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다가오자 강영수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대부분의 학생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장소월은 햇볕이 너무 따가웠던 탓에 서류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조수석에 올라탔다.차 안 온도는 아주 시원했다. 강영수가 차가운 물을 장소월에게 건넸다.“시험 잘 봤어?”물을 한 모금 마시니 무더위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괜찮은 거 같아. 예상보다 어렵지 않았어.”강영수는 그녀와 함께 이미 예약해 놓은 촬영 회사로 향했다.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사진을 찍어본 적이 몇 번 없었다. 이번이 그중 한 번이다.촬영을 마치고 나자 녹초가 된 장소월은 차 안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강영수는 운전을 하다 그녀의 몸이 옆으로 기우는 것을 보고는 팔을 뻗어 얼굴을 감쌌다. 빨간불이 되어 정차한 다음엔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혀 그녀를 편히 눕혔다.그녀는 화장한 얼굴로 편안히 누워 강씨 저택에 도착했다.강영수는 조수석 문을 열고 그녀를 안은 뒤 현관으로 들어갔다.도우미가 달려 나왔다.“도련님...”그의 품속 장소월을 본 순간 도우미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할 말 있으면 밤에 해요.”강영수가 장소월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방 안에 들어간 뒤 강영수는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강영수는 발신자 이름을 보고선 곧바로 전원을 꺼버렸다.요즘 시험 준비에 바삐 돌아친 데다 약혼식 등 많은 일까지 겹치다 보니 그녀는 이미 오랫동안 깊이 잠들지 못했었다.강영수는 화장대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려서야 겨우 클렌징 오일을 찾아냈다. 그는 세심히 성분표를 살펴본 뒤 비교적 온화한 클렌징 오일을 선택해 조금씩 장소월의 얼굴을 문지르며 화장을 지워냈다.은은한 레몬 향을 맡은 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뭐 하는 거야?”강영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화장한 채 자면 피부에 안 좋아. 내가 지워줄게. 금방이면 돼.”“응.”화장을 지우고 난 뒤 강영
인씨 가문.강영수가 약혼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인정아가 강씨 집안으로 전화를 걸었다.“어머님, 영수가 곧 약혼한다면서요? 왜 저한텐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전 영수의 엄마예요. 이렇게 큰일을 알 권리조차 저한텐 없는 건가요?”강씨 노부인이 말했다.“이건 영수의 결정이야. 난 간섭할 수 없어. 영수는 이제야 가까스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어. 엄마로서 정말 영수를 위한다면 조용히 있어. 너와 강씨 집안 인연은 이미 끝났어. 나 또한 네가 영수의 엄마니까 전화통화라도 해주는 거야.”“당시 영수는 고작 다섯 살이었어. 넌 그 어린아이를 지하실에 가두고 괴롭혔어.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까지 했지. 이제 와 자책한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이제 다시는 전화하지 마. 우리 강씨 집안에선 이미 너라는 사람을 잊었으니까!”뚜뚜 통화음과 함께 전화가 끊겨버렸다.인정아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소파에 앉아 얼굴을 감쌌다.인시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엄마... 괜찮으세요? 의사 선생님께서 흥분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우리 오빠한테 차근차근 얘기해봐요. 네? 분명 용서해줄 거예요.”“오빠의 약혼식에 가고 싶으시면 제가 소월이에게 전화해 얘기할게요. 소월이가 갈 수 있게 만들어줄 거예요.”부모님 두 분 다 안 계신다면 어떻게 약혼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강영수도 마음을 내려놓을 때가 된 것이다.인시윤의 그 말에 희망이 생긴 인정아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시윤아, 이번 일은 너한테 부탁할게. 난 네 오빠한테 너무 큰 빚을 졌어.”“엄마 마음 다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언젠가 오빠가 엄마를 용서할 날이 꼭 올 거예요.”그녀는 줄곧 아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하지만 왜 그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단 말인가.그녀는 이미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당시 그녀는 강일주의 배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강일주가 밖에서 심유와 외도하며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사생아까지 낳은
약혼식에 참석한 강영수의 친척은 그리 많지 않았다.강일주가 왜 오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선 강씨 저택에 살고 있는 사람 빼곤 아무도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예전 인정아와 강일주의 이혼 때문에 나라 전체가 들썩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아무도 서울 제1명문가인 강씨 집안 사생활에 대해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강씨 집안엔 강일주를 제외하고 두 명의 형제와 한 명의 여동생이 더 있었다.그들은 강한 그룹의 계열사를 맡고 있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장소월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장소월은 연장자부터 시작해 한 명 한 명 인사하며 적잖은 봉투를 받았다. 그녀는 두둑하게 받은 봉투를 옆쪽 종업원에게 넘겨주었다.