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서는 장소월을 불러 오 아주머니가 준 거라면서 약을 한 갑 주었다. 만약 오 아주머니가 직접 준 약이 아니면 장소월도 감히 먹지 못할 것이다.백윤서는 전연우의 사람이니, 대체 무슨 약을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장소월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인시윤과 식당으로 갔다.서문정은 말을 걸기도 전에 장소월이 가버려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소월이 진짜 점점 대단해지는데? 내 성적이 소월이 절반만 해도 아버지가 매일 집에서 나를 나무라지 않을 텐데. 나 같은 딸 때문에 밖에 나가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면서.”백윤서는 눈을 내리뜨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말했다.“그래? 너도 노력만 한다면 소월이처럼 6반에 들어갈 수 있어.”장소월은 평소대로 고건우의 수업을 들으러 갔다. 고건우의 수업은 확실히 훌륭했다. 매 학생의 약점에 따라 학습계획을 세팅해주었다. 하지만 장소월에게 준 문제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어려웠고, 심지어 그녀가 공부한 지식의 범위를 넘어섰다. 지난번에 고건우가 준 연습문제 중, 장소월은 절반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다른 과외 서적을 찾아야 했다.훈련동 밑에 도착하자 장소월이 물었다.“요즘 엽준수가 왜 안 보이지?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인시윤은 무심코 대답했다.“몰라, 집에 일이 있겠지? 내 생각에는 아마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을 것 같아.”장소월은 웃으며 말했다.“그냥 물어봤어.”두 사람은 별생각 없이 교실로 들어갔다....어둠이 깔리고 저녁 9시 30분. 거실에는 여전히 불이 커져 있었고, 오 아주머니는 야식을 만들어 백윤서의 방에 가져갔다. 백윤서가 아직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때마침 문이 드르륵 열렸다.“연우 도련님, 또 술자리 가셨어요? 해장국을 준비할까요?”전연우는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피곤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괜찮아요.”전연우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갔다.“윤서 아직도 안 자요?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자 전연우가 손동작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려던 찰나, 벨 소리가 멈추었다. 전연우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더니 끊긴 부재중 번호를 확인한 후, 깊은 눈동자가 더 어두워졌다.경찰서.장소월은 전화를 걸려는 경찰의 전화를 급히 끊었지만, 이미 남자의 휴대폰 벨 소리가 몇 초 울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아저씨, 저랑 제 친구가 장난한 것뿐이에요. 보세요, 저 멀쩡하잖아요.”“늦은 시간인데 학부모까지 부를 필요 있나요...”“장난? 칼로 친구를 찌른 게 장난이라고요?”경찰의 시선은 붕대를 감은 장소월의 손등에 떨어졌다.“누군가 제때 발견하지 않았으면, 학생은 아마 지금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이렇게 큰일인데 당연히 학부모를 불러 학생을 데려가게 해야죠!”“그리고 너희들! 풀어준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들어와?”벽 모퉁이에는 알록달록한 머리색의 몇 명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중간에 서 있는 가죽옷 세트를 입고 문신을 한 불량소녀는 딱 봐도 사회에서 안 좋은 것들을 많이 배운 모습이었다.이 몇 명은 다름 아닌 장소월이 도원촌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이름이 엽시연이었고 강용과 한 패거리였다.“이번에는 그래도 좋은 일을 했으니, 너희 몇은 먼저 가도 좋아.”녹색 머리와 빨강 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굽혀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착하게 살겠습니다.”“좋은 시민이 되려면, 일단 그 알록달록한 머리부터 어떻게 해 봐. 보기만 해도 정신 사나워.”“하지만 학생은 집에 못 가요. 양쪽 학부모를 다 불러야 해요. 아니면... 계속 경찰서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경찰은 장소월에게 말했다.장소월이 상처를 입었으니, 진짜 따지기 시작하면 엽준수는 감옥에 갈 수도 있다.장소월은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갑자기 밤이 먹고 싶어 줄을 서서 밤을 샀다.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뛰쳐나와 그녀의 목을 조르며 목숨을 앗아가려 했다...나중에 그들 몇 명에게 구조되
