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벌써 인시윤한테 손을 댄 거야?고작 그놈의 인맥 하나 때문에?아니면 돈 때문에!이번 생의 인시윤과 저번 생의 인시윤이 다른 게 없다. 전연우의 손아귀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겠지.전연우가 갑자기 앞으로 한걸음 걸어가더니 손을 뻗어 장소월의 이마 위에 붙어있던 머리카락을 슬쩍 떼어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그녀로서도 미처 방어할 수가 없었다."아무리 오랜만에 보는 거라고 해도 그렇지,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을 생각이야?“장소월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연우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깊은 눈동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정복욕, 소유욕과 광기의 감정들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하지만 소월의 눈에는 보였다. 그 위선적인 웃음 뒤에 감추어진 진짜 그의 모습이 어떤지 말이다.그는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가까스로 시선을 그에게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소현아가 소월의 오빠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전연우의 미소는 삽시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살벌한 표정만이 소현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표정에 지레 겁을 먹은 소현아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무서워."소월아!“소현아는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월아, 인시윤 너희 오빠랑 결혼하는 거야?“그게 그녀와 무슨 상관인가?소현아는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말했다."아니, 인시윤이랑 너희 오빠가 결혼하고, 너는 또 인시윤 오빠랑 결혼하면 인시윤은 너한테 아가씨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럼 너는 인시윤을 뭐라고 불러야 해? 너도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야?“"소월아! 나 진짜 어지러워!“그 천진난만하고 맑은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다.장소월은 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얘기했다."조용히 해.“그들은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았을 텐데 방금 그녀들이 그렇게 큰 소리로 얘기해버리는 바람에 대화 내용을 들어
말하고 보니 인시윤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늙은 남자를 좋아하겠나.그녀의 조건으로라면 그녀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널리고 널렸다. 그녀가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넘어올 남자들이 한 트럭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눈이 멀어버렸다.여태까지 살면서 인시윤은 원하는 것은 뭐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방금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제대로 느껴본 것이다.이런 기분이 절대 좋을 리가 없었다. 그가 눈앞에 없을 때면 머릿속이 온통 그의 생각으로 가득 들어찼다. 다른 일에 자신을 혹사하지 않는 이상 그에 관한 생각만 자꾸 커져 온몸의 모든 신경과 세포를 포함한 기관들에까지 그가 침투해버릴 지경이었다.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전연우를 잊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그가 좋아하는 게 도대체 백윤서인지 장소월인지 감도 안 잡혔다.장소월은 이미 자신의 큰오빠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니까, 만약... 백윤서라면…하지만 그가 장소월을 볼 때의 눈빛은 단 한 번도 백윤서의 앞에서 등장한 적이 없었다.전연우가 백윤서에 대한 감정도 단순히 정일 가능성이 크다.만약 장소월이 자신의 큰오빠와 결혼한다면, 그렇다면… 그녀에게도 기회는 있는 것이다!전연우는 아직 강가네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어머니께서 허락하시든 말든 갖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그녀가 못 얻는 건 절대 없다.강한 그룹.진봉은 이 소식을 대표에게 전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대표가 마음이 약해질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지금 소월 아가씨와의 정혼을 앞두고 계시는데 이번에는 절대 저번처럼 김남주에게 그 둘을 강제로 떼어놓을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진봉은 결국 회사의 미래를 위해 이 일을 조용히 묻는 것을 택했다. 나중에 비난을 받더라도 그 홀로 감당하게 말이다.진봉은 1000자 가까이 되는 자료를 건네주러 들어가기 위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서는 파란 셔츠에
“네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잊었어?”남자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강영수의 눈빛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비쳤지만 이내 마음속의 선택으로 눈빛이 생기를 잃어가는 게 보였다.그도 지금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그 애는 이해해줄 거야.”이 한마디를 남긴 채 강영수는 차에 시동을 걸더니 홀연히 회사를 떠났다.그 자리에 남겨진 진봉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부디 이번 일은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랄게요’사실 만약 소월 아가씨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대표님과의 혼인 같은 선택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목적은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기 단 하나였으니까. 그녀는 이미 그녀의 능력으로 중앙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한 사람이다. 