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와 회의실로 향했다. 저녁 6시 반쯤, 장소월은 특별히 차려입지 않고 강영수와 같은 스타일의 커플 옷을 입었다. 이 옷 또한 강영수가 직접 고른 옷이었다. 잠시 후, 장해진과 강만옥이 들어왔고 강만옥은 장소월의 손을 붙잡고 거실로 와서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약혼까지 하게 될 줄이야. 아줌마가 너한테 줄 건 없고. 널 위해 특별히 산 거니까 이 옥팔찌를 받거라.”“아줌마, 고마워요.”장소월은 거절하지 않았다. 강만옥과 사이좋게 지내는 건 여전히 익숙지 않았다. 핏빛 옥팔찌는 반짝반짝 빛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액체가 흐르고 있는 것이 딱 봐도 비싸 보였다. 아마도 아버지가 산 것 같다. 지금 강만옥은 장씨 가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이고 게다가 아들을 임신하고 있어 장해진은 강만옥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었고 돈을 쓰는 데 대해서도 제한하지 않았다. 몸매가 잘 드러나는 짙은 녹색의 치파오를 입고 있는 강만옥은 우아해 보였고 볼록한 아랫배가 눈에 띄게 드러났다. 장해진과 강영수는 서재로 들어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식사 준비가 다 되어서야 서재에서 나왔다. 장해진의 시원시원한 웃음소리가 위층에서 들려왔다.“하하하, 소월이를 자네한테 맡기면 당연히 안심이 되지. 어릴 때부터 내가 너무 오냐오냐하게 키워서 성격이 온순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자네가 너그럽게 봐주게나.”“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인어른.” 소파에 앉아있던 장소월이 일어나서 강영수에게로 다가갔다.“얘기 다 했어?”“응.”강영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얘기 했어?”“저녁에 알려줄게.”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만옥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 귓속말까지 다 하고? 우리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라도 있는 거야?”그 말에 장소월은 이내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아무 얘기 안 했어요. 아버지, 아줌마. 일단 식사부터 해요.”“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오
백윤서가 전연우의 팔짱을 낀 채 걸어들어왔다.“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습니다.”백윤서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전연우를 따라 들어왔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부로 둘러보지도 않고 어색한 모습을 보이며 전연우를 따라 옆에 긴 테이블에 착석했다. 맨 마지막에 온 박순옥은 장해진과 함께 가운데로 앉았다. 장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어르신, 오랜만입니다. 몸은 어떠하십니까?”박순옥은 강씨 가문의 손주며느리가 될 장소월의 체면을 봐서 장해진의 말에 대답했다.“나쁘진 않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가 보지. 다들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식사부터 하자고.”박순옥은 젓가락을 들고는 옆에 있던 장소월에게 수육을 집어주었다.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아.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했으니 많이 먹거라.”“감사해요, 할머니.” “천운사의 주지 스님한테 너와 영수의 약혼식 날짜를 받아왔어. 시험이 끝나고 3일째 되는 날이 좋은 날이라고 하니 약혼날짜를 그날로 정하는 게 좋겠다. 넌 어떠하냐?”가슴이 떨려온 장소월은 왼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네, 할머니 뜻에 따를게요.”강영수는 장소월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저랑 소월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할머니께서 그리 결정하셨으니 할머니 뜻에 따를게요.”“장인어른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그 자리에서 가장 기쁜 사람은 바로 장해진이었다. 강영수의 물음에 그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소월이가 장씨 가문의 큰 사랑을 받으며 시집을 가는 건 소월이의 복이네. 난 당연히 동의하지.”한편, 옆에 있던 박순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넌 우리 집안의 며느리야. 가문의 법도에 따라 난 청담 빌리지에 있는 별장을 약혼선물로 소월이 너한테 줄 생각이다. 영수 네 생각은 어떠하냐?”“그렇게 하세요.”그 말을 들은 장소월
사람들은 각자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저녁 식사를 했다. 박순옥은 몇 숟가락 들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한편, 장해진과 강영수 두 사람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 장소월은 승낙했을 때부터 가슴이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어쩐지 생각만큼 즐겁지도 않았다. 이유는 그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너무 급히 이루어진 것 같다...잠시 후, 백윤서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빠, 나 다 먹었어요.”전연우는 그녀의 그릇을 가져와 국 한 그릇을 담아주었다.“국 조금만 더 먹어. 이따가 배고플 거야.”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장소월은 두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었고 얼마 후, 그녀 앞에 누군가 국 한 그릇을 가져다주며 입을 열었다.“국 괜찮아. 한번 먹어봐.”고개를 들어보니 그 사람은 전연우였고 그를 보니 마음이 설렜다.“고마워... 오빠.”“응.”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차가운 그의 눈빛을 마주치게 된 장소월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기분이 좋아진 강영수는 장소월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이건 단맛이어서 소월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모르고 있는 것 같군.”그 말 한마디에 식탁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영수야, 많이 취했어. 방으로 들어가자. 응?”전연우는 성격이 어둡고 소심하고 마음에 원한을 잘 담아두는 사람이었다. 특히 뒤에서 사악한 수법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전연우는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강한그룹을 장악했다. 비록 그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소월은 이번 생에도 같은 비극이 일어나는 건 두고 볼 수가 없었다.그리고 지난번 하마터면 교통사고가 났을 뻔한 그 큰 트럭도 분명 전연우가 직접 계획한 짓일 것이다. 지금은 전연우가 강씨 가문을 대적할 수 없고 강씨 가문의 권위가 높다 하지만 사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전연우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소월이가 집에 온 지 오래돼서 오빠가... 다 잊어버렸
