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미처 자신의 발을 걷기도 전에 발목이 잡혔다.“내가 약 발라주고 있는 거 안 보여?”강용은 고개를 들고 여전히 거친 말투로 말했고, 장소월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나한테 약을 발라줘?’학교에서 그녀를 목졸라 죽일 뻔했던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약을 발라준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진짜 약이 맞는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어? 조금만 호의를 보이면 바로 마음이 약해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강용은 이미 손에 약을 붓고 장소월의 부어오른 발목에 바르려는데, 장소월이 즉시 자신의 발을 걷었다.“난... 괜찮아. 약 바를 정도는 아니야.”장소월은 그가 또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강용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웅크렸던 몸을 폈다. 무심하게 고개를 숙인 채 한쪽에서 휴지를 뽑아 자신의 손을 닦으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장소월은 한 걸음 내딛자마자 발목에서 전해오는 고통에 넘어지고 말았다.“너 같은 고집불통은 처음이야. 호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강용은 손에 있던 종이를 버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바로 이때 명랑한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강용? 여기 왜 왔어?”장소월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인시윤이 우아하고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총총 걸어왔다.장소월은 인시윤이 강용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원수를 보듯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럽다는 것을 눈치챘다.바로 이런 눈빛이었다. 6반 전체 학생이 장소월을 바라보던 눈빛. 장소월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강용이 이런 눈빛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인시윤은 장소월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 어디 다쳤어?”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별일 아니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시윤은 다시 여주인의 자태로 팔짱을 끼고 눈앞의 사람을 보며 말했다.“강용... 우리 집은 널 환영하지 않는다고 분명 말했잖아! 당장 나가!”이쪽 상황을 본 방서연은 즉시 하던 이야기
모두들 함부로 숨을 쉬지 못했다.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1초.2초...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시윤뿐이었다.모두 강용이 분노하여 인시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강용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눈이 붉어졌다. 인시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약간 섬뜩하고 두려웠다.강용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너는 너의 어머니가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그게 무슨 소리야?”강용은 무거운 한마디를 던지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거기 서! 서라고! 잡종 새끼야!”방서연은 떠나는 강용이 조금 걱정되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인정아는 바람을 쐬면서 취기가 많이 가셨다. 방금 그 말들은 모두 그녀의 귓가에 들어갔다. 설마... 강용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인정아는 눈썹을 깊게 찡그렸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시윤아, 친구들 앞에서 왜 소란을 피워?”익숙한 목소리에 인시윤은 곧 조용해졌고, 꾸중을 들을까 봐 고개를 숙였다.인정아는 인시윤에게 예의범절에 관한 많은 수업을 신청해주었다. 반 년 넘게 수업을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몇백만 원의 수강료를 전부 환불했다.인시윤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낮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별것 아니야. 엄마.”“이 친구는 누구?”인정아는 한쪽에 앉은 사람을 보며 말했다.시선을 느낀 장소월은 대답하려 했다.“저는...”장소월이 입을 열자마자 인시윤이 말을 가로챘다.“엄마, 나 먼저 방에 가서 선물 뜯어볼게. 너희 재밌게 놀고 있어.”인시윤은 이미 그 아저씨가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인정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성격은 대체 언제 고칠 거야? 친구가 와도 대접할 줄도 모르고.”집사가 다가와 인정아의 귓가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주위에 몰린 구경꾼들은 어느새 모두 흩어졌고, 방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장소월은 전에 성격이 세고 제멋대로였고, 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 강용이 나타나고 나서야 장소월은 서서히 사람들에게 고립되고 억압당했다.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장소월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변명할 수도,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이번 파티는 전체적으로 별로였다.