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장소월은 그들에게 공간을 양보하며 가장 뒤에서 걸어갔다. 종업원이 문을 열자 정갈한 일본식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바닥엔 보일러가 켜져 있어 얼어붙었던 몸을 녹일 수 있었다.장소월이 목에 걸었던 목도리를 풀어 문 앞 옷걸이에 걸었다.“먼저 주문해요! 난 화장실에 가야겠어요.”“그래. 가!”인시윤은 메뉴판을 전연우에게 밀며 말했다.“같이 주문해요. 뭘 먹고 싶어요? 이번엔 봐주지 않을 거예요.”전연우가 말했다.“좋을 대로 해요.”인시윤의 몸은 어느덧 전연우의 옆자리까지 가 있었다. 그녀가 자주 먹던 세트를 주문하고는 말했다.“일단 이렇게 시키고 소월이가 돌아오면 더 추가하라고 해요.”화장실에서 돌아온 장소월은 룸마다 단독 종업원이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주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종업원이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아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펼쳐보다가 채소 비빔밥을 시켰다.그녀는 요즘 별로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체중은 감소하지 않았다.장소월은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밥상은 그리 크지 않아 다리를 펴면 상대방에 닿을 정도였다.밥상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차를 본 그녀는 손으로 유리컵을 감쌌다. 방금전 찬물에 손을 씻어 추웠던 차에 말이다.인시윤은 흥미진진하게 전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장소월은 간혹 인시윤의 말에 대꾸를 할 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이러하다. 나른하고 가라앉아있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창밖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것이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내일 크리스마스잖아. 소월아, 너 약속 있어?”그 말에 고개를 돌린 장소월은 전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이어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약속 없어.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다른 흥취반 수업을 하려고.”“그래? 몇 시쯤 끝나?”“9시쯤에
인시윤이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전연우는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룸을 나왔다. 가게 종업원들이 분명 그녀를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줄 것이다. 그녀의 신분이라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른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진 채 녹초가 되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고작 3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렇게까지 취하다니. 처음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향기가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연속 마신 것이다. 만약 전연우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 역시 인시연처럼 인사불성이 되었을 것이다.그녀는 술을 깨려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연우가 매정히 닫아버렸다.“뭐 하는 거예요! 빨리 문을 열어요, 빨리요... 빨리...”그녀가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솜사탕이라도 삼킨 듯 부드럽고 나른했다.“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아있어.”“짜증 나요! 창문도 안 열어주고! 열어주기 싫으면 말아요. 다음부턴 절대 오빠 차에 앉지 않을 거예요.”장소월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순간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전연우의 시선이 조심스레 옆으로 향했다. 삐진 건가?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삐졌단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떼를 쓰며 난리를 피웠을 텐데.“바깥이 추워서 그래. 찬바람 맞으면 감기 걸려.”모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못마땅한 듯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런 가식적인 말 믿지 않아요. 오빠는 나한테 상처만 주잖아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오빠예요. 이제 영수를 제외하고, 날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몸이 강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왜 멈춰요?”“너 방금 뭐라고 했어?”차디찬 얼음이 산산조각이라도 난 듯 살을 에일 듯한 한기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니 장소월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농후했던 취기가 단번에 깨
장소월이 그의 손목을 잡고 약간 차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집에 돌아가요. 윤서 언니가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저도 피곤해서 돌아가 쉬고 싶어요.”전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아래턱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였다.“넌 아직 어려서 사랑이 뭔지 몰라. 소월이가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면 이 오빤 막지 않아. 너에게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줄 수도 있어.”장소월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와 맞설 때가 아니니 이 화를 스스로 삼켜낼 수밖에 없다.“알... 알겠어요.”이젠 정말 술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겠다. 술에 취해 또 그에게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말을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장소월은 완전히 취기가 사라졌다.