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장소월은 애써 그 고통을 견뎌내다가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얼마 후, 전연우가 또다시 가까이 다가와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조금 자세를 고쳐잡았다.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장소월이 덤덤히 대답했다.“아니. 자.”말을 마친 뒤 그녀는 눈을 감았다.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니, 곧바로 잠이 들었다.깊은 밤, 전연우의 작은 움직임이 장소월을 깨웠다. 그는 밤새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가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빼내고는 피가 통하지 않아 찡찡 저리는 팔을 문지르며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뒤 밖으로 나갔다.아침 여덟 시 반, 의사가 시간 맞춰 들어와 장소월의 몸 상태를 살폈다.의사가 말했다.“회복이 잘 되고 있어요.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조금씩 운동해야 해요. 전엔 깨어나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원기가 상한 거예요. 당분간 다른 문제는 없을 것 같으니까 2, 3주 병원에서 회복하면 퇴원하실 수 있어요. 그리고 정기적으로 암세포가 재발하진 않았는지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장소월이 인사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별말씀을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푹 쉬세요.”“네.”은경애가 의사를 모시고 나가자, 전연우는 장소월과 함께 병실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녀는 스스로 먹을 수 있었음에도 전연우는 꼭 한 술 한 술 먹여주겠다고 고집부렸다.전연우는 손으로 그녀 입가에 묻은 죽 흔적을 닦아주었다.“다 먹고 나면 나랑 내려가서 산책하자. 오늘 날씨 좋아.”방 안엔 히터가 켜져 있어 별로 춥지 않았다. 장소월은 환자복을 입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창을 뚫고 금색 찬란한 햇살이 부드럽게 비추어 들어왔다. 병원 마당엔 노란색 오동나무 잎들이 무성히 자라나 있었다. 그 광경은 장소월로 하여금 오동나무가 길 양옆으로 빼곡히 펼쳐져 있고, 바닥에 나뭇잎
식탁 위, 장소월이 아이에게 계란찜을 먹이려 하자 별이는 손을 뻗어 그녀 손에 있는 숟가락을 잡았다. 전연우는 빠르게 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밥이나 먹어.”별이는 그를 향해 악 소리치고는 작은 손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손이 그릇에까지 들어갔고, 장소월이 재빨리 그릇을 잡지 않았더라면 바닥에 엎을 뻔했다.“말 안 들어?”남자가 위험한 눈동자로 아이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은 휴지 몇 장을 뽑아 별이의 손을 닦아주었다.“아직 어린아이야. 왜 그렇게 사납게 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잖아.”“밥 먹이는 일은 도우미한테 맡겨.”장소월이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있으니, 전연우는 아이에게까지 마음을 써야 했다.별이는 전연우에게 겁을 먹고 억울한 듯 입꼬리를 축 내리뜨렸다.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장소월은 밥도 채 먹지 못하고 아이를 안고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그때 마침 은경애가 분유를 풀어 가져왔다.“아가씨, 이것 좀 먹이면 울음을 그칠 거예요.”“알겠어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휴가 내고 싶으면 저한테 말해주시면 돼요.”은경애는 손을 휘저었다.“아이고. 전 하나도 안 힘들어요. 그냥 밥하고 아이만 보는 걸요. 집에 있는 것보다 더 자유롭다니까요.”은경애는 지금까지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해 다치게 한 일로 죄책감에 장소월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었다.이제 보니 장소월은 그녀를 별로 원망하는 것 같지 않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전연우는 닭죽을 들고 장소월의 옆으로 다가왔다. 장소월이 고개를 들어보니, 전연우가 이미 그릇을 들고 와 숟가락을 그녀 입에 가져왔다.“일단 죽부터 먹어. 먹고 나서 달래.”“나 배불러.”“조금만 더 먹어. 말 들어.”“진짜 안 먹을 거야! 짜증 나게 하지 마.”장소월은 아이를 안고 도망쳤고, 전연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그녀가 방 안으로 숨어든다고 해도, 전연우는 틀림없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녀에게 먹이고야 말 것이다.장소월은 그의 고
