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장소월은 전연우에게 매달리려 자주 이곳에 왔기에 회사 안은 손바닥 보듯 훤했다. 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너무나도 까다로운 손님이었으니 말이다.직원이 말했다.“아가씨, 전 대표님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대표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시라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따뜻한 물 한 잔 주세요. 고마워요.”장소월은 인시윤이 34층으로 올라가자 두 사람을 방해하기 싫어 옆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네... 알겠습니다.”프런트 직원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맙다고? 장소월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솟을 일이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놓여있는 잡지를 들고 무심히 펼쳐보았다.그때 직원이 마침 일 때문에 32층에 도착한 기성은을 불러세웠다.“기 비서님, 이건 대표님에게 드릴 서류입니다.”기성은은 서류를 받은 뒤 휴게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소월인가?만약 장소월이라면 조금 전 올라간 건 누구의 뒷모습이란 말인가?기성은이 눈을 축 내리깔았다.“왜 온 거예요?”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잘 모르겠어요. 오자마자 저기에 들어가 앉더라고요. 기 비서님, 설마 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쓸데없는 곳에 관심 두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요.”“알겠습니다.”기성은의 말에 직원은 더는 묻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시간은 흐르고 흘러 장소월은 이제 몇 잔의 물을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갖고 있던 시험지도 모두 다 풀었다.필통을 정리하고 나서 바깥을 쳐다보니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전연우가 이미 퇴근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 시 반이었다.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은 장소월 뿐만 아니라 대표 자리에 앉아있는 인시윤도 마찬가지였다.20분을 더 기다리니 여덟 시가 거의 되어갔다.그녀는 더는 기다리지 않고 책가방을 메고 자리
장소월이 천성 빌딩을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늦어 버스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가 눈앞 신호동 앞에 멈춰 섰다.지금은 서울시의 퇴근 시간이라 거리엔 차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그녀가 가방에서 차비를 꺼내려던 순간, 검은색 차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연우가 창문을 내리고 준수한 얼굴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타!”인시윤은 왜 차에 없는 거지? 장소월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가 차 뒷자리에 올라탄 뒤 문을 닫았다. 차 안에 전연우와 단둘이 있으니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네가 인시윤을 어떻게 알아?”그가 백미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제가 반을 옮겼어요. 그래서 이제 같은 반이에요.”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회사 문 앞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이어 얇은 치마를 입은 인시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견디다니.그녀는 타고난 체질이 냉해 겨울만 되면 손발은 항상 차가운 상태이다.인시윤이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전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내려왔어요?”“뭘 먹을래요?”전연우는 핸들을 돌리며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인시윤은 이미 온갖 산해진미를 모두 맛본 사람이다. 가장 즐겨 먹던 것들도 이제 다 질려버려 갑자기 물으니 무엇을 먹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먹는 것이니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소월아, 넌 뭘 먹고 싶어? 추천할만한 식당 있어?”그녀는 이 난제를 장소월에게 떠넘겼다.멍하니 앉아있던 장소월이 그녀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은평관으로 가요.”“은평관? 거긴 어디야? 왜 난 들어본 적 없지? 그냥 대게 먹으러 가자. 그곳에 가면 따뜻한 자스민 차도 끓여줘. 나 추워죽겠단 말이야.”전연우가 말했다.“주소.”인시윤이 식당 이름을 말했다.“신사처럼 겉옷을 벗어 나한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장소월은 그들에게 공간을 양보하며 가장 뒤에서 걸어갔다. 종업원이 문을 열자 정갈한 일본식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바닥엔 보일러가 켜져 있어 얼어붙었던 몸을 녹일 수 있었다.장소월이 목에 걸었던 목도리를 풀어 문 앞 옷걸이에 걸었다.“먼저 주문해요! 난 화장실에 가야겠어요.”“그래. 가!”인시윤은 메뉴판을 전연우에게 밀며 말했다.“같이 주문해요. 뭘 먹고 싶어요? 이번엔 봐주지 않을 거예요.”전연우가 말했다.“좋을 대로 해요.”인시윤의 몸은 어느덧 전연우의 옆자리까지 가 있었다. 그녀가 자주 먹던 세트를 주문하고는 말했다.“일단 이렇게 시키고 소월이가 돌아오면 더 추가하라고 해요.”화장실에서 돌아온 장소월은 룸마다 단독 종업원이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주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종업원이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아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펼쳐보다가 채소 비빔밥을 시켰다.