집에 돌아가니 열한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거실에 들어가 더듬거리며 벽에 붙어있는 전원을 켰다. 그제야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장소월은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발을 뗐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국수를 삶아.”계단에 발을 디디려던 장소월의 귀에도 그 무례한 요구가 들려왔다.“제... 제가 아주머니를 불러올게요.”“내 말 못 알아들어?”전연우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린 채 소파에 기대에 앉았다.장소월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상태를 살펴보니 분명 또다시 위병이 도진 것 같았다. 요즘 자주 공복에 술을 마셔댄 데다 오늘 밤 해산물 요리도 많이 먹었으니...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한 거다.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식자재를 찾았다. 그녀는 늦은 시간이라 너무 피곤해 음식을 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분명 집에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도 기어코 이곳으로 왔다. 최근 들어 전연우는 자주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집을 나갔단 말인가.장소월은 365일 단 하루도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물을 끓이고 채소를 썰고 국수를 넣었다. 그녀는 먹지 않을 테니 일 인분만 끓였다.국수가 다
다음 날 아침, 장소월은 편안하고 꿀맛 같았던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방을 나서자마자 또 누군가 들어올까 봐 문을 걸어 잠갔다.아침을 먹은 뒤 학교에 가니 여덟 시 정도였고, 남들보다 일찍 도착했다.인시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장소월을 찾았다.“소월아, 어제 너와 연우 오빠는 왜 먼저 간 거야? 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한테 호되게 혼났어. 이제 통금시간까지 생겼다니까.”어젯밤 과음을 했던 탓인지 아니면 푹 쉬지 못한 탓인지 인시윤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어제는... 나도 좀 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어제 가기 전 오빠가 일부러 종업원들에게 널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주라고 신신당부했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별일 없었지?”인시윤은 희미한 정신으로 고개를 저었다.“별일 없었어. 하지만 어떻게 날 혼자 거기에 남겨두고 갈 수가 있어? 동생만 챙기고 왜 난 안 챙기는데! 만에 하나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진짜 나쁜 남자야! 신사의 품격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니까!”장소월 또한 전연우가 인시윤을 혼자 내버려 둘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장소월은 최대한 그를 두둔했다.“오빠는... 원래 그랬어. 머릿속엔 온통 일 뿐이야. 당시엔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널 데려다주다가 파파라치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너한테도 안 좋잖아.”인시윤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 그런 생각으로 한 거라면 됐어. 하지만 다음에도 똑같이 행동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수업 종이 울렸다.인시윤은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오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 45분의 시험 시간을 추가하니 학생들에겐 15분의 점심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그들은 또 다른 건물에 가야 했다.장소월도 어제의 올림피아드 성적을 확인하러 그들을 따라갔다.그녀는 인시윤과 함께 첫 줄에 앉았다.인시윤이 그녀를 위로했다.“자신을 믿고 마음을
마지막 1분, 고건우는 이미 물건을 챙겨 교실에서 나갔다.장소월은 다급히 자신의 책을 가방에 넣고는 인시윤에게 말했다.“오늘은 너 먼저 가. 난 다른 일이 있어.”인시윤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홀연히 사라져버린 장소월에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장소월은 고건우를 쫓아가 말했다.“선생님, 잠시만요.”고건우가 걸음을 멈추었다.“장... 장소월?”“네, 맞습니다. 선생님. 저번 시험 성적을 알고 싶어서요.”고건우가 웃으며 말했다.“수업까지 들었으면서 성적이 왜 궁금해? 이미 합격한 거잖아.”장소월은 여전히 께름칙했다.“제 눈으로 제 성적을 보면 안 될까요?”“그건 뭣 하러 봐? 네 시험지는 지금 나한테 없어. 넌 시험 잘 봤어. 특히 마지막 문제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풀었잖아. 그중 두 번째 방법에선 대학 수학 지식을 사용했어. 그 공식을 보고 솔직히 정말 놀랐다니까.”고건우가 감탄하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하지만...”“고 선생님!”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으로 지나가던 선생님 한 명이 그를 불렀다. 고건우가 얼버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건우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행동할수록 장소월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이번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오는 기회를 인시윤 덕분에 얻었을까 봐 불안했다.만약 정말 그랬다면 엽준수에겐 너무나도 불공정한 일이 아니겠는가?인시윤...장소월은 꼭 그 팀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그녀는 교실에 돌아간 뒤 엽준수와 똑똑히 얘기해보려고 그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엽준수의 짝꿍인 서기우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오늘 아침에도 오지 않았어.”인시윤이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갔다.그녀가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치는 장소월을 보며 말했다.“너 무슨 일 있어?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있잖아. 고 선생님은 왜 내 성적을 발표하지 않으시는 걸까? 혹시 네가 선생님에게 말해 날 올림피아드 팀에 들여 보내준 거야?
