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백윤서가 죽음으로 몰아붙이든 아니면 다른 행동을 하든 전연우가 결정한 일은 바뀌지 않았다.연우는 그녀를 안고 차를 운전하여 엘리트 개인병원에 데려다주었다.응급실.서철용은 여유 있게 윤서의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얼핏 보기엔 가녀린 아가씨께서 널 위해 목숨마저 버리네. 못 이기는 척 이분 소원 이뤄드리는 게 어때?”“소월 씨는 미래 강한 그룹 안주인이야. 뭐, 이미 정해진 일이잖아. 네가 단시간에 강한 그룹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강영수 손에서 소월 씨 뺏지 못할 거야.”“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너 잊지 마! 지금 유전자 검사 결과에 따르면 너랑 소월 씨는 친 남매 사이야. 진짜 함께했다간 천벌 받을 거야.”“쯧쯧.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너처럼 속이 시커먼 놈을 좋아해 주는 여자도 있고.”철용은 웃으며 말했다.“진짜 희한한 일도 다 있네.”“할 말 다 했냐?”창문을 향해 서 있던 연우는 몸을 돌려 철용을 보았는데 그의 눈썹은 찡그려졌고 말투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철용은 침을 거둔 후 윤서의 상처를 붕대로 감았다.“그렇게 나 보지 마. 난 더 오래 살고 싶거든.”“또 해줄 말 있어. 황유나 얼굴 내가 수술해 준 거야. 어때 보여?”전연우: “... 너 또 무슨 수작 벌이려고?”철용은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렸다.“알잖아, 나 이 병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돈이 되는 프로젝트라면 뭐든 다 하거든. 그중에 의료 미용도 포함하고 있어.”“삼 년 전, 황유나가 출국하기 전에 성형하러 왔어. 그때 내가 마침 병원에 있어서 검진해 줬거든. 글쎄 걔가 내 책상에 있던 사진을 보더니 이대로 성형해달라지 뭐야. 그래서 수술 해줬는데 놀랍게도 회복이 잘 된 거야. 꽤 비슷했어.”“음... 근데 황유나 걔 얼굴은 좀 별로긴 한데 몸매는 우리 소월 씨랑 거의 똑같아.”“생각해 보면 정말 인연인 것 같아.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너 소월 씨한테 푹 빠진다고 했는데 넌 내 말 귓등으로 들었지. 마침 잘됐어. 소월 씨랑 닮은 황유
고요한 밤.창밖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두툼한 커튼은 바람에 휘날렸다.사월의 날씨는 너무 춥지 않았다. 바람이 창문을 통해 병실에 불어 들자 쓴 약 냄새가 공기 속에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백윤서는 깨어난 후, 연우를 마주하기 싫어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창문 밖 휘날리는 커튼을 보고 있었다.“오빤 이미 나 버렸잖아요. 그런데 지금 왜 병원에 온 거예요? 돌아가요. 난 오빠 보살핌 필요 없으니까.”연우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약을 들었다. 검은색 액체에선 쓴 향기가 퍼졌다.“알겠어.”그는 약을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본 후 말했다.“지금 열두 시 십이 분이야. 십 분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줄게. 진정됐을 때 다시 들어올게.”“오빠!”윤서가 절박하게 그를 부르자 연우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윤서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연우는 침대 옆에 앉아 윤서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따뜻할 때 마셔. 링거 다 맞으면 데려다줄게. 그리고 내일 학교 안 가도 돼. 이미 병가 신청했거든.”윤서는 그의 손을 꼭 잡고는 초췌한 얼굴로 간절히 빌었다.“오빠, 아까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면 안 돼요? 난 계속 오빠 여자친구고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네?”“오빠가 지금 날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좋아질 수 있을 거예요. 오빠가 소월이 같은 타입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고칠게요. 오빠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말이에요.”“그냥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 말아줘요. 제발요. 다른 건 다 할 수 있는데 이것만은 안 돼요.”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원래 자신을 한없이 낮추게 된다.어릴 때부터 윤서는 연우와 많은 일을 겪으면서 속으로 꼭 그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다짐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간절함 속에 감정의 억제도 담겨 있는 목소리.“윤서야, 네 인생엔 한가지 선택만 있는 게 아니야. 앞으로 삼 년간 대학을 다니면서