그녀가 더는 강영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후회의 바닷속으로 잠식되는 건 강영수일 것이다.고속도로 사고 현장은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사고가 난 것은 두 대의 은색 승용차였고 가해자는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경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강 대표님, 저희가 뒤쫓아 왔을 때, 차는 이미 폭발한 상태였습니다.”강영수는 분노에 찬 손길로 경찰의 멱살을 잡았다.“누가 뒤쫓으라고 했어!”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급하게 둘을 떼어놓던 그때, 한 명이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 아무리 강 대표님께서 서울시에서 날고 기는 분이라고 하셔도 법은 지키면서 삽시다. 경찰 공격하는 거, 이거 중범죄예요. 전화로도 이미 설명해드리지 않았나요? 김남주는 정신병원에 있었고 살인혐의로 조사 중이었다고요. 저희는 법대로 저희가 해야 할 일 한 것뿐입니다.”“정신병원?”김남주 감옥에 있던 게 아니었어?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정신병원에 있어!“네, 구체적인 원인은 아직 조사 중입니다. 김남주 사건에 대해선 저희도 예비 서류 작성할 겁니다. 수색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고요. 그러니 강 대표님도 무슨 일 생기시거나 새로운 정보 같은 걸 얻으시면 바로 저희에
김남주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정확히 한 시간 반 뒤에 별장의 대문이 열렸다.이 별장의 비밀번호는 바로 그녀의 생일이었다.이거 봐, 기억하고 있잖아.김남주를 바라보는 강영수의 온몸은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무사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얼굴과 팔에 난 상처,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정신병원 환자복까지. 그녀의 몰골을 보자마자 강영수의 화는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그녀의 좋지 않은 안색을 주시하며 물었다.“누가 널 감옥에서 꺼내준 거야?”“이딴 재미 없는 장난에 놀아나 줄 생각 없어."그 말을 끝으로 강영수가 김남주에게서 몸을 돌려 별장을 떠나려고 할 때 김남주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내가 어떻게 나왔는데. 다 너 때문이잖아! 넌 절대 몰라. 너의 말 한마디에 감옥에 갇혀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었는지 아느냐고! 그 사람들이 날 바닥에 눕히고 그 날카로운 칼로 내 팔을 난도질해대면서, 나한테 더러운 여자라고 욕해댄 걸 알긴 하냐고, 이 나쁜 놈아!”“내가 한마디 좀 했다고, 우리가 한때 연인 사이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대했는지 알기나 해!”“순식간에 미친 사람 취급하더니, 모두가 날 밟기 시작했어!”“나 죽을 뻔했어. 마지막 숨넘어가기 직전에 누군가가 날 발견하고 바로 다시 정신병원에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내 시체였을 거야!”“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영수야, 잊었어? 예전엔…. 넌 죽어도 나 다치는 꼴은 못 봤잖아. 내가 어디서 괴롭힘당하고 있으면 항상 등장해서 막아줬잖아.”김남주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의 그녀는 정상이건 정신병이건 별 차이가 없는 상태였다.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의 마음은 비뚤어지고 깨지기 시작했다.강영수는 김남주에 대해 잘 몰랐다. 그녀가 겪은 모든 것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그녀에게 무어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정신병원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주사 맞고, 약 먹고…. 나는
시험이 끝나고 장소월은 우산을 든 채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그녀의 긴 양말을 적셨다. 강영수는 학교에서 그녀를 픽업할 때 늦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그녀는 교문 앞에서 10분 가까이 강영수가 오기를 기다리며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휴대전화가 울리더니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는 경고문구가 보였다.장소월은 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연속적으로 메시지를 여러 개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오늘 약혼 사진 찍는 날인데, 평소 강영수의 성격대로라면 절대 늦을 리가 없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가?장소월은 강영수의 비서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의 전화번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두었다.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것을 보던 장소월은 근처 편의점을 찾아 급히 몸을 피했다.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가방에서 숙제를 꺼내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시간은 한 시간, 한 시간 흘러갔고 그러다가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학생, 8시 다 됐어요. 가게 문 닫을 시간이에요.”“아, 죄송해요. 시간을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장소월은 급히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제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풀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창밖의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길가에는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나오는 서울 제2중 학교 학생들 말고는 더는 사람도 없었다.사실 장소월이 밖에서 강영수를 기다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1시간 반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그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장소월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실망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 실망의 감정도 조금을 있을 것이다.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그녀에겐 자주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지금 이 시각에 택시라도 잡아타려면 시내 광장 중심까지 어느 정도 걸어가야 했다.길가에서 갑자기 주황색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온몸이 다 빗물에 젖은 채 그녀의 발 앞까지 다가와 몸을 비비며 야옹
