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정확히 한 시간 반 뒤에 별장의 대문이 열렸다.이 별장의 비밀번호는 바로 그녀의 생일이었다.이거 봐, 기억하고 있잖아.김남주를 바라보는 강영수의 온몸은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단지 그녀가 무사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얼굴과 팔에 난 상처,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정신병원 환자복까지. 그녀의 몰골을 보자마자 강영수의 화는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그녀의 좋지 않은 안색을 주시하며 물었다.“누가 널 감옥에서 꺼내준 거야?”“이딴 재미 없는 장난에 놀아나 줄 생각 없어."그 말을 끝으로 강영수가 김남주에게서 몸을 돌려 별장을 떠나려고 할 때 김남주의 목소리가 정신없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내가 어떻게 나왔는데. 다 너 때문이잖아! 넌 절대 몰라. 너의 말 한마디에 감옥에 갇혀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었는지 아느냐고! 그 사람들이 날 바닥에 눕히고 그 날카로운 칼로 내 팔을 난도질해대면서, 나한테 더러운 여자라고 욕해댄 걸 알긴 하냐고, 이 나쁜 놈아!”“내가 한마디 좀 했다고, 우리가 한때 연인 사이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대했는지 알기나 해!”“순식간에 미친 사람 취급하더니, 모두가 날 밟기 시작했어!”“나 죽을 뻔했어. 마지막 숨넘어가기 직전에 누군가가 날 발견하고 바로 다시 정신병원에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내 시체였을 거야!”“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영수야, 잊었어? 예전엔…. 넌 죽어도 나 다치는 꼴은 못 봤잖아. 내가 어디서 괴롭힘당하고 있으면 항상 등장해서 막아줬잖아.”김남주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의 그녀는 정상이건 정신병이건 별 차이가 없는 상태였다.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의 마음은 비뚤어지고 깨지기 시작했다.강영수는 김남주에 대해 잘 몰랐다. 그녀가 겪은 모든 것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그녀에게 무어라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정신병원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주사 맞고, 약 먹고…. 나는
시험이 끝나고 장소월은 우산을 든 채 교문 앞에 서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그녀의 긴 양말을 적셨다. 강영수는 학교에서 그녀를 픽업할 때 늦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그녀는 교문 앞에서 10분 가까이 강영수가 오기를 기다리며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휴대전화가 울리더니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는 경고문구가 보였다.장소월은 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연속적으로 메시지를 여러 개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오늘 약혼 사진 찍는 날인데, 평소 강영수의 성격대로라면 절대 늦을 리가 없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가?장소월은 강영수의 비서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의 전화번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관두었다.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것을 보던 장소월은 근처 편의점을 찾아 급히 몸을 피했다.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가방에서 숙제를 꺼내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시간은 한 시간, 한 시간 흘러갔고 그러다가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학생, 8시 다 됐어요. 가게 문 닫을 시간이에요.”“아, 죄송해요. 시간을 깜빡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장소월은 급히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제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풀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창밖의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길가에는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나오는 서울 제2중 학교 학생들 말고는 더는 사람도 없었다.사실 장소월이 밖에서 강영수를 기다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1시간 반 정도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그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장소월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실망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 실망의 감정도 조금을 있을 것이다.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그녀에겐 자주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지금 이 시각에 택시라도 잡아타려면 시내 광장 중심까지 어느 정도 걸어가야 했다.길가에서 갑자기 주황색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온몸이 다 빗물에 젖은 채 그녀의 발 앞까지 다가와 몸을 비비며 야옹
