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장소월은 차가워진 손을 모으고 초조한 얼굴로 수술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별이가 정말 그녀의 아이인 걸까?별이가 방에서 크게 다쳤을 때, 그 위험이 장소월에게 전해지기라도 한 듯, 심장에서 전해져오는 극심한 통증이 그녀를 깨웠다. 꿈속에서... 그녀의 아이는 별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생 그녀가 낳았던 그 아이는 분명 여자아이였다. 어떻게 남자아이로 태어나 별이가 되었단 말인가?아니면 그냥 모든 것이 그녀의 허황된 망상일 뿐인 걸까?아마 그렇겠지.그녀의 아이는 이미 죽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고 있을 수 있겠는가.장소월은 순간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 순간, 남자가 빠르게 걸어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장소월의 희미한 시선이 전연우에게 닿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전연우는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여자를 안았다.“의사 선생님! 기성은, 빨리 서철용한테 오라고 해.”기성은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전연우의 모습에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연구원에 있는 서철용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철용은 소식을 들은 뒤 모든 일을 미뤄두고 십여 분 안에 병원에 도착했다.서철용은 그녀의 주치의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그의 얼굴에서 예전 같은 정도의 어둠은 보이지 않았다.“한 번 깨어났으니, 이미 거의 회복됐다는 걸 설명해. 조금 전엔 그저 몸이 너무 약해져서 정신을 잃은 거야.”“잠시 쉬게 놔뒀다가 깨어나면 먼저 죽을 먹여 체력을 회복하게 해. 앞으론 마음대로 움직이게 해선 안 돼.”전연우는 소중히 그녀의 손을 잡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성은을 노려보았다.“아이는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다친 건데?”기성은은 변명할 얼굴도 없었다.“급히 나가야 해서 아이를 침대에만 눕혀두고 나왔습니다. 그 뒤의 일은 저도 모릅니다.”서철용은 기성은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저 사람 탓할 필요
아니면 별이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은경애는 재빨리 야채죽을 끓였다.장소월은 누군가 옆에 있음을 감지했다. 링거 바늘을 꽂은 손등에 뜨거운 온도가 느껴져 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별... 별이는?”전연우가 대답했다.“이제 괜찮아. 아주머니가 병실에서 보살피고 있어.”“배 안 고파? 뭐 좀 먹을래?”장소월은 평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실은 지난 3개월 동안,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었다.그리고 깊은 밤, 전연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했던 자신의 과거를 포함한 모든 말까지...그에게 닥쳤던 불행함 때문에 장씨 집안에 원한을 가졌던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모든 원한을 풀었다. 대체 왜 아직도 아무 죄 없는 사람을 해친단 말인가.너무나도 잔인하다.장소월은 그에게서 시선을 옮긴 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익숙한 화첩을 발견했다. 그런 모습을 본 전연우는 그녀를 부축해 앉히고는 베개를 등 뒤에 놓아 기대게 한 뒤 화첩을 손에 쥐여주었다.“오래전에 잃어버렸었는데 어떻게 찾았어?”전연우는 차가운 그녀 손의 온도를 느끼고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누가 훔쳐 갔더라고. 내가 오늘 가서 찾아왔어.”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화첩을 어루만졌다. 전연우가 손을 뻗어 얼굴 옆으로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뭐 없어진 건 없나 살펴봐.”장소월은 익숙한 페이지를 펼쳐보니 마음속에 옅은 파도가 일었다.“찾아줘서 고마워.”하지만 이제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서울을 떠나있던 4년 동안, 그녀는 이곳들을 모두 여행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네가 깨어났으면 됐어. 배 안 고파? 내가 아주머니에게 죽을 끓이라고 했어. 먹을래?”“그래.”장소월이 전연우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전연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았어. 내가 가져다줄게.”전연우가 숟가락에 담은 죽을 호호 불어 자상하
전연우는 그에게 있는 모든 인내심을 장소월에게 쏟고 있었다.그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벽에 붙어 어쩔 줄 모르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차갑게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떴다. 소현아가 도둑처럼 살금살금 코너를 돌아 나왔다.얼마 후, 그녀는 전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경호원들은 이번엔 그녀를 막지 않았다.그녀가 조심스레 장소월이 있는 병실로 들어갔다.장소월은 문밖 인기척을 듣고 전연우가 다시 돌아온 줄로 알았다. 소현아가 왔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장소월을 보자마자 소현아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장소월이 번쩍 눈을 떴다.“현아?”장소월은 기침하며 손을 짚고 침대에서 일어났다.“네가 어떻게 왔어?”