그녀가 받은 축의금은 서울 중심 구역에서 별장 하나 정도는 충분히 살 정도의 금액이었다.강영수는 물질적인 면에서 종래로 그녀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강영수의 방 안 금고의 비밀번호까지 그녀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안엔 금괴와 평소 편히 쓸 수 있는 현금이 들어있었다.전연우가 백윤서의 귓가에 무어라 말하자 그녀가 손에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전연우는 새 잔을 갖고 와 알코올이 들어있지 않은 주스를 부어주었다.보기엔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으나 실상은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장해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위선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소월이는 자네한테 맡기겠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고생이란 모르고 자랐네.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지. 때론 천방지축 날뛰더라도 자네가 이해하고 보듬어주게.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네.”강영수가 허리를 굽혔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모습이 더없이 준수했다. 목에 남아있는 문신 자국엔 장소월이 파운데이션을 발라주어 가까이 다가가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었다. 본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야 할 일이나 강영수가 거부하는 바람에 장소월이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강영수가 깊은 눈동자로 장소월을 바라보았다.“소월이는 이제 제 와이프입니다. 어떤 행동을
“난...”장소월은 어찌할 줄 몰라 망설였다. 강영수에게 있어 인씨 집안은 지옥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소월아, 엄마와 오빠가 화해하길 원하지 않는 거야? 너도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야지. 우리 다 가족이잖아. 오빠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이번 일은 반드시 우릴 도와줘야 해. 엄마랑 내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장소월이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시윤아, 이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이모님에 관한 건 내가 영수와 상의해볼게. 하지만 영수가 받아들일지는 보장하지 못해.”“장소월!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우리 엄마가 오빠랑 얼마나 화해하고 싶어 하시는지 몰라? 넌 우리 생각 따위 하지 않는 거지?”인시윤이 노기를 애써 꾹꾹 누르며 말했다.장소월이 예쁜 눈썹을 찌푸렸다.“시윤아, 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이모님께서 우릴 축복하고 싶으시다면 우린 마음속으로 고맙게 받을게.”“왜, 누구 전화야?”강영수의 온화한 목소리가 장소월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장소월이 방금 끊긴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조금 전 일을 강영수에게 말할지 말지 고민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지금 그 일을 언급하는 건 그를 괴롭게만 할 뿐일 테니 말이다.장소월이 고개를 저었다.“현아야.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 약혼식에 오지 못했잖아. 통화하면서 아쉽다고 울기까지 하더라고.”강영수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맑은 하늘에서 둥근 달과 찬란한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이렇듯 밝은 밤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은 극히 드물다.“소월아, 나 정말 기뻐. 넌 이제 내 것이야. 절대 너랑 헤어지지 않을 거야.”장소월도 그의 등에 손을 올려 그를 끌어안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술 냄새가 강영수의 몸에 배어있었다.“그래.”앞으로 그녀의 인생엔 전연우도, 백윤서도, 강만옥도, 그리고... 송시아도 없을 것이다.더는 전생의 일이 반
노부인은 일찍 약혼식장에서 나와 저택으로 돌아갔다.오부연이 서류 봉투를 하나 가져왔다.“이건 조금 전 누군가 도련님께서 사모님에게 전해준 것이라며 가져온 것입니다. 내용은 사모님께서 직접 읽어보라고 하더라고요.”노부인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너희들은 나가 있어. 나 혼자 열어 볼 테니.”오랫동안 노부인의 곁을 지키던 도우미 한 명만 빼고 모두 방에서 나갔다.노부인이 소파에 앉아 서류 봉투를 열었다. 안엔 건강검진 결과 서류가 들어있었는데 장소월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마지막 줄을 본 노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이건...”서류를 들고 있던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사모님, 왜 그러세요?”도우미가 심장병 증세를 보이는 노부인을 보고는 재빨리 약 한 알을 그녀의 입안에 넣어주었다.노부인의 호흡이 그제야 평온해졌다. 바닥에 떨어진 건강검진 결과서를 본 도우미가 아연실색했다.“뭐라고요? 소월 아가씨에게 자궁이 없다고요? 임신을 못 하는 거예요? 이렇게나 큰일을 도련님은 아시는 걸까요?”노부인이 소리쳤다.“지금 당장 전화해. 이런 일을 왜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거야!”도우미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곧바로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그때, 다른 도우미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사모님, 바깥에 아이 한 명이 와있습니다. 