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볼펜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인시윤과 전연우의 식사 자리라니...인시윤은 또 장소월의 귓가에 대고 부탁했다.“소월아, 나랑 같이 가자! 아니면 무슨 말을 나눠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면 분위기가 어색해지잖아. 동생인 네가 있으면 훨씬 더 자연스럽잖아. 날 도와준다면 네가 수학 팀에 들어가는 일은 내가 책임질게!”“따르릉...”수업 종이 울렸다.“좀 더 생각해볼게. 오빠 평소에 바빠서 오늘 시간이 나는지 모르겠어.”인시윤은 기뻐하며 말했다.“그건 걱정 마. 내가 가는 이상, 무조건 나올 거야. 그럼 저녁에 같이 가는 거다? 나 먼저 갈게!”인시윤의 눈에는 전연우에 대한 호감이 가득했다.장소월은 책상 위의 시험지를 보며 멍을 때리다가 갑자기 등이 무언가에 부딪히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뒤돌아보니 뒤에 앉은 학생의 책이 땅에 떨어진 것이었다. 장소월이 몸을 굽혀 책을 줍고 그에게 건넸다.“누가 너더러 주워 달래?”엽준수의 말투는 조금 거칠었다.장소월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전 수업이 끝나고 인시윤은 장소월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장소월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먹었다. 전에는 아줌마가 해준 도시락을 갖고 와서 학교 식당의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장소월은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담았지만 입맛에 맞지 않았다. 억지로 먹기는 했지만 많이 먹지는 않았다.인시윤은 전연우에게 완전히 꽂혔는지 휴대폰으로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보냈는지 모른다.“왜 답장을 안 하는 거야! 너희 오빠 평소 이 시간에 뭐해? 점심 12시면 휴식시간이잖아!”장소월은 콩 반찬을 맛보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입맛에 맞지 않았고, 냅킨 한 장을 뽑아 입을 닦았다.“회사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나도 잘 몰라. 아마 회의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얼른 밥부터 먹어, 식겠어.”남천 그룹.전연우는 중앙 자리에 앉아 각 부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 팔을 반쯤 들어냈고,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손에 든
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휴대폰을 내주었지만, 사실 이 식사 자리에 전혀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사이를 엮어주기 위해 장소월은 하는 수 없이 참가해야 했다.인시윤은 휴대폰을 귓가에 대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음이 울린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전화기 너머에서 낮고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월아, 무슨 일이야?”인시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조금 실망했고, 화난 말투로 말했다.“아저씨 동생 아니고 저예요!”“시윤 씨? 무슨 일이죠?”인시윤은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냉담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차별 대우를 하고 있었다.“제가 보낸 메시지 못 보셨어요? 저 오늘 밥 사주기로 하셨잖아요!”인시윤은 말하면서, 전화기 너머로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대표님, 회의 끝나셨어요? 주문하신 음식 이미 사무실로 갖다 놓았습니다.”전연우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기성은은 다음 스케줄을 보고하며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알겠어요. 저녁 몇 시죠?”인시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부러 자신의 전화를 안 받는 걸로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직도 식사 안 하셨어요? 그럼 먼저 식사하세요. 몇 시 퇴근하세요? 저녁에 소월이랑 같이 갈게요. 어디 가서 먹을 지는 저녁에 다시 정하죠.”“네.”“그럼 이만 끊을게요. 우리... 저녁에 봐요!”“네.”전연우는 인시윤이 먼저 전화를 끊기 기다렸고 기성은에게 저녁 스케줄을 물었다.“저녁 7시에 건자재그룹 대표님과 식사 약속이 있으십니다.”“취소하세요.”“네.”...오후 마지막 수업은 자습이었고, 장소월은 훈련동의 강의실로 향했다. 수학 팀의 책임 선생님은 30대 중반의 남자로 이름이 고건우였다. 장소월은 도착하자마자 따로 다른 교실로 불려갔다.잠시 후, 고건우는 또 다른 학생을 데려왔다. 다름 아닌 장소월의 뒤에 앉은 엽준수였다. 그는 문 앞의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고건우는 강단으로 올라가
장소월은 정 집사에게 전화해 먼저 백윤서를 데려가라고 하고, 인시윤 집안의 자가용을 타고 전연우의 회사로 향했다.인 씨 집안의 인하 그룹에 비해 장 씨 집안은 별 볼 일 없는 벼락부자에 불과했다. 도심에 있는 인하 빌딩은 가치가 수백억이었고, 앞으로 가치가 최소 수십 배는 더 될 것이다.전연우와 인시윤이 함께 한다면, 전연우에게는 큰 이득이었다.차 안의 운전기사는 칸막이를 당겼다. 인시윤은 교복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틴트를 바르고 머리를 풀어헤치고는 장소월에게 말했다.“이뻐?”장소월은 가슴에서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떠보듯 물었다.“너... 진짜 우리 오빠 좋아해?”인시윤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맑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당연히 좋아하지, 아니면 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나러 가겠어.”“너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데 괜찮아? 너 대학 졸업하면 오빠는 거의 서른이야. 넌 아직 한창이니... 어쩌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쉽게 마음을 주지 말고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인시윤은 콧방귀를 뀌었다.