연우는 윤서에게 혈기를 보양하는 한약을 먹이고 삼십 분이나 달랜 후 병실 밖에 나왔다.시간이 너무 늦었는지라 그는 병원에서 하룻밤 쉬고 내일 돌아갈 생각이었다.연우는 밖으로 걸어가 담배 한 대를 꺼냈다. 고요하고 어두운 베란다에서 야경을 보며 손으로 바람을 막고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는 입에 넣어 한 모금 마셨다.“후.”연기를 내뿜었다.담배를 절반 정도 피웠을 때 철용이 진단서를 들고 찾아왔다.“시간을 더 끌면 팔 년 전에 윤서에게 했던 최면 효과가 다 떨어질 거야. 이번에 정서 기복이 큰 게 바로 윤서 속마음이 반사된 거야.”“만약 마음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네가 주시하지 않았을 때 또 오늘 같은 일을 벌일 수 있어.”담배의 니코틴은 마음속의 응어리를 많이 녹여주었다. 담배 성분은 사람을 중독되게 한다. 하지만 연우에겐 그렇지 않았다.그는 중독된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갖고 싶을 때 갖지 못한다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고 뼛속까지 짜릿한 아픔이 도졌다. 하지만 갖는다면 이런 느낌은 순간 절정에 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도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끊기 어려운지 말이다. 그런 고통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들게 했고 그는 그런 어둠 속에서 몇 년 동안 혼자 버텨온 것이다.“이 몇 년 동안 내가 윤서에 대한 보호는 이미 넘쳐났어. 성인도 됐으니, 모든 일을 내가 대신 결정해 주는 건 옳지 않아.”연우는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이런 말을 내뱉었다.철용은 라이터로 이 진단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진단서가 불에 조금씩 삼켜져 나중에 잿더미로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이 둘만 만나면 모두 어둠 속에 먹힌다.“이런 결정을 한 거 두 번 다시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처음은... 그가 장소월에게 마음이 없다고 했을 때였다.하지만 전연우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어둠 속에서 살기 적합한 사람 같았다. 빛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음침하게 한없이 비뚤어지면서 말이다.또 마치 은하수
팔 년 전, 서울은 그저 허름하고 낡은 도시에 불과했다. 거리엔 양아치들이 가득했고 사회가 혼란스러웠다.그날 사건은 목격자도 없었고 CCTV도 없었다.하지만... 이 팔 년 동안 연우는 포기하지 않고 증거를 찾기에 힘썼다.윤서더러 출국하라고 한 건 천식 말고도 그녀가 모든 것을 잊고 새로 출발하기를 바라서였다.“아악!”윤서는 목구멍을 찌르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연우가 병실에 들어갔을 땐 윤서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끌어안고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몽롱한 시선으로 말했다.“오빠... 오빠 어디 갔어요?”윤서의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렸다.연우는 반쯤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품에 안았다.“괜찮아.”그의 목소리는 마치 마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윤서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한참이 지나자 그녀는 제법 진정되었다. 연우의 몸에 풍기는 옅은 담배 냄새를 맡으며 그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오...오빠... 아까 엄청 무서운 악몽을 꿨어요. 너무... 너무 무서워요. 꿈에서 난 피투성이로 됐는데 진짜 너무 아팠어요.”“오빠를 찾으러 갔는데, 근데... 어떻게 찾아도 오빠가 보이지 않았어요. 원장 엄마가... 오빠가 나 버린 거래요.”“꿈일 뿐이야. 진짜가 아니야.”연우는 그녀의 옆에 있는 커튼을 거두었다. 그러자 빛이 병실에 비쳤다.“날이 밝았어. 오빠가 퇴원 절차 밟고 널 데려다줄게.”윤서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그의 옷을 꼭 쥐고 있었다.“하지만 그 꿈은 마치 진짜 벌어진 일 같았어요. 너무 무서워요.”연우는 윤서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품에서 떨고 있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윤서가 진정됐을 무렵, 안색은 꽤 좋아졌다. 그녀는 조용히 연우의 손을 잡고는 그와 함께 병원에서 나갔다.조수석에 앉은 후, 연우는 그녀에게 안전띠를 매주었다.차는 평온하게 가든 아파트에 도착했다.땅바닥의 핏자국은 연우가 직접 처리했다. 꼬박 하루 동안 힘들게 보낸 후 그는 네시간만 자고 다시 회사에 갔다.오 아주머니가 아직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받고
