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소리 냈다.“오빠.”전연우의 상반신 위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근육을 따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몸을 숙여 장소월의 몸을 압박하며 그녀에게 숨을 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한바탕 휘몰아친 뒤 장소월은 잠시나마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틀어막혀버렸다. 소리조차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지 못해 그대로 삼켜버렸다.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장소월은 처음엔 신음소리를 내다가 나중엔 급기야 울며 빌기까지 했다.침대 위에서, 탁자 위에서, 창문 앞에서...방 안 이곳저곳 전체에 야릇한 분위기가 흘러 들어갔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장소월은 몇 번이고 깨어나다가 다시 정신을 잃기를 반복했다.새벽 3시.방안엔 그제야 고요함이 찾아왔다. 장소월은 의식을 잃은 채 남자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온 강영수의 이름이 떴다.전연우는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놔둔 채 다 피운 담배꽁초를 버렸다....강씨 저택. 창밖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노부인이 침대에 누워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소월이가 불임이라는 사실 알고 있었어?”강영수는 부인하지 않았다.“네. 그게 어때서요?”“소월이는 이미 강씨 집안의 며느리입니다. 소월이의 몸 상태가 어떻든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가슴에 응어리가 들어앉아 숨을 내쉬기조차 힘겨웠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흥분하며 말했다.“어리석은 놈! 후대를 잇는 게 강씨 집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 예전 그 여자가 널 임신했을 때 내가 널 지켰어. 그 이유는 강씨 집안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야.”강영수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요? 하신 모든 일들이 강한 그룹을 위한 거였다고요? 그럼 차라리 절 낳지 못하게 하고 그 잡종에게 이어받으라고 하면 좋았잖아요.”“제 생각은 똑같아요. 소월이의 신분은 절대 변하지 않아요. 임신을 하든 못하든 영원히 제 아내라고요.
강영수는 방에서 나간 뒤 거실 소파에 앉아 밤새 담배를 피웠다.새벽 여섯 시,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는 시간, 청소를 하러 온 도우미는 자욱한 안개 속에 앉아있는 강영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어제 약혼식을 치른 도련님은 응당 호텔에서 소월 아가씨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지금 몇 시죠?”강영수가 돌연 소리를 내자 도우미가 덜컥 내려앉은 심장을 부여잡고 말했다.“도련님, 여섯 시입니다.”날이 이미 밝은 건가?강영수는 실핏줄이 가득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소파에서 일어서자 어지러움에 온몸이 흔들렸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고 곧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도련님!”도우미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고는 이내 의사를 불렀다.30분 뒤 도착한 의사가 그의 몸을 살펴보고는 말했다.“도련님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과로한 탓에 몸이 버티지 못한 것입니다. 푹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노부인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강영수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도우미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사모님, 얼른 주무세요. 날이 밝았어요.”노부인이 물었다.“그 아인 알아봤어?”“조금 전 오 집사님이 CCTV를 살펴보았는데 여자 한 명과 함께 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더이상의 정보는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도련님께선 종래로 밖에서 여자들과 함부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닮은 아이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겁니다.”“예전 영수가 속을 썩이던 시절...”노부인의 머릿속에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사진은? 아이가 돌아가던 모습이 찍힌 사진을 가져와.”“네. 제가 지금 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도우미는 사진을 뽑아 노부인에게 건네주었다. 노부인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중 몇 장의 사진엔 어젯밤 밤이 깊어 어두웠던 탓에 아이의 윤곽만 어렴풋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론 알아볼 수 있었다.노부인이