장소월은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갔다.장소월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었다. 시험이 10일도 안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번 시험만은 무조건 최상의 컨디션으로 맞이해야 했다.이미 중앙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했다고 해도 말이다…이번 시험 성적도 심각할 정도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밤 11시 반, 그녀가 자기 전에 간단히 단어 암기를 하다가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손에서 책을 내려놓고 불을 끄려던 순간, 침대 밑에 있던 고양이가 침대 위로 튀어 올라왔다. 그러더니 장소월의 머리맡에 엎드리더니 앞발로 꾹꾹이를 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침대 맡에 무드등만 켜놓은 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만큼 컸으면서 아직도 꾹꾹이를 하네.”“잘 자, 오렌지."장소월은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얼굴 밑으로 갖다 대더니 곧장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강영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2시였다.“도련님.”하인은 강영수 입가의 상처를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다 살 만큼 산 사람들로서 그 입술의 상처가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강영수가 집 밖으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입술에 남사스러운 상처를 달고 나타나다니, 도대체 무슨 이유로 생긴 상처인지 얘기를 들어보지 않아도 뻔했다.강영수는 온몸이 피로에 절어 우울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풍겼다.“소월이는?”하인이 대답했다.“소월 아가씨는 이미 쉬고 계십니다.”강영수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그 아이가 따로 물어본 것은 없었나요?”하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저… 소월 아가씨께선 9시가 거의 될 때쯤에야 집으로 돌아오셨어요. 저녁 드시자마자 바로 올라가서 쉬셨고요. 많이 지치신 모양이에요.”“큰 도련님은 식사하셨어요? 밥 아직 안 식었는데."“됐습니다.”강영수는 별다른 표정 없이 바로 계단으로 올라가며 덧붙였다.“만약 소월이가 저에 관해 물어본다면, 제가
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컵에 들어있던 물이 찼다. 그의 말은 장소월로 하여금 잠을 깨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거실에 있던 시계 초침 소리만 틱탁틱탁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확히 5초의 시간이 흘렀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이 강영수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한참이나 깨물던 장소월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놀란 기색은 전혀 없었다.“알겠어, 그럼 그동안 나도 나가 있어야 할까?”장소월은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했고 냉정했다. 강영수 또한 정소월의 말 속에서 기분 나쁜 기색이나 삐딱한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사실 그녀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강영수의 눈빛에는 예전과 같은 따스함이 아예 사라졌었기 때문이다. 지금 강영수의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느낌도 자주 받았다.갑자기 180도로 달라져 버린 그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최근 며칠 동안,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 돌아온다고 해도 새벽 시간대에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장소월도 정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경험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한때 그토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 맹세해놓고 어떻게 그걸 바로 쉽게 잊을 수가 있을까.심지어 김남주도 딱히 잘못한 게 없었다.강영수가 그림자처럼 검은 눈동자로 장소월을 응시했지만,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을 따로 해주지는 않았다.장소월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쓸데없는 감정 소모 안 해도 돼. 네 의견 존중하고 따를게. 그럼 난 먼저 들어가서 쉴게. 너도 일찍 자.”위층으로 돌아온 장소월은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침대 맡에 걸터앉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컵에 담겨있던 물을 한꺼번에 마셔버렸다.장소월은 화장대 쪽을 쳐다보더니 어둠 속에서 화장대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