오전 시간은 바삐 이어지는 수업 속에 파묻혀 빠르게 지나갔다.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다른 반은 반급 회의를 조직하거나 영화 보기, 게임을 하기 등 활동을 하지만 1반은 아직 두 시간의 자율 학습 시간이 남아있어 9시 반이 되어서야 하교할 수 있다.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로 이루어진 반이기 때문에 오락성 활동은 전혀 없다. 대부분 빼곡히 짜인 계획안에서 쉴 틈 없이 돌아친다. 하지만 때로는 서프라이즈도 있다. 오늘은 학생 모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주었다.장소월은 피아노와 댄스 수업을 해야 했기에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할 수 없어 숙제로 낸 시험지 두 장을 챙겨 집에 가서 완성해야 했다. 장소월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마침 6반을 지나던 그때, 그들도 마침 수업을 마치고 하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윤서가 책을 정리하다가 그녀를 보고는 말했다.“소월아...”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윤서 언니.”두 사람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백윤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은 크리스마스라 마침 나도 널 찾으러 가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이건 너한테 줄 크리스마스 카드야. 메리크리스마스.”장소월이 교실을 둘러보니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있었다. 그밖에도 채색 리본, 풍선... 등 장식품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겨냈다. 또한 학생들의 손엔 모두 서로 주고받은 선물들이 쥐어져 있었다.“이건 내가 주는 거야.”서문정이 서랍 안에서 카드와 선물을 꺼내 장소월에게 건네주었다.장소월은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난처한 얼굴로 선물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가방을 열고 1반에서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내주었다. 위엔 금색 방울이 달려있었는데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 꽤나 값이 나갔다.“난 너희들한테 줄 게 별로 없네. 작지만 이거라도 받아.”인시윤이 자신의 것을 장소월에게 주었기에 그녀는 마침 두 개를 갖고 있어 두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다. 이건 서문정이 장소월에게서 받은 첫
서문정이 말했다.“맞아. 쟤들은 질투를 하는 거야...”허철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내가 장소월을 질투한다고? 진짜 웃겨.”평소 과묵하던 방서연도 말을 보탰다.“실력이 부족한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의 뛰어남도 부정하다니. 장소월은 변했어. 최소한 예전만큼 얄밉지는 않아.”“네 생각은 어때? 강용?”강용이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던져버렸다. 그는 검은색 반팔티를 입고 있었는데 팔뚝에 드러난 문신은 신비롭고도 야만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앞으로 내 앞에서 장소월은 언급도 하지 마. 역겨우니까.”그 음산한 분위기에 아무도 더는 말하지 못했다.장소월이 학교 밖으로 나가자 마침 정 집사도 학교에 도착했다.길은 별로 막히지 않아 빠르게 달렸지만 그래도 몇 분이나 지각했다.두 시간의 피아노 연습을 마쳤다. 이제 남은 두 시간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시간이었다.그녀는 몇 번 수업을 빠진 바람에 그동안 했던 스트레칭이 무색하게 또다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돌연 아랫배에서 강한 고통이 밀려왔다. 이어 다리 사이에서 뜨겁고 끈적한 액체가 천천히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익숙한 그 느낌이었다. 은은한 피 냄새가 올라오기도 했다.그녀는 다급히 화장실로 가 바지를 벗고 흔적을 살폈다. 그러고는 탈의실로 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생리대를 가지고 화장실로 돌아왔다.깨끗이 정리한 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변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자아이들은 일반적으로 13세부터 15세 사이에 초경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생에서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시작됐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걱정되어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했다. 검사결과는 모두 정상이었고 의사의 말로는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 늦게 시작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하여 그녀는 한약으로 몸 상태를 조절했을 뿐 크게 마음을 두지는 않았다.그 후 자궁암이 진행되었고 위까지 전이되었다. 그녀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그녀는 이제야
