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 전연우가 손동작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려던 찰나, 벨 소리가 멈추었다. 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더니 끊긴 부재중 번호를 확인한 후, 깊은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경찰서.장소월은 전화를 걸려는 경찰의 전화를 급히 끊었지만, 이미 남자의 휴대폰 벨 소리가 몇 초 울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아저씨, 저랑 제 친구가 장난한 것뿐이에요. 보세요, 저 멀쩡하잖아요.”“늦은 시간인데 학부모까지 부를 필요 있나요...”“장난? 칼로 친구를 찌른 게 장난이라고요?”경찰의 시선은 붕대를 감은 장소월의 손등에 떨어졌다.“누군가 제때 발견하지 않았으면, 학생은 아마 지금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이렇게 큰일인데 당연히 학부모를 불러 학생을 데려가게 해야죠!”“그리고 너희들! 풀어준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들어와?”벽 모퉁이에는 알록달록한 머리색의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중간에 서 있는 가죽옷 세트를 입고 문신을 한 불량소녀는 딱 봐도 사회에서 안 좋은 것들을 많이 배운 모습이었다.이 몇 명은 다름 아닌 장소월이 도원촌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이름이 엽시연이었고 강용과 한 패거리였다.“이번에는 그래도 좋은 일을 했으니, 너희 몇은 먼저 가도 좋아.”녹색 머리와 빨강 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혀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착하게 살겠습니다.”“좋은 시민이 되려면, 일단 그 알록달록한 머리부터 어떻게 해 봐. 보기만 해도 정신 사나워.”“하지만 학생은 집에 못 가요. 양쪽 학부모를 다 불러야 해요. 아니면... 계속 경찰서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경찰은 장소월에게 말했다.장소월이 상처를 입었으니, 진짜 따지기 시작하면 엽준수는 감옥에 갈 수도 있다.장소월은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갑자기 밤이 먹고 싶어 줄을 서서 밤을 샀다.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뛰쳐나와 그녀의 목을 조르며 목숨을 앗아가려 했다...나중에 그들 몇 명에게 구조되
엽시연은 사실대로 말했다. 당시 바다에서 장소월을 구해준 사람은 전연우가 아니라 강용이었다.강용이 장소월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장소월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소월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한 것도 강용 때문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장소월도 반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게 진짜 사실이라면, 강용이 그녀에게 했던 이상한 말들이 전부 맞아떨어진다. 어쩐지...엽시연은 떠나고 장소월과 엽준수만 남았다.한 여경이 감금실에서 나와 장소월을 불러들였다.엽준수는 수갑을 찬 채 장소월의 맞은편에 앉았고, 여경은 엄숙하게 말했다.“말해봐요. 왜 이 학생을 해쳤는지.”“이년, 모두 이년 때문이에요!”엽준수는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고, 흉악한 표정은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으세요!”장소월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엽준수를 보며 살의를 드러냈다.“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트러블도 없었어. 만약 진짜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일 때문이라면 그냥 말해. 난 꼭 그 팀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너의 장래는 네 손으로 망친 거야!”“닥쳐! 네가 뭘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갑자기 6반에 오지 않았다면 나도 쫓겨나지 않았을 거야. 원래 이번 장학금만 받으면 우리 엄마는 살 수 있었어! 장학금도, 서울대 진학 자격도 없어졌어, 우리 엄마가 전화를 받고...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바로 사망했다고... 난 임종도 못 지켰어.”차설아는 순간 멍해졌다.“장소월! 이건 모두 너 때문이야! 왜 전학 왔어? 왜 내 모든 걸 빼앗아가려고 해?”“내 인생은 네가 다 망쳤어! 전부 너 때문이라고! 방금 그 친구가 한 말이 맞아, 넌 재앙을 몰고 오는 년이야!”장소월은 마치 온몸의 힘이 다 빠진 듯했다.은경애가 데리러 왔을 때, 장소월은 이미 영혼을 빼앗긴 몸뚱이만 남은 상태였고, 어떻게 경찰서를 떠났는지 그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집에 도착하고, 장해진의 꾸짖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장소월은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
“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은경애는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이게 대체 뭔 일이야? 어젯밤에 돌아올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지금은 또 몸살이 나고. 휴, 진짜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은경애가 고개를 들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어머, 연우 도련님, 아가씨 보러 오셨어요? 아가씨께서 아프셔서 제가 뜨거운 물주머니를 가지러 가는 길이에요.”“어젯밤에 경찰서에 있었어요?”전연우는 차갑게 물었다.은경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험상궂은 전연우의 말투에 감히 숨기지 못하고, 어젯밤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어젯밤 11시쯤에 아가씨가 저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고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 제가 가보니, 아가씨는 손을 다치셨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위층으로 올라가 쉬었어요. 제가 오늘 아침에 걱정이 돼서 올라와 보니 저렇게 되었지 뭐예요? 아마 크게 놀랐나 봐요.”“왜 저한테 전화하지 않았죠?”은경애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건... 아가씨가 하지 말라고...”“도련님과 친하지도 않은데, 괜히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셨어요.”폐를 끼친다? 그녀가 저지른 사고 중, 전연우에게 폐를 끼친 일이 어디 한 두 가지란 말인가? 이건 그와 확실히 선을 긋겠다는 뜻일까?그들 사이의 관계는 장소월이 선을 긋는다고 해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전연우는 장소월의 방으로 가 그녀 손 위를 훑어보았고, 또 그녀 팔뚝의 긴 흉터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상처는 이미 아물었고 딱지가 벗겨졌고, 지네처럼 못생긴 흉터가 남았으며 여전히 약간 붉게 물들었다.“왜? 마음 아파?”강만옥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려 퍼졌다.오늘 그녀는 모란꽃 무늬의 복고풍 붉은 치파오를 입고 개미허리를 흔들며 들어왔다. 침대 옆에 앉아 투명명옥으로 만든 작은 연고 상자를 꺼냈다.강만옥은 뚜껑을 열고, 연고를 식지에 약간 덜어내어 장소월의 팔에 있는 흉터에 발랐다.“귀하신 몸에 흉터라도 나면 안 되지. 앞으로 장씨 가문이 서울에서