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엔 모성애가 가득 차 있었다.장소월은 여전히 전연우와 함께 안방에서 지냈다. 이제 장소월은 정말로 이 남원 별장의 여주인이 된 것 같았다...그들은 분명 부부가 아니다. 하지만 평소 부부가 하는 일을 하고 있다.남원 별장의 도우미는 모두 바뀌어 다들 장소월을 전연우의 아내로 알고 있었다.하여 그들은 모두 장소월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유독 은경애만큼은 줄곧 그녀를 아가씨라고 불렀다.장소월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그들이 편한 대로 호칭을 정하게 했다.별장엔 경호가 더 강화되어 장소월은 여전히 아무 데도 나갈 수 없었다.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아이가 한 명 더 생겨 그녀의 족쇄가 된 것, 그 하나였다.장소월은 남원 별장에서 몸조리를 한 끝에 이젠 예전의 기력을 되찾았다. 다만 큰 병을 앓고 난 뒤라 몸이 약해져 층계를 오를 때에도 거친 숨을 내쉬었다.장소월은 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별이는 이제 완전히 익숙해져 선명하게 엄마라고 발음하고 있었다.도우미가 다가와 말했다.“사모님, 조금 전 대표님께서 전화하셔서 오늘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사모님에게 잊지 말고 약 드시고 일찍 쉬라고 하셨습니다.”장소월은 도우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차갑게 주방에서 걸어 나가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앞으로 그런 건 저한테 얘기할 필요 없어요.”그녀는 물을 한 컵 따르고는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만약 장소월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탁자 위 전화기가 통화 중인 상태라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도우미는 그녀가 위층에 완전히 올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올라가셨습니다. 혹시 더 분부하실 일 있나요?”성세 그룹 대표 사무실.전연우는 금테 안경을 걸고, 검은색 셔츠 위에 와인색 조끼를 입고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깊은 눈동자 속엔 서늘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예전과 유
송시아는 두 손으로 책상을 탁 치고는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전연우를 쳐다보았다.“천하 일성의 일은 내가 꾸민 거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강지훈에게...”그 뒤의 말은 차마 입에 담아내지 못했다.“그 일은 이제 없었던 거로 해요.”“제가 원하는 건 성세 그룹 안주인 자리예요.”전연우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성세 그룹 부대표 자리도 성에 안 차? 성세 그룹 안주인에 네가 가당키나 해?”“하하하...”송시아는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전연우 씨, 그런 말 할 자격이 제일 없는 건 바로 당신이에요. 전생에서 당신이 어떻게 장소월을 내쫓았는지 말해줬던 거 잊었어요?”“내가 한 번 더 얘기해줄까요?”“당신은 장소월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와 8년이나 바람을 피웠어요. 결국 장소월은 아이와 함께 저승으로 가버렸죠.”송시아가 조롱 어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인시윤을 제거한 건 아마 인시윤이 당신의 비밀을 알아서였겠죠. 전연우 씨, 당신은 무서웠던 거예요!”“장소월이 친오빠가 하려 하는 이 황당무계한 일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겠죠. 그래서...”“악!”송시아가 돌연 귀를 찢을 듯 소리쳤다.전연우가 서늘한 눈동자로 그녀의 머리를 잡고 책상에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전연우의 몸에서 사람을 비틀어 죽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또다시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지껄이면 지금의 위치를 박탈하는 건 물론이고 혀를 뽑아 지하에서 창녀로 뒹구는 게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줄 거야.”“두 번의 인생을 거쳐 내 곁에 있었다니까 잘 알고 있겠지. 난 모든 사람한테... 너한테도...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라는 걸.”“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건 바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는 거야!”송시아는 확실히 적잖게 그를 도왔다. 그건 전연우가 지금까지 그녀를 참아줬던 이유이기도 했다.송시아는 목이 졸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얼굴은 터질 듯 시뻘게졌고, 머리는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아찔하게 어지러웠고, 눈앞은 점차 흐