아빠를 찾으러 왔다고 합니다.”“어느 집 아이인데 여기에 온 거야? 얼른 경찰서에 데려다줘.”도우미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사모님, 직접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노부인이 밖에 나가보자 4,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청바지를 입고 곰 인형을 안고 서 있었다.“할머니, 엄마가 이곳에 오면 아빠를 찾을 수 있다고 했어요.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너... 이름이 뭐야?”노부인이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도우미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정말 닮았어요. 판에 박은 듯 완전히 닮았어요. 이렇게 이럴 수가 있죠?’“아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선물상자를 건넸다.“영수야, 엄마가 늦어서 미안해. 너한테 약혼 선물을 가져왔어. 너와 소월이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구나.”“오빠, 새언니... 엄마가 두 사람에게 선물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하셨어.”선물상자 안엔 정교한 도자기 그릇과 접시가 들어있었다. 이건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다. 그 가치가 고대 신물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밑에서 수군거렸다.그때, 쨍그랑 소리가 약혼식장에 울려 퍼졌다. 강영수가 유리잔을 닥치는 대로 내던진 것이다. 그가 차가운 얼굴로 소리쳤다.“누가 오라고 했어요! 꺼져요!”그는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았다.전연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찻잔에 담긴 차를 마셨다. 본래 들썩였던 분위기가 찬물이라도 부은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로 입을 꾹 닫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인정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슬픔이 자리 잡았다.인시윤이 다급히 나서며 말했다.“새언니가 우릴 오라고 했어요. 제가 조금 전 전화했거든요.”그녀가 장소월을 쳐다보며 말했다.“새언니, 나랑 엄마가 올 거라는 걸 오빠한테 얘기 안 했어?”장소월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강영수를 쳐다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인시윤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이렇게 중요한 일을 오빠한테 왜 알려주지 않았어?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대체 뭘 한 거야?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기나 해?”인정아가 억지로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렸다.“괜찮아. 소월이도 일부러 한 일이 아닐 거야. 너무 정신이 없어 잊어버렸겠지.”“영수야, 엄마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준비해줄게.”그 순간 약혼식장에 오싹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짝!따귀 한 대가 인시윤의 얼굴에 힘껏 내리꽂혔다. 인시윤은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얼굴을 감싸 쥐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는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백윤서는 깜짝 놀라 전연우의 옆에 바
강영수는 술을 깨야 한다는 핑계로 장소월을 데리고 휴게실에 갔다.장소월이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미안해. 확실히 시윤이가 나한테 전화했었어. 난 네가 신경 쓸까 봐 말하지 않은 거야. 정말 올 줄은 몰랐어.”강영수는 술에 취해 눈동자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 오늘 종일 바삐 돌아쳤으니 말이다.장소월은 따뜻한 물을 받은 뒤 그의 옆에 앉았다. 강영수에겐 그녀를 원망할 조금의 생각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장소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알아... 시윤이가 했던 말은 마음에 두지 마. 그들이 또 너에게 연락했을 때 상대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면 언제든 나한테 얘기해.”“그래. 이젠 숨기지 않을게. 넌 다른 사람이 네 앞에서 그 일을 언급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말하지 않았어.”“안아줄래?”장소월은 앞으로 다가서 그의 품에 안겼다.오늘 약혼식이 끝나면 그들은 호텔에 머물 계획이었다. 이곳은 공항과 가깝기에 이른 시간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가기 편할 테니 말이다.인정아는 잠시 자리에 앉아있다가 이내 일어서 휴게실로 향했다. 하지만 문 앞에서 진봉이 막아섰다.“사모님, 여긴 개인 휴게실입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영수한테 몇 마디만 하고 갈게요. 들여보내 줘요. 아니면 당신이 들어가서 말해줄래요? 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진봉이 무표정한 얼굴로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대표님께서 인씨 가문분들이 온 걸 눈감아주신 건 사모님의 체면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 점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인시윤이 벌컥 화를 냈다.“진 비서! 당신은 내 오빠 옆 비서일 뿐이에요.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들어가서 묻지 않고도 오빠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하는 거죠?”“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 대표님의 분부대로 행하는 한낱 비서일 뿐입니다. 절 난감하게 하지 마세요.”“당신!”그녀가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씩씩거리는 모습을