아침 8시, 장소월은 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깨어 깨질 듯한 머리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몸에는 흰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뭐지? 왜 머리가 이렇게 아프지?어젯밤에 잘을 설쳤나?방안에는 부서진 장미꽃이 가득했고 꽃잎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멀쩡한 꽃이 왜 이렇게 됐지?난...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종업원이 준 방 키를 갖고 방에 들어왔을 때 너무 더운 것 같아 욕실에 가서 샤워한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잠든 것 같았다.그녀는 얼른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땅을 밟는 순간, 갑자기 온몸이 나른해져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랫도리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아랫배가 약간 더부룩했다.경험이 있는 그녀는 이런 상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남자와 잠자리에 든 후에만 이런 느낌이 든다는 것을.혹시 어제 강영수가 다녀갔을까?만약 영수와 관계를 맺었다면, 왜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까?바로 그때, 호텔 방 문이 밖에서 열리면서 한 객실 종업원이 들어왔다.“손님, 괜찮으세요?”“전 부른 적이 없는데 누가 들어오라고 했죠?”객실 종업원은 관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말했다.“강 선생님께서 모닝콜을 요청하셨어요.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해서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어서 바로 들어왔습니다. 비행기 이륙 시간까지 이제 세 시간이 남았으니 지금 일어나셔야 합니다.”그녀는 앞으로 다가가 장소월을 일으켜 세웠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떠보듯 물었다.“어젯밤에 누가 제 방에 왔었나요?”“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하지만 호텔 당직 직원에게 물어 봐 드릴 수는 있어요.”장소월은 이마를 짚고 호흡이 가빠지더니 온몸이 불편했다.“손님, 어젯밤에 술을 드셨으니 아침에 두통이 있는 건 당연합니다. 이미 해장국을 준비했으니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하지만... 어젯밤에 마신 건 대부분 도수가 높지 않은 과일주였어요.”그녀는 빙그레 웃었다.“평소에
장소월은 통증을 참으며 욕실에 가서 샤워했다. 따듯한 물이 머리 꼭대기에서 쏟아졌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뭔가 이상했다. 손을 뻗어 하체의 민감한 곳을 만졌지만 부은 흔적도 없었고 통증도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사실 그녀가 볼 수 없는 허벅지에는 붉은 자국이 있었다. 다만 너무 깊이 숨겨져 있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내가 예민했나?어젯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녀가 또 술주정을 부린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멀쩡한 장미꽃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을까?술에 취하면 필름이 끊긴다는 뉴스에 관해 전에 본 적이 있었다.그녀는 잡생각을 재빨리 털어내고 30분의 샤워를 마친 후, 목욕 수건을 두르고 나갔다.만약 이때, 그녀가 뒤돌아본다면 거울에 비친 그녀의 가녀린 등에 남은 어젯밤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강영수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한참 후에야 전화가 연결되었다.“영수야, 할머니 어떠셔?”“소월 아가씨!”전화를 받은 사람은 진봉이었다.“진 비서님?”“네, 저예요. 대표님은 회사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소월 아가씨와 함께 파리에 갈 수 없으세요. 호텔에 이미 기사를 보냈으니 아가씨를 공항까지 모셔다 줄 거예요. 파리에 도착한 후의 일정도 대표님께서 이미 안배해놓으셨어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아가씨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저희는 일주일 후에 도착할 겁니다.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시라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괜찮아요. 회사 일이 중요하죠. 할머니는 괜찮으세요?”장소월은 확실히 좀 실망했다. 처음으로 서울을 떠나 혼자 낯선 곳으로 가려고 하니 긴장되고 두렵기도 했다.“안심하세요. 어르신은 괜찮습니다.”“그럼 다행이네요. 비서님 일 보세요. 저도 출발해야 해요.”“소월 아가씨, 조심해서 다녀오세요.”“네.”전화를 끊은 진봉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혼자서도 괜찮으실 거예요. 경호원이 24시간 아