새벽 12시, 돌연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휘몰아쳤다.거대한 소리가 남원 별장 전체에 울려 퍼지자 별이는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렸다.장소월은 토닥토닥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고는 소변에 젖은 침대 시트를 갈아주었다.우렛소리가 언제 그칠지 알 수 없었다.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별이를 데리고 전연우의 서재로 향했다. 몇 개월 사이 별이는 살이 꽤 붙어 조금만 안고 있으면 팔이 시큰해졌다. 하여 그저 소파에 앉히고 장난감으로 장난을 칠 뿐이었다.서재에선 괜찮았지만, 한 발자국만 나서면 또다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장소월은 손가락으로 아이의 코를 톡톡 두드렸다.“별아, 우레가 그렇게 무서워?”“엄... 엄마...”장소월은 반응하지 않았다.“엄마...”“...”“아, 엄... 엄마...”장소월은 아이가 하품을 하는 걸 보고는 이제 재워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안고 서재를 나섰다. 그 순간 문밖 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려보니 익숙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그녀는 못 본 척 서재 조명을 끄고 방으로 돌아갔다.서철용은 위층을 올려다보며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 된 전연우를 차에서 끌어냈다. 그러고는 그의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에 매정하게 내팽개쳐버리고는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그깟 주량으로 나랑 술을 마시려고 해? 그러니까 송시아한테 당했지.”서철용은 복도를 힐끗 보고는 더는 머무르지 않고 열쇠를 내려놓은 뒤 별장을 떠났다.그가 차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를 보고 전화를 끊어버리려는 순간, 별장 3층 조명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장소월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창가에 서 있었다.서철용이 전화를 받았다.“오랜만에 나한테 전화하네요.”얇은 잠옷을 입고 있는 장소월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약속 지킬 수 있어요?”서철용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당연하죠. 뭐든 말해요.”“그래요... 나 당신 도움이 필요해요.”서철용은 그녀의 말을 들은 뒤 흔쾌히
장소월은 눈을 감고 그가 전해오는 한 번 또 한 번의 충격을 견뎌냈다.창문 밖 날이 밝을 때까지 말이다.격렬한 운동을 마친 뒤 전연우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술도 어느 정도 깬 것 같았다.그는 기진맥진해 축 늘어져 있는 장소월을 안아 욕실에 들어가 씻기고는 다시 침대에 눕혔다.어둠 속에서 전연우는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눈썹을 만지작거렸다.‘반드시 언젠가 너 스스로 내 옆에 남겠다고 하는 날이 올 거야.이제 더는 나한테서 도망치지 마.’“이번 생엔... 송시아 같은 사람은 없어. 오직 너와 나뿐이야.”“우리 사이에 아이가 없어도 괜찮아.”남자의 무거운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선명히 맴돌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해 두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운 장소월의 귀엔 닿지 않았다.그녀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옆에 있던 별이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온몸을 쑤시는 근육통에 이마를 찌푸리며 일어나 앉았다. 옷이 가리지 못한 가슴 주위 피부는 온통 어젯밤 남자가 남긴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다.몇 분 뒤, 은경애가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깨셨어요?”“들어오세요.”은경애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대체 대표님이 얼마나 사납게 휘둘렀길래 사람이 저렇게 된단 말인가.그것도 이제야 간신히 몸을 회복한 사람을 말이다.은경애는 방으로 들어간 뒤 행여 찬바람이 들어올까 봐 문을 닫고는 옷장에서 따뜻한 가디건을 꺼내 장소월에게 덮어주었다.“정말 너무하네요. 아가씨, 힘들면 얘기하세요. 제가 의사 선생님한테 연락할게요.”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조금 쉬면 돼요.”그녀가 물었다.“별이는요?”“전 대표님은 아침 일찍 나가셨고 별이는 옆 방에 있어요. 제가 아가씨 몸보신 하라고 삼계탕 끓였어요.”장소월은 다시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지금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보세요. 전 조금 더 쉬고 싶어요.”은경애는 걱정스레 그녀를 쳐다보았다.“혹시 어디 불편하면