소현아는 또 소월에게 우유 하나를 주었다.“소월아, 꼭 힘내! 네가 시험 끝내면 우리가 데리러 올게. 저녁에... 큰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어!”단모연은 차창에 손을 얹고 소월을 향해 흔들었다.“결과가 어떻든 나랑 허이준은 꼭 널 올해 수능 수석으로 만들 거야. 시장님께서 직접 너에게 상장을 수여하도록 말이야. 힘내!”허이준은 다른 말 대신 그냥 두 글자만 말했다.“힘내.”그들이 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소월은 몸을 돌려 시험장에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도화지에 손이 닿는 순단, 소월은 최대한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필을 들었다.저번 생에도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자신의 그림 실력을 검증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긴장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참 좋아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그렇게 반대했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가만히 그림을 그렸다.그 후... 강영수랑 함께 하고 나서부터 그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소월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두 시간 동안의 스케치, 드로잉 등등을 완성한 후, 시험을 마치고나니 시간은 이미 많이 지났다.여섯 시 반, 소월은 시험장에서 나왔다.현아는 예전처럼 그녀를 향해 달려오며 흥분된 목소리로 소월의 이름을 불렀다.“소월아... 소월아... 소월아...”“시험 어땠어? 괜찮아?”소월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내 생각엔 꽤 잘 쳤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아.”단모연은 한쪽 팔을 소월의 어깨에 두르면서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 이제 축하하러 갈까? 마침 잘됐네. 우리 한동안 제대로 놀지 못했잖아.”소월은 시간을 한눈 보았다.“아, 어쩌지. 난 가봐야 할 것 같아.”단모연: “쯧쯧. 아직 결혼식 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단속하니 원...”소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가 걱정되었나 봐. 우리 다음에 함께 놀자.”현아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으면서 소월의 핸드폰을 들
저녁, 허이준이 해산물 구이 가게를 예약했다.가게가 위치하여 있는 대학가는 야시장이 열려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지금은 때마침 바닷가재 철이라 맥주와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단모연이 말했다.“우리 밖에 나가서 먹을까?”소현아가 대답했다,“좋아. 난 상관없어.”장소월도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처음 길거리 음식을 먹었던 건 강용과 함께 보냈던 작년 그믐날이었다. 하지만 당일 밤 곧바로 설사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장소월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최대한 조금 먹을 수밖에 없었다.네 사람이 밥상 하나에 둘러앉았다.허이준과 단모연은 한눈에 봐도 처음 온 것 같지 않았다. 곧바로 쟁반 하나를 갖고 가 익숙하게 원하는 구이 재료를 와구와구 담았다. 장소월은 얼마 먹지 못할 것이니 조금만 담았다.네 사람은 추가로 바닷가재 4킬로를 주문했고, 단모연은 맥주 한 상자를 들고 가 자리에 앉았다.“너희 여자애들은 마시지 마. 나랑 이준이만 마실 거야.”장소월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마당 안 몇십 개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시끌벅적 떠들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너희들 여기 자주와?”단모연이 대답했다.“자주는 아니고 가끔씩만 와. 우리 이준 남신께선 피아노 수업과 아르바이트로 스케줄이 꽉 차 있어 학교가 아니면 보지도 못한다니까.”허이준이 밀크티 두 잔을 소현아와 장소월에게 나누어 주었다.“내 마음대로 대충 샀어. 먹어봐.”장소월이 말했다.“고마워... 이거 밀크티야? 나 아직 이거 못 먹어봤어.”소현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못 먹어봤다고? 거리에 널리고 널린 게 밀크티 가게인데 어떻게 못 먹어봤을 수가 있어. 그럼 빨리 마셔봐. 난 너무 좋아해서 하루에 몇 잔이나 마셔.”“자. 내가 빨대를 꽂아줄게.”소현아가 익숙한 손길로 포장을 뜯고 빨대를 꽂고는 그녀에게 건네주었다.“난 외출을 별로 안 하거든. 아버지께서 반대하셔서 이런 야시장에 온 것도 이번이 두 번째야.”단모연이 탄식을 내뱉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장소월에게로 향했다.장소월이 대답했다.“응. 떠났어.”소현아가 물었다.“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야?”