엽시연은 사실대로 말했다. 당시 바다에서 장소월을 구해준 사람은 전연우가 아니라 강용이었다.강용이 장소월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장소월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장소월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한 것도 강용 때문이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장소월도 반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게 진짜 사실이라면, 강용이 그녀에게 했던 이상한 말들이 전부 맞아떨어진다. 어쩐지...엽시연은 떠나고 장소월과 엽준수만 남았다.한 여경이 감금실에서 나와 장소월을 불러들였다.엽준수는 수갑을 찬 채 장소월의 맞은편에 앉았고, 여경은 엄숙하게 말했다.“말해봐요. 왜 이 학생을 해쳤는지.”“이년, 모두 이년 때문이에요!”엽준수는 갑자기 감정이 격해졌고, 흉악한 표정은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으세요!”장소월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엽준수를 보며 살의를 드러냈다.“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트러블도 없었어. 만약 진짜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간 일 때문이라면 그냥 말해. 난 꼭 그 팀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너의 장래는 네 손으로 망친 거야!”“닥쳐! 네가 뭘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갑자기 6반에 오지 않았다면 나도 쫓겨나지 않았을 거야. 원래 이번 장학금만 받으면 우리 엄마는 살 수 있었어! 장학금도, 서울대 진학 자격도 없어졌어, 우리 엄마가 전화를 받고... 갑자기 감정이 격해져서 바로 사망했다고... 난 임종도 못 지켰어.”차설아는 순간 멍해졌다.“장소월! 이건 모두 너 때문이야! 왜 전학 왔어? 왜 내 모든 걸 빼앗아가려고 해?”“내 인생은 네가 다 망쳤어! 전부 너 때문이라고! 방금 그 친구가 한 말이 맞아, 넌 재앙을 몰고 오는 년이야!”장소월은 마치 온몸의 힘이 다 빠진 듯했다.은경애가 데리러 왔을 때, 장소월은 이미 영혼을 빼앗긴 몸뚱이만 남은 상태였고, 어떻게 경찰서를 떠났는지 그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집에 도착하고, 장해진의 꾸짖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지만, 장소월은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
“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은경애는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이게 대체 뭔 일이야? 어젯밤에 돌아올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지금은 또 몸살이 나고. 휴, 진짜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은경애가 고개를 들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어머, 연우 도련님, 아가씨 보러 오셨어요? 아가씨께서 아프셔서 제가 뜨거운 물주머니를 가지러 가는 길이에요.”“어젯밤에 경찰서에 있었어요?”전연우는 차갑게 물었다.은경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험상궂은 전연우의 말투에 감히 숨기지 못하고, 어젯밤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어젯밤 11시쯤에 아가씨가 저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고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 제가 가보니, 아가씨는 손을 다치셨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위층으로 올라가 쉬었어요. 제가 오늘 아침에 걱정이 돼서 올라와 보니 저렇게 되었지 뭐예요? 아마 크게 놀랐나 봐요.”“왜 저한테 전화하지 않았죠?”은경애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건... 아가씨가 하지 말라고...”“도련님과 친하지도 않은데, 괜히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셨어요.”폐를 끼친다? 그녀가 저지른 사고 중, 전연우에게 폐를 끼친 일이 어디 한 두 가지란 말인가? 이건 그와 확실히 선을 긋겠다는 뜻일까?그들 사이의 관계는 장소월이 선을 긋는다고 해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전연우는 장소월의 방으로 가 그녀 손 위를 훑어보았고, 또 그녀 팔뚝의 긴 흉터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상처는 이미 아물었고 딱지가 벗겨졌고, 지네처럼 못생긴 흉터가 남았으며 여전히 약간 붉게 물들었다.“왜? 마음 아파?”강만옥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울려 퍼졌다.오늘 그녀는 모란꽃 무늬의 복고풍 붉은 치파오를 입고 개미허리를 흔들며 들어왔다. 침대 옆에 앉아 투명명옥으로 만든 작은 연고 상자를 꺼냈다.강만옥은 뚜껑을 열고, 연고를 식지에 약간 덜어내어 장소월의 팔에 있는 흉터에 발랐다.“귀하신 몸에 흉터라도 나면 안 되지. 앞으로 장씨 가문이 서울에서