그녀는 요즘 별로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체중은 감소하지 않았다.장소월은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밥상은 그리 크지 않아 다리를 펴면 상대방에 닿을 정도였다.밥상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차를 본 그녀는 손으로 유리컵을 감쌌다. 방금전 찬물에 손을 씻어 추웠던 차에 말이다.인시윤은 흥미진진하게 전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장소월은 간혹 인시윤의 말에 대꾸를 할 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이러하다. 나른하고 가라앉아있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창밖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것이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내일 크리스마스잖아. 소월아, 너 약속 있어?”그 말에 고개를 돌린 장소월은 전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이어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약속 없어.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다른 흥취반 수업을 하려고.”“그래? 몇 시쯤 끝나?”“9시쯤에
인시윤이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전연우는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룸을 나왔다. 가게 종업원들이 분명 그녀를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줄 것이다. 그녀의 신분이라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른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진 채 녹초가 되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고작 3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렇게까지 취하다니. 처음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향기가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연속 마신 것이다. 만약 전연우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 역시 인시연처럼 인사불성이 되었을 것이다.그녀는 술을 깨려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연우가 매정히 닫아버렸다.“뭐 하는 거예요! 빨리 문을 열어요, 빨리요... 빨리...”그녀가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솜사탕이라도 삼킨 듯 부드럽고 나른했다.“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아있어.”“짜증 나요! 창문도 안 열어주고! 열어주기 싫으면 말아요. 다음부턴 절대 오빠 차에 앉지 않을 거예요.”장소월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순간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전연우의 시선이 조심스레 옆으로 향했다. 삐진 건가?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삐졌단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떼를 쓰며 난리를 피웠을 텐데.“바깥이 추워서 그래. 찬바람 맞으면 감기 걸려.”모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못마땅한 듯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런 가식적인 말 믿지 않아요. 오빠는 나한테 상처만 주잖아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오빠예요. 이제 영수를 제외하고, 날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몸이 강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왜 멈춰요?”“너 방금 뭐라고 했어?”차디찬 얼음이 산산조각이라도 난 듯 살을 에일 듯한 한기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니 장소월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농후했던 취기가 단번에 깨
장소월이 그의 손목을 잡고 약간 차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집에 돌아가요. 윤서 언니가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저도 피곤해서 돌아가 쉬고 싶어요.”전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아래턱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였다.“넌 아직 어려서 사랑이 뭔지 몰라. 소월이가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면 이 오빤 막지 않아. 너에게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줄 수도 있어.”장소월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와 맞설 때가 아니니 이 화를 스스로 삼켜낼 수밖에 없다.“알... 알겠어요.”이젠 정말 술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겠다. 술에 취해 또 그에게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말을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장소월은 완전히 취기가 사라졌다.집에 돌아가니 열한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거실에 들어가 더듬거리며 벽에 붙어있는 전원을 켰다. 그제야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장소월은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발을 뗐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국수를 삶아.”계단에 발을 디디려던 장소월의 귀에도 그 무례한 요구가 들려왔다.“제... 제가 아주머니를 불러올게요.”“내 말 못 알아들어?”