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윤서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뒷좌석에 앉아있는 장소월을 발견하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억울한 듯 말했다.“미안해, 소월아. 나 오늘 너희 반 수업시간표를 봤는데 오늘 저녁 자율 학습이 있더라고. 그래서...”장소월은 이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백윤서의 표정에 대해서도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탓에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질근 감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다 제 탓이에요. 아저씨, 출발하죠! 먼저 윤서 언니를 데려다줘요.”“알겠습니다. 아가씨.”역시 장씨 가문에서 잔뼈가 굵게 일한 사람이라 무슨 말이든 과감히 내뱉는다. 정 집사는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다. 하여 장해진도 지금까지 그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이다.백윤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집사님, 절 연우 오빠 회사에 내려주시면 돼요. 할 얘기가 있어 오빠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요.”정 집사는 백윤서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백미러로 장소월에게 말했다.“소월 아가씨, 장소를 바꿀까요?”그는 장소월의 동의를 구했다.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으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백윤서는 무안함에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예전 장소월이 전연우를 좋아할 때에도 늘 학교를 마치면 그의 회사에 가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서라도 회사에 갔었다.이렇듯 그녀와 백윤서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다.장소월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화려한 배경에 크나큰 부와 권세를 쥐고 있어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인시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함께 갖은 시련을 이겨내 왔던 백윤서... 전연우는 과연 둘 중 누구를 선택할까?예전엔 당사자였지만 이젠 구경꾼에 불과하다.장소월도 전연우가 백윤서와 결혼해 전생에 진 빚을 갚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녀의 빚은 이미 깨끗이 갚았다.그녀가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했던 그 날...지금은 퇴근 시간이라 남천 그룹까지 평소라면 30분 정도밖에 걸리
전연우가 오늘 파티에 그녀를 부른 건 그녀와 파트너로 함께하고 싶은 건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백윤서는 긴장된 마음에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순식간에 가슴속에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장소월은 인시윤의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간 것이었다. 파티에 빈손으로 참석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작은 선물은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었다.그저 겉으로만 친구일 뿐이니 고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선택한 스카프가 가격표를 보니 20만 원이나 되었다. 그녀는 구매를 취소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이미 점원이 가격표를 뜯은 뒤라 되돌릴 수 없었다.다행히 장해진이 준 카드가 있어 절반 정도 할인받을 수 있었다.그래도 10만 원이다.장소월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지끈거렸다.남원 별장.방 안에 들어간 그녀는 인시윤의 생일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옷방 서랍을 열어보니 하얀색 박스가 하나 있었고 안엔 마침 그녀가 찾던 드레스가 들어있었다.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올블랙 드레스...이 옷이면 괜찮을 것이다.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라 많은 옷을 준비하진 못했다. 모두 한물간 디자인이라 그녀의 마음에조차 들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눈엔 어떻겠는가.이 옷은 아주 심플하면서도 유행을 타는 디자인이 아니라 언제든 예쁘게 입을 수 있었다.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과연 그녀에게 어울릴까?“한 번 입어볼까?”장소월은 재빨리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드레스가 그녀의 몸에 딱 들어맞았다. 조금 더 말랐다면 가슴 부분이 빈약했을 것이고 조금 더 살집이 있었다면 부담스럽게 팽팽해졌을 것이다.이런 매혹적인 그녀의 몸매를 보고 그 누가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여덟 시 반.파티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인시윤이 2억이 되는 고액의 드레스를 입고 최근 대세 남자 연예인과 함께 커플 댄스를 추며 파티의 포문을 열었다.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정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거나