강영수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잠시 약혼을 취소한 것뿐이에요. 초대장 날짜 정도는 쉽게 수정할 수 있잖아요.”그리고 그는 시선을 돌려 장소월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속내를 캐내려는 듯이.박순옥이 강영수에게 크게 호통쳤다.“당장 그 입 닥치지 못해? 내가 너한테 물었니? 잊지 마, 이 혼사는 네가 먼저 원한 거다. 지금 서울시의 모두가 알고 있는 이슈야. 지금 와서 취소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취소해버리면 밖에서 뭐라고 수군대겠니? 너, 소월이 기분은 생각해 봤니?”박순옥은 강영수에게 이런 말투로 얘기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장소월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목구멍에 목화솜 한 뭉치를 쑤셔 넣은 기분이었다. 여러 번의 심사숙고 끝에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제 생각엔 영수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약혼 일정을 잠시 취소한 영수만의 생각이 있을 거예요. 어찌 됐든 저희의 평생이 걸린 일이니까요."“저도 이 의견에 찬성해요. 아버지랑은 제가 잘 얘기해볼게요. 아버지도 별다른 의견 없으실 거예요.”“제가 지금 시험을 보러 가야 해서요. 다른 일에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서요. 할머님, 혹시 무슨 일 생기시면 저 시험 끝나고 나서 말씀해주실래요?”박순옥은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아마 소월이 억지로 꾸며낸 괜찮은 듯한 표정을 알아챘기 때문이겠지. 말은 저렇게 해도 속은 분명 말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장소월을 보는 박순옥의 눈빛에는 안타까움만이 가득했다.아침을 먹고 난 후, 박순옥은 강영수더러 장소월을 학교에까지 데려다주라고 부탁했다.그는 굳이 거절의 답변을 내놓는 대신 가볍게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장소월은 조수석에 앉아 안전띠를 맸다. 강영수가 천천히 악셀을 밟자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빨간 불이 되자 차가 멈춰 섰다.강영수가 창문을 내리더니 담뱃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를 들고 있는 쪽 팔을 창가에 걸친 채로 입을 열었다.“약혼을 잠시 취소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직 좀
의사가 들어와 손이준을 진찰했다.장소월은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의사가 대답했다.“상처 회복은 잘 되고 있습니다. 휴식만 잘 취하면 됩니다.”“네, 알겠습니다.”의사가 떠나자, 장소월은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때 갑자기 강용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전 씨, 그 총알 맞고 왜 안 죽은 거요.”“무... 무슨 소리야?” 이불을 덮어주던 장소월의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강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려던 순간, 돌연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언제 알아차린 거야? 눈썰미 꽤 쓸만하네.”정... 정말 그 사람이었다!장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병상에 누워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저항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강용은 재빨리 그들을 떼어놓았다. 전연우가 일어나려고 하자 강용은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접근하려고 정말 애썼네요.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 누구예요?”강용의 손은 전연우의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웠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연우 씨, 내 손에 잡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장소월은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전연우였다니.그를 본 순간 도망쳤어야 했지만, 그녀의 발은 납덩이라도 매달린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네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라고 했었잖아.”“소월아, 넌 내 아내야.”그 애절한 말에 장소월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아... 아니에요. 당신이 전연우일 리 없어요...”장소월은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악마와 마주치기라도 한 듯, 강력한 충격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통증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급기야 그녀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소월아...”강용이 그녀를 재빨리 붙잡았다.전연우는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
강지훈이 명령했다.“말해.”부관은 손에 든 정보를 강지훈에게 건넸다. “최근 근처 도시에 세 명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현재 저희가 일차적으로 걸러낸 상태이고, 곧 시스템으로 소현아 씨의 사진을 인식할 겁니다. 30분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강지훈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지금 호텔로 간다.”“알겠습니다, 주인님.”거꾸로 매달려 있던 흑인 남자는 그야말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곳은 사막과 가까운지라 지면에서 뜨거운 열기까지 올라오고 있었다.“가지 마세요! 형님!”“저 혼자 여기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아빠!”옆에 있던 규영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 사람 풀어주는 게 어떠십니까.”“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 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제가 옛날 어르신께 듣기로는...” 그 순간 규영은 자기도 모르게 실언했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어르신의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뭐라고? 계속해!”규영은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집안에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피를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 속에 있는 아기에게 재앙이 닥친다고요.”