전연우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린 채 소파에 기대에 앉았다.장소월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상태를 살펴보니 분명 또다시 위병이 도진 것 같았다. 요즘 자주 공복에 술을 마셔댄 데다 오늘 밤 해산물 요리도 많이 먹었으니...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한 거다.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식자재를 찾았다. 그녀는 늦은 시간이라 너무 피곤해 음식을 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분명 집에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도 기어코 이곳으로 왔다. 최근 들어 전연우는 자주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집을 나갔단 말인가.장소월은 365일 단 하루도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물을 끓이고 채소를 썰고 국수를 넣었다. 그녀는 먹지 않을 테니 일 인분만 끓였다.국수가 다
다음 날 아침, 장소월은 편안하고 꿀맛 같았던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방을 나서자마자 또 누군가 들어올까 봐 문을 걸어 잠갔다.아침을 먹은 뒤 학교에 가니 여덟 시 정도였고, 남들보다 일찍 도착했다.인시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장소월을 찾았다.“소월아, 어제 너와 연우 오빠는 왜 먼저 간 거야? 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한테 호되게 혼났어. 이제 통금시간까지 생겼다니까.”어젯밤 과음을 했던 탓인지 아니면 푹 쉬지 못한 탓인지 인시윤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어제는... 나도 좀 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어제 가기 전 오빠가 일부러 종업원들에게 널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주라고 신신당부했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별일 없었지?”인시윤은 희미한 정신으로 고개를 저었다.“별일 없었어. 하지만 어떻게 날 혼자 거기에 남겨두고 갈 수가 있어? 동생만 챙기고 왜 난 안 챙기는데! 만에 하나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진짜 나쁜 남자야! 신사의 품격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니까!”장소월 또한 전연우가 인시윤을 혼자 내버려 둘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장소월은 최대한 그를 두둔했다.“오빠는... 원래 그랬어. 머릿속엔 온통 일 뿐이야. 당시엔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널 데려다주다가 파파라치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너한테도 안 좋잖아.”인시윤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 그런 생각으로 한 거라면 됐어. 하지만 다음에도 똑같이 행동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수업 종이 울렸다.인시윤은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오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 45분의 시험 시간을 추가하니 학생들에겐 15분의 점심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그들은 또 다른 건물에 가야 했다.장소월도 어제의 올림피아드 성적을 확인하러 그들을 따라갔다.그녀는 인시윤과 함께 첫 줄에 앉았다.인시윤이 그녀를 위로했다.“자신을 믿고 마음을
마지막 1분, 고건우는 이미 물건을 챙겨 교실에서 나갔다.장소월은 다급히 자신의 책을 가방에 넣고는 인시윤에게 말했다.“오늘은 너 먼저 가. 난 다른 일이 있어.”인시윤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홀연히 사라져버린 장소월에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장소월은 고건우를 쫓아가 말했다.“선생님, 잠시만요.”고건우가 걸음을 멈추었다.“장... 장소월?”“네, 맞습니다. 선생님. 저번 시험 성적을 알고 싶어서요.”고건우가 웃으며 말했다.“수업까지 들었으면서 성적이 왜 궁금해? 이미 합격한 거잖아.”장소월은 여전히 께름칙했다.“제 눈으로 제 성적을 보면 안 될까요?”“그건 뭣 하러 봐? 네 시험지는 지금 나한테 없어. 넌 시험 잘 봤어. 특히 마지막 문제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풀었잖아. 그중 두 번째 방법에선 대학 수학 지식을 사용했어. 그 공식을 보고 솔직히 정말 놀랐다니까.”고건우가 감탄하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하지만...”“고 선생님!”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으로 지나가던 선생님 한 명이 그를 불렀다. 고건우가 얼버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건우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행동할수록 장소월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이번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오는 기회를 인시윤 덕분에 얻었을까 봐 불안했다.만약 정말 그랬다면 엽준수에겐 너무나도 불공정한 일이 아니겠는가?인시윤...장소월은 꼭 그 팀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그녀는 교실에 돌아간 뒤 엽준수와 똑똑히 얘기해보려고 그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엽준수의 짝꿍인 서기우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오늘 아침에도 오지 않았어.”인시윤이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갔다.그녀가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치는 장소월을 보며 말했다.“너 무슨 일 있어?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있잖아. 고 선생님은 왜 내 성적을 발표하지 않으시는 걸까? 혹시 네가 선생님에게 말해 날 올림피아드 팀에 들여 보내준 거야?
