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이 미처 자신의 발을 걷기도 전에 발목이 잡혔다.“내가 약 발라주고 있는 거 안 보여?”강용은 고개를 들고 여전히 거친 말투로 말했고, 장소월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나한테 약을 발라줘?’학교에서 그녀를 목졸라 죽일 뻔했던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약을 발라준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진짜 약이 맞는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어? 조금만 호의를 보이면 바로 마음이 약해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강용은 이미 손에 약을 붓고 장소월의 부어오른 발목에 바르려는데, 장소월이 즉시 자신의 발을 걷었다.“난... 괜찮아. 약 바를 정도는 아니야.”장소월은 그가 또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강용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웅크렸던 몸을 폈다. 무심하게 고개를 숙인 채 한쪽에서 휴지를 뽑아 자신의 손을 닦으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장소월은 한 걸음 내딛자마자 발목에서 전해오는 고통에 넘어지고 말았다.“너 같은 고집불통은 처음이야. 호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강용은 손에 있던 종이를 버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바로 이때 명랑한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강용? 여기 왜 왔어?”장소월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인시윤이 우아하고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총총 걸어왔다.장소월은 인시윤이 강용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원수를 보듯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럽다는 것을 눈치챘다.바로 이런 눈빛이었다. 6반 전체 학생이 장소월을 바라보던 눈빛. 장소월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강용이 이런 눈빛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인시윤은 장소월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 어디 다쳤어?”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별일 아니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시윤은 다시 여주인의 자태로 팔짱을 끼고 눈앞의 사람을 보며 말했다.“강용... 우리 집은 널 환영하지 않는다고 분명 말했잖아! 당장 나가!”이쪽 상황을 본 방서연은 즉시 하던 이야기
모두들 함부로 숨을 쉬지 못했다.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1초.2초...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시윤뿐이었다.모두 강용이 분노하여 인시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강용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눈이 붉어졌다. 인시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약간 섬뜩하고 두려웠다.강용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너는 너의 어머니가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그게 무슨 소리야?”강용은 무거운 한마디를 던지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거기 서! 서라고! 잡종 새끼야!”방서연은 떠나는 강용이 조금 걱정되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인정아는 바람을 쐬면서 취기가 많이 가셨다. 방금 그 말들은 모두 그녀의 귓가에 들어갔다. 설마... 강용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인정아는 눈썹을 깊게 찡그렸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시윤아, 친구들 앞에서 왜 소란을 피워?”익숙한 목소리에 인시윤은 곧 조용해졌고, 꾸중을 들을까 봐 고개를 숙였다.인정아는 인시윤에게 예의범절에 관한 많은 수업을 신청해주었다. 반 년 넘게 수업을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몇백만 원의 수강료를 전부 환불했다.인시윤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낮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별것 아니야. 엄마.”“이 친구는 누구?”인정아는 한쪽에 앉은 사람을 보며 말했다.시선을 느낀 장소월은 대답하려 했다.“저는...”장소월이 입을 열자마자 인시윤이 말을 가로챘다.“엄마, 나 먼저 방에 가서 선물 뜯어볼게. 너희 재밌게 놀고 있어.”인시윤은 이미 그 아저씨가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인정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성격은 대체 언제 고칠 거야? 친구가 와도 대접할 줄도 모르고.”집사가 다가와 인정아의 귓가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주위에 몰린 구경꾼들은 어느새 모두 흩어졌고, 방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장소월은 전에 성격이 세고 제멋대로였고, 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 강용이 나타나고 나서야 장소월은 서서히 사람들에게 고립되고 억압당했다.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장소월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변명할 수도,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이번 파티는 전체적으로 별로였다.인시윤이 장소월을 이용해 전연우에게 접근하든, 장소월이 두 사람을 사이를 엮어주든, 장소월은 인시윤을 통해 전연우를 떠나고, 장 씨 가문을 떠나면 그만이었기에, 인시윤과 가식적인 우정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장소월의 얇은 숄은 찬 바람을 막기 역부족이었다. 장소월은 인 씨 집안의 하인에게 자신의 발목에 약을 발라 달라고 했고, 30여 분이 지나서야 부기가 가라앉았다.이때 누군가 다가왔다.“저기, 이거 아가씨 핸드폰이세요?”“네! 죄송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아주세요. 지금은 제가 좀 불편해서요. 