장소월은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갔다.장소월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 따위 없었다. 시험이 10일도 안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번 시험만은 무조건 최상의 컨디션으로 맞이해야 했다.이미 중앙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했다고 해도 말이다…이번 시험 성적도 심각할 정도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밤 11시 반, 그녀가 자기 전에 간단히 단어 암기를 하다가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손에서 책을 내려놓고 불을 끄려던 순간, 침대 밑에 있던 고양이가 침대 위로 튀어 올라왔다. 그러더니 장소월의 머리맡에 엎드리더니 앞발로 꾹꾹이를 하고 있었다.장소월은 침대 맡에 무드등만 켜놓은 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만큼 컸으면서 아직도 꾹꾹이를 하네.”“잘 자, 오렌지."장소월은 눈을 감고 손을 모은 채 얼굴 밑으로 갖다 대더니 곧장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강영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2시였다.“도련님.”하인은 강영수 입가의 상처를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다 살 만큼 산 사람들로서 그 입술의 상처가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오늘 강영수가 집 밖으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입술에 남사스러운 상처를 달고 나타나다니, 도대체 무슨 이유로 생긴 상처인지 얘기를 들어보지 않아도 뻔했다.강영수는 온몸이 피로에 절어 우울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풍겼다.“소월이는?”하인이 대답했다.“소월 아가씨는 이미 쉬고 계십니다.”강영수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그 아이가 따로 물어본 것은 없었나요?”하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저… 소월 아가씨께선 9시가 거의 될 때쯤에야 집으로 돌아오셨어요. 저녁 드시자마자 바로 올라가서 쉬셨고요. 많이 지치신 모양이에요.”“큰 도련님은 식사하셨어요? 밥 아직 안 식었는데."“됐습니다.”강영수는 별다른 표정 없이 바로 계단으로 올라가며 덧붙였다.“만약 소월이가 저에 관해 물어본다면, 제가
장소월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컵에 들어있던 물이 찼다. 그의 말은 장소월로 하여금 잠을 깨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거실에 있던 시계 초침 소리만 틱탁틱탁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확히 5초의 시간이 흘렀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이 강영수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한참이나 깨물던 장소월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놀란 기색은 전혀 없었다.“알겠어, 그럼 그동안 나도 나가 있어야 할까?”장소월은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했고 냉정했다. 강영수 또한 정소월의 말 속에서 기분 나쁜 기색이나 삐딱한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사실 그녀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강영수의 눈빛에는 예전과 같은 따스함이 아예 사라졌었기 때문이다. 지금 강영수의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느낌도 자주 받았다.갑자기 180도로 달라져 버린 그의 태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최근 며칠 동안,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극히 드물었다. 돌아온다고 해도 새벽 시간대에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장소월도 정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경험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한때 그토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 맹세해놓고 어떻게 그걸 바로 쉽게 잊을 수가 있을까.심지어 김남주도 딱히 잘못한 게 없었다.강영수가 그림자처럼 검은 눈동자로 장소월을 응시했지만,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을 따로 해주지는 않았다.장소월은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쓸데없는 감정 소모 안 해도 돼. 네 의견 존중하고 따를게. 그럼 난 먼저 들어가서 쉴게. 너도 일찍 자.”위층으로 돌아온 장소월은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침대 맡에 걸터앉은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컵에 담겨있던 물을 한꺼번에 마셔버렸다.장소월은 화장대 쪽을 쳐다보더니 어둠 속에서 화장대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
강영수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잠시 약혼을 취소한 것뿐이에요. 초대장 날짜 정도는 쉽게 수정할 수 있잖아요.”그리고 그는 시선을 돌려 장소월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속내를 캐내려는 듯이.박순옥이 강영수에게 크게 호통쳤다.“당장 그 입 닥치지 못해? 내가 너한테 물었니? 잊지 마, 이 혼사는 네가 먼저 원한 거다. 지금 서울시의 모두가 알고 있는 이슈야. 지금 와서 취소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취소해버리면 밖에서 뭐라고 수군대겠니? 너, 소월이 기분은 생각해 봤니?”박순옥은 강영수에게 이런 말투로 얘기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장소월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목구멍에 목화솜 한 뭉치를 쑤셔 넣은 기분이었다. 여러 번의 심사숙고 끝에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제 생각엔 영수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약혼 일정을 잠시 취소한 영수만의 생각이 있을 거예요. 