장소월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날 주말이었다. 꿈속에서 큰 재난을 겪은 듯 입고 있던 잠옷은 거의 흠뻑 젖었고 온몸은 화로처럼 뜨거웠다.은경애는 죽을 들고 숨을 헐떡였다. 늙어빠진 몸으로 단숨에 5층으로 올라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공허한 눈빛의 장소월을 보았다.은경애가 들어온 것도 몰랐고, 은경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아가씨, 하루 밤낮으로 주무셨는데, 뭐 좀 드세요!”장소월은 촉촉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어젯밤 경찰이 와서 아빠한테 뭐라고 했어요?”“무슨 말인지는 잘 못 알아들었어요. 하지만 아가씨에게 칼을 겨눈 흉악범을 선생님께서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어요.”장소월은 시선을 거두어 손등에 싸인 거즈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이미 엽준수의 결말을 짐작했다.장해진은 반드시 그에게 수천 배로 돌려줄 것이다.감옥에 가더라도 틀림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장소월이 짐작한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장소월은 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손에 너무 힘을 주면 봉합한 부위가 아파 먹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은경애가 방을 나갈 때, 장소월은 여광으로 방에 있는 가구가 많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벽에 있던 그림들이 전부 사라졌다.“아주머니, 제 그림은요?”은경애는 그제서야 말했다.“아가씨가 집으로 들어오신 후에 계속 사고가 생기니 선생님께서 방의 풍수가 좋지 않다고, 며칠 후에 방을 새로 인테리어한다고 하셨어요.”그릇을 들고 있던 장소월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방을 인테리어하면 저는 어디서 자죠?”“아마 연우 도련님네 집에 가서 며칠 묵으셔야 할 거예요.”‘쨍그랑.’은경애는 장소월의 반응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손에 들고 있던 몇 입 먹지도 않은 죽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장소월은 장해진의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사실이었다니.점심 식사 때, 은경애는 장소월의 짐을 챙겼다.식탁에
장소월은 차라리 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편했지만, 학교는 다음 주에 방학하고,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음 달 21일이 섣달 그믐날이었다.가든 아파트 밑.장소월은 일찍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 아주머니와 백윤서를 발견했다.차가 멈추자, 오 아주머니는 급히 달려와 조수석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오 아주머니는 그녀의 다친 손을 잡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어디 한 번 봐요. 아가씨. 왜 또 다치셨어요?”“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피부가 좀 까졌을 뿐이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백윤서는 다가와 다정하게 장소월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소월아, 방은 이미 정리해놓았어. 근데 불편하더라도 나랑 같은 방을 써야 해. 내가 준비한 방이 맘에 들어야 할 텐데...”“좋아.”장소월은 얼굴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방을 썼고,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함께 자는 습관이 없었다.아파트 위층에 도착했을 때, 백윤서는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방으로 들어갔다.백윤서의 방에 침대가 하나 더 있는 것이 보였다.침대 시트 이불 커버는 모두 오 아주머니가 장소월의 취향에 따라 연한 핑크로 산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는 핑크 곰돌이가 있었다. 장소월이 원했던 생일 선물이었다. 백윤서의 침대에도 똑같은 위치에 같은 곰돌이가 있었다.남에게 얹혀사는 신세에 장소월은 싫다고 말할 권리가 없었다.“고마워요. 아주 맘에 들어요.”백윤서는 기뻐하며 말했다.“마음에 들면 됐어. 나랑 오 아주머니가 네가 싫어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직 몸이 낫지 않았으니 일단 쉬어. 나랑 오 아주머니가 짐 정리하면 돼.”장소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미 다 나았어. 내가 정리할게.”“그럼 내가 도와줄게.”장소월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거절한다면 무례할 것 같았다.짐 정리를 마치고 나니 장소월의 옷이 옷장 대부분을 차지했고, 책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장소월은 미안한 듯 말했다.“내가 너무 많이 챙겨왔어.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오 아주머니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저녁 6시 30분.백윤서는 비로소 펜을 놓고 책을 덮었다.“소월아, 혹시 아저씨가 너한테 압력을 가하시는 거야? 너처럼 집안이 좋은 애들은 사실 이렇게까지 노력할 필요 없잖아.”장소월은 사로가 끊겨 손동작을 멈추었다.“아버지랑 상관없어요. 그냥 제가 자신한테 요구가 높아서 더 열심히 하는 거예요.”장소월은 감히 멈추지 못했다. 다시는 전생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돈으로 학력을 얻고 싶지 않았다. 송시아처럼 독립적이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도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그렇구나. 확실히 6반은 압력이 크지. 그래도 너무 몸을 혹사하지는 마. 나 먼저 가서 밥 먹을 테니까 너도 너무 늦지마.”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백윤서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소월도 나머지 절반을 마치고 나갔다.오 아주머니가 만든 요리는 대부분 장소월이 좋아하는 담백한 음식이었다. 백윤서와 전연우가 좋아하는 매운 닭볶음탕도 있었다.장소월은 매운 요리를 본체도 하지 않고 젓가락은 탕수육을 향해 뻗어 입에 넣었다. 변함없는 맛이었다.식탁에서는 잡담하지 않고 조용히 먹는 것이 장해진이 정해준 규칙이었다.