감사해요.”하인은 말을 이었다.“방금 휴대폰이 계속 울리더라고요.”“네, 알겠어요.”장소월의 드레스는 주머니가 없어 휴대폰을 소지하기 불편했고, 들어올 때 현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장소월은 누가 이 시간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궁금했다.손을 닦고 휴대폰을 들자 마침 전화가 또 걸려왔다.장소월은 전화를 받지 않고 자동으로 끊어질 때까지 옆에 버려두었다.그리고 메시지도 도착했다...“왜 아직도 집에 안 가?”“발은 좀 나아졌어?”“진봉이한테 너 데리러 가라고 할까?”“소월아, 답장 줘.”메시지를 보며 장소월은 아무런 감정의 미동도 없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대방의 관심에 마음이 따뜻해지겠지만, 장소월에게는 그저 감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강영수가 이런 말을 할 때의 말투와 표정까지 머릿속으로 그려질 정도였다.장소월이 무엇을 하든 그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었고, 무슨 일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다.이것은 장소월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손님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장
하지만 전연우는 회노애락을 종래로 얼굴에 드러내지 않아 백윤서는 가끔 그의 속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전연우는 차갑게 한마디 했다.“쓸데없는 생각 말고 차에 타.”그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백윤서는 전연우를 보던 중 대문에서 걸어 나오는 장소월을 발견했다... 장소월이 진짜 왔다니!하지만 장소월은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고 하인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었다.전연우가 차 앞으로 돌아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백윤서는 차창을 닫았다.장소월은 하인에게 인사를 했다.“고마워요. 이만 돌아가셔도 돼요. 우리 집 기사님이 근처라고 했으니 곧 올 거예요.”“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네, 감사합니다.”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장소월이 갖고 온 외투는 정 집사의 차에 있었고, 그녀는 찬 바람에 몸을 감싸 안고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발끝을 쳐다보았다.갑자기, 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더니, 몸에는 코트가 걸쳐졌다.남자의 두껍고 검은 외투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장소월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너... 네가 왜 여기 있어?”“어떤 바보가 조심하지 않아서 발을 삐끗하고 욕을 하더라고! 걱정돼서 돌아와 보니 길가에 얼어 죽어가는 고양이가 있지 뭐야?”남자는 부드러운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아, 다 봤었구나, 못 본 줄 알았는데.’“그러니까 그 약도 네가 보낸 거야?”“발은 괜찮아졌어?”강영수는 자연스럽게 얼어붙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장소월은 어쩔 줄 몰라서 입술을 오므리고, 자신의 손을 빼고는 몸 뒤로 갖다 댔다.“많이 좋아졌어. 여기까지 올 필요 없는데. 아저씨가 곧 올 거야!”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오는 차를 보며 장소월은 마치 구세주를 본 듯했다.“나 갈게. 너도 일찍 돌아가서 쉬어!”장소월이 떠나려는데, 갑자기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강영수는 상처받은 눈으로 말했다.“소월아, 요즘 내 메시지도 답장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나 피하는
장소월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강영수가 말을 끊었다.“소월아, 난 그저 네가 걱정돼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말해줘. 고칠게.”강영수의 시퍼런 손은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장소월의 착각인지, 강영수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음이 보였다.강영수가 이런 표정을 지으면 장소월은 늘 마음이 약해졌다. 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장소월은 눈빛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자신이 주변의 모든 것에 민감하고 방어의식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미...미안해...”장소월은 횡설수설하며 머리를 쓸어내렸다.“나 돌아가야 해. 너도 일찍 가서 쉬어. 잘자.”장소월은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강영수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문제는 그녀 자신이었다...강영수가 잘자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장소월은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고, 그녀의 검은 치맛자락이 하늘하늘 움직이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장소월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몸에 강영수의 코트를 걸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옷에서는 은은한 민트 향이 풍겨왔다. 강영수의 몸에서 나는 익숙한 향기였다.강영수를 생각하면, 장소월은 마음이 심란했다. 휴대폰을 들고 어떻게 해야 방금 자신이 준 상처를 줄일 수 있는지 고민했다.몇 분 후, 휴대폰 진동이 울려 확인해보니 강영수가 보낸 메시지였다.간단한 두 글자였다: “잘자.”장소월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강영수가 잘해줄수록, 그녀는 더욱 자신을 비난했다.검은 카이엔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장소월이 탄 차를 뒤따랐다. 강영수는 몇 분을 기다렸지만 휴대폰이 울리지 않자,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의 그 느낌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또 다른 아우디 차량에서 백윤서가 말했다.“오빠, 우리... 언제 출발해요?”다시