“나이가 많긴 하지. 하지만 여덟 살 정도야 뭐. 우리 부모님은 12살 차이 나지만 사이가 아주 좋아. 우리 아빠가 엄마 말을 얼마나 잘 듣는데, 완전 애처가야. 하지만 난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 지금은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아닐 수 있잖아. 하지만 난 지금까지 나를 이 정도로 안중에 두지 않는 남자를 본 적이 없어.”인시윤은 장소월을 덥석 잡으려 말했다.“소월아, 그거 알아? 내가 인 씨 집안의 딸인 걸 알면서도 날 욕한 사람은 처음이야. 다른 사람들처럼 나한테 아부하지도 않아.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가식적인 사람을 많이 만나봤는데. 전부 내 신분이 아니면 우리 집안의 돈을 목적으로 접근해왔어. 그런 사람들 진짜 짜증나.”“...”“내 스커트 어때? 예뻐? 좀 추울까?”장소월은 생각에 잠긴 듯 천진난만한 인시윤을 바라보았다. ‘넌 아직 전연
예전 장소월은 전연우에게 매달리려 자주 이곳에 왔기에 회사 안은 손바닥 보듯 훤했다. 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너무나도 까다로운 손님이었으니 말이다.직원이 말했다.“아가씨, 전 대표님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대표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시라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따뜻한 물 한 잔 주세요. 고마워요.”장소월은 인시윤이 34층으로 올라가자 두 사람을 방해하기 싫어 옆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네... 알겠습니다.”프런트 직원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맙다고? 장소월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솟을 일이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놓여있는 잡지를 들고 무심히 펼쳐보았다.그때 직원이 마침 일 때문에 32층에 도착한 기성은을 불러세웠다.“기 비서님, 이건 대표님에게 드릴 서류입니다.”기성은은 서류를 받은 뒤 휴게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소월인가?만약 장소월이라면 조금 전 올라간 건 누구의 뒷모습이란 말인가?기성은이 눈을 축 내리깔았다.“왜 온 거예요?”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잘 모르겠어요. 오자마자 저기에 들어가 앉더라고요. 기 비서님, 설마 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쓸데없는 곳에 관심 두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요.”“알겠습니다.”기성은의 말에 직원은 더는 묻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시간은 흐르고 흘러 장소월은 이제 몇 잔의 물을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갖고 있던 시험지도 모두 다 풀었다.필통을 정리하고 나서 바깥을 쳐다보니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전연우가 이미 퇴근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 시 반이었다.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은 장소월 뿐만 아니라 대표 자리에 앉아있는 인시윤도 마찬가지였다.20분을 더 기다리니 여덟 시가 거의 되어갔다.그녀는 더는 기다리지 않고 책가방을 메고 자리
장소월이 천성 빌딩을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늦어 버스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가 눈앞 신호동 앞에 멈춰 섰다.지금은 서울시의 퇴근 시간이라 거리엔 차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그녀가 가방에서 차비를 꺼내려던 순간, 검은색 차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연우가 창문을 내리고 준수한 얼굴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타!”인시윤은 왜 차에 없는 거지? 장소월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가 차 뒷자리에 올라탄 뒤 문을 닫았다. 차 안에 전연우와 단둘이 있으니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네가 인시윤을 어떻게 알아?”그가 백미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제가 반을 옮겼어요. 그래서 이제 같은 반이에요.”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회사 문 앞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이어 얇은 치마를 입은 인시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견디다니.그녀는 타고난 체질이 냉해 겨울만 되면 손발은 항상 차가운 상태이다.인시윤이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전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내려왔어요?”“뭘 먹을래요?”전연우는 핸들을 돌리며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인시윤은 이미 온갖 산해진미를 모두 맛본 사람이다. 가장 즐겨 먹던 것들도 이제 다 질려버려 갑자기 물으니 무엇을 먹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먹는 것이니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소월아, 넌 뭘 먹고 싶어? 추천할만한 식당 있어?”그녀는 이 난제를 장소월에게 떠넘겼다.멍하니 앉아있던 장소월이 그녀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은평관으로 가요.”“은평관? 거긴 어디야? 왜 난 들어본 적 없지? 그냥 대게 먹으러 가자. 그곳에 가면 따뜻한 자스민 차도 끓여줘. 나 추워죽겠단 말이야.”전연우가 말했다.“주소.”인시윤이 식당 이름을 말했다.“신사처럼 겉옷을 벗어 나한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장소월은 그들에게 공간을 양보하며 가장 뒤에서 걸어갔다. 종업원이 문을 열자 정갈한 일본식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바닥엔 보일러가 켜져 있어 얼어붙었던 몸을 녹일 수 있었다.