인시윤이 장소월을 이용해 전연우에게 접근하든, 장소월이 두 사람을 사이를 엮어주든, 장소월은 인시윤을 통해 전연우를 떠나고, 장 씨 가문을 떠나면 그만이었기에, 인시윤과 가식적인 우정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장소월의 얇은 숄은 찬 바람을 막기 역부족이었다. 장소월은 인 씨 집안의 하인에게 자신의 발목에 약을 발라 달라고 했고, 30여 분이 지나서야 부기가 가라앉았다.이때 누군가 다가왔다.“저기, 이거 아가씨 핸드폰이세요?”“네! 죄송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아주세요. 지금은 제가 좀 불편해서요. 감사해요.”하인은 말을 이었다.“방금 휴대폰이 계속 울리더라고요.”“네, 알겠어요.”장소월의 드레스는 주머니가 없어 휴대폰을 소지하기 불편했고, 들어올 때 현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장소월은 누가 이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궁금했다.손을 닦고 휴대폰을 들자 마침 전화가 또 걸려왔다.장소월은 전화를 받지 않고 자동으로 끊어질 때까지 옆에 버려두었다.그리고 메시지도 도착했다...“왜 아직도 집에 안 가?”“발은 좀 나아졌어?”“진봉이한테 너 데리러 가라고 할까?”“소월아, 답장 줘.”메시지를 보며 장소월은 아무런 감정의 미동도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대방의 관심에 마음이 따뜻해지겠지만, 장소월에게는 그저 감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강영수가 이런 말을 할 때의 말투와 표정까지 머릿속으로 그려질 정도였다.장소월이 무엇을 하든 그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었고, 무슨 일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다.이것은 장소월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손님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장
하지만 전연우는 회노애락을 종래로 얼굴에 드러내지 않아 백윤서는 가끔 그의 속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전연우는 차갑게 한마디 했다.“쓸데없는 생각 말고 차에 타.”그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백윤서는 전연우를 보던 중 대문에서 걸어 나오는 장소월을 발견했다... 장소월이 진짜 왔다니!하지만 장소월은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고 하인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차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백윤서는 차창을 닫았다.장소월은 하인에게 인사를 했다.“고마워요. 이만 돌아가셔도 돼요. 우리 집 기사님이 근처라고 했으니 곧 올 거예요.”“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네, 감사합니다.”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장소월이 갖고 온 외투는 정 집사의 차에 있었고, 그녀는 찬 바람에 몸을 감싸 안고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발끝을 쳐다보았다.갑자기, 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더니, 몸에는 코트가 걸쳐졌다.남자의 두껍고 검은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장소월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너... 네가 왜 여기 있어?”“어떤 바보가 조심하지 않아서 발을 삐끗하고 욕을 하더라고! 걱정돼서 돌아와 보니 길가에 얼어 죽어가는 고양이가 있지 뭐야?”남자는 부드러운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아, 다 봤었구나, 못 본 줄 알았는데.’“그러니까 그 약도 네가 보낸 거야?”“발은 괜찮아졌어?”강영수는 자연스럽게 얼어붙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장소월은 어쩔 줄 몰라서 입술을 오므리고, 자신의 손을 빼고는 몸 뒤로 갖다 댔다.“많이 좋아졌어. 여기까지 올 필요 없는데. 아저씨가 곧 올 거야!”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오는 차를 보며 장소월은 마치 구세주를 본 듯했다.“나 갈게. 너도 일찍 돌아가서 쉬어!”장소월이 떠나려는데, 갑자기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강영수는 상처받은 눈으로 말했다.“소월아, 요즘 내 메시지도 답장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나 피하는
장소월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강영수가 말을 끊었다.“소월아, 난 그저 네가 걱정돼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말해줘. 고칠게.”강영수의 시퍼런 손은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장소월의 착각인지, 강영수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음이 보였다.강영수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장소월은 늘 마음이 약해졌다.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장소월은 눈빛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자신이 주변의 모든 것에 민감하고 방어의식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미...미안해...”장소월은 횡설수설하며 머리를 쓸어내렸다.“나 돌아가야 해. 너도 일찍 가서 쉬어. 잘자.”장소월은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강영수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문제는 그녀 자신이었다...