춤을 마친 뒤 인시윤은 도우미가 건네준 외투를 받고는 인정아의 곁으로 걸어갔다.“엄마.”살짝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본 인정아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 생일인데 왜 별로 안 즐거워 보이지?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도 초대했잖아. 아가, 표정 풀어. 엄마랑 같이 삼촌들한테 인사하러 가자.”인시윤의 눈썹이 다시 찌푸려졌다.“저 안 가면 안 돼요? 전 친구들과 놀고 싶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저만 보면 온갖 질문을 쏟아내요. 정말 너무 지겨워서 짜증 나요.”파티장엔 음악을 틀었고 인시윤의 목소리도 크지 않아 인경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됐어. 이것도 앞으론 익숙해질 거야. 후계자는 후계자답게 행동해야지.”두 모녀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인시윤은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인씨 가문 사업가들을 만나러 향했다.이번 파티에 강씨 가문은 초청하지 않았다.“엄마, 오빠는 오지 않겠대요?”인경아의 얼굴에 잠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영수는 최근 강한 그룹을 인계받고 있어서 바쁜가 봐. 그러니까 될수록 귀찮게 하지 마. 엄마가 이미 말했으니까 바쁘지 않으면 올 거야.”예전엔 그 집에서 강영수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럴 자격도 없다.그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다!드디어, 인시윤이 전연우와 마주 섰다.인경아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당신이 우리 시윤이를 구해줬다면서요?”검은색 정장을 입고 곧게 서 있는 전연우에게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웠다.“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인경아가 다시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시윤아, 감사 인사는 제대로 했어?”그녀의 말투는 부드럽고 예의 있고 차분했으나 그 안엔 확연한 거리감이 담겨있었다.이렇듯 능력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시윤이의 곁에 두고 유용하게 쓰는 게 좋을 것이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장해진의 사람이다.때문에 분명 더럽고 비열
이미 아홉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어 파티가 끝났을지도 모른다.이번 파티는 인씨 집안 별장에서 진행되었다.장소월이 문 앞 경비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자 그는 곧바로 그녀를 안내했다.“아가씨의 친구분이시면 이 길을 따라가세요. 끝까지 가면 보일 겁니다.”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합니다.”경비원은 장소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아가씨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느 집 아가씬데 여태껏 한 번도 오지 않았단 말인가?장소월은 외투를 걸치고 경비원이 말한 방향으로 걸어갔다.파티장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이미 한 번씩 인사를 마쳤다.뒷마당에선 한창 수영장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다!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친한 친구들이다. 그녀는 힘 빠진 몸을 의자에 축 늘어뜨렸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힘들어 죽겠어... 그 변태 같은 영감들한테 왜 인사를 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왜겠어? 집안 재산을 상속받기 위함이지!”꽃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 허철이 말했다.인시윤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난 이미 말했어. 앞으로 재산, 회사... 모두 다 오빠한테 주고 싶다고! 난 그냥 오빠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면 돼! 나같이 예쁜 여자가 뭣 하러 엄마처럼 힘들게 살겠어. 안 그래?”허철이 말했다.“돈 많은 걸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인시윤은 와인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그를 쳐다보았다.“봤어?”“뭘?”“장소월 말이야! 설마 안 온 걸까?”허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장소월도 불렀어? 너 미쳤어? 장소월을 왜 불러! 나 걔랑 절교했잖아!”인시윤이 이마를 찌푸리고 허철을 툭 두드렸다.“너와 장소월 사이의 일은 관여하지 않을게. 하지만 앞으로 감히 내 앞에서 장소월을 욕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허철이 말했다.“이봐, 아가씨... 장소월이 어떤 앤지 몰라? 왜 그런 애와 친구로 지내려고 해? 너 친구가 부족
그녀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악마처럼 고소해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나쁜 놈! 이게 재밌어?!”장소월은 접질린 발목을 부여잡았다. 너무 아파 눈물까지 질끈 나왔다.강용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어떻게 재미없겠어? 장소월... 네가 이렇게 바보 같은데!”장소월은 이곳에서 강용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강용의 집안은 이곳에 초대될만한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역시 강용과 마주치면 좋은 일이 없다.장소월은 통증 때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일어나 치마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검은색이라 얼룩이 선명하지는 않았다.“운도 없이 널 만났네.”그녀는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하지만 등 뒤에서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봐!”장소월은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강용의 부름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앞으로 더 가면 길이 없어. 너 어디로 가려는 거야?”장소월은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어쩐지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더라니.