장소월이 목에 걸었던 목도리를 풀어 문 앞 옷걸이에 걸었다.“먼저 주문해요! 난 화장실에 가야겠어요.”“그래. 가!”인시윤은 메뉴판을 전연우에게 밀며 말했다.“같이 주문해요. 뭘 먹고 싶어요? 이번엔 봐주지 않을 거예요.”전연우가 말했다.“좋을 대로 해요.”인시윤의 몸은 어느덧 전연우의 옆자리까지 가 있었다. 그녀가 자주 먹던 세트를 주문하고는 말했다.“일단 이렇게 시키고 소월이가 돌아오면 더 추가하라고 해요.”화장실에서 돌아온 장소월은 룸마다 단독 종업원이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주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종업원이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아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펼쳐보다가 채소 비빔밥을 시켰다.그녀는 요즘 별로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체중은 감소하지 않았다.장소월은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밥상은 그리 크지 않아 다리를 펴면 상대방에 닿을 정도였다.밥상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차를 본 그녀는 손으로 유리컵을 감쌌다. 방금전 찬물에 손을 씻어 추웠던 차에 말이다.인시윤은 흥미진진하게 전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장소월은 간혹 인시윤의 말에 대꾸를 할 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이러하다. 나른하고 가라앉아있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창밖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것이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내일 크리스마스잖아. 소월아, 너 약속 있어?”그 말에 고개를 돌린 장소월은 전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이어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약속 없어.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다른 흥취반 수업을 하려고.”“그래? 몇 시쯤 끝나?”“9시쯤에
인시윤이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전연우는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룸을 나왔다. 가게 종업원들이 분명 그녀를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줄 것이다. 그녀의 신분이라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른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진 채 녹초가 되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고작 3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렇게까지 취하다니. 처음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향기가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연속 마신 것이다. 만약 전연우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 역시 인시연처럼 인사불성이 되었을 것이다.그녀는 술을 깨려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연우가 매정히 닫아버렸다.“뭐 하는 거예요! 빨리 문을 열어요, 빨리요... 빨리...”그녀가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솜사탕이라도 삼킨 듯 부드럽고 나른했다.“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아있어.”“짜증 나요! 창문도 안 열어주고! 열어주기 싫으면 말아요. 다음부턴 절대 오빠 차에 앉지 않을 거예요.”장소월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순간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전연우의 시선이 조심스레 옆으로 향했다. 삐진 건가?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삐졌단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떼를 쓰며 난리를 피웠을 텐데.“바깥이 추워서 그래. 찬바람 맞으면 감기 걸려.”모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못마땅한 듯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런 가식적인 말 믿지 않아요. 오빠는 나한테 상처만 주잖아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오빠예요. 이제 영수를 제외하고, 날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몸이 강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왜 멈춰요?”“너 방금 뭐라고 했어?”차디찬 얼음이 산산조각이라도 난 듯 살을 에일 듯한 한기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니 장소월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농후했던 취기가 단번에 깨
장소월이 그의 손목을 잡고 약간 차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집에 돌아가요. 윤서 언니가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저도 피곤해서 돌아가 쉬고 싶어요.”전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아래턱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였다.“넌 아직 어려서 사랑이 뭔지 몰라. 소월이가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면 이 오빤 막지 않아. 너에게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줄 수도 있어.”장소월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와 맞설 때가 아니니 이 화를 스스로 삼켜낼 수밖에 없다.“알... 알겠어요.”이젠 정말 술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겠다. 