강지훈은 그 말을 듣고 황당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미신은 대체 어디에서 주워들은 거야? 북경 감옥에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럼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지 못한다는 거야?”“주인님,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모르니 믿는 게 좋습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아 아가씨 배 속에 있는 작은 주인님을 위해서라도요.”“주인님께서 좋은 일을 하시면 자연히 작은 주인님에게 복이 쌓일 겁니다. 또한 현아 아가씨께서 순산도 하실 수 있을 거고요.”강지훈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예전에는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옷도 입고 있었어. 그냥 너무 추워서 그랬어. 강용 몸은 뜨겁고 따뜻하더라고.”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횡설수설 변명하는 소현아의 모습이 귀여워 장소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 나는 단지 강용의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 강지훈이라는 사람은 아주 나쁜 놈이거든. 혹시 그 사람이 강용에 대해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야 해. 강용과 모르는 사이인 척, 전혀 개의치 않는 척해야 해. 알았지?”“그럼 소월이랑도 모르는 사이라고 해야 해?”장소월은 소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방법을 알려줄게. 나중에 돌아가서 강지훈의 입에서 남자 이름이 나오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야 해. 여자는 괜찮아.”“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널 괴롭히면 울면서 그 사람이 너를 때렸다고, 욕했다고 말해야 해. 강지훈한테 전부 고자질해.”소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해? 꼭 울어야 해?”장소월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현아야, 넌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중에 나한테도 딸이 생기면 너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그녀에게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다.사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감옥에 가두기 십상이니까.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녀처럼 되어버리고 만다.소현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소현아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북경 감옥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장소월은 강지훈이 소현아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사랑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이다.왜 하필 강지훈이란 말인가!장소월은 잠들어 있는 소현아를 보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었다.강지훈 같은 사람은 무해하고 천진난만한 소현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도 꺼려질
수술실 문밖에 돌아와 보니, 강용은 여전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소월은 그에게 음식을 챙겨주었다.“수고했어. 먼저 가서 쉬어. 나랑 현아가 근처에 방 두 개 잡아놨어. 현아는 당분간 나랑 같이 잘 거고, 이건 네 방 카드야. 현아랑 같이 먼저 가 있어.”“됐어, 너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잖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나중에 그 사람이 나오면 내가 도와야할 일이 있을 거야. 여자인 너 혼자서는 불편해.”장소월은 화장실에서 꾸물거리며 나오는 소현아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간식 두 봉지도 들려 있었다. “그래... 알았어. 나는 옷이라도 좀 사러 가야겠다.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옷을 많이 못 챙겨왔거든.”“그래, 갔다 와.” 강용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모두 비웠다.장소월이 물었다. “옷 말고 또 필요한 거 있어?”“아무거나, 네 맘대로 해.”강용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돈 좀 있어. 내 걸로 결제해.”“됐어. 이 돈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너는 남자니까, 나중에 뭐라도 하려면 돈이 좀 있어야지”무거워진 장소월의 말투를 눈치챈 강용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쳇, 네 그림 한 점이 몇천만 원이나 된다고 지금 날 비웃는 거지? 어휴. 아가씨, 절 키워주시는 건 어때요?“계속 아가씨의 개가 될게요.”장소월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됐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개는 무슨.”장소월은 소현아와 함께 쇼핑몰에 가서 옷을 몇 벌 구매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신분증을 등록하려고 프런트에 선 순간, 장소월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엄습했다. 하여 새로운 신분증을 꺼내 등록 정보로 사용했다.“미카엘 씨, 여기 객실 카드입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감사합니다.”원래는 저렴한 호텔에 묵을 생각이었지만, 소현아가 불편해할까 봐 걱정되어 이곳으로 결정했다. 10층에 위치한 방에 들어가 커튼을 열어보니 아름다운 강 풍경이 눈