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강용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틀린 길인 걸 알면서도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장소월은 몸을 돌린 뒤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좁은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장소월이 그를 지나치려한 순간, 돌연 그가 몸을 움직였다. 깜짝 놀란 장소월은 중심을 잃고 그의 어깨에 축 늘어졌고 그는 한 팔로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너 뭐 하는 거야! 날 놔줘! 강용!”장소월이 아등바등 그의 등을 내리쳤다.3층은 아직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큰 유리창 너머에 서 있는 남자는 고귀하고 우아해 보였지만 그 눈빛엔 말 못할 냉담함이 담겨있었다.“저와 손을 잡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얼마를 원하든 다 줄게요.”인경아가 말했다.“영수야, 그 프로젝트를 갖고 싶다면 내가 줄게. 한 푼도 받지 않아도 돼.”강영수는 그녀의 말을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떠오른 강영수가 진봉에게 말했다.“인씨 집안 사람에게 파스를 갖고 정원으로 가보라고 해.”“네.”진봉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지만 강영수의 분부대로 도우미에게 파스를 쥐어 보냈다.수영장에선 한창 뮤직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머지않은 곳에서 걸어오고 있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한 허철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강용? 어깨에 여자를 안고 오네?이제 이렇게 화끈하게 논다고? 설마 벌써 첫 거사를 치른 거야?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은 허철은 더더욱 놀랐다.“헉!”장소월의 목소리는 변하긴 했어도 충분히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강용은 그녀를 의자에 던져버렸다.“젠장, 너무 무거워. 돼지 같아. 너 좀 적게 먹지 그래?”“네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잖아!”그때 위가 뒤집히는 고통이 밀려오더니 이어 그녀는 오늘 먹은 모든 것들을 깡그리 토해냈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을 먹지 않았다. 위가 경련하는 듯한 통증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야! 장소월! 너 내 몸에 토하면 죽을 줄 알아!”허철은 눈을 감은 채 보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너무 역겹다.강용은 그녀가 거의 다 토해내자 그녀의 뒷목을 잡아 올리고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너 거기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얼른 꺼져! 나 너무 괴롭단 말이야.”허철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이게 내 탓이야?”“꺼져!”허철은 어쩔 수 없이 바닥의 토사물을 치웠다.그때 도우미 한 명이 파스를 쥐고 걸어왔다.“아가씨, 혹시 파스 필요하세요?”장소월은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전 가져다 달라고 한 적 없어요.”도우미가 말했다.“어떤 남자분이 아가씨에게 드리라고 했어요. 아가씨가 발목을 삐었다고요.”장소월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저 확실히 발목을 접질렸어요. 하지만 저한테 준 거 아닐 거예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옆에 있던
장소월이 미처 자신의 발을 걷기도 전에 발목이 잡혔다.“내가 약 발라주고 있는 거 안 보여?”강용은 고개를 들고 여전히 거친 말투로 말했고, 장소월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나한테 약을 발라줘?’학교에서 그녀를 목졸라 죽일 뻔했던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약을 발라준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진짜 약이 맞는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어? 조금만 호의를 보이면 바로 마음이 약해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강용은 이미 손에 약을 붓고 장소월의 부어오른 발목에 바르려는데, 장소월이 즉시 자신의 발을 걷었다.“난... 괜찮아. 약 바를 정도는 아니야.”장소월은 그가 또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강용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웅크렸던 몸을 폈다. 무심하게 고개를 숙인 채 한쪽에서 휴지를 뽑아 자신의 손을 닦으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장소월은 한 걸음 내딛자마자 발목에서 전해오는 고통에 넘어지고 말았다.“너 같은 고집불통은 처음이야. 호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강용은 손에 있던 종이를 버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바로 이때 명랑한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강용? 여기 왜 왔어?”장소월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인시윤이 우아하고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총총 걸어왔다.장소월은 인시윤이 강용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원수를 보듯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럽다는 것을 눈치챘다.바로 이런 눈빛이었다. 6반 전체 학생이 장소월을 바라보던 눈빛. 장소월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강용이 이런 눈빛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인시윤은 장소월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 어디 다쳤어?”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별일 아니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시윤은 다시 여주인의 자태로 팔짱을 끼고 눈앞의 사람을 보며 말했다.“강용... 우리 집은 널 환영하지 않는다고 분명 말했잖아! 당장 나가!”이쪽 상황을 본 방서연은 즉시 하던 이야기