술에 취해 또 그에게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말을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장소월은 완전히 취기가 사라졌다.집에 돌아가니 열한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거실에 들어가 더듬거리며 벽에 붙어있는 전원을 켰다. 그제야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장소월은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발을 뗐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국수를 삶아.”계단에 발을 디디려던 장소월의 귀에도 그 무례한 요구가 들려왔다.“제... 제가 아주머니를 불러올게요.”“내 말 못 알아들어?”전연우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린 채 소파에 기대에 앉았다.장소월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상태를 살펴보니 분명 또다시 위병이 도진 것 같았다. 요즘 자주 공복에 술을 마셔댄 데다 오늘 밤 해산물 요리도 많이 먹었으니...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한 거다.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식자재를 찾았다. 그녀는 늦은 시간이라 너무 피곤해 음식을 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분명 집에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도 기어코 이곳으로 왔다. 최근 들어 전연우는 자주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집을 나갔단 말인가.장소월은 365일 단 하루도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물을 끓이고 채소를 썰고 국수를 넣었다. 그녀는 먹지 않을 테니 일 인분만 끓였다.국수가 다
신이랑이야말로 이곳의 총편집장이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녀는 일하러 회사에 나온 것이 아니라 호캉스를 하러 나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신이랑이 손가락을 톡 움직여 그녀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그건 내가 허락한 일이에요. 민아 씨 업무의 일부분이기도 하고요... 민아 씨가 바쁘게 돌아치든, 편하게 누워있든 나한텐 중요하지 않아요. 난 그냥 매일 보고 싶을 때 민아 씨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소민아가 체리를 가득 들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먹먹해진 얼굴로 말했다.“저 정말 모르겠어요. 그날 선을 봤던 이후로 우린 그 어떤 접촉도 없었잖아요. 왜 그때부터 저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거예요?”“이랑 씨... 혹시 예전 우리 만난 적 있어요?”신이랑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는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신이랑이 책상 위에 놓인 휴지 몇 장을 뽑아 손의 물기를 닦고는 말했다.“한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할까요? 민아 씨한텐 지금 남자친구가 있으니 강요하지 않을게요. 아직 시간 많으니까 난 민아 씨 기다릴 수 있어요.”기약 없는 기다림을 견디는 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소민아는 그 누구보다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한번 결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예전 대학 입시를 앞두었을 때, 부모님은 의학 전공을 권유했지만, 그녀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경제학을 고집했다. 어렵지도, 또 그리 간단하지도 않은 전공이었다. 이 길을 선택하면 이어받을 가업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에게도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다.다들 경제학은 배워도 소용없고, 졸업하기도 힘들 거라 했었다. 하지만 소민아는 그런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순조롭게 졸업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교 수석이라는 명예까지 쟁취해냈다. 서울대가 얼마나 경쟁이 심한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이번엔 기성은이다...모든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겨도 소민아는 한 번 마음을 준 이상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와 쉽게 끝낼
소민아가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을 때, 소피아가 팔짱을 끼고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소민아 씨, 정말 어리석네요. 총괄 비서 자리를 거절하고 그 구멍가게 같은 회사 비서직에 만족하다니요. 소민아 씨답지 않은데요? 듣기론 기 비서님을 차버리고 이젠 신이랑에게 붙었다면서요! 소민아 씨... 예전엔 이렇게 인기가 많은 여자인 줄 몰랐네요.”“함께 일했던 정을 생각해 나한테 알려줘요. 기 비서님과 신이랑 씨 중 누가 침대에서 더 잘해요?”소민아는 조금도 참지 않고 바로 따귀를 날렸다. 소피아가 분노에 차올라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쏘아보았다.“이 교활한 년, 감히 날 때려?”“교활한 건 소피아 씨죠! 앞으론 그 입 좀 똑바로 놀려요. 한낱 비서일 뿐이면서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예요! 그렇게 총괄 비서 자리에 욕심을 부리다가 대표님이 깨어나시는 날엔 직위를 박탈당하는 건 물론이고, 성세 그룹에서 쫓겨나게 될 거예요.”소피아는 분노가 가득 이글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화를 분출할 구멍을 찾지 못해 그 낯빛은 점점 더 볼썽사나워졌다.“소민아 씨, 대표님께서 신혼 첫날밤 변고를 당하셨고, 지금은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누워있다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아요? 이 회사의 통제권이 최종적으로 누구 손에 들어갈지 어떻게 알겠어요. 