그때, 진봉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큰일 났습니다. 대표님, 노부인께서 앓아누우셨습니다.”강영수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무슨 일이야?”“도련님더러 집에 오라고 하십니다. 소월 아가씨는 함께 오실 필요 없고요.”장소월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요?”강영수가 그녀를 쳐다보았다.“잘 모르겠습니다. 노부인의 뜻입니다. 하지만 말투를 들어보니 작은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소월 아가씨가 먼 길을 떠나야 하니 걱정이 되어 오지 말라고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할머니가 할 만한 생각이었다.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느낀 강영수가 이마를 찌푸렸다.“할머니는 지금 어떠셔?”“개인 주치의가 급히 갔습니다.”강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위에 놓아두었던 정장을 잡고는 장소월에게 말했다.“넌 호텔에서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올게.”“나도 같이 갈게.”“내 말 들어. 지금은 이미 시간이 늦었어. 파리와는 시차가 있으니 충분히 쉬지 못하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야. 할머니 쪽은 내가 살펴보고 나서 연락할게.”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꼭 연락해. 내일 시간이 안 되면 나 혼자 가도 돼.”강영수가 그녀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 반드시 시간 맞춰 돌아올 거야.”“그래.”강영수가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호텔 종업원이 펜트하우스 방키를 가져왔다.진봉이 손님들을 다 보내고 나니 이미 열한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장소월은 66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들어가니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낭만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었고 은은한 조명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다만 아쉽게도...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신혼 방에 장소월 한 사람만 남게 된 것이다.침실 문을 열어본 장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침대 위에 9999송이의 붉은색 장미가 놓여있었던 것이다.그가... 서울시 장미꽃 모두를 사 온 건가?방 안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디퓨저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향기가 너무 강해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어두컴컴한 방에
미경이 말했다.“현아 아가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효연 아가씨랑은 완전히 달라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여자는 처음 봤어요. 송시아보다도 훨씬 나아요. 그 여자는 별장에 오자마자 왕이라도 된 듯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시켰잖아요.”규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일단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우리도 연락하지 말아요. 혹시라도 주인님이 눈치챌지도 모르잖아요.”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주사는 석 달에 한 번씩 맞는 것으로, 뇌의 핏덩이를 녹여준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북경 감옥은 밤이 되면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고, 가끔 늑대 울음소리도 들려오곤 했다.사방이 막혀 있는 격투장 안, 강지훈은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내려와 부관이 건네준 수건을 받았다. 링 위에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눈을 부릅뜬 채로 숨통이 끊겨 있었다.이건 북경 감옥의 규칙이었다. 이긴 자는 다시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패배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주어질 뿐이다.강지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아직 소식이 없어?”부관이 묻지 않아도 소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소장님,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 물으시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되신다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마침 소장님이 조사하고 있는 일도 그쪽에서 단서를 찾았다고 합니다.”겨우 3일밖에 되지 않았나?강지훈은 손에 든 물건을 던져 버리고 검은색 군복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사무실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했고, 벽엔 부자연스러운 그림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건 소현아가 이곳에 왔을 때 그린 그림이었다.