모두들 함부로 숨을 쉬지 못했다.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1초.2초...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시윤뿐이었다.모두 강용이 분노하여 인시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강용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눈이 붉어졌다. 인시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속으로 약간 섬뜩하고 두려웠다.강용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너는 너의 어머니가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그게 무슨 소리야?”강용은 무거운 한마디를 던지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거기 서! 서라고! 잡종 새끼야!”방서연은 떠나는 강용이 조금 걱정되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인정아는 바람을 쐬면서 취기가 많이 가셨다. 방금 그 말들은 모두 그녀의 귓가에 들어갔다. 설마... 강용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인정아는 눈썹을 깊게 찡그렸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시윤아, 친구들 앞에서 왜 소란을 피워?”익숙한 목소리에 인시윤은 곧 조용해졌고, 꾸중을 들을까 봐 고개를 숙였다.인정아는 인시윤에게 예의범절에 관한 많은 수업을 신청해주었다. 반 년 넘게 수업을 들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몇백만 원의 수강료를 전부 환불했다.인시윤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낮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별것 아니야. 엄마.”“이 친구는 누구?”인정아는 한쪽에 앉은 사람을 보며 말했다.시선을 느낀 장소월은 대답하려 했다.“저는...”장소월이 입을 열자마자 인시윤이 말을 가로챘다.“엄마, 나 먼저 방에 가서 선물 뜯어볼게. 너희 재밌게 놀고 있어.”인시윤은 이미 그 아저씨가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인정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성격은 대체 언제 고칠 거야? 친구가 와도 대접할 줄도 모르고.”집사가 다가와 인정아의 귓가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는 금세 자리를 떠났다.주위에 몰린 구경꾼들은 어느새 모두 흩어졌고, 방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강씨 집안이 없었더라도, 전연우는 어떤 식으로든 다른 이들을 해치려 했을 것이다.한 프랑스풍 저택, 강용이 그녀의 여행 가방을 안방까지 옮겨다 주고 있었다. 장소월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네가 산 집이야?” “따지고 보면 강씨 집안 소유야. 예전 내가 서울에서 쫓겨날 때 그 사람이 나한테 준 집이거든. 지금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 강용이 말하는 ‘그 사람’은 강영수의 아버지이자 강용의 아버지였다. 예전 인정아는 강용의 어머니를 끝까지 괴롭히며 쫓아내려 했다. 결국 어머니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그녀를 따라갔다. 지금은 강용만이 홀로 이 세상에 남아있다. “이 방은 내가 도우미를 구해 청소해 놨어. 그 누구도 머무른 적 없는 방이야. 당분간 이 방 쓰면 돼. 근처에 꽤 괜찮은 꽃밭도 있으니까 나중에 한번 가 봐.” 장소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신세 좀 질게. 나 지금... 좀 특별한 상황이라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강용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편하게 지내. 아무도 널 쫓아내지 않아. 하지만 밤에는 조심해야 할 거야...” “뭘 조심해야 하는데?” 강용은 돌연 가까이 다가갔다. 장소월은 빛나는 안광을 내뿜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까지 말이다. 강용이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내가 몽유병이 좀 있거든. 혹시라도 밤에 실수로 네 방에 들어가면, 네가 나한테 반해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 나 책임져야 할 거야.” 장소월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 “됐어, 그만해.” 그녀는 이내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나와 전연우는 법적으로 아직 부부관계야. 이제 그 누구에게도 감정을 쏟는 일은 없을 거야.” 너무 지쳤다! 매번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때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도 다치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다 잊어버렸어. 너도 나 머리 나쁜 거 알잖아. 옛날에 나 과외해줄 때, 네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잊었어?” “그건 그래! 내가 아는 모든 걸 다 가르쳐 줬는데도 넌 그저 놀기만 했어.” 다행히 강용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강용을 망가뜨리지 않았고, 강영수 또한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떠나는 길을 선택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어?” 강용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소월은 걸음을 멈추고 멀리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뭘 후회한다는 거야?” 강용도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곁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떠나는 거 후회하지 않냐고. 