강렬한 반응 때문에 장소월은 저녁에 먹은 음식물까지 모두 토해냈다. 복통이 더더욱 심해져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 그 바람에 피가 바늘 안으로 거꾸로 흘러갔고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은경애가 간호사를 불러왔다. 간호사는 어쩔 수 없이 장소월의 다른 손에 링거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은경애는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걱정스레 물었다.“간호사님, 설마 무슨 일 생기는 건 아니겠죠?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하는데 다른 방법 더 없어요?”간호사가 링거의 속도를 조절하며 말했다.“생리 시기에 큰 반응을 일으키는 환자는 병원에 매일 수십 명이 들어와요.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이제 더이상 방법이 없어요. 흑설탕을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고 복부를 부드럽게 문지르면 증상을 조금 완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간호사가 나가자 은경애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가서 흑설탕을 사올까요?”장소월이 물을 마시려 손을 뻗자 은경애는 곧바로 물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장소월은 입을 헹구고는 힘없이 침대에 누우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아주머니도 옆방에서 잠시 눈을 붙여요. 곧 날이 밝아요. 내일 또 일하셔야 하잖아요.”“아가씨가 이렇게 아픈데 제가 어떻게 자요. 제가 배를 문질러 줄게요.”은경애는 거친 손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고 장소월의 옷 위에 올려 부드럽게 배를 문질렀다.“좀 괜찮아졌어요?”장소월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네. 괜찮아졌어요.”“그럼 더 자요! 내일 아침 깨어났을 땐 아프지 않을 거예요.”“네.”그녀의 손길은 오 아주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웠기에 장소월은 얼마 지나지 않아 꿈나라로 향했다.시간은 어느덧 다섯 시, 날이 밝았다.은경애는 뻐근해진 손을 꺼내려 일어섰지만 그녀가 멈추는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장소월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때문에 조금도 쉴 수 없다. 계속 이렇게 문지르다간 손목이 꺾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가엾은 마음이 피어오른다...바로 그때 은경애는 문
소민아는 눈썹을 찌푸리고 말을 이어갔다.“만약 아니라면, 송시아는 왜 나더러 반드시 이랑 씨와 결혼해 신씨 집안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우린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라는 거 이랑 씨도 인정하잖아요. 나한텐 기성은 씨가 있어요... 이런 말이 이랑 씨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지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송시아가 소월 언니 목숨을 담보로 날 협박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송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소월 언니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게 될 거예요.”“이랑 씨, 사실 제 머릿속에 예전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어요.”“송시아는... 제 언니가 맞아요...”소민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송시아가 그녀의 언니이고, 두 사람은 혈연관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소민아는 어린 시절 송시아를 가장 의지하고 좋아했지만, 이젠 그녀와의 관계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민아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송시아가 돈을 벌기 위해 더러운 곳에 가서 늙은 아저씨들의 노리개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지 생활비를 벌어 동생을 키우기 위함이었다.그녀 역시 당시의 고됨이 송시아를 이토록 권력에 눈이 먼 괴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그녀가 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엔 종래로 그녀를 해친 적이 없다.소민아는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예전 기억이 모두 돌아오니 송시아에게 드는 감정은 애증이에요. 절 살리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던 언니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눈물을 흘리는 소민아를 본 신이랑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꼭 껴안고는 등을 토닥여주었다.“나 민아 씨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나 다 알고 있어요. 한 번도 민아 씨를 힘들게 할 생각 없었어요. 난 영원히 민아 씨 편이라는 거 기억해요.”“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뭘 요구하든 다