강영수가 잘자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장소월은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고, 그녀의 검은 치맛자락이 하늘하늘 움직이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장소월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몸에 강영수의 코트를 걸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옷에서는 은은한 민트 향이 풍겨왔다. 강영수의 몸에서 나는 익숙한 향기였다.강영수를 생각하면, 장소월은 마음이 심란했다. 휴대폰을 들고 어떻게 해야 방금 자신이 준 상처를 줄일 수 있는지 고민했다.몇 분 후, 휴대폰 진동이 울려 확인해보니 강영수가 보낸 메시지였다.간단한 두 글자였다: “잘자.”장소월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영수가 잘해줄수록, 그녀는 더욱 자신을 비난했다.검은 카이엔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장소월이 탄 차를 뒤따랐다. 강영수는 몇 분을 기다렸지만 휴대폰이 울리지 않자,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의 그 느낌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또 다른 아우디 차량에서 백윤서가 말했다.“오빠, 우리... 언제 출발해요?”다시
전연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백윤서는 마침 집으로 돌아온 장소월을 보았다.“소월아... 만두 삶았는데 좀 먹을래?”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전 괜찮아요. 가서 잘래요.” 장소월은 복도 손잡이를 잡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실키한 긴 치마가 몸에서 떨어졌고, 부드러운 카펫을 맨발로 밟으며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30분 후, 욕실을 나온 장소월의 긴 머리는 반쯤 말랐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바닥의 옷을 치우지 않아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오직 남자 외투만 질서 정연하고 깔끔하게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한밤중에 침대맡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켜졌고, 그녀는 잠결에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윽하고 차가운 눈동자였다.이튿날 아침, 장소월은 습관대로 7시 30분에 깨어났고, 양치질을 하다가 어젯밤 방으로 돌아오던 모습을 회상했다.너무 피곤해서 치마를 바닥에 벗어던지고 전혀 정리하지 않았다.하지만 장소월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치마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속옷도 보이지 않았다.‘설마 그게 꿈이었나?’장소월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속이 울렁거려 변기에 대고 마구 토하기 시작했다.은경애는 빨랫감을 안고 지나가다가 방안의 기척을 듣고, 귀를 방문에 대고 안의 기척을 살피다가 노크를 했다.“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세요?”10여 분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무슨 일이죠?”장소월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눈에 핏발이 선 그녀의 모습에 은경애는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젯밤 잘 못 주무셨어요?”“아침식사는 이미 준비했으니 식기 전에 내려가 드세요.”“앞으로 저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장소월은 펑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은경애는 문전박대를 받고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이래? 이 집 사람들은 진짜 하나 같이 다 이상하단 말이야.”장소월은 위층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고, 전연우와 백윤서가 떠난 후에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 도착한 장
장소월은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인시윤과 전연우의 식사 자리라니...인시윤은 또 장소월의 귓가에 대고 부탁했다.“소월아, 나랑 같이 가자! 아니면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면 분위기가 어색해지잖아. 동생인 네가 있으면 훨씬 더 자연스럽잖아. 날 도와준다면 네가 수학 팀에 들어가는 일은 내가 책임질게!”“따르릉...”수업 종이 울렸다.“좀 더 생각해볼게. 오빠 평소에 바빠서 오늘 시간이 나는지 모르겠어.”인시윤은 기뻐하며 말했다.“그건 걱정 마. 내가 가는 이상, 무조건 나올 거야. 그럼 저녁에 같이 가는 거다? 나 먼저 갈게!”인시윤의 눈에는 전연우에 대한 호감이 가득했다.장소월은 책상 위의 시험지를 보며 멍을 때리다가 갑자기 등이 무언가에 부딪히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뒤돌아보니 뒤에 앉은 학생의 책이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장소월이 몸을 굽혀 책을 줍고 그에게 건넸다.“누가 너더러 주워 달래?”엽준수의 말투는 조금 거칠었다.장소월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전 수업이 끝나고 인시윤은 장소월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장소월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었다. 전에는 아줌마가 해준 도시락을 갖고 와서 학교 식당의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장소월은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담았지만 입맛에 맞지 않았다. 억지로 먹기는 했지만 많이 먹지는 않았다.