“너 같은 변태에게 찍힌다는 건 정말 생각만 해도 섬뜩해. 소월이는 무슨 죄로 너 같은 인간을 만나서 인생을 망치는 건지.”“네가 이 정도로 강영수를 괴롭히는 건, 설마 아직도 영수가 남천 그룹을 인수해 널 사직시키려던 일을 기억하고 보복하려는 거야?”전연우는 답이 없었고, 서철용은 이를 묵인으로 간주했다.이렇게 음흉한 사람과 적이 아니라 한 패라니. 서철용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전연우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행여나 서철용 자신까지 다칠까 두렵기도 했다.말을 마친 그는 손을 내 흔들며 말했다.“남은 약은?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 개발한 줄 알아? 한 병에 50미리 밖에 없어서 나도 아까워 못 쓰고 있어.”전연우는 액셀을 밟고 핸들을 꺾어 유턴했다.“약 좋더라. 다음에 챙길게.”“그래, 전연우! 다음에 꼭 가져와!”그 약은 환각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고, 먹고 나면 전날 밤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전연우가 저번에 가져갈 때, 그가 분명 무슨 짓을 꾸밀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전연우의 말대로 진정한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같은 시각, 장소월은 아주 설레고 흥분되었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비행기에 오르기 전, 허 교수에게 전화해 호텔 주소를 보냈고, 소현아와 허이준이 보낸 문자에도 일일이 답장했다.서울에서 파리까지, 10시간을 넘어 달렸고, 비행기는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착륙했다.마중을 나온 사람은 파리 현지인으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40대 여성이었고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그녀는 바스턴 호텔의 집사, 에리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그들의 차를 타고 함께 호텔로 향했다. 장소월은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오기 전 꽤 많은 공부를 했다.장소월은 인터넷에서 이 호텔의 가격을 검색해보니 하룻밤에 거의 백만
장소월의 짐은 트렁크 하나로 그리 많지 않았다. 방에 도착하니 내부는 꽤 큰 편이었다.“정리 마치면 나랑 누구 좀 만나러 가요. 선생님과 함께 온 학생들이에요. 학번으로 따지면 소월 씨 선배들이죠.”“선생님은 어디 계시죠?”“선생님은 파리 예술 아카데미 측 지도자들과 저녁 약속이 있으세요. 아마 늦게 돌아오실 것 같아요.”이때, 누군가 호텔 방 문을 두드렸고, 서현이 다가가 열어보니 호텔의 객실 담당 직원이었다.서현은 그들과 몇 마디 주고받고, 입구에서 소월을 보며 외쳤다.“소월 씨 찾으러 왔어요.”장소월은 하던 일을 멈추고 문밖으로 나갔다.서현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통역 해드려요?”장소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영어는 꽤 하는 편이에요.”얘기를 나눠보니 그들은 장소월에게 생필품을 전달하러 온 것이다.입구에 있는 이동식 옷걸이에는 최신상 원피스부터 속옷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은 전부 그녀의 몸에 맞춰 맞춤 제작한 것이고, 화장품과 가방들도 적지 않았다.전적으로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의 기준에 맞춰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들이 준비한 물건들은 아마 이 방에 다 놓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대충 옷 몇 벌을 골라 챙기려 했지만, 그들은 맞은편의 호텔 방을 그녀의 드레스룸으로 사용하라고 했다.장소월은 이 일에 너무 오래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었다.모든 일을 정리하고 서현은 그녀를 데리고 아래층 식당으로 향했다.식당 창가 구석 자리에서 그녀는 소개했다.“이 두 분이 바로 내가 말한 선배님이세요. 주시윤, 박원근, 모두 나랑 같은 학번이고 곧 3학년생들이죠.”여자를 본 두 남자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장소월은 그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는 자리에 앉았다.주시윤: “소월 후배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네요.”박원근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그러게, 나중에 소월 후배가 학교에 오면 인기 짱이겠는데?”장소월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는 테이블 아래에