6시 퇴근 후, 소민아는 호텔에 들러 신이랑의 컴퓨터 가방과 옷을 챙기고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그녀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딸깍 문이 열렸다.신이랑이 편한 잠옷을 입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은 아까보다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왔어요?”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민아는 빠르게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네. 이랑 씨 물건 가져왔어요. 빠진 건 없는지 확인해봐요.”거실에 들어와 보니 깜빡하고 청소하지 못했던 거실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공기청정기까지 작동하고 있었고,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놓았던 카펫도 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구석구석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이랑 씨가 청소한 거예요?”소민아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푹 쉬라고 했잖아요. 이런 일은 왜 한 거예요!”심지어 식탁엔 신이랑이 만든 음식까지 놓여 있었고 주방에선 채 완성되지 않은 음식이 조리되고 있었다.신이랑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 있는 물건을 받아들었다.“손 씻고 와요. 내가 갈비탕 만들고 있어요. 곧 다 돼요.”소민아는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모두 삼켜버리고 말머리를 돌렸다.“그럼 약은 먹었어요? 좀 좋아졌어요? 머리 아직도 아파요?”신이랑이 머리를 저었다.“이제 안 아파요. 내가 가서 젓가락 가져올게요. 앉아요.”실은 소민아는 물건을 전해준 뒤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가버린단 말인가?그녀는 여전히 그의 마음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소민아는 어쩔 수 없이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신이랑이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와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많이 만들었으니까 얼른 먹어요. 내일까지 놔두면 상할 거예요.”“나 혼자 먹으라고요? 이랑 씨도 앉아요. 저 다 못 먹어요.”“그래요.”신이랑은 앞치마를 벗고 마지막으로 국을 가져온 뒤 그녀 옆에 앉았다.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채 입안에 밥을 넣고 있었다. 신이랑은 그동안 줄곧 그녀에게 음식을
송시아는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소민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언니가 했던 고생 넌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민아야, 그때 언니가 널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 미안해. 다 언니 잘못이야. 널 잃어버렸던 그 날 밤... 얼마나 많이 찾아다녔는지 몰라.”“이제 언니한테 가족은 너밖에 없어.”“난 다시는 너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지난 시간 너한테 잘못했던 거 하나하나 다 보상해 줘야지.”“이번 한 번만 언니 말대로 해줄래? 기성은은 잊고 신이랑과 결혼해. 언니가 있는 한 신씨 가문에서도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지금으로선 널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야.”“소씨 가문은 널 도울 능력이 없어.”소민아가 말했다.“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요, 이랑 씨 좋죠. 하지만 전 그 사람한테 마음 없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성은 씨라고요. 꼭 이렇게까지 절 몰아붙여야겠어요?”“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주선호는 지금 신장암 말기야. 치료될 가능성은 제로고. 지금은 선거 시즌이잖아. 신군회도 후보자 중 한 명이야. 신군회도 성세 그룹 임원들과 밀접히 관계를 맺고 있으니 분명 당선될 거야. 신군회가 시장 자리에 앉으면 지금 그 사람이 맡고 있는 비서실장 자리는 공석이 돼. 신이랑이 정계에 진출하기만 하면 그 자리는 자연히 신이랑의 것이 될 거야. 애초부터 신군회는 신이랑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었거든.”소민아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신씨 가문과 예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네요!”송시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건 전연우한테 물어야지.”“전연우야말로 이런 면에서 가장 빠삭한 사람이야. 전연우와 장소월이 결혼하기 전, 주선호는 전연우와 자신의 딸인 주가은을 맺어주려 했었어. 하지만 아쉽게도 전연우는 이미 장소월에게 단단히 빠져버려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해버렸어.”“정치와 사업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 전연우가 짧은 몇 년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프로젝트를 따냈다고 생각해?”주가