인시윤은 전연우에게 완전히 꽂혔는지 휴대폰으로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보냈는지 모른다.“왜 답장을 안 하는 거야! 너희 오빠 평소 이 시간에 뭐해? 점심 12시면 휴식시간이잖아!”장소월은 콩 반찬을 맛보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입맛에 맞지 않았고, 냅킨 한 장을 뽑아 입을 닦았다.“회사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잘 몰라. 아마 회의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얼른 밥부터 먹어, 식겠어.”남천 그룹.전연우는 중앙 자리에 앉아 각 부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팔을 반쯤 들어냈고,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손에 든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휴대폰을 내주었지만, 사실 이 식사 자리에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사이를 엮어주기 위해 장소월은 하는 수 없이 참가해야 했다.인시윤은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음이 울린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전화기 너머에서 낮고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월아, 무슨 일이야?”인시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실망했고, 화난 말투로 말했다.“아저씨 동생 아니고 저예요!”“시윤 씨? 무슨 일이죠?”인시윤은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냉담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차별 대우를 하고 있었다.“제가 보낸 메시지 못 보셨어요? 저 오늘 밥 사주기로 하셨잖아요!”인시윤은 말하면서, 전화기 너머로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표님, 회의 끝나셨어요? 주문하신 음식 이미 사무실로 갖다 놓았습니다.”전연우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기성은은 다음 스케줄을 보고하며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알겠어요. 저녁 몇 시죠?”인시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부러 자신의 전화를 안 받는 걸로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식사 안 하셨어요? 그럼 먼저 식사하세요. 몇 시 퇴근하세요? 저녁에 소월이랑 같이 갈게요. 어디 가서 먹을 지는 저녁에 다시 정하죠.”“네.”“그럼 이만 끊을게요. 우리... 저녁에 봐요!”“네.”전연우는 인시윤이 먼저 전화를 끊기 기다렸고 기성은에게 저녁 스케줄을 물었다.“저녁 7시에 건자재그룹 대표님과 식사 약속이 있으십니다.”“취소하세요.”“네.”...오후 마지막 수업은 자습이었고, 장소월은 훈련동의 강의실로 향했다. 수학 팀의 책임 선생님은 30대 중반의 남자로 이름이 고건우였다. 장소월은 도착하자마자 따로 다른 교실로 불려갔다.잠시 후, 고건우는 또 다른 학생을 데려왔다. 다름 아닌 장소월의 뒤에 앉은 엽준수였다. 그는 문 앞의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고건우는 강단으로 올라가
두 남녀의 뜨거운 열기에 달도 부끄러운 듯 구름 뒤에 몸을 숨겼다...소민아는 숨을 헐떡이다 배에 통증이 느껴져 그를 멈춰 세웠다. “이랑 씨, 나 배가 너무 아파요. 생리 시작하려는 것 같아요.”신이랑은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내가 약 가져다줄게요.”소민아는 이불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침대 무드등이 켜져 있어 상반신을 벗고 있는 신이랑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소민아는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바로 돌렸다. “괜찮아요. 프런트에 전화해서 생리대 좀 가져다 달라고 해줘요. 화장실 한 번 가야겠어요.”“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요.”소민아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괜찮아요. 그냥 생리 날짜가 다가와서 그래요.”하지만 흘러나온 피를 보니 생리혈 같지는 않았다.화장실에서 다시 소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죠?”소민아는 변기에 앉은 채, 잠옷 차림으로 생리대를 들고 다가오는 신이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까요?”“괜찮아요. 들어오지 말아요. 부끄러워요.”“그래요.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신이랑은 발코니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여우림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여우림은 컴퓨터로 메일을 보며 말했다. “이랑 씨가 보낸 메일 봤어요. 그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이랑 씨,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건 거짓말이에요. 민아 씨가 이 일을 알면 이랑 씨를 원망할 거예요...”“저 어떻게 해야 할까요?”“진실을 말해줘요. 그리고 마지막 선택은 민아 씨에게 맡겨야 해요.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어떻게든 만회할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요.”소민아는 물을 마시고 싶어 불편한 배를 움켜쥐고 방에서 나왔다. 진실, 여지 등 단어들이 그녀의 귀에 흘러들어왔다.신이랑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민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부엌에 들어가 컵에 물을 따랐다.하지만 물의 온도가 차가워 전기 포트 전원을 눌렀다.“많이 아파요? 병원에 가볼까요?”소민아는 거절했다.