강영수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면 두 사람 다시 함께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장소월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난 그럴 자격 없어. 그리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일 뿐이야. 영수가 행복하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강용, 넌 어때? 아직도 강영수가 미워?” 강용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여전히 예전처럼 거칠고 반항적인 소년이었지만, 정말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딱히 미워할 것도 없어. 따지고 보면 강영수 잘못도 아니야. 내가 그 사람의 아버지를 오랫동안 빼앗아 간 건 사실이잖아. 내 어머니 때문에 형의 가족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로 인해 형은 가정의 화목함을 잃어버렸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내가 겪었던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가장 힘든 건 형이었을 거야. 네가 떠난 후 많이 힘들어했거든. 줄곧 너를 찾아 헤맸고...” “게다가... 예전의 강 씨 집안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잖아.” “그래! 강 씨 집안은 사라졌어.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영수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내가 떠나
저 여자가 여긴 왜 왔지?“이 선물 전해주려고 왔어.” 박원근은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월아... 좋은 날인데 같이 앉아서 축하주 좀 마시고 가지 그래? 오늘 특별한 날이잖아. 곧 공연도 시작될 거야.” 장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강용이었다. 예전 그 오만하고 자유분방했던 소년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제법 성숙하고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들거리는 태도와 모든 것에 무심한 듯한 그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장소월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강용 때문이기도 했다. 강용의 도움으로 강영수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종잡을 수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그녀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저 사람은...” 박원근은 강용을 알지 못했다. 장소월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사직서는 선생님께 따로 드릴게요.” 그녀는 혼례복을 입은 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있어.”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 채, 장소월은 방으로 돌아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겼다. 처음부터 그녀는 강영수의 무사함만 확인하면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유화가 그녀를 붙잡았다. “송 선생님, 가지 마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장소월이 가르쳤던 아이들 모두 그녀에게 깊은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용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쓴 채 기둥에 기대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앞머리가 가늘고 긴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강용이 장소월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 장소월이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유화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 송 선생님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선생님 성함은 장소월 맞죠? 그림에 쓰여 있는 이름이 진짜 선생님의 이름이죠?” “장 선생님, 유화는 선생님이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유화는 선생님이 계속 그림을 가르쳐줬으면 좋겠어요.” 장소월은 유화 뒤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천진한 눈망
낙일 마을에는 오래된 풍습이 있었다. 새롭게 부부의 연을 맺은 신랑 신부는 황혼 녘 태양을 향해 무릎 꿇고 백년가약을 맺으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백년해로한다고 한다. 결혼식이 치러질 때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일손을 도왔다. 유월은 오래전 이미 혼례복을 지어 놓았다. 낙일 마을에는 풍습이 또 하나 있었는데, 여자들은 혼기가 차면 결혼식에 입을 옷을 손수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액세서리를 몸에 지니고 결혼식을 올려야만,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평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잔치는 3일 밤낮으로 이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며 축복을 빈다. 신랑은 매일 손님들과 술잔을 기울인 뒤에야 신방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축복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낙일 마을 전체는 기쁨에 들썩이고 있었다. 유화 엄마는 유월의 머리를 빗겨주고, 산에서 꺾어온 꽃들을 꽂아 예쁘게 장식했다. 거울에 비친 유월의 모습을 보며 유화는 신이 나 팔짝팔짝 뛰었다. “언니, 드디어 시집가네요!” 엄마는 유화를 타박했다. “이 녀석이! 어서 가서 놀아. 언니 방해하지 말고.” “전 해이 오빠 보러 갈 거예요!” 오후 4시 30분 저녁노을이 하늘을 발갛게 물들이는 시간, 여자가 결혼식을 올리는 최고의 길시다. 