오전 시간은 바삐 이어지는 수업 속에 파묻혀 빠르게 지나갔다.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다른 반은 반급 회의를 조직하거나 영화 보기, 게임을 하기 등 활동을 하지만 1반은 아직 두 시간의 자율 학습 시간이 남아있어 9시 반이 되어서야 하교할 수 있다.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로 이루어진 반이기 때문에 오락성 활동은 전혀 없다. 대부분 빼곡히 짜인 계획안에서 쉴 틈 없이 돌아친다. 하지만 때로는 서프라이즈도 있다. 오늘은 학생 모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주었다.장소월은 피아노와 댄스 수업을 해야 했기에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할 수 없어 숙제로 낸 시험지 두 장을 챙겨 집에 가서 완성해야 했다. 장소월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마침 6반을 지나던 그때, 그들도 마침 수업을 마치고 하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윤서가 책을 정리하다가 그녀를 보고는 말했다.“소월아...”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윤서 언니.”두 사람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백윤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은 크리스마스라 마침 나도 널 찾으러 가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이건 너한테 줄 크리스마스 카드야. 메리크리스마스.”장소월이 교실을 둘러보니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있었다. 그밖에도 채색 리본, 풍선... 등 장식품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겨냈다. 또한 학생들의 손엔 모두 서로 주고받은 선물들이 쥐어져 있었다.“이건 내가 주는 거야.”서문정이 서랍 안에서 카드와 선물을 꺼내 장소월에게 건네주었다.장소월은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난처한 얼굴로 선물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가방을 열고 1반에서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내주었다. 위엔 금색 방울이 달려있었는데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 꽤나 값이 나갔다.“난 너희들한테 줄 게 별로 없네. 작지만 이거라도 받아.”인시윤이 자신의 것을 장소월에게 주었기에 그녀는 마침 두 개를 갖고 있어 두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다. 이건 서문정이 장소월에게서 받은 첫
소민아는 남자의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싫어요. 당신한테서 그 사람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기성은 씨, 난 다시는 당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이 손 놓으면 또 사라져 버릴 거잖아요.”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기성은은 손을 들어 올렸다가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민아 씨, 이러면 안 돼요. 곧 결혼하잖아요.”소민아는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신이랑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사람과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일 뿐이에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언니가 계속 날 괴롭혀요. 처음에는 소월 언니 안전을 빌미로 협박했어요. 소월 언니를 찾았으니까 만약 신이랑과 결혼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두 번째는 별이 그 아이를 노리려 했어요. 그리고 대표님의 회사도 팔아넘기려고 했고요. 내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그 약속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요.”“세 번째는 기성은 씨의 안전이에요. 다들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요. 기성은 같이 대단한 사람이 죽을 리가 없죠.”“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플까요. 왜 좋아하는 사람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걸까요.”“사람이 살아봤자 얼마나 산다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민아 씨, 미안해요!”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그였다.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 기성은은 손을 들어 소민아의 뒷덜미를 내리쳤다. 소민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신이랑은 휴대폰 플래시를 비추며 폐기물 더미가 쌓인 복도에서 위로 올라왔다. “민아 씨?”발코니 밖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신이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급히 다가갔다.백혜진도 마침 이곳을 찾아왔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민아 씨 괜찮은 거죠.”“네, 그냥 잠들었을 뿐이에요. 오늘 밤 민아 씨랑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헤비메탈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연거푸 술잔을 비우던 소민아는 마지막 잔을 마신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조명은 그녀에게 몽롱한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백혜진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다. “그만 마셔요, 민아 씨. 벌써 얼마나 마신 거예요. 계속 마시면 몸이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소민아는 백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다. “나... 나는 집에 안 갈 거예요. 집에 가면, 신이랑이랑 결혼해야 한다고요. 난 결혼 안 할 거예요. 기성은 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잠자리까지 했으니까 날 책임져야 한다고요!”엄청난 비밀을 들은 듯 백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아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기 비서님랑 잤다고요? 그럴 줄 알았어요. 