전연우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백윤서는 마침 집으로 돌아온 장소월을 보았다.“소월아... 만두 삶았는데 좀 먹을래?”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전 괜찮아요. 가서 잘래요.” 장소월은 복도 손잡이를 잡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실키한 긴 치마가 몸에서 떨어졌고, 부드러운 카펫을 맨발로 밟으며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했다.30분 후, 욕실을 나온 장소월의 긴 머리는 반쯤 말랐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바닥의 옷을 치우지 않아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오직 남자 외투만 질서 정연하고 깔끔하게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한밤중에 침대맡에 놓여 있던 핸드폰이 켜졌고, 그녀는 잠결에 흐릿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윽하고 차가운 눈동자였다.이튿날 아침, 장소월은 습관대로 7시 30분에 깨어났고, 양치질을 하다가 어젯밤 방으로 돌아오던 모습을 회상했다.너무 피곤해서 치마를 바닥에 벗어던지고 전혀 정리하지 않았다.하지만 장소월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치마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속옷도 보이지 않았다.‘설마 그게 꿈이었나?’장소월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속이 울렁거려 변기에 대고 마구 토하기 시작했다.은경애는 빨랫감을 안고 지나가다가 방안의 기척을 듣고, 귀를 방문에 대고 안의 기척을 살피다가 노크를 했다.“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세요?”10여 분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무슨 일이죠?”장소월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눈에 핏발이 선 그녀의 모습에 은경애는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젯밤 잘 못 주무셨어요?”“아침식사는 이미 준비했으니 식기 전에 내려가 드세요.”“앞으로 저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장소월은 펑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은경애는 문전박대를 받고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이래? 이 집 사람들은 진짜 하나 같이 다 이상하단 말이야.”장소월은 위층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고, 전연우와 백윤서가 떠난 후에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 도착한 장
장소월은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인시윤과 전연우의 식사 자리라니...인시윤은 또 장소월의 귓가에 대고 부탁했다.“소월아, 나랑 같이 가자! 아니면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면 분위기가 어색해지잖아. 동생인 네가 있으면 훨씬 더 자연스럽잖아. 날 도와준다면 네가 수학 팀에 들어가는 일은 내가 책임질게!”“따르릉...”수업 종이 울렸다.“좀 더 생각해볼게. 오빠 평소에 바빠서 오늘 시간이 나는지 모르겠어.”인시윤은 기뻐하며 말했다.“그건 걱정 마. 내가 가는 이상, 무조건 나올 거야. 그럼 저녁에 같이 가는 거다? 나 먼저 갈게!”인시윤의 눈에는 전연우에 대한 호감이 가득했다.장소월은 책상 위의 시험지를 보며 멍을 때리다가 갑자기 등이 무언가에 부딪히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뒤돌아보니 뒤에 앉은 학생의 책이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장소월이 몸을 굽혀 책을 줍고 그에게 건넸다.“누가 너더러 주워 달래?”엽준수의 말투는 조금 거칠었다.장소월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전 수업이 끝나고 인시윤은 장소월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장소월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었다. 전에는 아줌마가 해준 도시락을 갖고 와서 학교 식당의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장소월은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담았지만 입맛에 맞지 않았다. 억지로 먹기는 했지만 많이 먹지는 않았다.인시윤은 전연우에게 완전히 꽂혔는지 휴대폰으로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보냈는지 모른다.“왜 답장을 안 하는 거야! 너희 오빠 평소 이 시간에 뭐해? 점심 12시면 휴식시간이잖아!”장소월은 콩 반찬을 맛보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입맛에 맞지 않았고, 냅킨 한 장을 뽑아 입을 닦았다.“회사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잘 몰라. 아마 회의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얼른 밥부터 먹어, 식겠어.”남천 그룹.전연우는 중앙 자리에 앉아 각 부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팔을 반쯤 들어냈고,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손에 든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휴대폰을 내주었지만, 사실 이 식사 자리에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사이를 엮어주기 위해 장소월은 하는 수 없이 참가해야 했다.인시윤은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음이 울린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전화기 너머에서 낮고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월아, 무슨 일이야?”인시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실망했고, 화난 말투로 말했다.“아저씨 동생 아니고 저예요!”“시윤 씨? 무슨 일이죠?”인시윤은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냉담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차별 대우를 하고 있었다.“제가 보낸 메시지 못 보셨어요? 저 오늘 밥 사주기로 하셨잖아요!”인시윤은 말하면서, 전화기 너머로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표님, 회의 끝나셨어요? 주문하신 음식 이미 사무실로 갖다 놓았습니다.”