소민아가 혼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 키를 들고 문을 열려고 할 때, 돌연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이미 떠난 줄 알았던 그 사람이었다.눈앞에 기성은이 나타난 순간,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거두었다.“아까 가지 않았어요? 여기엔 왜 또 나타난 거예요.”기성은이 말했다.“축하해요.”그에게서 축하 인사를 받으니 우습기도, 슬프기도 했다. “축하할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내가 축하해 줘야죠. 곧 시장님의 사위가 될 거잖아요. 앞으로 우리는 같은 계층의 사람이 아니겠네요.”“저 피곤해서 쉬러 올라온 거예요. 빨리 가요. 이랑 씨가 올라와서 당신을 보면 안 되잖아요.”“그리고 앞으로는 오지 말아요. 그 사람이 오해하는 거 싫어요.”기성은이 말했다. “나랑 주가은 씨는 민아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그 입 다물어요!” 소민아는 갑자기 격한 감정을 드러내며 뒤돌아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 말했다. “이제야 변명하는 거예요? 기성은 씨, 내가 신이랑 씨와 결혼하기 전엔 대체 어디에 있었어요?”“내가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 하나 없었잖아요. 송시아가 당신이 죽었다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당신이 정말 죽었다면 나도 같이 죽으려고 했단 말이에요. 휴대폰 메시지로도 다 이야기했잖아요, 이랑 씨와 결혼한 건 그냥 속임수일 뿐이라고. 근데 기성은 씨는요? 나한테 신경도 안 썼어요!”“기성은 씨, 일이 이미 벌어진 뒤엔 후회하고 변명한다고 한들 되돌릴 수 없어요.”“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앞으로 난 이랑 씨와 잘살아 볼 생각이니까 또다시 나타나 내 삶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기성은은 더는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텅 빈 복도 안 희미한 조명이 그의 어두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알겠어요.”기성은은 뒤
“집이 작다고 생각되면, 결혼식 끝나고 신혼집 구하러 가요.”소민아는 그의 다리 위에 누워 감자칩 봉지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건 됐어요. 이 아파트 조용하고 환경도 좋잖아요.”“그래요, 민아 씨 말대로 해요...”그때, 무언가 냄새를 맡은 소민아는 신이랑의 옷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담배 피웠어요? 안 피우는 거 아니었어요?”“이제 안 피울게요.”신이랑은 정직하게 주머니 속 담배와 지갑 속 돈 전부를 소민아에게 건넸다.“앞으로 내 재산은 민아 씨가 모두 관리해요. 은행 비밀번호는 민아 씨 생일이에요.”“저 돈 관리 못 해요... 망쳐버릴지도 몰라요...”“괜찮아요. 천천히 해나가면 돼요. 출근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동안 민아 씨랑 같이 집에 있을게요.”“그래요.”또 한 주가 지나 소민아의 결혼식이 다가왔다.결혼식은 교회에서 5개 테이블 정도만 차려놓고 소규모로 진행되었다.그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찾아왔다.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이랑의 팔짱을 낀 채 경건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소민아의 눈에 기성은과 주가은이 들어왔다.주가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초대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일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민아 씨, 내가 준비한 신혼 선물이에요.”주가은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목소리까지도 기품 있게 부드러운 것이 한눈에 봐도 명문가 귀한 아가씨임을 알 수 있었다. 예전 기성은도 주가은과 그녀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랬다. 주가은이 나타나기만 하면, 기성은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향했었다.신군회는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주 시장님 몸은 괜찮아지셨는지요?”주가은은 신군회가 다가오자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며 기성은 뒤로 숨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저 고마움을 전하고자 선물을 드리고 싶어 온 것이니 더는 방해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신이랑은 많은 식재료를 사 들고 아파트에 들어왔다.소민아는 완전히 신이랑의 집으로 이사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슬리퍼를 갈아 신고 겉옷을 가지러 안방에 들어갔다. 옷장을 열어보니 안엔 그녀의 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이랑의 옷은 평소 자주 입는 셔츠와 긴 바지 몇 벌뿐이었다.그 아래 열려있는 서랍을 살펴보니 그녀의 속옷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소민아는 옷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연 밀려오는 답답함에 들고 있던 잠옷을 침대에 던져버리고 머리를 움켜쥔 채, 불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순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텅 비어버렸다.그때 신이랑이 들어왔다. “민아 씨, 왜 그래요?”소민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래요. 괜찮아요. 좀 쉬면 나아질 거예요.”“잠깐 눈 좀 붙여요. 밥 다 되면 깨워줄게요.”신이랑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민아는 돌연 몸을 돌려 신이랑의 무릎 위에 올라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한바탕 격렬한 키스가 끝난 뒤.“이랑 씨, 우리 한 번 더 할까요?”“민아 씨, 이런 식으로 그 사람 잊으려고 하지 말아요. 후회할 거예요.”소민아는 온몸에 힘이 빠져버린 듯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 자신에게 후회할 여지조차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랑 씨, 난 어렸을 때부터 반항아였어요. 부모님이 늘 옆에 안 계셔서, 그분들이 날 버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듣지 않았어요.”“이랑 씨는 부모님이 나를 위해 신중하게 골라주신 남편감이에요. 이번에는... 한 번 부모님의 말씀대로 해보고 싶어요.”“기성은 씨... 단순히 그 사람을 잊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진심으로... 이랑 씨와 안정적인 생활을 해보고 싶어요.”“나 거절하지 말아요. 네?”신이랑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소민아와 코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민아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소민아