어찌 됐든 저희의 평생이 걸린 일이니까요."“저도 이 의견에 찬성해요. 아버지랑은 제가 잘 얘기해볼게요. 아버지도 별다른 의견 없으실 거예요.”“제가 지금 시험을 보러 가야 해서요. 다른 일에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서요. 할머님, 혹시 무슨 일 생기시면 저 시험 끝나고 나서 말씀해주실래요?”박순옥은 더는 얘기하지 않았다. 아마 소월이 억지로 꾸며낸 괜찮은 듯한 표정을 알아챘기 때문이겠지. 말은 저렇게 해도 속은 분명 말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장소월을 보는 박순옥의 눈빛에는 안타까움만이 가득했다.아침을 먹고 난 후, 박순옥은 강영수더러 장소월을 학교에까지 데려다주라고 부탁했다.그는 굳이 거절의 답변을 내놓는 대신 가볍게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장소월은 조수석에 앉아 안전띠를 맸다. 강영수가 천천히 악셀을 밟자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빨간 불이 되자 차가 멈춰 섰다.강영수가 창문을 내리더니 담뱃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를 들고 있는 쪽 팔을 창가에 걸친 채로 입을 열었다.“약혼을 잠시 취소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직 좀
뜨거운 분노의 불길이 마음속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강영수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악셀을 힘껏 밟아 학교 문 앞으로 도착했다.장소월은 멀쩡하던 강영수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얼음장같이 차가웠다.“내려!”장소월은 안전띠를 풀고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강영수는 말없이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장소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질투가 가득 차 있었다.장소월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보고도 못 본 척을 해야 하는 걸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그녀와 함께 있어야 할까.강영수가 장소월을 사랑하는 한, 그녀의 속임수 하나하나에 다 속아 넘어가 주며 모든 것을 견뎌왔다.분노에 찬 강영수가 차창에 손을 힘껏 내리쳤다. 힘을 제어하지 못한 관계로 손가락 관절 쪽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마이바흐 자동차가 학교 문 앞에 장장 10분 동안 멈춰있었다. 강영수는 장소월이 주고 간 반지를 손에 꼭 쥐고 복잡한 마음으로 마음속에 폭력성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영수는 진봉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진봉이 더듬더듬 말을 전했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의뢰하신 거, 전부 알아봤습니다.”강영수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드리워졌다.“얘기 해봐.”“소월… 아가씨께서… 전연우와 긴밀한 왕래가 있었던 것 같긴 합니다. 전연우 구매명세를 확인해 봤더니... 적지 않은 성인용 란제리 구매 명세가 있었습니다.”이 사실은 진봉에게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모두…. 소월 아가씨의 속옷 치수에 맞춰서 구매한 것들이고요. 소월 아가씨께서 실종되셨을 때 대부분 시간을 전연우와 함께 보낸 것이 길거리의 카메라를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둘이 함께 소월 아가씨의 원룸으로 들어간 것도 확인이 되었고요.”“그 외에도…. 해커를 통해 전연우의 이메일을 해킹해 접속해 보았는데요. 소월 아가
하지만 심층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는 것이 밝혀졌다.진봉 역시 현재의 장소월과 과거의 장소월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하지만 그녀 역시... 자신의 대표를 배신하고 전연우와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그 목적은 바로 강가네가 남천에게 일정한 이익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약혼을 코앞에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모든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장소월과 전연우가 사적으로 연락해 음모를 꾸몄던 증거들이 그들의 손에 넘어갈 수가 있는지, 어떻게 모든 증거가 다 장소월을 천하의 나쁜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는지 진봉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전연우는 실제로 장해진이 직접 처음부터 차근차근 키워낸 후계자로서 그의 속내는 이 정도로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할 리가 없었다.이 정도로 중요한 사진들을 이메일에 저장을 해두었으면서 비밀번호조차 설정해놓지 않은, 이런 지나치게 단순한 부분들이 어딘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더 수상한 것은 이메일에 이런 내용의 사진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문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장가네는 서울시의 권력 있는 명문세가로서 20년 동안 비밀리에 그들을 조사해오던 경찰들조차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진봉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중요한 사진들이 이렇게 단순하게 자신들에게 발견되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날 저녁, 강영수는 술을 진탕 퍼마시고 만취 상태로 음주운전까지 해 집으로 돌아왔다.‘쿵’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강영수가 문에 부딪혔다.저녁 식사 중이던 장소월은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에 심장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소리를 듣고 문 앞까지 간 하인이 문을 보자마자 놀라 새된 소리를 내었다.“세상에! 문이!”장소월은 식사를 하다 말고 급히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문 앞으로