소현아는 곧바로 장소월의 품에 뛰어들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소월아,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네가 병 난 거야.”장소월은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소현아를 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자책하지 마. 영수 일은 고마웠어.”아니면 그녀는 평생 전연우에게 속았을 것이다.“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소월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제일 친한 친구를 잃어버릴까 봐 너무 무서웠어.”소현아가 너무 꽉 안았던 탓에 장소월은 숨쉬기조차 어려웠다.“현아야, 나 이제 괜찮아. 병도 다 나았으니까 울지 마.”그녀가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장소월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내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소현아는 곧바로 눈물을 닦았다. 장소월이 누워있을 때, 전연우는 아무에게도 병원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그녀의 말엔 전연우의 막무가내 행동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그동안 전연우는 매일 청연사로 가 불경을 드렸다. 장소월은 그가 정확히 무엇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모든 행동이 누구를 위해서였는지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전연우는 그녀의 이름으로 희망 어린이 재단
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병실에서 밥을 먹었다. 장소월은 죽만 먹을 수 있었고, 소현아는 반찬 세 가지와 국 한 그릇을 와구와구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소월아, 너희 집 아주머니 음식 솜씨 진짜 좋구나.”“맛있으면 많이 먹어. 모자라면 내가 아주머니한테 더 해달라고 할게.”그때 은경애가 다시 들어왔다.“아가씨, 도련님 식사 남겨둘까요?”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느긋하게 죽을 먹으며 머리도 들지 않고 말했다.“괜찮아요. 알아서 먹을 거예요.”“그래요.”은경애는 주방에 돌아가 설거지를 했다.소현아는 배불리 먹고 난 뒤 빵빵해진 배를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소월아, 나 내일도 너 보러 와도 돼?”장소월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되지.”“오늘은 늦었으니까 집에 가서 쉬어. 아버지가 걱정하셔.”시간을 보니 어느덧 아홉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소현아는 장소월을 끌어안고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소월아, 네가 괜찮아져서 정말 다행이야. 너무 좋아!”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병실을 나섰다.소현아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여전히 낙관적이고 활달하다.장소월은 기력을 조금 회복한 뒤 휠체어를 타고 아이를 보러 옆방으로 갔다. 머리를 다쳐 끙끙 앓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니 장소월은 심장이 또다시 아프게 저려왔다. 그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내가 그만 자고 깨어나길 바랐던 거지?”‘사실 나... 네가 날 엄마라고 부르는 걸 계속 듣고 있었어...’‘별아... 네가 정말 내 아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넌 아니겠지... 난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니까.’‘난 오직 내 아이의 엄마만 되어줄 수 있어. 때문에 난 널 받아들일 수 없어. 미안해... 별아...’장소월이 옆방에서 돌아와 침대에 올라가려고 할 때, 병실 문이 열렸다. 장소월은 힐끗 그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어느덧 새벽 12시였다. 전연우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가까이
머릿속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장소월은 애써 그 고통을 견뎌내다가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얼마 후, 전연우가 또다시 가까이 다가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조금 자세를 고쳐잡았다.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장소월이 덤덤히 대답했다.“아니. 자.”말을 마친 뒤 그녀는 눈을 감았다.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니, 곧바로 잠이 들었다.깊은 밤, 전연우의 작은 움직임이 장소월을 깨웠다. 그는 밤새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가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빼내고는 피가 통하지 않아 찡찡 저리는 팔을 문지르며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뒤 밖으로 나갔다.아침 여덟 시 반, 의사가 시간 맞춰 들어와 장소월의 몸 상태를 살폈다.의사가 말했다.“회복이 잘 되고 있어요.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조금씩 운동해야 해요. 전엔 깨어나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원기가 상한 거예요. 당분간 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으니까 2, 3주 병원에서 회복하면 퇴원하실 수 있어요. 