신이랑은 사진작가들에게 촬영을 잠시 멈추라고 말했다.2층 휴게실로 돌아온 뒤, 소민아는 바로 소파에 드러누웠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나 옷 갈아입으러 갈게요.”“내가 도와줄까요?”소민아는 화들짝 놀랐다.신이랑도 별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뱉은 말이었다.“미안해요. 내가...”“괜찮아요. 그럼 와서 지퍼 좀 풀어줄래요? 손이 닿지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잘됐네요.”이제 결심도 내렸고, 그녀와 신이랑은 엄연한 부부 사이다. 또한 지난번에 볼 것은 다 보지 않았던가?소민아는 신이랑의 손을 잡고 탈의실로 향했다. 안에 들어선 순간, 신이랑이 그녀를 문에 밀치고는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민아 씨,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마음 변함없을 거예요.”소민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요. 믿을게요. 이랑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변함없을 거라는 신이랑의 그 말에서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 묻어나왔다.신이랑, 그는 분명 좋은 남편이 될 것이다...사실 모두의 말이 맞다. 신이랑은 분명 평생을 함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탈의실에서 나왔을 때, 소민아의 얼굴은 완전히 새빨개져 있었다.소민아는 화장실 위치를 묻고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달려나갔다.그렇게 침착하고 차분하고 선비 같은 사람이 이토록 낯 뜨거운 행동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소민아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씻었다. 이후 볼일을 보고 나와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끄고 고개를 들었을 때, 등 뒤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기성은은 예전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슴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소민아는 휴지 몇 장을 뽑아 손을 닦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주가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성은 씨... 저 반지 잃어
소민아는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결혼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서둘러 결혼 준비를 해야 했다. 이번 결혼식은 많은 사람을 초대하지는 않지만, 매우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다.촬영 스튜디오로 가는 길, 소민아는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말했다.“이랑 씨, 우리 휴대폰 매장에 잠깐 들렀다 가요.”신이랑은 별다른 질문 없이 대답했다.“그래요.”휴대폰 매장에 들어간 뒤, 소민아는 새로운 번호를 받고 기존 번호는 해지해 버렸다.사직서를 내는 일은 이미 송시아의 허락을 받았다. 그녀는 절차에 따라 반나절 만에 짐을 정리하고 회사를 떠났다. 신이랑도 그녀와 함께 회사에 동행했다.휴대폰 매장에서 나오면서, 소민아는 최신 모델 휴대전화 두 개를 구입했다. 신이랑과 커플로 맞춘 것이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신이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이랑 씨에게 주는 신혼 선물이에요. 이랑 씨, 우리 결혼하면...나도 이랑 씨한테 잘해주도록 노력할게요...”신이랑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민아 씨는 그럴 필요 없어요. 결혼해 주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기뻐요.”“나한테 와줘서 고마워요!”소민아는 그의 품에 안겨 힘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녀는 예전 사용했던 유심카드를 부러뜨렸다.‘기성은 씨, 이제 우린 완전히 끝이에요!’‘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갈게요.’‘이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거예요.’유심카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 소민아는 완전히 마음을 비워냈다.스튜디오에 들어가 보니, 유리 진열장엔 신이랑이 준비한 웨딩드레스들이 가득 줄지어 있었다.소민아는 먼저 메이크업을 한 후, 탈의실로 가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신이랑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민아가 탈의실에서 나온 순간, 신이랑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소민아는 처음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지라 자신 없이 쭈뼛거리
연락처를 삭제하고 한바탕 괴로움이 지나가고 나니, 이어 처음 가져보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예전 기성은과 함께하고 싶어 했던 마음의 강렬함 만큼이나, 포기의 결심 또한 단호했다. 단 1초 만에 그를 놓아버린 것이다.그녀와 기성은은 이런 면에선 비슷한 사람이다. 쉽게 결정하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만약 정말로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돌아보지 않고 깨끗이 끊어낸다.호텔.“민아 씨가 오해하고 있네요. 기성은 씨, 제가 소민아 씨한테 가서 설명할게요. 당신이 나랑 약혼하는 이유는 그저 주 씨 가문을 노리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걸요. 민아 씨도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민아 씨 많이 좋아하잖아요, 안 그래요?”기성은은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주가은은 그의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냉정하고 차갑기로 소문난 기성은이지만, 그 역시 사람이기에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다만 그들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됐어요.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아가씨, 편히 쉬세요.”