강력한 힘이 그녀를 밀어냈다. 힘없이 바닥으로 밀려 넘어진 장소월은 바닥에 있던 유리 파편에 손바닥을 베였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손바닥에서 선혈의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퍼진 피가 옷깃을 물들였다.강영수의 눈에서 불쾌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는 장소월에게 한발 앞으로 성큼 다가갔지만, 그것도 잠시 더 이상의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고 그 감정도 바로 사라졌다.그는 바로 등을 돌려 그녀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넓은 창밖을 바라보며 눈을 지그시 감고 백색소음들로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려 노력하고 있었다.“일단 나가 있어.”그는 단지 장소월의 배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 그녀를 다치게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강영수는 장소월을 너무 사랑했고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강영수를 바보 천치로 여기며 제대로 속이기 시작했다.그녀는 전연우와 침대에서 함께 뒹굴고, 그렇고 그런 짓을 하며 강영수의 무지에 대해 비웃고 있진 않았을까?장소월은 고통을 참으며 손바닥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내 상처 난 손을 몸 옆으로 슬쩍 감추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알겠어, 진정 될 때까지 기다릴게.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강영수는 바로 등을 돌려 그녀가 머물다 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했다. 굳게 닫힌 문을 보던 그의 눈빛에는 깊은 고통이 묻어나왔다.위층으로 올라온 하인이 다친 장소월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뛰어왔다.소월 아가씨께서 다치셨는데 큰 도련님께서 신경도 안 쓰신다니.예전부터 큰 도련님이 제일 애지중지 하던 사람이 바로 소월 아가씨인데. 예전엔 손 다칠까 봐 주방 식칼조차 못 잡게 하셨는데.하인이 구급상자를 들고 와 장소월에게 간단한 처치를 해주었다.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장소월이 하인에게 얘기했다.“먼저 가세요. 조금 있다가 이 식사 영수 방까지 가져다주세요. 약 챙기라는 말도 잊지 마시고요.”하인이 대답했다.“네,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
“의사 선생님... 선생님...” 송시아는 가득 흥분한 채 의사를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달려와 전연우를 진찰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환자분 상처는 아주 잘 아물고 있습니다. 아까 정말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반응이 있었다면, 신경이 스스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곧, 혹은 예정보다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송시아는 환희가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좋은 소식이었다. 송시아는 전연우의 침대에 앉아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조금 묻히고는 그의 옷을 걷고 이미 아문 상처에 발랐다. “연우 씨, 이 팔찌 장소월이 준 거 맞지? 서철용이 당신에게 한 말 전부 다 들은 거야?” “당신도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나서 장소월을 보고 싶겠지?” “당신들은 날 너무 얕잡아 봤어.” “당신의 흉터... 없어지지 않도록 몸에 남겨둬야겠어. 이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평생 잊지 못하게 말이야.” 송시아가 그에게 쓰는 연고는 최고급이라 시중에서 개당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 흉터 제거뿐 아니라 상처 회복도 빠르게 해준다. 그녀는 휴지를 꺼내 연고를 닦아냈다. 그때 송시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송 대표님, 그 팔찌는 비슷한 디자인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닷가 쪽에서 파는 팔찌는 거의 다 흡사한 유형이거든요. 완전히 똑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마지막 3초를 남기고 연결되었다. 송시아가 말했다. “전연우는 곧 깨어날 거예요. 이직 준비는 다 됐어요? 이랑 씨 마음만 굳건하다면, 내가 꼭 민아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게 할게요. 마음이 변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신씨 집안은 나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니까.” 신이랑이 물었다. “성세 그룹 주식은 왜 팔았어요? 뭘 하려는 거죠?” 송시아는 한쪽 팔을 가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전 나중에 갈 거예요. 거긴 아주 안전한 곳이에요.” 도우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사모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군병원 아래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운전기사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배은란은 딸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민용 씨, 나 혼자 가는 거 무서워. 같이 가자, 응?” 서철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끝나면 금방 너한테 갈게. 