두 사람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고 일찌감치 느꼈었거든요. 기 비서님이 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나 했더니 역시 그런 일이 있었네요.”백혜진은 또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기 비서님을 좋아하면서 왜 신 편집장님이랑 결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소민아는 술에 취해 정신없이 비틀거리며 술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려 했다. “왜 이랑 씨랑 결혼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그건 내 언니가 강요한 거니까.”백혜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언니요? 언니가 누군데요?”“누구겠어요, 송시아지.”“뭐라고요?” 백혜진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부딪히자, 백혜진은 급히 소민아를 부축했다. “민아 씨... 천천히 가요.”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들어간 뒤, 소민아는 중심을 잡지 못해 벽에 기대섰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잡고 불빛이 없는 컴컴한 복도로 끌고 갔다.“민아 씨, 어디 있어요?”“나...”백혜진이 다급하게 소민아를 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엄마, 소민아가 우리 집 며느리 되는 거 막아주면 안 돼요?”유연홍이 말했다. “안심해, 설령 소민아가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공들여 쌓은 탑을 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녀는 신이랑이 아무리 청렴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도 여자의 유혹은 뿌리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서울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트하우스.한 채 가격이 몇백억 원에 달한다. 설사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신군회는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여자의 다리에 누워있었다. 여자는 보라색 레이스 잠옷 차림에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은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가슴 위로 흩어져 있었다. “오빠, 나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됐어요.”“오늘 만두를 좀 빚어놨는데, 먹을래요?”신군회가 물었다. “요즘 낯선 사람이 찾아온 적 없어?”“오빠 말대로 요즘은 밖에 나가지도 않았어요. 혹시 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제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더라도 그런 일은 못 해요.”신군회는 여자가 손수 껍질을 벗긴 포도를 먹고 있었다. 여자가 입가로 포도를 가져가자 신군회는 여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손가락을 빼내며 말했다. “부끄러워요.”“어디 좀 볼까, 조금 커졌나.”신군회는 겉으로는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그 역시 여느 부패한 정치 인사들처럼 뒤에서는 돈세탁을 통해 불법적으로 수많은 돈을 벌어들였다.신군회는 여자와 노는 데도 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했어도 임신한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거실에서 거의 30분 동안 뒹굴거린 후, 천미연은 머리카락이 땀에 흥건히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누워있었다. 신군회는 곧바로 베개를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여보, 이번에도 임신 못 하면 어떻게 해요? 그 지긋지긋한 한약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아요.”“마시기 싫어도 마셔야
“오...오빠...”신수지는 다급하게 신이랑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살결이 닿기도 전에 그는 매정히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군회는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팔을 들어 신수지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지금 날 때렸어요? 감히 날 때려요? 왜 때리는 거예요? 억지로 예의를 갖춰줘서 그렇지, 아빠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엄마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당신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친아빠도 이렇게 때린 적은 없다고요!”“여기는 엄마 집이지, 당신 집이 아니에요. 당장 나가요!”신군회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매서워졌다. “한 번 더 말해 봐.”“말하면 어쩔 건데요! 당신은 우리 집 돈이 탐나 엄마와 결혼한 거잖아요. 엄마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 집에 발도 못 들였어요. 우리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 당신은 아내와 아들까지 버렸잖아요.”“닥쳐!” 신군회의 가장 아픈 곳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팔을 들어 그녀의 뺨을 또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거의 온 힘을 실어 매를 들었다.신수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고, 입가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과 시퍼렇게 멍든 자국을 본 순간, 유연홍은 다급히 달려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군회의 뺨을 후려갈겼다. “당신이 감히 내 딸을 때려요? 신군회 씨,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딸을 때려요? 이 집에서 당신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거 몰라요?”신이랑은 현관 밖에 서서 그들의 소동을 들으며 냉담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신수지는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요. 당장 외할아버지에게 말할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알면 당신 가만히 안 둘 거예요!”신군회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유연홍, 이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좋아. 네 딸이 또다시 내 일을 망치면, 그땐 절대 용서하지