그래서 밥을 먹을 때 장소월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백윤서는 따로 사니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오 아주머니. 같이 앉아 먹어요!”“괜찮아요. 먼저 드세요.”장소월은 입안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말했다.“같이 먹어요.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규칙을 지킬 필요 없어요.”오 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닭고기 수프를 끓였어요. 조금 있다가...”오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비쳤다.‘내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에 소월 아가씨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점점 더 우울해지고, 예전처럼 웃지도 않으셔.’장소월의 모습을 본 오 아주머니는 마음이 불편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평소보다 밥을 한 그릇 더 먹
전연우: “괜찮아.”“다음부터 많이 마시지 마요. 위도 안 좋으면서.”오 아주머니는 해장국을 끓여 가져왔다.“윤서 씨, 어서 도련님께 먹여주세요.”문밖의 인기척을 들은 장소월은 상관하고 싶지 않아 이어폰을 끼고 영어 단어를 암기했다.저녁 9시 30분.백윤서는 피곤한 기색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 머리맡 캐비닛 위에서 충전을 한 상태로 한참이나 울린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소월아, 전화 왔어.”장소월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소월아?”백윤서가 다가가 발신 번호를 보니 일련의 8888 숫자였다.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충전기를 뽑아서 장소월의 앞에 놓았다.장소월이 이어폰을 빼자 백윤서가 말했다.“전화 왔어.”“고마워.”장소월은 발신자 표시를 보더니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시... 전화 안 해?”장소월은 담담하게 말했다.“잘못 거신 것 같아요.”백윤서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걸어갔다.장소월은 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서야 휴대폰을 다시 들고 읽지 않은 수십 개의 메시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감정을 억누르고 바로 휴대폰 전원을 껐다.장소월은 11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백윤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전연우의 방에 가서 보살폈다.얼마 후, 장소월은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지만 곧 다시 잠이 들었다. 그녀는 깊은 잠을 자지 못해서 약간의 인기척에도 잘 깨어났다.백윤서가 방으로 돌아온 후에야, 그녀는 완전히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6시 알람이 울렸다.장소월은 조용히 일어나 씻고, 포니테일을 하고 책가방을 메고, 여전히 잠자고 있는 백윤서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떠났다.6반은 아침 7시부턴 아침 자율학습이 있었다.깨어나 씻고 차를 타고 가면 시간이 비슷했다. 아파트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오 아주머니는 여전히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방에서 나온 장소월을 보고 깜짝 놀랐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요? 9시 수업 아니에
하지만 그는 못 본 척하며 이어폰을 끼고 창가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톡을 하고 있었다.장소월은 그날 엽시연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강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그때 큰비가 내리고 파도가 넘실거려서 그녀가 바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식을 잃었다. 그저 희미한 얼굴만 보여, 그 사람이 전연우인 줄 알았다.왜냐하면 그녀가 사는 것이 전연우에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연우 외의 다른 사람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만약 장소월이 죽는다면, 전연우는 장해진을 볼 면목이 없다.학교까지 겨우 네 정거장이었지만, 버스가 여러 번 멈추면서, 곧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찼고, 대부분은 서둘러 출근하는 직장인들이었다.장소월은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오른 것을 발견했다. 버스에는 이미 자리가 없었다. 뜻밖에도... 강용이 일어나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강용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어? 저 순수한 웃음을 보면 모르는 사람들은 말 잘 듣는 모범생인 줄 알겠네.’갑자기, 강용의 시선은 사람들을 넘어 장소월에게 향하더니 미간을 살짝 올렸다. 장소월은 나쁜 일을 하다 들통 난 것처럼 괜히 그를 보기 민망했다.학교 정류장.장소월은 발걸음을 늦췄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제운고등학교에 오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길 건너 맞은 편에서 서울제2중학교의 낭랑한 아침 자습 낭송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은 갑자기 1반에서 나오기 전 강용이 책을 들고 와서 과외를 해달라고 했고, 그녀가 매정하게 거절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장소월은 확실히 무정했기에 강용이 욕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전에 강용이 그녀를 보는 눈빛에 냉철함만 있었다면, 지금은 냉철함 외에 무정하다고 욕까지 하는 것 같았다.장소월은 강용이 교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가 따라잡으려 했지만,