네가 가는 곳은 내 스승님과 사모님의 댁이야. 그분들은 평생을 의학에 헌신하셨고, 자녀가 없어서 날 친아들처럼 여기셨어. 너에게도 잘해주실 테니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그분들은 분명 너 좋아하실 거야.” 배은란은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거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차에 올라탔다. “그럼 꼭 빨리 나한테 와야 해.” “그래.” 점차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서철용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배은란, 이건 내가 너한테 진 빚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땐 진짜 서민용이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게. 완전한... 서민용을 너에게 돌려줄게!’ 그날 밤, 서민용은 분명히 죽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서철용이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 냈다. 다만, 그의 상황은 아직도 좋지 않다. 여전히 스승님의 병원에 누워 연명 치료만 받고 있을 뿐이다. 전연우 외에, 지금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바로 서민용이다...배은란이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서철용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배은란은 정신과 약을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기억도 천천히 회복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반산 별장. 송시아는 바로 그 소식을 들었다. “쯧,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서 형수를 얻
전연우가 어떻게 성세 그룹 주식 매각을 허락할 수 있지? 혹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건가?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 파도가 넘실거리며 해안에 부딪히고 있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해초와 물고기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머리를 질근 묶고는 조개껍데기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손에 들고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장소월 앞으로 걸어와 유창한 러시아어를 말했다. 이곳은 외딴곳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예쁜 언니, 이 목걸이 선물로 줄게요.” 전설에 따르면, 예전 이곳은 황량한 사막이었는데, 신의 딸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아 이곳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물을 찾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바다가 되어 이 해역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에선 조개껍데기와 소라를 신의 은총을 받은 물건이라고 믿고 있다. 이걸로 만든 장신구를 선물하면 상대방이 신의 축복과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개껍데기 목걸이를 주는 것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외에 남녀가 서로에게 프러포즈 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휴대폰에 서철용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난번에 보낸 팔찌, 전연우가 아주 좋아하네요. 수고했어요.] 장소월은 그의 상황을 묻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 메시지를 지웠다 썼다 반복했다. 시간이 꽤 오래 흘렀는데도 전연우에 대한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유일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유튜브 계정에서 올린 결혼식 다음 날 그녀와 전연우가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영상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소식도 없었다. 이곳에 머무른 이후로 그녀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했다. 산장 신혼 방에서 칼날을 전연우의 가슴에 꽂아 넣었을 때, 두 사람 모두 시뻘건 피를 온몸에 뒤집어썼었다. 그날 밤 손바닥에 스며든 붉은 피는 아무리 씻어도 도저히 지워낼 수가 없었다. 장소월은 한참을 갈등하다가 휴대폰을 들어 한마디 물었다. [그 사람은 괜찮나요?] 어린 소녀가 말했다. “언니, 나랑 같이 놀러
기성은이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했다면, 전연우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잔혹한 그의 출신이 늘 발목을 잡았다. 모든 사람의 출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성은도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만의 아픈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의 과거는 그저 과거라는 단어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소민아가 정말로 기성은과 함께하려 한다면, 그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그들 손으로 직접 극복해야 할 것이다. 소민아는 이 난관을 스스로 떨쳐내고 성장해야 한다. 그녀가 지금처럼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모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면,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소민아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전혀 몰랐다. 