눈은 예전 강영수가 그녀를 찾아 파리에 왔던 그 날처럼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그녀가 자주 지나가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는 어깨에 쌓이는 눈송이를 툭툭 털어내며 그곳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렸다...“어머, 아가씨, 왜 우세요?”아까 방에 들어왔던 은경애는 바닥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다 돌연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급히 다가갔다.“아이고. 왜 이러세요.”은경애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에야 정신을 차린 장소월은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걱정 마세요. 전 괜찮아요.”은경애의 시선이 장소월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진첩 속 사람에게 향했다.“어머나, 누군데 이렇게 예뻐요?”그녀는 급기야 사진첩을 손에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정말 예쁘네요. 선녀 같아요.”장소월이 말했다.“제 엄마예요.”“어쩐지. 아가씨도 선녀처럼 아름다우시잖아요.”이제 장씨 집안 예전 도우미들을 제외하고는 이 남원 별장의 안주인이었던 성예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장소월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엄마는 늘 부드러운 사람이셨어요...”“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했고, 모란꽃을 좋아했어요...”당시 연선우는 어머니를 위해 정원에 커다란 모란꽃밭을 만들었었다. 꽃 피는 계절 창밖을 내다보면 정원 가득 만연한 모란꽃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말이다.장소월은 은경애에게 자신의 많은 일을 털어놓았다.남원 별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장소월은 퇴원한 뒤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장시간 억눌렀던 마음이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그래서 아가씨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거였네요. 그것도 사모님 덕분이었어요. 아가씨... 그럼 사모님은 그 뒤에 어떻게 되셨어요?”“엄마는... 절 낳고 나서 돌아가셨어요.”“사모님... 대표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도우미가 문을 두드리고 일러주었다.은경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
그녀가 거절하지 않자, 전연우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그때 마침 모든 사진 정리를 마친 장소월은 내려와 한 바퀴 둘러보았다. 꽤나 만족스러웠다.“회사 나가지 않았어?”“잠깐 시간 나서 너 보려고 왔어.”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이어 백옥 같은 피부에 남은 자국을 보며 말했다.“아직도 아파?”장소월은 늘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그 뻔뻔하게 뱉는 음란한 말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연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장소월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의 손을 밀어내며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걱정해줘서 고마워. 이제 괜찮아.”고맙다는 말에 전연우의 이마가 찌푸려졌다.“고마워?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돼?”갑자기 들이닥친 그의 분노에도 장소월은 평온했다.“걱정해주니까 고맙다고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바깥에서 받은 스트레스 나한테 풀지 마.”장소월이 손을 빼내고 몸을 돌린 순간, 강렬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벽에 밀쳤다. 전연우가 화가 잔뜩 어린 눈으로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대체 언제면 알아들을 거야?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고맙다는 한마디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네가 원하는 건 내 몸 아니었어? 이제 가졌잖아. 내가 더 어떻게 하길 바라?”그의 눈빛에 갇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소월아... 이 오빠가 뭘 원하는지 넌 잘 알고 있잖아.”그녀는 늘 이렇게 모르는 척하기가 일쑤다.전연우는 그녀가 언제까지 모르는 척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장소월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와 상대하면 영원히 좋은 일은 없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알았어. 착하게 네 말 잘 들을게. 네가 싫다면 앞으로 그런 말 안 할게.”장소월은 또다시 화제를 돌렸다.“다른 일 없으면 별이 보러 갈게.”“잠시만.”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전연우는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당황함이 역력한 얼굴로 검은색 셔츠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