강지훈은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부관이 라이터로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쪽에서 전화 안 왔어?”부관이 대답했다.“얼마 전 감옥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탈옥을 시도한 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니 그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효연 아가씨가 돌아온 탓에 현아 아가씨가 주인님의 총애를 잃게 된 걸까? 주인님의 여자 교체 속도는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효연 아가씨를 제외하고 주인님이 진심으로 마음을 쏟았던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들은 늘 새로운 여자를 탐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소현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해서 심통을 부리며 주인님과 싸우기 일쑤였다.어쩌면 그녀에게 싫증이나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는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현아 아가씨는 결국 주인님에게 버려진 듯하다.현아 아가씨와 효연 아가씨는 정말이지 비교할 가치도 없다. 주인님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효연 아가씨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만약 어르신께서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애써 그녀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소현아가 수술대에 실려 간 뒤, 주인님에게 연락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규영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래야만 소현아가 치료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의사가 수술대에 누워 있는 소현아의 머리에 주사기 바늘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정맥에 주사했다. 소현아는 겁에 질려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나 주사 안 맞을 거예요! 이거 놔요!”규영과 미경은 소현아의 팔다리를 누르며 안심시켰다. “현아 아가씨, 조금만 참으세요. 곧 좋아질 거예요.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갈 수 있어요.”집에 간다는 말을 듣자 소현아는 조금씩 진정되었다. 어쩌면 약물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주변의 소리도 점점 줄어들었다.규영이 물었다. “이 약 뱃속 태아에게 영향을 주진 않겠죠?”요셉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약은 임상 시험을 거쳐 임신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미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면 됐어요.”소현아의 뱃속 아기에게 조금의 문
소현아는 비행기 안에서 과일과 고단백 식단을 먹으며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임신한 그녀를 정성껏 돌보며, 최대한 간식은 그녀가 찾지 못하도록 깊게 숨겼다. 과자 같은 음식은 복중 태아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규영이 말했다.“....지금 상황으로는 가능한 한 하루라도 더 숨기는 수밖에 없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야 할 텐데요.”미경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만약 주인님이 우리가 몰래 어르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뼈도 추리지 못할 거예요.”“일단 상황 봐가면서 대처해요. 그래도 다행히 아가씨의 임신 사실은 결국 숨길 수 있었잖아요.”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규영 씨, 우리가 했던 내기, 내가 이긴 거 맞죠? 내가 아기 가졌다는 거 강지훈한테 들키지 않았잖아요. 나한테 주겠다고 약속한 거 줄 때 되지 않았어요?”“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릴 거예요.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임신 후 소현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잠을 자곤 했다. 비행기에서도 배불리 먹고 난 뒤 바로 잠들었다.깨어났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였다.강지훈이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세 사람을 차에 태워서 시골에 있는 한 별장으로 향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는 라벤더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소현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던져 버리고 라벤더 밭으로 달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규영과 미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붙잡았다. 심하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 속의 아이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아가씨, 짐을 정리하고 나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밖에 없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습니다.”소현아는 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며 말했다.“알았어요.”운전기사는 러시아 현지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강지훈이 심어 놓은 감시카메라이기도 했다.