장소월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날 주말이었다. 꿈속에서 큰 재난을 겪은 듯 입고 있던 잠옷은 거의 흠뻑 젖었고 온몸은 화로처럼 뜨거웠다.은경애는 죽을 들고 숨을 헐떡였다. 늙어빠진 몸으로 단숨에 5층으로 올라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공허한 눈빛의 장소월을 보았다.은경애가 들어온 것도 몰랐고, 은경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아가씨, 하루 밤낮으로 주무셨는데, 뭐 좀 드세요!”장소월은 촉촉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어젯밤 경찰이 와서 아빠한테 뭐라고 했어요?”“무슨 말인지는 잘 못 알아들었어요. 하지만 아가씨에게 칼을 겨눈 흉악범을 선생님께서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어요.”장소월은 시선을 거두어 손등에 싸인 거즈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이미 엽준수의 결말을 짐작했다.장해진은 반드시 그에게 수천 배로 돌려줄 것이다.감옥에 가더라도 틀림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장소월이 짐작한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장소월은 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손에 너무 힘을 주면 봉합한 부위가 아파 먹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은경애가 방을 나갈 때, 장소월은 여광으로 방에 있는 가구가 많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벽에 있던 그림들이 전부 사라졌다.“아주머니, 제 그림은요?”은경애는 그제서야 말했다.“아가씨가 집으로 들어오신 후에 계속 사고가 생기니 선생님께서 방의 풍수가 좋지 않다고, 며칠 후에 방을 새로 인테리어한다고 하셨어요.”그릇을 들고 있던 장소월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방을 인테리어하면 저는 어디서 자죠?”“아마 연우 도련님네 집에 가서 며칠 묵으셔야 할 거예요.”‘쨍그랑.’은경애는 장소월의 반응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손에 들고 있던 몇 입 먹지도 않은 죽 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장소월은 장해진의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사실이었다니.점심 식사 때, 은경애는 장소월의 짐을 챙겼다.식탁에
장소월은 차라리 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편했지만, 학교는 다음 주에 방학하고,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음 달 21일이 섣달 그믐날이었다.가든 아파트 밑.장소월은 일찍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 아주머니와 백윤서를 발견했다.차가 멈추자, 오 아주머니는 급히 달려와 조수석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장소월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오 아주머니는 그녀의 다친 손을 잡으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어디 한 번 봐요. 아가씨. 왜 또 다치셨어요?”“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피부가 좀 까졌을 뿐이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백윤서는 다가와 다정하게 장소월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소월아, 방은 이미 정리해놓았어. 근데 불편하더라도 나랑 같은 방을 써야 해. 내가 준비한 방이 맘에 들어야 할 텐데...”“좋아.”장소월은 얼굴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혼자 방을 썼고,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함께 자는 습관이 없었다.아파트 위층에 도착했을 때, 백윤서는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방으로 들어갔다.백윤서의 방에 침대가 하나 더 있는 것이 보였다.침대 시트 이불 커버는 모두 오 아주머니가 장소월의 취향에 따라 연한 핑크로 산 것이다. 침대 머리맡에는 핑크 곰돌이가 있었다. 장소월이 원했던 생일 선물이었다. 백윤서의 침대에도 똑같은 위치에 같은 곰돌이가 있었다.남에게 얹혀사는 신세에 장소월은 싫다고 말할 권리가 없었다.“고마워요. 아주 맘에 들어요.”백윤서는 기뻐하며 말했다.“마음에 들면 됐어. 나랑 오 아주머니가 네가 싫어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아직 몸이 낫지 않았으니 일단 쉬어. 나랑 오 아주머니가 짐 정리하면 돼.”장소월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미 다 나았어. 내가 정리할게.”“그럼 내가 도와줄게.”장소월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거절한다면 무례할 것 같았다.짐 정리를 마치고 나니 장소월의 옷이 옷장 대부분을 차지했고, 책을 놓을 자리가 없었다.장소월은 미안한 듯 말했다.“내가 너무 많이 챙겨왔어.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오 아주머니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저녁 6시 30분.