문밖에서는 혼례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흥겨운 북소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해이가 입고 있는 파란색 한복은 유월이 직접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바느질한 것이었다. 그녀가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그 옷은 유월이 앞으로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해이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것이었다. 그가 신고 있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바느질은 낙일 마을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신부가 신방으로 들어가면, 신랑은 사흘 동안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신부 또한 방을 나올 수 없고, 먹고 자는 모든 것을 방에서 해결해야 했
“정말이야?” 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말했잖아, 너랑 결혼하겠다고. 울지 마, 나 마음 아파.” 해이가 유월을 품에 끌어안았다. 유월은 그때에야 비로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평온해졌다. “네 과거를 알아보고 싶더라도, 앞으로는 혼자서 몰래 그 여자 찾아가지 마. 나 질투 나.” “알았어.” “됐어. 그만 징징거리고 빨리 안으로 들어가 봐. 그 아가씨 쓰러졌잖아.” “멀쩡하던 사람이, 무슨 일이야.” 장소월은 해열제를 먹고 진료소에서 반나절 동안 링거를 맞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옆에는 강영수, 유월 외에도 박원근이 더 있었다. “후배님, 좀 괜찮아졌어?” “후배?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유월은 깜짝 놀라 물었다. 박원근은 장소월보다 반년 정도 먼저 이곳에서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후배님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미술 선생님 아니었어요?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장소월은 두통과 어지럼증 때문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귓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더더욱 아찔해졌다. “좀 나가줄래요. 쉬고 싶어요.” 박원근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문밖에 있을게. 푹 쉬어.” 세 사람이 문밖으로 나온 뒤, 유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여자 대체 누구예요? 어떤 사람이에요? 교장 선생님?” 박원근은 옆에 있던 해이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난 민영이와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어요.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민영이는 내 스승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제자예요.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죠. 기회가 되면 미술관에 가 봐요. 그곳에 전시된 작품 중 몇몇은 민영이의 손에서 탄생한 거니까.” “민영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에요.” 유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저 여자 결혼했다는 거 사실
“영수?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참, 너 이제 강영수 아니지.” 장소월의 입안에 한약의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여긴 어디야?” “읍내 의원이에요. 선생님 만나러 집에 갔었는데 쓰러져 계셔서 이곳에 모셔 왔어요.” “이제 괜찮으면 알아서 약 드세요. 난 이만 갈게요.” 필사적으로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은 장소월은 떠나려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약그릇을 집어 들다가 힘이 풀려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문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은 장기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호의를 베풀 거면 끝까지 베풀어야지. 난 더이상 도와줄 수 없어. 이 콧구멍만 한 낡은 의원에서 그 아가씨까지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야.” 장소월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약국에 가서 해열제 몇 알을 사 먹을 생각이었다. 이 약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써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깨진 숟가락 조각을 주우려다 실수로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일찌감치 자리를 떴는 줄 알았던 남자는 다시 돌아와 쪼그려 앉아 있는 여자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몸이 성치도 않으면서, 왜 일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장소월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해이가 그녀를 재빨리 부축했다. 문밖에서 유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감님, 우리 해이 못 봤어요?” 유월은 고개를 돌린 순간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당... 당신들!” “이 뻔뻔스러운 년, 너 이럴 줄 알고 있었어! 우리 해이 꼬드기려는 거지!” 그는 유월이 갑자기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유월은 단번에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쥔 채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오... 오해예요.” “오해라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너 쫓아낼 거야.