서울 공항으로 향하는 헬리콥터가 북경 감옥을 떠난 후, 침대 위의 남녀는 다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천효연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절정에 달했다. 그 오르가즘은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남자를 원했다.“지훈 씨, 계속...”“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어요.”여자의 팔과 가슴에는 남자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강지훈은 침대에 누워 여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몸 위에 앉혔다. “이제 네가 알아서 해.”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모든 힘을 쏟아낸 뒤 침대에 기대어 잠들었다.오후 3시, 강지훈은 깨어나 샤워를 한 뒤 샤워 가운을 입고 바깥으로 나갔다. 맞은편 방문을 열려고 한 순간, 도우미가 소현아의 방에서 옷을 정리하고 나오며 말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는 이미 떠나셨습니다.”“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이미 비행기에 탔고 내일쯤 도착할 거라고 합니다.”강지훈이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도우미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옷을 정리해 놓으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일 테니까요.”강지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우미 뒤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소현아의 방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옷장과 화장대 위의 물건들, 그리고 항상 바닥에 흩어져 있던 과자들마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예전의 그 공허한 방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강지훈은 발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소현아 특유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고, 청량한 공기 청정제 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방에 있던 물건은 어디 있어?”도우미는 침대에 향한 강지훈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인형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한다며 물건을 거의 다 챙겨 떠났습니다. 남긴 거라곤 옷 몇 벌이 전부입니다.”강지훈이 차갑게 말했다.“내 허락 없이 누가 마음대로 소현아 물건을 만지라고 했어?”그 한마디에 도우미는 순식간에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두 도우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소현아의 임신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지훈의 사람이 아니라 강씨 가문에서 보낸 강지훈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임신 사실을 강씨 어르신에게 보고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배 속의 아이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왔었다.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유일한 핏줄이니 어떤 사고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만약 주인님이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히 아이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지금은 다행히도 아기가 석 달이 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강지훈이 일 때문에 바빠 별장을 떠나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소현아에게 유산 방지 주사를 놓아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러시아에서 최고의 뇌 전문의를 섭외하고 난 다음 날, 두 도우미는 모든 짐을 챙겨 소현아와 함께 해외 치료를 떠났다.새벽,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소현아는 손에 인형을 안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말했다. “규영 씨, 미경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규영이 말했다. “현아 아가씨, 주인님께서 아주 재미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다.”소현아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요?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그 나쁜 놈도 같이 가요?”“주인님은 할 일이 있으셔서 저희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주인님도 오실 겁니다.”소현아는 뒤돌아 계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다지 실망하지는 않았다. 강지훈은 항상 바빠서 별장에 없는 날이 더 많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며칠만 있다가 돌아와야 해요! 내 동생이 곧 결혼하거든요. 난 언니니까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해야 해요.”규영과 미경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측은한 마음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소현아가 헬리콥터에 올라타자 헬리콥터는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방 안, 남자가
소현아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엔 아무리 심통을 부렸어도, 내버려 두다가 식사 때가 되어 부르면 두말없이 내려오곤 했었다. 마음에 품었던 앙금을 절대 다음 날까지 가져가지 않았고 주인님과 화해하는 것도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조용하다. 게다가 오늘 밤엔 주인님 분부로 아가씨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분명히 방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도우미가 말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고프면 스스로 나오셨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미동도 없으십니다.”천효연은 강지훈에게 아주 적합한 애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외에도 강지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다른 여자들을 용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북경 감옥에 사적으로 지어진 별장은 강지훈이 혼자 거주하는 곳으로, 그녀 외에는 아무도 드나든 적이 없었다. 때문에 외국에서 돌아와 그 바보를 보았을 때, 약간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천효연은 강지훈의 입술에 키스하며 말했다. “먼저 방에 돌아가서 씻을게요. 밤에 와요.” 그녀는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강지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고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강지훈은 발로 문을 걷어찼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남자는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방안을 본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쳤다.강지훈은 곧바로 창가로 가서 그녀가 뛰어내린 건 아닌지 확인했다.“주인님, 아가씨 여기 계십니다.” 도우미가 드레스룸 바닥에 누워 있는 소현아를 발견했다.소현아는 벽에 기대어 손에 먹다 남은 과자를 든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떠보니 눈에 칼자국이 있는, 무섭게 생긴 남자가 보였다.