백윤서는 비로소 펜을 놓고 책을 덮었다.“소월아, 혹시 아저씨가 너한테 압력을 가하시는 거야? 너처럼 집안이 좋은 애들은 사실 이렇게까지 노력할 필요 없잖아.”장소월은 사로가 끊겨 손동작을 멈추었다.“아버지랑 상관없어요. 그냥 제가 자신한테 요구가 높아서 더 열심히 하는 거예요.”장소월은 감히 멈추지 못했다. 다시는 전생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돈으로 학력을 얻고 싶지 않았다. 송시아처럼 독립적이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도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그렇구나. 확실히 6반은 압력이 크지. 그래도 너무 몸을 혹사하지는 마. 나 먼저 가서 밥 먹을 테니까 너도 너무 늦지마.”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백윤서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장소월도 나머지 절반을 마치고 나갔다.오 아주머니가 만든 요리는 대부분 장소월이 좋아하는 담백한 음식이었다. 백윤서와 전연우가 좋아하는 매운 닭볶음탕도 있었다.장소월은 매운 요리를 본체도 하지 않고 젓가락은 탕수육을 향해 뻗어 입에 넣었다. 변함없는 맛이었다.식탁에서는 잡담하지 않고 조용히 먹는 것이 장해진이 정해준 규칙이었다.그래서 밥을 먹을 때 장소월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백윤서는 따로 사니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오 아주머니. 같이 앉아 먹어요!”“괜찮아요. 먼저 드세요.”장소월은 입안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말했다.“같이 먹어요.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규칙을 지킬 필요 없어요.”오 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닭고기 수프를 끓였어요. 조금 있다가...”오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비쳤다.‘내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에 소월 아가씨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점점 더 우울해지고, 예전처럼 웃지도 않으셔.’장소월의 모습을 본 오 아주머니는 마음이 불편했다.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장소월은 평소보다 밥을 한 그릇 더 먹
전연우: “괜찮아.”“다음부터 많이 마시지 마요. 위도 안 좋으면서.”오 아주머니는 해장국을 끓여 가져왔다.“윤서 씨, 어서 도련님께 먹여주세요.”문밖의 인기척을 들은 장소월은 상관하고 싶지 않아 이어폰을 끼고 영어 단어를 암기했다.저녁 9시 30분.백윤서는 피곤한 기색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 머리맡 캐비닛 위에서 충전을 한 상태로 한참이나 울린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소월아, 전화 왔어.”장소월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소월아?”백윤서가 다가가 발신 번호를 보니 일련의 8888 숫자였다.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충전기를 뽑아서 장소월의 앞에 놓았다.장소월이 이어폰을 빼자 백윤서가 말했다.“전화 왔어.”“고마워.”장소월은 발신자 표시를 보더니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시... 전화 안 해?”장소월은 담담하게 말했다.“잘못 거신 것 같아요.”백윤서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걸어갔다.장소월은 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서야 휴대폰을 다시 들고 읽지 않은 수십 개의 메시지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감정을 억누르고 바로 휴대폰 전원을 껐다.장소월은 11시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백윤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전연우의 방에 가서 보살폈다.얼마 후, 장소월은 누군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지만 곧 다시 잠이 들었다. 그녀는 깊은 잠을 자지 못해서 약간의 인기척에도 잘 깨어났다.백윤서가 방으로 돌아온 후에야, 그녀는 완전히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6시 알람이 울렸다.장소월은 조용히 일어나 씻고, 포니테일을 하고 책가방을 메고, 여전히 잠자고 있는 백윤서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떠났다.6반은 아침 7시부턴 아침 자율학습이 있었다.깨어나 씻고 차를 타고 가면 시간이 비슷했다. 아파트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오 아주머니는 여전히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방에서 나온 장소월을 보고 깜짝 놀랐다.“왜 이렇게 일찍 깼어요? 9시 수업 아니에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