소현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번 강용은 농구를 칠 때 그녀의 손에서 막대 사탕 하나를 빼앗아갔었다. 며칠 후 그녀에게 새로 하나 사주겠다고 했으나 지금까지도 미동조차 없다.“나도 몰라. 강용 어머니의 병 치료가 끝나면 아마 돌아오겠지.”단모연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걔가 간 이후로 우리 이준이가 고달파졌어. 책상 서랍에 편지가 가득 쌓여있다니까. 그 소녀들을 피하기 위해 수업에도 별로 안 들어와.”30분이 지나고 8시가 막 지난 시간, 장소월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분위기가 단번에 조용히 가라앉았다.장소월이 핸드폰 화면 속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나 끝났어. 학교 문 앞으로 나 데리러 오면 돼.”“...”“그래. 기다릴게. 조심히 와.”간단한 몇 마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난 이제 가야겠어.”단모연이 말했다.“우리가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그다음에 현아를 집에 데려다주면 돼.”소현아가 곧바로 손을 저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택시 타고 가면 돼.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희들을 귀찮게 할 수 없어.”단모연이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여자아이가 혼자 택시를 타는 건 위험해. 오늘 차를 몰고 나왔으니까 같이 가자.”장소월도 그녀에게 말했다.“허이준의 차를 타고 가. 아니면 나 걱정돼.”소현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허이준은 마침 차를 학교 문 앞에 세워두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 문 앞엔 아무도 없었다.돌연 머지않은 곳 어딘가에서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풀숲에서 갈기갈기 찢긴 옷을 입고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남자 한 명이 힘겹게 달려 나왔다. 남자는 다리 한쪽까지 잘려있었는데 아직도 피가 흐르는 걸 보니 잘린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살려주세요. 누가 절 죽이려고
전연우가 별장에서 이런 일을 저지른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종래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한 사람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다.장소월은 처음엔 너무 무서워 눈물까지 흘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어느덧 점차 무덤덤해졌다.그는 처음부터 이렇듯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행했다. 그 손에 묻은 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만약 그가 언젠가 서울의 패권을 잡게 된다면 그 자리는 수많은 시체를 쌓아 올려 올라가게 된 것일 것이다.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대부분의 기억이 흐릿해졌다. 반면 이 복면을 쓴 사람에 대한 기억은 뚜렷했다. 그는 전연우의 수하인 강지훈이라는 사람이다하지만 전연우가 그를 찾은 시간은 3년 후가 아니었던가? 왜 벌써?설마... 모든 일이 앞당겨져 일어나는 건가?장소월은 당황스러움과 걱정에 휩싸였다. 그런 감정이 왜 생겼는지 알 순 없었지만 말이다.전생의 일은 결국 바뀌지 않는다는 건가? 당시의 운명을 바꾼다고 해도 언젠가는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죽어야 할 사람은 역시나 죽게 된다!그럼 그녀는?전생의 삶이 되풀이되어 또다시 천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진무현은 뒤로 물러서며 손의 칼을 꼭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의 몸 전체는 두려움에 휩싸여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가까이 오지마... 오지마... 난 잘못한 게 없어. 사람 잘못 봤어.”강지훈이 손에 쥐고 있던 몽타주를 들여다보았다.“아니, 내가 오늘 찾을 사람은 너 맞아.”소현아는 곧 눈물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울먹였다.“우리 얼른 가자. 나 너무 무서워.”장소월이 생각에 잠겨 있을 그때, 돌연 비명소리가 귀를 때렸다.“소월아, 조심해!”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누군가에 의해 저만치 밀려났다.허이준이 휘청거리는 그녀를 부축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남자가 소현아를 감싸 안은 뒤 칼로 목을 겨누고 있었다.진무현이 말했다.“다가오지 마. 경고하는데 조금만 더 오면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장소월이 소리쳤다.“현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