“남천그룹을 인수한다고?”장해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전연우를 쳐다보았다.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차가운 눈빛을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결국 나도 남천그룹에서 일하는 직원일 뿐이에요. 이 일에 관해서는 저희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난 이 일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없거든요.”“장소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장해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웠다.“아버지, 이 일은 나도 잘 몰라요. 이 사람이 술에 취해서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아요.”그녀는 강영수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영수야, 회사는 오빠가 알아서 잘 경영할 거야. 그 얘기는 그만 해. 방으로 들어가서 쉬자.”“그래, 알았어.”강영수는 마지막 잔에 담긴 와인을 마시고는 옆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장해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 일은 장인어른과 전연우 씨가 상의해 보고 언제든지 강한그룹으로 날 찾아와요. 난 남천그룹이 강한그룹 제2의 계열사가 되는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장소월은 술에 취한 강영수를 방으로 데리고 왔다. 평소에 술 접대 자리에 거의 나가지 않는 사람이라 그는 술이 많이 약한 편이었다. 그녀는 그를 침대에 눕혔고 그는 침대에 뻗은 채로 손을 눈에 얹고 있었다. 그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해장국 끓여다 줄게. 힘들어도 잠깐만 참아.”자리를 뜨려고 할 때 강영수가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왜 그래?”“방금 내가 한 말 때문에 화났어? 내가 남천그룹에서 전연우 씨의 직권을 빼앗는 게 싫어?”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을 몰랐던 장소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주며 대답했다.“아니. 네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거야.”“거짓말.”강영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매번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거에 대해 말하거나 나한테 거짓말 할 때면 넌 항상 내 눈을 쳐다보지 않았어.”그에게
웃는 얼굴 뒤에 가려진 그의 잔인함.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장소월은 그가 지금 화가 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의 손에 넘어가면 그녀는 아마도... 뼈도 못 추릴 것이다.전연우는 처음부터 그녀가 강영수한테 접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강씨 가문의 권력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씨 가문을 원했던 그는 언제든지 빼앗아 갈 수 있었다.장소월은 그저 평생을 편안히 사는 게 목표였다. 그녀는 그의 삶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백윤서든 송시아든 그녀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알았어.”잠시 후, 오부연은 기사들을 한 명씩 안배하여 그들을 남원별장으로 돌려보냈다.장소월은 그들을 본가 문 앞까지 배웅했다. 떠나기 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강영수가 자신 몰래 이렇게 많은 선물을 준비한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귀중한 액세서리, 티 그리고 영양품들까지 차 한 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올 때는 차가 두 대였는데 떠날 때는 차가 세 대가 되었다. 강영수가 그들을 매우 중시하고 있단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강영수를 사랑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가 자신을 존중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강영수는 좋은 사람이었고 동반자로서도 적합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자신이 걱정하고 있던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번 생은 오직 평안하게 보낼 길 바라고 있다. 장소월은 해장국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강영수에게 먹여주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 전연우가 그녀에게 메일을 보내왔는데 그녀는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삭제해 버렸다. 가든 아파트, 전연우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백윤서가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오빠, 천천히 가요.”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백윤서가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오빠, 오는 내내 나