옆에 앉아 있던 주시윤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후배가 밥 사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이번 활동 경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식당 지배인이 다가왔고 서현이 막 지갑을 여는데 지배인이 말했다.“강 대표님은 우리 호텔의 VIP 회원이십니다. 대표님의 아내도 저희 호텔에서 똑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비용은 무료이니 계산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저희 호텔의 모든 오락 시설을 즐기실 수 있으세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세 사람은 일제히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강영수다운 일 처리 방식이었다.하지만 강영수가 그녀를 위해 한 일이 많을수록, 마음의 짐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그의 행동이 모두 당연한 것 같지만, 그녀는 여전히 빚을 진 느낌이었다.식사를 마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밥을 먹을 때부터 서현은 말이 별로 없었고, 장소월은 뒤에서 강영수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문을 닫았다.서현은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욕실로 향했고, 장소월은 남자의 전화를 받고 혼자 베란다로 갔다.“왜 내가 준비한 방에 묵지 않았어?”그의 목소리는 피곤한 듯 보였다.“이번에 혼자 온 게 아니라 허 교수님의 다른 학생들도 있어. 전부 일반 룸에 묵고 있는데 나만 호화로운 방에 묵으면 분명 뭐라고들 할 거야.”“영수야, 너 언제 와? 보고... 싶어.”이 말을 내뱉은 장소월은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졌다.강영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나도 너 보고 싶어. 여기 일 다 처리하면 당장 너 보러 갈게.”“그리고, 우리의 첫날밤도 치러야지. 응?”장소월은 부끄러워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들을 보았다. 서울은 지금 낮일 것이다.낯선 환경에서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허전했다.강영수: “일찍 쉬어. 내일 다시 전화할게.”“그래.”“잘자.”장소월이 전화를 끊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방의 전등은 이미 반쯤 꺼져 있었다. 서현은 이미 샤
낯선 환경에서 잠든 장소월은 잠을 설쳤다.룸의 모닝콜이 울려서야 그녀는 일어났다. 서현은 어느새 세수를 마쳤는지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묶고 있었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왔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서현은 거울을 통해 그녀를 보며 귀띔했다.“오늘 학교 가는 거 잊지 말아요. 어느 반인지는 알죠?”장소월은 미간을 어루만지며 겨우겨우 대답했다.“알면 됐어요. 그럼 나도 같이 가지 않을게요. 만약 길을 모르겠으면 나한테 전화해서 물어요.”“네.”서현은 오늘 특별히 화장으로 얼굴의 주근깨를 가리고 검은 볼테 안경을 썼다. 책상 위의 룸카드를 보며 망설이더니 챙기고는 가방을 메고 나갔다.방 입구에서 마침 주시원과 박원근을 만났다. 주시원: “소월 후배는?”서현은 안경을 밀더니 대답했다.“이제 깨났어. 우리 소월이 기다리지 말고 바로 선생님 보러 가자. 혼자 괜찮을 거야.”박원근은 머리를 움켜쥐더니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 선생님께서 특별히 소월이를 안전하게 학교에 데려다주라고 하셨잖아. 혼자 낯선 땅에서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떡해? 소월이는 강 대표 사모님이라는 걸 잊지 마. 우리 이번에 파리에 온 것도 모두 강씨 집안 덕분이야. 우리가 푸대접해서 만약 고자질이라도 하면 우리 셋은 분명 욕먹을걸?”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럼 네가 데려다주던가. 난 그럴 시간 없어. 우리는 대회에 참가하러 온 거지 재벌가 사모님에게 아부하러 온 게 아니잖아? 선생님이 우리에 대한 기대를 잊지 마.”떠나는 서현을 보며 주시원은 웃으며 박원근의 어깨를 툭툭 쳤다.“사실 서현이 말이 맞아. 아무리 네가 똥개처럼 따라다닌다고 해도 너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을 거야. 이미 주인이 있는 몸이잖아. 그런 헛수고는 그만하고, 이번 대회에서 어떻게 상 받을지나 생각해. 만약 도저히 마음이 안 놓이면 여기서 기다리던가. 난 서현이랑 먼저 아침 먹으러 가야겠어.”주시원은 쏜살같이 도망쳤다.박원근은 손목시계를 보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