“송시아 씨, 당신은 정말 답도 없이 망가져 버렸네요. 분명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목이 부서져라 송시아를 향해 소리쳤다.그때, 사무실 문밖엔 소피아가 송시아에게 결재를 받을 서류를 들고 와 있었다.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걸음을 멈춰 섰다.“대가? 이 세상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전연우, 강지훈, 기성은은... 필시 나보다 먼저 숨통이 끊어질 거야. 나보다 장소월을 더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못 믿겠으면 지켜봐. 내가 3일 안에 장소월을 목숨을 거둘 수 있는지 없는지.”송시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말이야. 너무 쉽게 죽이고 싶진 않아. 죽는 것보다도 못하게 살도록 만들어줄 거야. 그림 그리는 손목이 뜨거운 불에 구워지는 고통을 맛보게 해줘야지. 참... 전연우가 그 반반한 얼굴에 홀딱 빠져버렸었지?”“난 언제든 그 얼굴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어. 그때가 돼도 남자들이 장소월을 위해 나랑 맞설 수 있을지 궁금하네.”“송시아 씨, 그만 해요! 정말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미친 사람이네요! 당신 같은 사람은 분명 지옥에 떨어질 거예요!”송시아가 가장 개의치 않아 하는 말이 바로 이런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전혀 상관없다.“그럼 똑똑히 지켜봐. 내가 장소월의 숨통을 어떻게 끊어놓고 전연우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말이야.”소민아는 눈앞 완전히 악마가 되어버린 여자를 쳐다보았다.“당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네요. 대표님에겐 적어도 자신의 목숨으로라도 그분의 뜻을 지키려 하는 기성은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겐... 아무것도 없잖아요. 바깥에서 어울려 다니는 그 남자들 또한 당신을 성욕을 분출하는 도구 정도로 생각할 거예요.”“제 말이 좀 과격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당신 귀엔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잖아요.”“송시아 씨... 자신이 이렇게 변해버렸다고 생각하면... 괴롭지 않아요?”“세상엔 수많은 남자들이 있어요. 왜 하필 전 대표님이어야 하는
신이랑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래요.”소민아는 회사에 돌아가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던 도중 캡모자를 눌러쓰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소민아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았다.얼마 후 남자가 전화를 걸었다.“누님, 그 여자 위치 찾았어요. 사진도 있고요. 전 지금 지하주차장에 있어요.”소민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송시아가 찾는 그 여자?소월 언니다!송시아가 이렇게나 빨리 소월 언니를 찾았다고?그... 그럴 리가 없다!3분 뒤, 송시아가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자 남자는 그녀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누님, 그 여자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몰래...”그가 손가락으로 목을 베는 동작을 취했다.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급할 필요 없어. 넌 일단 돌아가 내 전화 기다리고 있어. 너무 쉽게 죽게 하면 안 되지.”“알겠어요. 그럼... 누님, 저희한테 줄 수고비는... 저희들 요즘 전국을 휘젓고 다니고 해외에까지 나가느라 정말 힘들었어요.”송시아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남자에게 돈을 이체해주었다.“이건 수고비의 3분의 1이야. 나머지는 일이 다 끝나면 줄게. 너희들 고생한 거 잊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 저희들 절대 누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두 사람의 거래가 끝나자 지하주차장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소민아는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려가 대표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소민아가 벌컥 문을 열었을 때, 송시아는 서류 봉투를 뜯고 있었다. 그녀는 소민아를 보고는 다시 서류 봉투를 닫아 옆에 놓아두었다.“언니한테 무슨 할 말 있는 거야?”“아까 지하주차장에서 만났던 그 남자 누구예요? 송시아 씨, 이번엔 또 누굴 죽이려는 거예요! 왜 꼭 그렇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건데요! 아무도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송시아가 웃으며 그 서류 봉투를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소민아 앞에서