서철용 또한 한때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민용의 목숨에 집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서민용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장영우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그동안 배은란은 이미 아이들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주로 서철용이 아이들을 돌보던 예전과는 달랐다. 당시의 배은란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애정 또한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배은란의 손에 맡겨졌다.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서철용이 떠나면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기에 배은란은 그들을 위해 남을 수밖에 없다.서철용 또한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장영우가 독단으로 그를 비행기에 실은 뒤에야 통보했던 것이다.지난 2년간 해외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들의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영우가 꾸준히 배은란과 아이들의 근황을 알려주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이젠 배은란 나한테 맡겨. 내가 잘 보살필게. 하지만 그 여자가 너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가끔씩 꿈에 보러 가줘. 또 그 토끼 인형처럼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서철용은 후련한 듯 묘비에 새겨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나보다도 더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믿어.”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내디뎠던 발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은란아, 언제 왔어?”배은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고 그를 지나쳐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민용 씨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오지 마.”소망이가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가지러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배은란은 아이들을 멀리서 기다리게 하
3년 후.서민용의 무덤 앞.배은란은 그의 묘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미안해, 민용 씨. 나 약속 못 지켰어. 민용 씨는 이미 떠났겠지? 떠나기 전에 나 원망 안 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3년 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민용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다른 데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죄 없는 두 아이를 차마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처음에 아이들을 서철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서철용의 핏줄인 데다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 서철용이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두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졌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워줄 리 만무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집안은 이 두 아이를 증오하기도 모자랄 것이다.어린 두 아이가 마음에 걸린 배은란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정성껏 돌봐주었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서철용이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지만, 서철용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점점 더 철이 들어갔다.“엄마, 아빠 옛날에 이렇게 생겼었어요?”소망이가 묘비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배은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 이분은 너희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너희는...”그녀는 아이들에게 서민용을 어떻게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서민용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저 기억나요!”소망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오빠랑 저와 자주 놀아주셨어요!”배은란은 목이 메었다. 아이가 서민용을 서철용과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원이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저씨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아니야! 저 얼굴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어제도 꿈에 나왔는데 엄마 잘 돌봐주라고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서 선생님, 미쳤어요? 손 앞으로 안 쓸 거예요?!”배은란은 복도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서철용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해갔다.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배은란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서 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그녀는 맥없이 터덜터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용 씨...”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싸늘하게 식어버린 서민용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서민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그 사람은 분명...배은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울면 안 된다. 서민용은 그녀가 우는 걸 싫어하기에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방 안에서 전해져오는 흐느낌 소리에 배은란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장영우와 남자 간호사에게 붙들린 채 끌려 나오고 있었다.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서철용의 몸짓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서민용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먹구름이 하늘을 덮친 우중충한 날, 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그를 묻었다.“민용 씨, 기다려. 곧 당신 찾아갈게.”납골당에서 나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배은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우세요?”소원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소원이는 그녀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엄마는 분명 울고 있으면서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소원아, 소망아, 너희들 철용 삼촌 좋아해?”배은란은 마음속의 죄책감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제일 좋아요.”