그녀의 눈에는 맑고 투명한 눈물이 고여 있었고 그녀가 울먹이며 그를 향해 달려가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오빠, 내가 소월이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소월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아낌없이 소월이를 사랑하고 있잖아요.”“소월이는 좋아하는 사람과 약혼도 하고. 오빠, 난 영원히 오빠와 함께하고 싶어요. 오빠의 아내로 영원히 살고 싶어요... 하지만 오빠는 왜 날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우뚝 서 있는 전연우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지만 그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윤서야, 난 네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 아니야. 네가 모르고 있는 게 많아.”백윤서는 그의 허리를 꽉 붙잡고는 전혀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요. 나한테 오빠는 최고예요. 오빠가 어떤 사람이든 난 상관 없어요. 난 그저 오빠 옆에 평생 있고 싶고 오빠의 아내로 살면서 아이도 낳고 싶어요. 나한테 가정을 만들어 주겠다고 오빠가 약속했었잖아요.”“오빠, 그 약속 꼭 지켜요.”그녀의 눈물에 그의 검은 양복은 흠뻑 젖었고 눈물이 셔츠까지 스며들어 그 축축한 열기가 등 뒤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연우가 몸을 돌려 거친 손바닥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결혼 말고는 네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하지만 결혼은 안 돼. 해야 할 일이 남았어. 사랑은 너하고 나한테 어울리지 않은 거야. 난 가정을 이룰 생각이 없거든.”“그런 말로 얼버무리지 말아요. 가정을 이룰 생각이 없다는 건 다 거짓말이잖아요.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장씨 가문에서 오빠가 거침없이 소월이한테 키스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오빠가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소월이 때문이잖아요. 안 그래요? 오빠 자신을 속일 수는 있지만 내 눈은 속이지 못해요.”백윤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정말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사실 오빠는 진작부터 소월이를 좋아하고 있었잖아요?”“오빠는 늘 내 스킨십을 거부했어요. 나랑 같이 있는 건 모두 거짓이잖아요. 날 좋아하지도
오늘 백윤서가 죽음으로 몰아붙이든 아니면 다른 행동을 하든 전연우가 결정한 일은 바뀌지 않았다.연우는 그녀를 안고 차를 운전하여 엘리트 개인병원에 데려다주었다.응급실.서철용은 여유 있게 윤서의 상처를 처리해 주었다.“얼핏 보기엔 가녀린 아가씨께서 널 위해 목숨마저 버리네. 못 이기는 척 이분 소원 이뤄드리는 게 어때?”“소월 씨는 미래 강한 그룹 안주인이야. 뭐, 이미 정해진 일이잖아. 네가 단시간에 강한 그룹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강영수 손에서 소월 씨 뺏지 못할 거야.”“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너 잊지 마! 지금 유전자 검사 결과에 따르면 너랑 소월 씨는 친 남매 사이야. 진짜 함께했다간 천벌 받을 거야.”“쯧쯧.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너처럼 속이 시커먼 놈을 좋아해 주는 여자도 있고.”철용은 웃으며 말했다.“진짜 희한한 일도 다 있네.”“할 말 다 했냐?”창문을 향해 서 있던 연우는 몸을 돌려 철용을 보았는데 그의 눈썹은 찡그려졌고 말투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철용은 침을 거둔 후 윤서의 상처를 붕대로 감았다.“그렇게 나 보지 마. 난 더 오래 살고 싶거든.”“또 해줄 말 있어. 황유나 얼굴 내가 수술해 준 거야. 어때 보여?”전연우: “... 너 또 무슨 수작 벌이려고?”철용은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렸다.“알잖아, 나 이 병원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돈이 되는 프로젝트라면 뭐든 다 하거든. 그중에 의료 미용도 포함하고 있어.”“삼 년 전, 황유나가 출국하기 전에 성형하러 왔어. 그때 내가 마침 병원에 있어서 검진해 줬거든. 글쎄 걔가 내 책상에 있던 사진을 보더니 이대로 성형해달라지 뭐야. 그래서 수술 해줬는데 놀랍게도 회복이 잘 된 거야. 꽤 비슷했어.”“음... 근데 황유나 걔 얼굴은 좀 별로긴 한데 몸매는 우리 소월 씨랑 거의 똑같아.”“생각해 보면 정말 인연인 것 같아.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너 소월 씨한테 푹 빠진다고 했는데 넌 내 말 귓등으로 들었지. 마침 잘됐어. 소월 씨랑 닮은 황유
고요한 밤.창밖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냈다.두툼한 커튼은 바람에 휘날렸다.사월의 날씨는 너무 춥지 않았다. 바람이 창문을 통해 병실에 불어 들자 쓴 약 냄새가 공기 속에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백윤서는 깨어난 후, 연우를 마주하기 싫어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창문 밖 휘날리는 커튼을 보고 있었다.“오빤 이미 나 버렸잖아요. 그런데 지금 왜 병원에 온 거예요? 돌아가요. 난 오빠 보살핌 필요 없으니까.”연우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약을 들었다. 검은색 액체에선 쓴 향기가 퍼졌다.“알겠어.”그는 약을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본 후 말했다.“지금 열두 시 십이 분이야. 십 분 동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줄게. 진정됐을 때 다시 들어올게.”“오빠!”윤서가 절박하게 그를 부르자 연우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윤서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연우는 침대 옆에 앉아 윤서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따뜻할 때 마셔. 링거 다 맞으면 데려다줄게. 그리고 내일 학교 안 가도 돼. 이미 병가 신청했거든.”윤서는 그의 손을 꼭 잡고는 초췌한 얼굴로 간절히 빌었다.“오빠, 아까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면 안 돼요? 난 계속 오빠 여자친구고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네?”“오빠가 지금 날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좋아질 수 있을 거예요. 오빠가 소월이 같은 타입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고칠게요. 오빠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말이에요.”“그냥 헤어지자는 말만 하지 말아줘요. 제발요. 다른 건 다 할 수 있는데 이것만은 안 돼요.”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원래 자신을 한없이 낮추게 된다.어릴 때부터 윤서는 연우와 많은 일을 겪으면서 속으로 꼭 그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다짐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간절함 속에 감정의 억제도 담겨 있는 목소리.“윤서야, 네 인생엔 한가지 선택만 있는 게 아니야. 앞으로 삼 년간 대학을 다니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