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장소월은 전연우에게 매달리려 자주 이곳에 왔기에 회사 안은 손바닥 보듯 훤했다. 프런트 직원이 장소월을 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너무나도 까다로운 손님이었으니 말이다.직원이 말했다.“아가씨, 전 대표님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대표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시라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따뜻한 물 한 잔 주세요. 고마워요.”장소월은 인시윤이 34층으로 올라가자 두 사람을 방해하기 싫어 옆에 있는 휴게실로 들어갔다.“네... 알겠습니다.”프런트 직원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맙다고? 장소월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솟을 일이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장소월은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놓여있는 잡지를 들고 무심히 펼쳐보았다.그때 직원이 마침 일 때문에 32층에 도착한 기성은을 불러세웠다.“기 비서님, 이건 대표님에게 드릴 서류입니다.”기성은은 서류를 받은 뒤 휴게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소월인가?만약 장소월이라면 조금 전 올라간 건 누구의 뒷모습이란 말인가?기성은이 눈을 축 내리깔았다.“왜 온 거예요?”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잘 모르겠어요. 오자마자 저기에 들어가 앉더라고요. 기 비서님, 설마 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쓸데없는 곳에 관심 두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요.”“알겠습니다.”기성은의 말에 직원은 더는 묻지 못하고 멀어져가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시간은 흐르고 흘러 장소월은 이제 몇 잔의 물을 마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갖고 있던 시험지도 모두 다 풀었다.필통을 정리하고 나서 바깥을 쳐다보니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전연우가 이미 퇴근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 시 반이었다.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은 장소월 뿐만 아니라 대표 자리에 앉아있는 인시윤도 마찬가지였다.20분을 더 기다리니 여덟 시가 거의 되어갔다.그녀는 더는 기다리지 않고 책가방을 메고 자리
장소월이 천성 빌딩을 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늦어 버스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가 눈앞 신호동 앞에 멈춰 섰다.지금은 서울시의 퇴근 시간이라 거리엔 차들이 빼곡히 차 있었다.그녀가 가방에서 차비를 꺼내려던 순간, 검은색 차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연우가 창문을 내리고 준수한 얼굴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타!”인시윤은 왜 차에 없는 거지? 장소월은 의문스러운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가 차 뒷자리에 올라탄 뒤 문을 닫았다. 차 안에 전연우와 단둘이 있으니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네가 인시윤을 어떻게 알아?”그가 백미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제가 반을 옮겼어요. 그래서 이제 같은 반이에요.”그는 더이상 묻지 않고 회사 문 앞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이어 얇은 치마를 입은 인시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런 차림으로 견디다니.그녀는 타고난 체질이 냉해 겨울만 되면 손발은 항상 차가운 상태이다.인시윤이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전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내려왔어요?”“뭘 먹을래요?”전연우는 핸들을 돌리며 운전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인시윤은 이미 온갖 산해진미를 모두 맛본 사람이다. 가장 즐겨 먹던 것들도 이제 다 질려버려 갑자기 물으니 무엇을 먹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먹는 것이니 무엇이든 좋을 것이다.“소월아, 넌 뭘 먹고 싶어? 추천할만한 식당 있어?”그녀는 이 난제를 장소월에게 떠넘겼다.멍하니 앉아있던 장소월이 그녀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은평관으로 가요.”“은평관? 거긴 어디야? 왜 난 들어본 적 없지? 그냥 대게 먹으러 가자. 그곳에 가면 따뜻한 자스민 차도 끓여줘. 나 추워죽겠단 말이야.”전연우가 말했다.“주소.”인시윤이 식당 이름을 말했다.“신사처럼 겉옷을 벗어 나한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장소월은 그들에게 공간을 양보하며 가장 뒤에서 걸어갔다. 종업원이 문을 열자 정갈한 일본식 다다미가 깔려있었고 바닥엔 보일러가 켜져 있어 얼어붙었던 몸을 녹일 수 있었다.장소월이 목에 걸었던 목도리를 풀어 문 앞 옷걸이에 걸었다.“먼저 주문해요! 난 화장실에 가야겠어요.”“그래. 가!”인시윤은 메뉴판을 전연우에게 밀며 말했다.“같이 주문해요. 뭘 먹고 싶어요? 이번엔 봐주지 않을 거예요.”전연우가 말했다.“좋을 대로 해요.”인시윤의 몸은 어느덧 전연우의 옆자리까지 가 있었다. 그녀가 자주 먹던 세트를 주문하고는 말했다.“일단 이렇게 시키고 소월이가 돌아오면 더 추가하라고 해요.”화장실에서 돌아온 장소월은 룸마다 단독 종업원이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주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종업원이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평소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아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펼쳐보다가 채소 비빔밥을 시켰다.그녀는 요즘 별로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체중은 감소하지 않았다.장소월은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밥상은 그리 크지 않아 다리를 펴면 상대방에 닿을 정도였다.밥상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화차를 본 그녀는 손으로 유리컵을 감쌌다. 방금전 찬물에 손을 씻어 추웠던 차에 말이다.인시윤은 흥미진진하게 전연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장소월은 간혹 인시윤의 말에 대꾸를 할 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의 성격은 이러하다. 나른하고 가라앉아있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창밖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은 것이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내일 크리스마스잖아. 소월아, 너 약속 있어?”그 말에 고개를 돌린 장소월은 전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이어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약속 없어.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다른 흥취반 수업을 하려고.”“그래? 몇 시쯤 끝나?”“9시쯤에