“이미 호흡이 멈췄습니다.”장영우는 비교적 침착하게 서민용의 상태를 확인했다.전신 마비인 몸으로 손가락 하나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할 수 있었겠는가.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그 말에 배은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응급실로 옮겨서 CPR 시행해!”서철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장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고인의 뜻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옆에 늘어뜨린 서철용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CPR 준비하라고 했어! 지금 바로 시작해!”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민용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서민용 자신조차도 안 된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아직 깁스를 하고 있는 그의 왼손과 흐느껴 울고 있는 배은란을 번갈아 보며, 장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미쳤어, 하나같이 다 미쳤어.’“장 선생님...” 간호사가 망설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장영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대로 해.”시도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민용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보호자분, 부디 힘내세요.”장영우는 병실을 나서며 배은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응급실 빨간 등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켜져 있었다.배은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즉시 일어나 달려갔다. 저번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장영우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보호자분, 들어가서 서 선생님 좀 말려 주세요. 선생님을 말릴 수 있는 분은 보호자분밖에 없습니다.”배은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순간 절망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너무나도 안타까운 모
장영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철용의 깁스에 물이 닿아 흐물흐물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의사다. 장영우는 그 자리에서 직접 빠르게 서철용의 팔을 고정해 주었다.“서민용은 회복 잘하고 있어? 수술은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아?”장영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고 싶으세요?”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갑자기 죽는 것보단 죽을 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장영우가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살 시간 많을 것 같아요.”서철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배은란 씨가 간병인까지 고용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데도 서민용 씨의 수치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식사는 하지 않고, 영양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그 말에 서철용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장영우는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이미 살겠다는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장을 주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겁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에게도, 배은란 씨에게도, 또 서민용 씨에게도 그저 고통만 안겨줄 뿐입니다.”정영우는 세 사람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서민용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서철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고 지시했다. “이틀 더 지켜봐. 계속 음식 거부하면 코로 주입해.”서민용의 목숨은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두어갈 수 없다.서민용 본인조차도 안 되는 일이다.장영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환자분은 의식을 갖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서철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장영우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무실 문 앞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서철용의 몸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반신에 간단히 수건 한 장만 두른 상태였다. 자세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서철용이 배은란을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배은란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리에 굳어 선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서철용의 알몸을 수차례 보았었고, 심지어 더 친밀한 행동도 함께 했었다.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제 서민용이 자신의 손바닥에 한 획 한 획 써 내려갔던 글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온몸에선 서철용에 대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었다.“장영우 선생인 줄 알았어. 가져올 필요 없어. 나 다 씻었어.”아침은 남자의 성욕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간이다. 배은란의 향기를 맡으니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휴게실로 돌아가 가운을 걸쳐 입고 나서야 다시 사무실에 나왔다.