그리고 정기적으로 암세포가 재발하진 않았는지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장소월이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별말씀을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푹 쉬세요.”“네.”은경애가 의사를 모시고 나가자, 전연우는 장소월과 함께 병실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녀는 스스로 먹을 수 있었음에도 전연우는 꼭 한 술 한 술 먹여주겠다고 고집부렸다.전연우는 손으로 그녀 입가에 묻은 죽 흔적을 닦아주었다.“다 먹고 나면 나랑 내려가서 산책하자. 오늘 날씨 좋아.”방 안엔 히터가 켜져 있어 별로 춥지 않았다. 장소월은 환자복을 입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창을 뚫고 금색 찬란한 햇살이 부드럽게 비추어 들어왔다. 병원 마당엔 노란색 오동나무 잎들이 무성히 자라나 있었다. 그 광경은 장소월로 하여금 오동나무가 길 양옆으로 빼곡히 펼쳐져 있고, 바닥에 나뭇잎
식탁 위, 장소월이 아이에게 계란찜을 먹이려 하자 별이는 손을 뻗어 그녀 손에 있는 숟가락을 잡았다. 전연우는 빠르게 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밥이나 먹어.”별이는 그를 향해 악 소리치고는 작은 손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손이 그릇에까지 들어갔고, 장소월이 재빨리 그릇을 잡지 않았더라면 바닥에 엎을 뻔했다.“말 안 들어?”남자가 위험한 눈동자로 아이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은 휴지 몇 장을 뽑아 별이의 손을 닦아주었다.“아직 어린아이야. 왜 그렇게 사납게 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잖아.”“밥 먹이는 일은 도우미한테 맡겨.”장소월이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으니, 전연우는 아이에게까지 마음을 써야 했다.별이는 전연우에게 겁을 먹고 억울한 듯 입꼬리를 축 내리뜨렸다.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장소월은 밥도 채 먹지 못하고 아이를 안고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그때 마침 은경애가 분유를 풀어 가져왔다.“아가씨, 이것 좀 먹이면 울음을 그칠 거예요.”“알겠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휴가 내고 싶으면 저한테 말해주시면 돼요.”은경애는 손을 휘저었다.“아이고. 전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냥 밥하고 아이만 보는 걸요. 집에 있는 것보다 더 자유롭다니까요.”은경애는 지금까지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해 다치게 한 일로 죄책감에 장소월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었다.이제 보니 장소월은 그녀를 별로 원망하는 것 같지 않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연우는 닭죽을 들고 장소월의 옆으로 다가왔다. 장소월이 고개를 들어보니, 전연우가 이미 그릇을 들고 와 숟가락을 그녀 입에 가져왔다.“일단 죽부터 먹어. 먹고 나서 달래.”“나 배불러.”“조금만 더 먹어. 말 들어.”“진짜 안 먹을 거야! 짜증 나게 하지 마.”장소월은 아이를 안고 도망쳤고, 전연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그녀가 방 안으로 숨어든다고 해도, 전연우는 틀림없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에게 먹이고야 말 것이다.장소월은 그의 고
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엔 모성애가 가득 차 있었다.장소월은 여전히 전연우와 함께 안방에서 지냈다. 이제 장소월은 정말로 이 남원 별장의 여주인이 된 것 같았다...그들은 분명 부부가 아니다. 하지만 평소 부부가 하는 일을 하고 있다.남원 별장의 도우미는 모두 바뀌어 다들 장소월을 전연우의 아내로 알고 있었다.하여 그들은 모두 장소월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유독 은경애만큼은 줄곧 그녀를 아가씨라고 불렀다.장소월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그들이 편한 대로 호칭을 정하게 했다.별장엔 경호가 더 강화되어 장소월은 여전히 아무 데도 나갈 수 없었다.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아이가 한 명 더 생겨 그녀의 족쇄가 된 것, 그 하나였다.장소월은 남원 별장에서 몸조리를 한 끝에 이젠 예전의 기력을 되찾았다. 다만 큰 병을 앓고 난 뒤라 몸이 약해져 층계를 오를 때에도 거친 숨을 내쉬었다.장소월은 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별이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져 선명하게 엄마라고 발음하고 있었다.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조금 전 대표님께서 전화하셔서 오늘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사모님에게 잊지 말고 약 드시고 일찍 쉬라고 하셨습니다.”장소월은 도우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차갑게 주방에서 걸어 나가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앞으로 그런 건 저한테 얘기할 필요 없어요.”그녀는 물을 한 컵 따르고는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만약 장소월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탁자 위 전화기가 통화 중인 상태라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도우미는 그녀가 위층에 완전히 올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올라가셨습니다. 혹시 더 분부하실 일 있나요?”성세 그룹 대표 사무실.전연우는 금테 안경을 걸고, 검은색 셔츠 위에 와인색 조끼를 입고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깊은 눈동자 속엔 서늘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예전과 유