인시윤이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전연우는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룸을 나왔다. 가게 종업원들이 분명 그녀를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줄 것이다. 그녀의 신분이라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른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장소월은 온몸에 힘이 빠진 채 녹초가 되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고작 3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이렇게까지 취하다니. 처음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향기가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연속 마신 것이다. 만약 전연우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다면 아마 그녀 역시 인시연처럼 인사불성이 되었을 것이다.그녀는 술을 깨려 창문을 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연우가 매정히 닫아버렸다.“뭐 하는 거예요! 빨리 문을 열어요, 빨리요... 빨리...”그녀가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솜사탕이라도 삼킨 듯 부드럽고 나른했다.“시끄럽게 굴지 말고 앉아있어.”“짜증 나요! 창문도 안 열어주고! 열어주기 싫으면 말아요. 다음부턴 절대 오빠 차에 앉지 않을 거예요.”장소월은 두 다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순간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전연우의 시선이 조심스레 옆으로 향했다. 삐진 건가?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삐졌단 말인가? 예전이었다면 떼를 쓰며 난리를 피웠을 텐데.“바깥이 추워서 그래. 찬바람 맞으면 감기 걸려.”모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못마땅한 듯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런 가식적인 말 믿지 않아요. 오빠는 나한테 상처만 주잖아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오빠예요. 이제 영수를 제외하고, 날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몸이 강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왜 멈춰요?”“너 방금 뭐라고 했어?”차디찬 얼음이 산산조각이라도 난 듯 살을 에일 듯한 한기가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니 장소월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농후했던 취기가 단번에 깨
장소월이 그의 손목을 잡고 약간 차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얼른 집에 돌아가요. 윤서 언니가 집에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저도 피곤해서 돌아가 쉬고 싶어요.”전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아래턱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악마처럼 귓가에 속삭였다.“넌 아직 어려서 사랑이 뭔지 몰라. 소월이가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면 이 오빤 막지 않아. 너에게 더 좋은 사람을 소개해줄 수도 있어.”장소월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와 맞설 때가 아니니 이 화를 스스로 삼켜낼 수밖에 없다.“알... 알겠어요.”이젠 정말 술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겠다. 술에 취해 또 그에게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말을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장소월은 완전히 취기가 사라졌다.집에 돌아가니 열한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장소월은 전연우의 뒤를 따라 빛 하나 없는 어두운 거실에 들어가 더듬거리며 벽에 붙어있는 전원을 켰다. 그제야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장소월은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발을 뗐다. 하지만 등 뒤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국수를 삶아.”계단에 발을 디디려던 장소월의 귀에도 그 무례한 요구가 들려왔다.“제... 제가 아주머니를 불러올게요.”“내 말 못 알아들어?”전연우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린 채 소파에 기대에 앉았다.장소월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의 상태를 살펴보니 분명 또다시 위병이 도진 것 같았다. 요즘 자주 공복에 술을 마셔댄 데다 오늘 밤 해산물 요리도 많이 먹었으니...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한 거다.장소월은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식자재를 찾았다. 그녀는 늦은 시간이라 너무 피곤해 음식을 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분명 집에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도 기어코 이곳으로 왔다. 최근 들어 전연우는 자주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집을 나갔단 말인가.장소월은 365일 단 하루도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물을 끓이고 채소를 썰고 국수를 넣었다. 그녀는 먹지 않을 테니 일 인분만 끓였다.국수가 다