소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그래요. 저녁에는 다른 인터넷 소설 사이트 CEO들과 식사 약속이 있어요. 민아 씨도 함께 가요.”“네.”소민아의 기존 사무실은 편집장 사무실 밖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신이랑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부모님께서 웨딩 촬영할 곳을 몇 군데 골라주셨는데, 시간이 좀 촉박해서요. 민아 씨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말해줘요.]소민아는 메시지를 대충 훑어보고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그녀에게 해준 신이랑과의 과거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녀의 꿈속에 나온 남자아이가 혹시 신이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대화창을 열어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세 번째 곳이요. 지금은 일 때문에 바쁘니까 퇴근하고 얘기해요.][그래요.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게요.]신이랑의 공무원 합격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다. 필기시험에서 10등 안에만 들면, 면접은 두말할 것 없이 통과할 것이다.그때에야 비로소 정계에 진출하는 진정한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신이랑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때, 신군회가 정장 차림에 위풍당당하게 걸어왔다. “오늘 별다른 일 없으면, 나랑 같이 사람들 좀 만나러 가자. 나중에 공무원이 되면, 다 너한테 도움이 될 사람들이니까.”신군회는 현재 막강한 실권을 쥐고 있다. 그 자리에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자기만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이다.“흥미 없어요.”신군회가 그를 불러세웠다. “나중에 넌 틀림없이 내 자리를 이어받아야 할 거야. 이제 물러설 퇴로는 없어. 신이랑,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마. 다 너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권력을 직접 손에 쥐고 있을 때만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해.”그때 아래층에서 여자의 목소리와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어제 나 없을 때 오빠랑 소민아 결혼식 상의 한 거예요? 엄마,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왜 약속을 안 지켜요. 오빠가 소
결혼식 날짜는 다음 주로 급하게 결정되었다. 소민아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도, 외부에 알릴 생각도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초대해 간단히 식사 한 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다.모든 상의를 끝낸 뒤 밥을 먹고 돌아갈 때, 엄마 아빠의 눈에는 신이랑에 대한 흐뭇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처음 선을 봤을 때 엄마 아빠가 소개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었을 것이었다.고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와 기성은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명세진은 소민아의 불편함을 눈치채고는 손을 잡고 달랬다.“민아야, 내가 보기에 이랑이도 나쁘지 않아. 나와 네 고모부도 사랑 없이 강제로 정략결혼을 했었어. 처음엔 싫었지만, 고모부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좋겠구나 싶었어. 여자에게는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제일이야.”“이랑이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너한테도 잘하잖아. 어떤 사람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도 그런 남자 못 만나.”소민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이랑 씨랑 잘 지낼게요.”그녀는 단지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차 안, 소민아는 엄마의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기대며 물었다.“엄마, 궁금한 게 있어요. 이랑 씨랑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줬을까요? 이해가 안 돼요. 왜 저에게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거죠?”소희연이 말했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우리가 너를 구해왔을 때부터, 너와 이랑이는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 하지만 그때 너는 너무 많이 다쳐서 기억의 일부를 잃어버렸어. 그때... 이랑이에 관한 기억도 함께 잊어버린 거야.”그랬던 거야?소민아가 물었다. “엄마, 그럼 저랑 이랑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소민아는 요즘 들어 자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녀의 꿈속에서 상처투성이의 거지 소녀가 어두컴컴한 구
