렁이고 있었다.그가 말하지 않으면, 장소월은 그가 대체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