경고하는데 되도록 날 피해 다녀요! 권력을 잡는 순간... 가장 먼저 소민아 씨를 쫓아버릴 테니까!”소민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대표님이 의식이 없으시다는 거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또 누가 알고 있어요?”소피아는 약간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소민아 씨한테만 뒷배가 있는 줄 알았어요? 이제 소민아 씨 좋은 날도 끝났어요!”그녀와 송시아는 정말 손을 잡고 한배를 탄 것이 틀림없다. 대표님이 의식불명인 틈을 타 회사를 집어삼키려는 것이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소민아는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 10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곧 닫히려는 순간, 안으로 들어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총괄 비서? 그녀와 소피아가?그녀는 성세 그룹에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더러 소피아와 총괄 비서 자리를 두고 다투라니.비서팀엔 능력 있는 비서들이 수두룩한데 왜 하필 그녀를 불러들인단 말인가.소피아도...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직원이라고 할 수 있다. 수 년간 회사에 다니며 꽤 많은 인맥을 쌓았을 것이다.이 일은 분명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경 송시아의 머릿속엔 갖은 교활한 생각이 가득 담겨 있으니 말이다. 소피아는... 어쩌면 처음부터 송시아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예전 회사에서의 음침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이다.소민아가 송시아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소피아는 이미 안에 앉아있었다. 다들 소민아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소민아가 말했다.“송 부대표님, 찾으셨어요?”소파에 앉아있던 송시아는 손을 휘저어 옆에 있던 간병인을 내보냈다.“사소한 일일 뿐이니 긴장하지 말아요. 일단 앉아요.”소민아의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소피아는 깍듯하게 송시아에게 물을 한 잔 따라주었다.“부대표님, 목마르시죠? 물 마시세요.”송시아는 옅은 웃음만 지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까지 오는 길이의 짧은 단발머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깔끔하고 정교했지만, 몸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잔뜩 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내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 짐작하고 있을 거예요. 기 비서가 돌연 사직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렸어요.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리에 앉아 맡은 일을 처리해야 해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내 예전 비서였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비서직을 맡고 있어요. 나에게 있어 두 사람 모두 회사 내 가장 뛰어난 직원이죠. 혹시 추천할만한 사람 있어요? 아니면 대담하게 스스로 이 자리에 앉고 싶다고 나서지 않을래요?”소민아는 소피아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자신을 향한 송시아의 눈빛
“앞당겨졌다고요? 주말로 결정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 준비 아무것도 못 했어요. 이런 옷차림으로 가면 실례 아닐까요?”신이랑이 점차 속도를 줄여 신호등 앞에 멈추었다. 그는 긴장감에 경직되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내가 있잖아요. 뭘 입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민아 씨 자체니까요. 그냥 편하게 밥 한 끼 먹는다고 생각하고 부담 갖지 말아요.”“네.”회사에 도착한 뒤, 신이랑과 소민아는 연이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회사 직원들은 이제 그다지 의아해하지 않았다.하지만 소민아에 관한 루머들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몰랐다.필경 그녀는 얼마 전 제 입으로 기성은과 사귄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비서팀을 떠난 뒤로는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와 신이랑 편집장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소민아는 회사 뒷담화 방에서 꽃뱀 딱지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몰래 소민아가 결국 두 사람 중 누구에게 갈지에 대해 내기까지 하고 있었다.지금은 신이랑에게 건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이번 내기를 위해 꽤 많은 돈을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소민아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신이랑의 비서로서 오늘의 일정을 보고하고 일련의 계약서들을 처리했다.소민아가 서류 몇 장을 신이랑에게 내밀었다.“몽크 만화 스튜디오에서 보내온 계약서예요. 이랑 씨 사인이 필요해요.”신이랑은 서류를 받은 뒤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오늘 민아 씨가 할 일은 날 도와 원고를 봐주는 것과 고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대본을 보고 수정 의견을 내주는 거예요.”신이랑이 옆에 있던 태블릿을 가져와 내부 자료를 열어주었다. 안엔 아직 방영되지 않은 드라마 대본들이 가득했다. 이는 모두 구르미 시리즈에서 수정과 편집을 거듭한 것들이었다.소민아는 순간 수치심이 들었다. 부서를 옮긴 이후로 그녀는 줄곧 신이랑의 사무실에서 드라마를 보며 간식을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심지어 물까지도 신이랑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