소현아는 꿈속이라고 여기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꿈에도 이 나쁜 놈이 나오는 거지? 싫어, 난 소월이랑 강용이랑 같이 놀 거야. 소월아,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나중에 그 사람 어떻게 됐어?”“물 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키스했는지, 소현아는 머리가 먹먹해지고 입술이 얼얼해졌다. 급기야 뇌에 산소가 부족해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꺼내기만 해봐. 내가 그놈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거야”소현아는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 더러워졌어.”그녀는 눈에 눈물이 맺힌 채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다. “앞으로 다른 여자랑 뽀뽀한 뒤에 나한테 하지 말아요.”“진짜 더러워!” 소현아는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소현아! 거기 서!”소현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빠르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물건으로 문을 막아 놓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그의 침이 역겨워 욕실에서 물을 틀었다. 하지만 그때,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윙윙거렸고, 이상한 이명까지 들려왔다. 갑자기 밀려온 극심한 두통에 소현아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뒤, 도우미들은 위층에서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주인님, 아가씨 방문이 계속 닫혀 있고,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습니다.”“신경 쓰지 마.”그 짧은 말에 도우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밤이 깊어지고, 식탁에 놓인 음식들은 모두 치워졌다.천효연은 강지훈의 품에 안겨서 그에게 체리를 먹여주었다. “지훈 씨, 맛있어요?”강지훈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절반만도 못해.”“지훈 씨는 날 놀리기만 한다니까요.”“돌아갈 생각 없어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살 거예요.”어느덧 시계가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위층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프다며 내려왔을 텐데 말이다.오늘 처음으로 허기까지 참아내며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천효연은 남자의 마
도우미들은 정말로 그녀의 배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장면을 보면 분명히 울고불고 난리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뇌를 다쳐서 마음이 넓어진 건가.소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꽃빵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두 명의 도우미 역시 더는 위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소현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천효연은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른 채로 말했다. “지훈 씨, 왜 그래요? 그 여자 때문에 분위기 망치면 안 돼요. 우리 방으로 들어가요, 네?”소현아는 냉장고에서 마구마구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아이스크림을 본 도우미는 경악하며 얼른 빼앗아갔다. “아가씨, 의사 선생님께서 당분간 차가운 것을 드시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다른 걸 드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 해드릴게요.”소현아가 말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못 먹었어요. 딱 몇 입만 먹을게요.”도우미는 그녀의 배를 쳐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가씨, 제발 저희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차가운 음식을 몰래 드셨다가 배가 얼마나 아팠는지 잊으셨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머쓱하게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안 먹을게요.”“배고프시면 제가 국수라도 끓여 드릴게요.”소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주...주인님!” 도우미 중 한 명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보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강지훈은 샤워 가운을 걸치고 냉랭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들어왔다. 소현아를 돌보던 두 명의 도우미는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현아는 도우미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한테 국수 끓여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가요, 언제 돌아와서 끓여 줄 거예요?”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강지훈을 본 소현아는 덜컥 겁이 났다. 매번 이런
도우미들은 그런 광경에 익숙한 듯 두 사람이 편히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소파 위에서 천효연은 떨어지기 싫은 마음에 긴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지훈 씨, 나...”“당신한테 아이 낳아주고 싶어요...”단추가 하나씩 풀리고 검은색 군복이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흉터와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났다. 그는 소파에 파묻힌 여자에게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여자의 비명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만족스러운 쾌락을 담고 있었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때, 소현아는 두 시간 정도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밖에서 도우미들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소현아는 갑자기 배가 고파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문을 연 순간, 도우미들은 모두 화들짝 놀랐다. “현아 아가씨, 왜 나오셨어요? 빨리 다시 들어가세요.”침대 머리맡에 있던 꽃빵 두 개를 들고나온 그녀가 둥글게 불러온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파서 아래층에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싶어요.”도우미들은 눈썹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아래층에서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계시니, 현아 아가씨는 잠시만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지만 저 지금 배고프단 말이에요. 물도 마시고 싶고요.”머리가 망가진 사람은 역시 다르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그렇게 오랫동안 약을 먹었지만,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현아 아가씨, 지금은 주인님께서 바쁘게 일하고 계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끝나면 뭐든 다 해드릴게요.”“정말 너무들 하네요! 그냥 내려가서 뭐 좀 먹겠다는 것뿐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본 척할게요, 약속해요.” 소현아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도우미들을 바라봤다. 그 순수한 눈빛을 마주하니 누구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밑에서 급히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