송시아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대표 사무실. 소민아는 결국 송시아와 직접 대면하여 분명히 따져 묻기로 했다. 송시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회사 경영이 좀 힘들어서 누군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뭐 문제 있어?”소민아가 말했다. “전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예요. 지금 이 행동은 회사를 망치는 거예요.”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팔려고 내놓은 주식은 내가 갖고 있던 거야. 문제 있어?” “혹시 다른 일 없으면, 언니랑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당신을 보면, 입맛이 뚝 떨어져요.” 소민아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섰다. 송시아가 한 말은 단 한 글자도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대체 왜 주식을 팔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중, 마케팅팀 직원 몇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민아는 구석에 서 있었던지라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저 다음 주부터 연차 시작이에요. 외국에 다녀올 생각인데, 지유 씨는요? 연차 다 썼어요?” “아직이요.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너무 짜증 나요!” 그 순간 소민아의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은 하지 말고 내가 지시한 일이나 해요.”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대표님.”송시아는 회사 대부분의 주식을 던져버렸다. 성세 그룹이 설립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호시탐탐 주식이 시장에 풀리기를 노렸다. 하지만 주식은 줄곧 전연우와 송시아의 수중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었다. 다들 그들의 주식은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절대 한 푼도 빼내 오기 힘들다며 혀를 내둘렀다.지금 팔려나가는 10%만으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주식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이다. 소민아도 이 소식을 듣고 서철용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성세 그룹이 주식을 처분한다는 소식은 30분도 안 되어 이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서철용은 발코니에 있는 등나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코웃음을 쳤다. “전연우, 송시아가 정말 네 성세 그룹을 완전히 거덜 내려고 하고 있어.”“너와 송시아가 갖고 있는 주식 지분율은 똑같고, 인씨 가문이 3% 지분을 갖고 있어. 만약 인씨 가문이 그 3%를 양도한다면, 네 성세 그룹 대표 자리는 언제든지 빼앗길 수도 있겠어.” “송시아가 하는 꼴을 보니 너를 완전히 새장 속에 가둘 모양이야.” 서철용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연우, 다 자업자득이야. 배은란은 도우미의 부축을 받으며 서철용 앞으로 걸어와 휴대폰을 건넸다. “민용 씨, 전화 왔어.” 서철용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 서두르지 않고 일어서 배은란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익숙한 전화번호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았다. “아직도 안 끝났어요?”소민아는 미안한 듯 말했다. “서 선생님,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서 선생님이 제 전화번호를 차단해서 와이프분에게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서 연락드린 거예요. 뉴스 보셨죠? 송시아가 성세 그룹 주식을 매도하고 있어요. 서 선생님, 송시아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서철용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앞에 있는 여자를 보고는 애써 감정을
송시아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목적을 달성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일어나 경호원에게 말했다.“퇴원 준비해요.”경호원이 말했다.“송 대표님, 간호사가 대표님은 상처가 아물기 전엔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송시아는 아랫배를 만지며 빙그레 웃었다.“이 고비만 넘기면 나도 한동안 푹 쉬어야겠어요.”“알겠습니다.”저녁 12시 커다란 승합차 안, 송시아는 누워있는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어떤 곳에 도착했다. 핸드폰 신호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천 명은 족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이 커다랗고, 쥐 죽은 듯 고요한 그곳 별장 안은 의료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어 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개인 주치의 또한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주위엔 높디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전연우를 가두기 위해 만든 새장 같았다.안방은 수영장 하나도 담을 수 있을 만큼 드넓은 면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전연우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의사는 그의 손등에 다시 링거 바늘을 꽂고 있었다.하루 종일 바삐 돌아친 탓에 송시아도 많이 피곤했던지라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옷을 벗고는 반신욕을 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우유를 마시며 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얼마 후,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다가왔다.송시아는 매끄러운 긴 다리를 뻗어 눈앞의 남자를 도발했다.“여기 찾지 못할 줄 알았어요.”“나한테 누군가를 찾는 건 아주 간단한 거라고 했잖아.”송시아가 싱긋 웃어 보였다.“내가 알아봐달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건 알려줄 수 없어. 너희들 사이 일엔 끼어들지 않을 거야. 난 그냥 네 뱃속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 내 대를 잇게만 하면 돼.”송시아는 씁쓸한 얼굴로 컵 안