아이...지금 세 사람은 확실히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다.전 부인이 말했다. “절대 월이 돌려주지 않을 테니까 내 아이 뺏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강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우리 셋 다 당신 아이 봐줄 시간 없어요. 당신이 준다고 해도 우리가 싫어요.”“참, 그리고 전 남편 치료비도 잊지 말고 내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때 부부였는데 너무 매정하게 굴지는 말아야죠.”그녀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던졌다. “그동안 아이를 키워준 양육비와 예전 나한테 줬던 돈 전부 갚았어요. 이제 각자 갈 길 가고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요.”별이는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장소월은 차마 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필경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아이의 엄마다. 엄마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막을 권리가 없다.그들이 위풍당당하게 떠난 후, 강용은 돈을 세어보았다. 몇백 달러 정도였다. “제기랄, 몇만 달러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전 남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안 주다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건가. 이 돈으로는 수술도 못 하겠네.”장소월이 말했다. “됐어, 강용. 사람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거야. 일단 이준 씨 어떻게 됐는지부터 알아보자.”“그래.”소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월아, 아기가 배고픈 것 같아. 들어봐... 얘네 둘이 소리치고 있어.”강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배고픈 거면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밥 먹을 시간이긴 하네. 넌 소현아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가서 밥 먹어. 이준 씨한테는 내가 가볼게.”며칠 동안 강용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빨리 먹고 포장해서 갖다 줄게.”“그래.”식사를 마친 뒤 장소월은 소현아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산부인과로 향했다. 30분 후, 결과가 나왔고 예상외로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의사는 검사
바로 맞은편 길에서 또 한 무리의 차량이 웅장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규영이 돌연 즉시 차를 세우라며 소리쳤다. “...저... 현아 아가씨 목소리 들은 것 같아요.”강지훈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다가 그 말에 번쩍 눈을 떴다. “확실해?”규영은 확신할 수는 없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목소리가 정말 현아 아가씨 같았어요. 소월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요. 현아 아가씨 친구분이 장소월 씨잖아요. 그냥 우연인 걸까요?”강지훈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까지 바닥난 듯 말했다. “얼마나 남았지?”운전석에 묶여 있던 남자는 강지훈이 꽤 많은 힘을 들여서 찾아낸 인물이었다. 소현아의 행방을 쫓다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다. 바로 이 남자가 소현아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강지훈의 정보 조직이 오랫동안 소현아의 소식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강지훈은 항공편 정보를 토대로 소현아의 사진을 일일이 대조한 결과, 그녀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이곳 사막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전 폭동이 일어났고, 소현아는 무사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흑인 남자가 한 민박집 앞에 차를 세웠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예요.” 사투리가 가득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강지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이어 뒤따라오던 몇 대의 검은색 승용차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잠겨 있는 대문을 본 강지훈은 그대로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몇몇 사람들이 신속하게 위층으로 올라갔고, 강지훈도 천천히 소파 옆으로 걸어갔다. 규영과 미경은 주방으로 향했다.2분 후, 위층으로 올라갔던 흑인 남자가 보고했다. “위층에는 세 명이 살고 있고, 옷가지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물건들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떠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규영이 말했다.“주인님, 냉장고에 현아 아가씨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와 포도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흔적도 있습니다. 나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강지훈은 베개
장소월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드리웠다. “강용, 우리 가보는 게 어때? 아직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그 전 부인 쪽 사람들이 또 때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죽을지도 몰라.”“젠장, 그럴 수도 있겠네.” 강용이 곧장 뒤쫓아갔지만,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줄지어 정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던 여자가 한없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제가 힘을 너무 많이 주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죠?”그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잘했어.”“됐어, 그만 울어!” 전연우가 호통을 치자 옆에서 울고 있던 별이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도로록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을 삐죽 내밀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더니, 바로 꺄르륵 웃고 있었다.“어머,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네.”