배은란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무슨 일로 왔어?”서철용은 이마를 짚으며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배은란은 약간 발그스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민용 씨 죽 끓일 때 겸사겸사 갈비탕도 좀 끓였어. 당신 상처에 좋을 것 같아서.”서철용은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도시락통 두 개를 발견했다.하나는 그의 갈비탕, 다른 하나는 당연히 서민용의 것이었다.“겸사겸사라...”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알았어. 안심해. 오해하지 않을게. 넌 그저 내가 너 때문에 다친 게 마음에 걸릴 뿐이겠지.”그 말은 오히려 배은란에게 더욱 선명하게 상기시켜 주었다.“당신 상처...”조금 전 듣기론 상처에 물이 닿은 것 같았다. 지금은 서철용이 가운을 입고 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안 죽어. 나 의사잖아. 내가 알아서 해.” 서철용은 아래턱을 쳐들고 말했다. “근데 움직이는 건 좀 불편해. 국 좀 따라줘.”배은란은 국을 따른 뒤, 서민용을 오랫동안 간호해왔던 습관대로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고 그에게 먹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곧
“민용 씨, 미안해. 내가...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늦었어.”배은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죽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먹여주었다.“오늘 밸런타인데이래. 이런 날 일찍 와서 당신과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몇 시간 뒤면 밸런타인데이 지나가. 나한테 말 좀 해줄래?”배은란은 그가 자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손을 그의 손 옆에 가져갔다.서민용은 손가락 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괜찮아.]배은란의 손가락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서민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민용 씨, 뭐라도 좀 먹어. 당신 몸 회복되면 내년에는 우리 같이...”서민용은 평소 같지 않게 식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죽 한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배은란은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민용 씨, 당신도 빨리 낫고 싶은 거지? 나도 알아.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정말이야...”배은란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서민용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이후 마음이 진정되자 미소를 지으며 최근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서민용은 따뜻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모두 들어주었다.밤이 깊어졌다. 배은란은 병실에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서민용은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했다.배은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서민용은 이제야 간신히 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다. 그녀가 직접 죽을 끓여주면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별장으로 돌아온 배은란은 잠이 든 지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좁쌀에 으깬 호박을 넣고 약한 불로 천천히 끓였다.냉장고에는 며칠 전에 사놓은 갈비와 옥수수도 조금 남아 있었다. 배은란은 그것들을 모두 꺼내 갈비탕을 끓였다.자신 때문에 다친 서철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배은란의 시선은 줄곧 그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서철용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마음속으로 얄팍한 욕심이 피어올랐다.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서민용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의 팔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아마 후자일 것이다.그를 미워할 시간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병원에 도착하여 치료를 마친 후, 배은란은 긴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나야 회복될까요? 이 사람 의사인데, 나중에 팔을 쓰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관리만 잘하면 두 달 안에 거의 완전히 회복될 수 있고, 의사 생활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가 설명했다.그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서철용은 팔에 깁스를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병원을 나서는 길에서도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배은란을 본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심해. 이 팔 못 쓰게 된다고 해도 서민용에게는 아무 일 없을 거야.”배은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내 머릿속에 민용 씨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약간 화가 난 듯 물었다.서철용이 되물었다. “그럼 아니야?”서민용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서철용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지금 돌아가면 서민용이랑 저녁밥 먹을 시간은 충분하겠네. 밸런타인데이라 더욱 같이 있어 주고 싶었을 텐데 잘됐어.”서철용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차는 보험 회사에 견인되어 갔고, 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배은란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깁스한 왼손을 바라보았다.“난 단순히 당신 상처 걱정하면 안 되는 거야?”서철용은 분명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것이다. 그것도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방금 전 그 장면을 떠올리자, 배은란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꿰뚫어 보듯 그녀를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