다음 날 아침, 장소월은 편안하고 꿀맛 같았던 잠에서 깨어났다.그녀는 방을 나서자마자 또 누군가 들어올까 봐 문을 걸어 잠갔다.아침을 먹은 뒤 학교에 가니 여덟 시 정도였고, 남들보다 일찍 도착했다.인시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장소월을 찾았다.“소월아, 어제 너와 연우 오빠는 왜 먼저 간 거야? 나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한테 호되게 혼났어. 이제 통금시간까지 생겼다니까.”어젯밤 과음을 했던 탓인지 아니면 푹 쉬지 못한 탓인지 인시윤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장소월이 덤덤히 말했다.“어제는... 나도 좀 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어제 가기 전 오빠가 일부러 종업원들에게 널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주라고 신신당부했어.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별일 없었지?”인시윤은 희미한 정신으로 고개를 저었다.“별일 없었어. 하지만 어떻게 날 혼자 거기에 남겨두고 갈 수가 있어? 동생만 챙기고 왜 난 안 챙기는데! 만에 하나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진짜 나쁜 남자야! 신사의 품격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니까!”장소월 또한 전연우가 인시윤을 혼자 내버려 둘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장소월은 최대한 그를 두둔했다.“오빠는... 원래 그랬어. 머릿속엔 온통 일 뿐이야. 당시엔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널 데려다주다가 파파라치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너한테도 안 좋잖아.”인시윤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 그런 생각으로 한 거라면 됐어. 하지만 다음에도 똑같이 행동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수업 종이 울렸다.인시윤은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오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 45분의 시험 시간을 추가하니 학생들에겐 15분의 점심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그들은 또 다른 건물에 가야 했다.장소월도 어제의 올림피아드 성적을 확인하러 그들을 따라갔다.그녀는 인시윤과 함께 첫 줄에 앉았다.인시윤이 그녀를 위로했다.“자신을 믿고 마음을
마지막 1분, 고건우는 이미 물건을 챙겨 교실에서 나갔다.장소월은 다급히 자신의 책을 가방에 넣고는 인시윤에게 말했다.“오늘은 너 먼저 가. 난 다른 일이 있어.”인시윤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홀연히 사라져버린 장소월에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장소월은 고건우를 쫓아가 말했다.“선생님, 잠시만요.”고건우가 걸음을 멈추었다.“장... 장소월?”“네, 맞습니다. 선생님. 저번 시험 성적을 알고 싶어서요.”고건우가 웃으며 말했다.“수업까지 들었으면서 성적이 왜 궁금해? 이미 합격한 거잖아.”장소월은 여전히 께름칙했다.“제 눈으로 제 성적을 보면 안 될까요?”“그건 뭣 하러 봐? 네 시험지는 지금 나한테 없어. 넌 시험 잘 봤어. 특히 마지막 문제에서 세 가지 방법으로 풀었잖아. 그중 두 번째 방법에선 대학 수학 지식을 사용했어. 그 공식을 보고 솔직히 정말 놀랐다니까.”고건우가 감탄하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하지만...”“고 선생님!”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으로 지나가던 선생님 한 명이 그를 불렀다. 고건우가 얼버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건우가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행동할수록 장소월은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이번 올림피아드 팀에 들어오는 기회를 인시윤 덕분에 얻었을까 봐 불안했다.만약 정말 그랬다면 엽준수에겐 너무나도 불공정한 일이 아니겠는가?인시윤...장소월은 꼭 그 팀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그녀는 교실에 돌아간 뒤 엽준수와 똑똑히 얘기해보려고 그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엽준수의 짝꿍인 서기우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오늘 아침에도 오지 않았어.”인시윤이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갔다.그녀가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치는 장소월을 보며 말했다.“너 무슨 일 있어? 하루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있잖아. 고 선생님은 왜 내 성적을 발표하지 않으시는 걸까? 혹시 네가 선생님에게 말해 날 올림피아드 팀에 들여 보내준 거야?
오전 시간은 바삐 이어지는 수업 속에 파묻혀 빠르게 지나갔다.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다른 반은 반급 회의를 조직하거나 영화 보기, 게임을 하기 등 활동을 하지만 1반은 아직 두 시간의 자율 학습 시간이 남아있어 9시 반이 되어서야 하교할 수 있다.성적이 가장 좋은 학생들로 이루어진 반이기 때문에 오락성 활동은 전혀 없다. 대부분 빼곡히 짜인 계획안에서 쉴 틈 없이 돌아친다. 하지만 때로는 서프라이즈도 있다. 오늘은 학생 모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어주었다.장소월은 피아노와 댄스 수업을 해야 했기에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할 수 없어 숙제로 낸 시험지 두 장을 챙겨 집에 가서 완성해야 했다. 장소월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마침 6반을 지나던 그때, 그들도 마침 수업을 마치고 하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윤서가 책을 정리하다가 그녀를 보고는 말했다.“소월아...”장소월이 걸음을 멈추었다.“윤서 언니.”두 사람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백윤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은 크리스마스라 마침 나도 널 찾으러 가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이건 너한테 줄 크리스마스 카드야. 메리크리스마스.”장소월이 교실을 둘러보니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여있었다. 그밖에도 채색 리본, 풍선... 등 장식품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물씬 풍겨냈다. 또한 학생들의 손엔 모두 서로 주고받은 선물들이 쥐어져 있었다.“이건 내가 주는 거야.”서문정이 서랍 안에서 카드와 선물을 꺼내 장소월에게 건네주었다.장소월은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난처한 얼굴로 선물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책가방을 열고 1반에서 받았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꺼내주었다. 위엔 금색 방울이 달려있었는데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 꽤나 값이 나갔다.“난 너희들한테 줄 게 별로 없네. 작지만 이거라도 받아.”인시윤이 자신의 것을 장소월에게 주었기에 그녀는 마침 두 개를 갖고 있어 두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다. 이건 서문정이 장소월에게서 받은 첫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