소민아는 며칠 더 휴가를 주겠다는 신이랑의 배려를 거절했다. 다음 날 회사에 나와보니 신이랑은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그는 피곤한 듯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신이랑이 고개를 드니 눈에 가득 퍼진 실핏줄이 보였다. 소민아는 바로 가방을 내려놓고는 걱정스레 다가갔다.“이랑 씨, 두통이 또 발작한 거예요? 약은 먹었어요?”신이랑은 고개를 저었다. 한눈에 봐도 예전 두통 때문에 힘들어하던 그 모습이었다.소민아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지려다가 허공에서 멈춰 섰다.“제가 병원 예약해 둘 테니까 가봐요. 이렇게 참는 것만이 방법은 아니에요. 오늘 스케줄은 오후에 예정된 중문 시리즈 사람과의 미팅밖에 없어요. 지금 병원에 가면 그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소민아는 이제 신이랑의 스케줄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엔 항상 신이랑이 먼저 말했고, 장소가 어디든 그녀는 따라가기만 했었는데 말이다.지금의 소민아는 정말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신이랑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나 괜찮아요.”소민아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핸드폰을 들고 신경내과에 예약했다.“편집장님, 30분 뒤로 예약해 뒀어요. 얼른 물건 챙겨서 나랑 같이 가요.”소민아의 말투도 조금 사나워졌다.신이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알았어요.”소민아는 부하 직원에게 남은 일을 맡겨두고는 차를 몰고 신이랑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소민아가 운전하다가 물었다.“혹시 어젯밤 샜어요? 의사 선생님 말씀 잊었어요? 수술 뒤엔 몸을 잘 챙겨야 한다고 했잖아요. 잠을 제대로 안 자는 건 건강 회복에 치명적이에요.”눈을 감고 있던 신이랑은 그녀의 말을 들으니 몸이 훨씬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어젯밤 신수지가 왔었는데 보기 싫어서 호텔로 옮겼어요. 난 신수지가 싫어요.”소민아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신수지가 이랑 씨를 왜 찾아가요? 동생 아니었어요?”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소민아는 그가 뭘 말하려는
막무가내인 그녀의 모습을 신이랑은 더는 참아낼 수가 없어 단호히 말했다.“현실을 제대로 자각하세요. 난 절대 신수지 씨와 결혼하지 않아요. 당신 집안의 도움은 더더욱 필요 없고요. 성세 그룹에 들어간 건 민아 씨를 위해서예요. 민아 씨가 없어도 난 당신들과 얽히지 않을 거예요.”“계속 여기에 있고 싶으면 있어요.”신이랑은 바로 서재에 걸어 들어가 중요한 서류들을 챙기고는 노트북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신수지는 얼른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어디에 가려고요? 오빠, 가지 말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신이랑은 바로 그녀의 손을 뿌리쳐버렸다.“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 하지 말아요.”신이랑은 물건을 들고 바로 떠나버렸다.신수지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오빠!”신이랑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를 떴다.신수지는 분노에 차올라 발을 동동 굴렀다.“이게 다 소민아 때문이야. 너만 없었다면 오빠도 날 멀리하지 않았을 거라고!”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에서 나가 한 호텔 방에 체크인했다.신수지는 엉엉 울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유연홍은 자신의 귀한 딸이 울며 들어오자 얼른 뛰어가 달랬다.“왜 그래, 수지야? 누가 너 괴롭혔어? 엄마한테 말해.”유연홍은 신수지의 옆에 앉아 휴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엄마! 저 신이랑한테 갔었는데 쫓겨났어요. 밥 한 끼 같이 먹겠다고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쳤는데...”“절 완전히 무시하더라고요.”“욕까지 했어요! 대체 제가 그 여자보다 못한 게 뭐예요? 그 여잔 나보다 나이도 많고 예쁘지도 않잖아요.”유연홍이 그녀를 달랬다.“수지야, 네가 이랑이를 찾아간 일 절대 아빠가 알게 하시면 안 돼. 아빠는 이미 이랑이를 집에 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으셨어. 이랑이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엄마가 어떻게든 널 받아들이게 할게.”“그러니까 지금은 너무 밀어붙이면 안 돼. 알겠니?”그 말에 신수지는 다운되었던 기분이 많이 괜찮아졌다.“하지만 오빠 마음