소민아가 말했다. “현아 언니는 그냥 치료받으러 간 것뿐이에요. 고모,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금으로서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현재 소씨 집안 또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신씨 본가에 도착해보니 소민아의 부모님은 이미 그곳에 와 있었다.신이랑은 소민아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어요.”소민아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요. 들어가죠.”그녀는 신이랑이 잡으려고 하는 손을 못 본 척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어쩔 수 없이 짜낸 억지 미소나 다름없었다.“엄마, 언제 돌아오셨어요? 왜 저한텐 얘기 안 하셨어요?”소희연이 말했다. “네 아빠랑 내가 이랑이한테 전화했어. 너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거든. 네 아빠는 이랑이를 정말 많이 좋아해. 예전에 선봤을 때부터 엄청 기뻤는데 정말 너희 둘이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어.”“너희 아빠랑 난 너무 기쁜 마음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정말 잘했어, 우리 딸.”소민아가 소파에 앉자 도우미가 차를 가져왔다. “사모님, 차 드세요...”갑자기 바뀐 호칭에 소민아는 너무 어색해 대꾸도 하지 않았다.신이랑이 그녀 옆에 앉아 말했다. “내가 작성한 하객 명단이에요. 빠진 사람은 없는지 확인해 봐요.”빠진 사람이라...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은 아무도 오지 못한다. 소월 언니, 그리고 현아 언니...이런 결혼식이라면,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당신이 결정하면 돼요.”“알겠어요.”“...이번 민아의 결혼식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할게요.” 송시아는 가방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이건 한도가 없는 카드예요. 제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민아만을 위해 모아온 결혼 적금이에요.”소민아는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소민아는 계속해서 기성은의 목숨을 빌미로 자신에게 신이랑과의 결혼을 강요하는 송시아에게 치를 떨었다. 지난번 면북에 갔을 때, 소민아는 송시아가 그곳에서 누리는 권세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고, 심지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무서운 상상이지만, 어쩌면 그 폭발 사고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소민아는 답답함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울렁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뒤, 소민아는 차에서 내렸고 송시아도 뒤따라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명세진이 소민아를 맞이했다.“민아야,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이랑이는...”소정국은 심장을 움켜쥐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타난 송시아를 보자 모든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소정국이 소민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민아야, 이리 와.”소민아가 그의 말에 따라 걸어가자 명세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예요. 여기엔 당신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장 나가요.”송시아는 선글라스를 벗고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민아는 제 여동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언니로서, 여동생 결혼 준비는 당연히 함께해야죠. 물론, 그동안 여동생을 키워주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혼 비용은 전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결혼 이후 비용까지 모두 책임질게요.”명세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소정국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단란한 한 가족이었다. 송시아는 누가 봐도 낯설기 짝이 없는 외부인이었다.모두가 침묵하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소민아가 돌연 입을 열었다. 소민아를 꽉 잡고 있던 명세진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예전엔 당신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신이랑과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이제 마음을 굳혔어요. 신이랑과 이혼할 거예요. 더 이상 당신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소민아와 신이랑이 사
눈물이 예고도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거 믿지 않아요. 3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기성은 씨 찾으러 갈 거예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없어요!”“기성은 씨, 당신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은밀하게 감춰진 공간에서 두 남자가 감시 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보고 있었다.한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 “진짜 이 여자, 기성은 형 너무 좋아하나 봐. 한 달 동안 열 번 넘게 찾아왔어. 곧 결혼식까지 한다는데,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하나?”다른 남자가 컵라면을 들고 다가와 말했다. “그러게. 성은이 형도 참, 여자를 너무 몰라...”소민아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휴대폰에 도착해 있는 수많은 문자 메시지와 전화를 확인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빠 엄마가 왔어. 어디 있어? 민아야, 전화해. 너무 걱정돼.]아빠 엄마가 돌아오셨다고?소민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아파트를 나섰다.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빨간색 람보르기니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송시아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타, 동생.”소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신 동생이 아니에요.”송시아가 말했다. “이미 소씨 집안에 이야기해 뒀으니까 그쪽 사람들도 내가 간다는 거 알고 있어.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걸 몰라. 지금 차에 타면 시간 낭비 없이 일찍 도착할 거야.”소민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나 감시하는 거예요?”송시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소민아를 유혹하듯 말했다. “차에 타면 기성은에 대해 알려줄게.”그 단 한마디에 소민아는 바로 조수석에 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시선을 떨어뜨리니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