“다른 사람들은?”리샬이 대답했다.“안심하세요, 보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괜찮습니다. 그냥 연기였으니까요. 제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다친 사람은 보스뿐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총까지 맞다니요.”전연우는 팔과 어깨에 일부러 총상을 입었다. 더 실감 나게 연기하기 위해 진통제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인이었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심하게 매질까지 당했으니... 그의 검은색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그 강인한 의지력은 경외심마저 들게 했다.“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보스. 사모님이 쫓아오고 있습니다.”장소월과 강용이 걱정되어 달려왔을 때, 손이준은 바닥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장소월이 소리쳤다.“강용, 빨리 저 사람들 말려.”“오빠, 괜찮아요?” 장소월이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어 손을
“아주 흥미진진했어. 두 부부가 오붓하게 얘기하는 거 방해하지 않도록 안 가는 게 좋을 거야.”장소월은 평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사람... 와이프가 돌아왔다고?”강용은 웃으며 말했다. “응. 어젯밤 네가 쓰러졌을 때, 그 사람 보러 병실에 갔다가 부부가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 양육권 때문인 것 같더라고.”“지금도 계속 싸우고 있어서 가면 괜히 불똥이 튈지도 몰라.”그녀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부부가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었다가 전 부인이 오해라도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그래. 남의 일에 우리가 간섭할 수는 없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줘.”“응.”지금은 이게 최선이다.이곳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집에 돌아온 장소월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이 옷 몇 벌과 화구 상자가 전부였다.“내일 차 오는 거 확실하지?”강용이 대답했다. “응, 현지 사람 중 한 명에게 말해놨어. 돈만 주면 내일 아침에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줄 거야.”“떠나기 전에 현아를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현아와 배 속의 아이 모두 위험해질 수 있잖아.”강용은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딴생각을 하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소현아도 마침 잠에서 깨어났다.장소월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내려갔다. 그때 문밖 길 건너편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에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별이를 안은 채 여행 가방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입에서는 험한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 뒤에 있던 경호원 몇 명은 손이준을 밀쳐 넘어뜨렸다.그녀는 또다시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장소월은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남의 집안일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여자가 바로 손이준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사람인 걸까?확실히 좀
시간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1분 1초가 그녀에겐 더없는 고통이었다. 왜 멀쩡하던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날이 거뭇하게 어두워졌을 때, 몽롱한 정신의 장소월의 귀에 강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제 살았다...”장소월이 소리쳤다.“나 여기 있어.”휴대폰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강용은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부축해 나왔다.“이준 오빠부터 먼저 살펴봐. 많이 다쳤어.”강용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넌?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장소월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오빠부터 병원에 데려가.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몰라.”강용이 손이준을 안에서 끌어냈을 때 그의 몸은 그야말로 온통 피투성이였다. “괜찮아. 과다 출혈일 뿐이야. 밖에 의료진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강용은 그를 업고 나갔다. 장소월의 눈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상자들이 들어왔다. 바닥은 금방 청소를 마쳤는지 흥건히 젖어 있었고, 사방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장소월은 순간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소월아.”장소월이 다시 눈을 뜬 곳은 한 허름한 병실이었다. 그녀의 손등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옆에는 강용이 지키고 있었다.“깼어? 괜찮아?”장소월은 의식을 되찾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용은 그녀가 너무 무서웠다는 것을 알고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안전해.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까지 쉬어 있었다. “손이준 씨는 괜찮아?”강용이 대답했다. “와이프가 데리러 왔으니까 괜찮을 거야.”장소월이 물었다. “죽은 사람 많아?”강용은 그녀가 놀랄까 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내가 차 불러뒀어. 집에 가면 괜찮아질 거야.”현재 해외 시국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