소민아가 다시 깊게 잠이 들자 명세진은 도우미와 함께 방에서 나가 계단 입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송시아 씨?”“사모님.”명세진이 이마를 찌푸렸다. “송시아 씨, 난 전에도 말했어요. 민아가 송시아 씨를 인정하고 싶다고 하면 저희는 막지 않겠다고요. 하지만 다른 수단으로 우리 집안에 무언가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명확히 알려줄게요. 우린 그리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앞으로는 전화하지 말아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단호히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시아는 사무실에 앉아 꺼져버린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싸늘함이 번뜩였다.소씨 가문이 계속 서울에서 버티고 있으면 그녀가 소민아의 마음속에 들어갈 자리는 생기지 않는다. 절대 이대로 소씨 가문이 서울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하면 안 된다.소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건 그녀도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줄 수 없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송시아가 온 힘을 쏟아 이 자리에 오른 건 동생에게 가장 행복한 삶을 선물해주기 위함이었다.소민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반드시 동생을 신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앉힐 것이다.‘장소월... 네 목숨을 끊지 않는 건 다 민아를 위해서야. 영원히 꼭꼭 숨어있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절대 너한테 자비 따위 베풀지 않아.’송시아는 또 신이랑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때... 신이랑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해 문자를 확인해 본 순간, 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집에 도착하니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신이랑은 바로 핸드폰을 집어넣고 지문으로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돈된 오피스텔 안에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신수지가 머리를 묶고 앞치마를 한 채 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오빠, 왔어요?”신이랑이 이마를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밥상 위 차려진 음식으로 옮겼다.“열쇠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신수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
도우미가 말했다.“민아 아가씨가 돌아오셨어요. 그런데 제가 방금 방에 가보았는데 두통이 다시 재발한 것 같았어요.”명세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민아는요? 지금 어디에 있어요? 민아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만 가져다드렸어요. 얼굴색이 정말 안 좋았어요.”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내가 올라가 볼게요. 오늘 저녁엔 민아가 좋아하는 음식들 많이 만들어요.”“네, 사모님.”명세진은 소민아를 줄곧 자신의 친딸로 생각하며 키워왔다. 소현아와 소민아 모두 소씨 가문의 소중한 딸이다. 실제 언니는 소현아였지만, 평소엔 동생인 소민아가 언니처럼 소현아를 챙겼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평소 그녀에게 더 관심을 쏟기도 했다.명세진은 방으로 올라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소민아를 본 그녀는 조심스레 다가갔다.소민아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지 베개가 흥건해지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안 돼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오... 오지 마...”“언... 언니...”“언니... 어디에 있는 거예요!”명세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수건으로 이마 위 식은땀을 닦아주었다.“괜찮아. 괜찮아. 고모가 여기에 있어.”명세진은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예전 소민아를 집에 갓 데려왔을 때처럼 침대 옆에 앉아 밤새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슬프게 흐느끼던 소민아는 한참을 다독인 뒤에야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주는 명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이를 갓 집에 데려왔을 때를 그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영양실조로 살집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해 병원에서도 다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이후, 다행히 그녀는 목숨을 지켜냈고 천천히 몸을 회복했다.비록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영리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학교에서의 수업도 교과서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익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