송시아는 두 손으로 책상을 탁 치고는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전연우를 쳐다보았다.“천하 일성의 일은 내가 꾸민 거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강지훈에게...”그 뒤의 말은 차마 입에 담아내지 못했다.“그 일은 이제 없었던 거로 해요.”“제가 원하는 건 성세 그룹 안주인 자리예요.”전연우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성세 그룹 부대표 자리도 성에 안 차? 성세 그룹 안주인에 네가 가당키나 해?”“하하하...”송시아는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전연우 씨, 그런 말 할 자격이 제일 없는 건 바로 당신이에요. 전생에서 당신이 어떻게 장소월을 내쫓았는지 말해줬던 거 잊었어요?”“내가 한 번 더 얘기해줄까요?”“당신은 장소월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와 8년이나 바람을 피웠어요. 결국 장소월은 아이와 함께 저승으로 가버렸죠.”송시아가 조롱 어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인시윤을 제거한 건 아마 인시윤이 당신의 비밀을 알아서였겠죠. 전연우 씨, 당신은 무서웠던 거예요!”“장소월이 친오빠가 하려 하는 이 황당무계한 일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겠죠. 그래서...”“악!”송시아가 돌연 귀를 찢을 듯 소리쳤다.전연우가 서늘한 눈동자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책상에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전연우의 몸에서 사람을 비틀어 죽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또다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지껄이면 지금의 위치를 박탈하는 건 물론이고 혀를 뽑아 지하에서 창녀로 뒹구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줄 거야.”“두 번의 인생을 거쳐 내 곁에 있었다니까 잘 알고 있겠지. 난 모든 사람한테... 너한테도...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라는 걸.”“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건 바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거야!”송시아는 확실히 적잖게 그를 도왔다. 그건 전연우가 지금까지 그녀를 참아줬던 이유이기도 했다.송시아는 목이 졸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굴은 터질 듯 시뻘게졌고, 머리는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아찔하게 어지러웠고, 눈앞은 점차 흐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
“때가 되면 돌려보내 줄게.”군복을 입은 경호원이 바깥에서 걸어들어왔다. “강 소장님, 이상한 놈 두 명이 잡혀 왔습니다. 지금 감옥에 가두었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순식간에 차가워진 강지훈의 얼굴을 본 소현아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가 먹여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이 쓰디쓴 약을 며칠 동안 연속으로 먹었더니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강지훈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약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가 보낸 건지 확인했어?”“부관님 쪽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가두고 내버려 둬. 알아서 죽겠지.”“알겠습니다, 소장님.”소현아는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이제 안 먹을래요. 강지훈 씨, 나 자고 싶어요. 너무 졸려요.”강지훈의 약 그릇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우미가 다가가 그릇을 받아 들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졸리면 푹 쉬어.”소현아는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금세 잠들었다.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나가자, 방에 있던 도우미들도 그의 뒤를 따라 함께 방을 나서고 문을 닫았다.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검사한 거 맞지? 임신한 거 아니야?”도우미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아 아가씨는 임신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안 계신 동안, 주인님의 지시대로 아기씨를 돌보았습니다. 석 달에 한 번씩 건강 검진도 받게 했고요. 임신했다면 바로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무엇 때문인지 도우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로 말하고 있었다.강지훈은 도우미의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하는 말 역시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하지만 소현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다행히 평소에도 통통하게 살이 쪘던 덕분에 배가 점점 불러와도 주인님이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하지만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잠자리 과정에서 주인님의 흘러넘치는 힘이 분명히 배 속의 아이에게 충격을 줄 것이고, 그러다 혹시 피라도 나면...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