기성은은 호텔 방을 떠난 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민아는 신이랑의 품에 안겨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가만히 누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신이랑은 지난밤 그녀를 밤새도록 간호했다. 해열제를 먹었음에도 자정 전까지 반복적으로 고열에 시달렸다.이제 그녀는 완전히 나았다.소민아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걸어갔다. 어지러웠던 거실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소파 위에 놓여 있던 담요도 정연하게 개어져 있었다.신이랑은 몇 시간 자지 못했음에도, 옆자리가 비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일어나 거실로 달려갔다. 소파에 앉아 평소처럼 웃으며 TV를 보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신이랑이 비현실적인 느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소민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랑 씨, 방금 엄마한테 전화 왔어요. 점심
그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평소 여드름이 자주 나는 소민아에겐 너무나도 부러운 피부였다.소민아는 한바탕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마음속 모든 것을 모조리 털어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침대에 올라와서 잘래요?”신이랑이 기쁨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소민아는 이미 이불을 들어 올렸다. 신이랑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민아 씨...”“싫으면 됐어요.”신이랑이 침대에 올라간 뒤, 두 사람은 나란히 함께 누웠다. 그의 팔에 기댄 순간, 감기에 걸렸는지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아무리 자도 끝없이 잠이 쏟아졌다.“뭐라도 좀 먹을래요?”소민아가 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먹고 싶지 않아요.”“좀 더 자고 싶어요.”“그래요, 자요. 내가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그 사람이 주가은과 약혼을 한다고 하니, 예전 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겠어요. 이랑 씨, 미안해요. 여전히 날 받아줄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랑 씨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이제 더 이상 불안한 삶은 살고 싶지 않아요. 한 사람과 안정적으로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그래요. 우리 행복하게 잘살아 봐요.” 신이랑이 소민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민아 씨, 어디 아파요? 이마가 왜 이렇게 뜨거워요?”신이랑은 자신의 볼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녀의 체온은 확실히 정상이 아닌듯했다.신이랑은 침대에서 내려가 체온계를 가져왔다. 체온을 재보니 38.5도로 펄펄 끓고 있었다.신이랑은 급히 물을 끓이고 그녀에게 해열제를 먹인 후 죽을 만들었다.그는 소민아를 부축해 자신의 품에 기대어 앉게 했다. “일단 이것 좀 먹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요.”소민아는 힘없이 눈을 뜨고 천천히 한 입 삼켰다.그녀는 며칠 동안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데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하여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
“네.”그녀의 짤막한 대답에 백혜진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소민아가 정말로 신이랑을 받아들인 걸까?아니면 기성은에게 약혼녀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포기해버린 걸까?지금은 차가 막히는 시간이다.신이랑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소민아는 쇼핑몰 입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신이랑을 기다리고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들고 소민아 앞에 섰다. “민아 씨,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자신을 향한 신이랑의 시선을 느낀 백혜진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편집장님,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택시도 불렀어요. 바로 회사에 복귀할 거예요.”신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동안 민아 씨 돌봐줘서 고마웠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백혜진이 말했다. “괜찮아요. 얼른 민아 씨 집에 데려다주세요. 또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요.”그때 소민아의 눈에 쇼핑몰에서 걸어 나오는 한 쌍의 남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영혼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신이랑을 따라 떠났다.신이랑은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탄 뒤에야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내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에 도착했다.거실은 평소처럼 약간 어질러져 있었다.신이랑은 우산을 접어 현관에 두고,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 소민아는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신이랑은 현관에서 깨끗한 슬리퍼를 가져온 뒤 그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 끈을 풀고 양말까지 벗겼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발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소민아는 고개를 숙인 채 신이랑을 바라보며 억눌렀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잘해줘요?”“민아 씨는 내 아내니까요.”그 짧은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소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면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한다.신이랑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고백한 적이 없다. 심지어 ‘좋아한다’라는 말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