전연우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기성은은 다음 스케줄을 보고하며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알겠어요. 저녁 몇 시죠?”인시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부러 자신의 전화를 안 받는 걸로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식사 안 하셨어요? 그럼 먼저 식사하세요. 몇 시 퇴근하세요? 저녁에 소월이랑 같이 갈게요. 어디 가서 먹을 지는 저녁에 다시 정하죠.”“네.”“그럼 이만 끊을게요. 우리... 저녁에 봐요!”“네.”전연우는 인시윤이 먼저 전화를 끊기 기다렸고 기성은에게 저녁 스케줄을 물었다.“저녁 7시에 건자재그룹 대표님과 식사 약속이 있으십니다.”“취소하세요.”“네.”...오후 마지막 수업은 자습이었고, 장소월은 훈련동의 강의실로 향했다. 수학 팀의 책임 선생님은 30대 중반의 남자로 이름이 고건우였다. 장소월은 도착하자마자 따로 다른 교실로 불려갔다.잠시 후, 고건우는 또 다른 학생을 데려왔다. 다름 아닌 장소월의 뒤에 앉은 엽준수였다. 그는 문 앞의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고건우는 강단으로 올라가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총괄 비서? 그녀와 소피아가?그녀는 성세 그룹에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더러 소피아와 총괄 비서 자리를 두고 다투라니.비서팀엔 능력 있는 비서들이 수두룩한데 왜 하필 그녀를 불러들인단 말인가.소피아도...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직원이라고 할 수 있다. 수 년간 회사에 다니며 꽤 많은 인맥을 쌓았을 것이다.이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경 송시아의 머릿속엔 갖은 교활한 생각이 가득 담겨 있으니 말이다. 소피아는... 어쩌면 처음부터 송시아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예전 회사에서의 음침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이다.소민아가 송시아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소피아는 이미 안에 앉아있었다. 다들 소민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소민아가 말했다.“송 부대표님, 찾으셨어요?”소파에 앉아있던 송시아는 손을 휘저어 옆에 있던 간병인을 내보냈다.“사소한 일일 뿐이니 긴장하지 말아요. 일단 앉아요.”소민아의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소피아는 깍듯하게 송시아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부대표님, 목마르시죠? 물 마시세요.”송시아는 옅은 웃음만 지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까지 오는 길이의 짧은 단발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깔끔하고 정교했지만, 몸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잔뜩 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내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 짐작하고 있을 거예요. 기 비서가 돌연 사직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어요.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앉아 맡은 일을 처리해야 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내 예전 비서였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비서직을 맡고 있어요. 나에게 있어 두 사람 모두 회사 내 가장 뛰어난 직원이죠. 혹시 추천할만한 사람 있어요? 아니면 대담하게 스스로 이 자리에 앉고 싶다고 나서지 않을래요?”소민아는 소피아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자신을 향한 송시아의 눈빛
“앞당겨졌다고요? 주말로 결정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 준비 아무것도 못 했어요. 이런 옷차림으로 가면 실례 아닐까요?”신이랑이 점차 속도를 줄여 신호등 앞에 멈추었다. 그는 긴장감에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내가 있잖아요. 뭘 입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민아 씨 자체니까요. 그냥 편하게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고 부담 갖지 말아요.”“네.”회사에 도착한 뒤, 신이랑과 소민아는 연이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회사 직원들은 이제 그다지 의아해하지 않았다.하지만 소민아에 관한 루머들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몰랐다.필경 그녀는 얼마 전 제 입으로 기성은과 사귄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비서팀을 떠난 뒤로는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와 신이랑 편집장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소민아는 회사 뒷담화 방에서 꽃뱀 딱지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몰래 소민아가 결국 두 사람 중 누구에게 갈지에 대해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지금은 신이랑에게 건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이번 내기를 위해 꽤 많은 돈을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소민아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신이랑의 비서로서 오늘의 일정을 보고하고 일련의 계약서들을 처리했다.소민아가 서류 몇 장을 신이랑에게 내밀었다.“몽크 만화 스튜디오에서 보내온 계약서예요. 이랑 씨 사인이 필요해요.”신이랑은 서류를 받은 뒤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오늘 민아 씨가 할 일은 날 도와 원고를 봐주는 것과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대본을 보고 수정 의견을 내주는 거예요.”신이랑이 옆에 있던 태블릿을 가져와 내부 자료를 열어주었다. 안엔 아직 방영되지 않은 드라마 대본들이 가득했다. 이는 모두 구르미 시리즈에서 수정과 편집을 거듭한 것들이었다.소민아는 순간 수치심이 들었다. 부서를 옮긴 이후로 그녀는 줄곧 신이랑의 사무실에서 드라마를 보며 간식을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심지어 물까지도 신이랑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