송시아는 전연우의 손을 잡고 그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팔찌에 손을 댄 순간, 행동을 멈추고 느긋하게 그의 옆에 앉아 핸드폰으로 팔찌 사진을 찍고는 저장되지 않은 누군가의 번호에 전송했다.[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봐 줘요.]이어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전연우 씨, 지금 내가 하는 말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연우 씨가 깨어났을 땐 성세 그룹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전생에서 당신은 날 망가뜨렸어요. 이번엔 내가 당신의 모든 걸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 거예요. 그래야 내가 더 쉽게 당신을 통제할 수 있잖아요.”“당신은 권력을 너무 욕심낸 탓에 제일 중요한 걸 잃은 거예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간 뒤 기성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서 선생님이 대표님은 곧 깨어나실 거라고 했어요. 기성은 씨도 이제 돌아오는 거 맞죠?]쨍그랑.컵이 깨지는 소리에 소민아가 고개를 돌렸다. 신이랑이 일어나 유리 조각을 주우려하자 그녀는 급히 다가갔다.“움직이지 말아요. 다쳐요.”하지만 신이랑의 손가락은 이미 유리 조각에 찢어져 있었다. 소민아는 휴지로 그의 손가락을 감쌌다.“왜 그래요? 집에 돌아온 뒤로 쭉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어요.”신이랑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른 한 손은 소민아에게 잡혀 있었다.“난 괜찮아요. 요즘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래요.”소민아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신이랑이 결혼 때문에 복잡해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솔직히 이게 더 좋은 상황 아니에요? 이랑 씨는 내 상사고, 우린 친구잖아요. 이랑 씨... 난 무슨 이유로든 지금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지 않아요.”신이랑은 자신의 손을 빼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바람 좀 쐬러 나갈게요.”급히 나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언가 회피하는 것 같았다.늘 차분했던 신이랑은 평소와는 달리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발코니에서 주먹을 꽉 말아쥐고 눈을 감았다. 머리가 으스러지는 듯한 두통이 또다시 밀려오기
“됐어. 너 같은 냉혈한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서철용은 침대 옆에 앉아 호주머니에서 조개껍질 팔찌를 꺼냈다.“너 지금 모든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거 알아.”“전연우, 기억해. 깨어나면 소월 씨한테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예전 네가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해.”“소월 씨는 줄곧 강영수의 죽음이 너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벽이 생긴 거야. 하지만... 이건 기억해야 해, 소월 씨는 너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는 거. 소월 씨에겐 감정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 지금 강영수는 죽지 않고 잘 살아 있어.”“네가 계속 고집부리면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너한텐 영원히 소월 씨를 잃어야 하는 처벌이 내려질 거야.”“소월 씨가 성까지 바꾸고 강영수와 결혼하면 넌 어떻게 할까!”서철용은 전연우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반지를 끼고 있는 무명지가 살짝 움직였다. 서철용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이제야 조급해졌어? 지금까지 뭐 하다 이제야 온 거야!”소민아가 일정을 말하기 시작한 지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보이자 소민아는 바로 일어섰다.“서 선생님, 대표님은 어떻게 됐어요?”“뭐 어떻겠어요. 당연히 식물인간 상태죠. 하지만 이번 달 안엔 깨어날 거예요.”소민아는 활짝 웃어 보였다.“그래요? 정말 잘됐네요.”서철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신이랑을 향해 말했다.“두 사람 언제 결혼해요? 나한테도 청첩장 보내는 거 잊지 말아요.”그 말에 신이랑과 소민아의 사이는 더 어색해졌다.소민아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서 선생님, 오해예요.”서철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내가 찾아가지 않았는데 제 발로 왔네요?”송시아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민아와 이랑 씨 결혼 청첩장은 내가 직접 보내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서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