그러나 박원근이 장소월을 찾아 나섰을 때, 그녀는 집에 없었다. 장소월이 깨어난 곳은 어느 읍내의 작은 의원이었다. 낡은 나무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눈을 떴을 때,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너무 허약해. 좋은 걸 좀 먹여서 몸보신해줘야 해. 다행히 일찍 데려왔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정신을 놓았을 거야.” “이 아가씨는 누구야? 해이야, 너 유월이랑 헤어진 거야?” 해이가 말을 더듬었다. “전...” “콜록콜록...” 침대에 누워있던 여자가 갑자기 기침을 토해냈다. 해이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었다. 그녀의 곁에 다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장소월은 몽롱한 정신으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별아...” 해이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별이? 그녀의 아이다. 팔순의 노인은 따스한 햇살 아래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마주 앉은 이 하나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홀로 장기를 두고 있었다. “약이 다 끓었다. 따라내서 환자한테 먹여.” 해이는 손에 들었던 물컵을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놓고 싸늘한 눈빛으로 문을 나섰다.노인이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야?” “저 아가씨 그냥 저렇게 내버려 두려고?” “저랑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유월이가 싫어할 거예요.” “어휴, 쯧쯧, 쯧쯧... 그렇게 마누라 치마폭에만 싸여 있어서야. 그래, 그래, 그럼 가 봐. 어차피 이 늙은이도 바쁘니까, 그냥 내버려 두지 뭐.” 집을 나서 몇 걸음 걸었던 해이는 결국 다시 돌아와 정성껏 약을 따라냈다. 그러고는 약이 미지근하게 식기를 기다려 그녀의 입가에 조심스레 가져갔다. 약이 쓴 탓인지 그녀는 대부분의 약을 입술 밖으로 토해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해이의 눈빛에 처음이 아닌 듯한 묘한 익숙함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강력한 끌
이곳에서 장소월은 매일 바쁘게 돌아치며 자신에게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결혼식이 끝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지 못했다.또한 건강이 점점 악화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생명이 천천히 소실되는 공허한 기분이었고, 뭘 하든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장소월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저와 아무 상관없어요.”“별이는? 별이도 버릴 거예요?”별이 이야기를 꺼내자 장소월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그 아이, 혹시 시간 여유가 되면 친부모 찾아줘요. 전연우가 절 묶어두려고 데려온 아이예요. 이제 제가 없으니 그 아이를 버릴지도 몰라요.”“별이가 엄마로 생각하는 사람은 소월 씨뿐이에요.”장소월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했다.“하지만 전 그 아이 엄마가 아니에요. 선생님도 알잖아요... 전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거.”“저 여기 떠날 거예요. 전연우가 괴롭히더라도 비밀 지켜주길 바라요.”서철용은 발코니에 서서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밤하늘에 걸려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소월 씨... 난 언제나 소월 씨 편이에요.”“지금 한 말 꼭 기억해요. 이건 당신이 나한테 진 빚이니까.” 장소월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서철용을 믿고 있었다. 돌고 돌아 다시 전연우에게 돌아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더욱 무서운 건 전연우가 강영수를 해치는 것이다.지금의 강영수는 다행히 기억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을 잊은 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있다.차가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소월은 문을 닫다가 구석에 서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차디찬 냉기 속에서 장소월의 가냘픈 몸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장소월의 말을 엿들었던 세 사람이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유화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엄마한테 이를 거예요. 언니가 송 선생님 통화 엿들었다고요.”유월은 문
장소월은 손목에 찬 옥팔찌를 풀어 유월의 손목에 걸어주었다. “잘 어울리네요.”“이게 뭐예요! 이런 거 준다고 해서 내가 해이를 당신에게 넘겨줄 것 같아요?”장소월은 팔찌를 벗으려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하고 있어요. 이건 원래 그 사람의 것이었어요.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지금 유월 씨에게 이걸 주는 건, 유월 씨를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을게요.”“다만 단 하나 확실히 알려주고 싶은 건, 그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거예요.”“진심으로 두 사람이 행복하게 백년해로하길 바라요.”유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에요? 정말로 해이를 뺏어가려고 온 거 아니에요?”“설령 이 여자가 날 데려가려 한다고 해도, 내가 따라가지 않아.” 해이가 된 남자가 유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주일 뒤 우리 결혼할 거예요. 송 선생님 바쁘실 텐데 청첩장은 안 보낼게요.”“팔찌 돌려줘. 과거의 물건은 지금 가져와 봐야 아무 의미 없어.”유월은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이 말이 맞아요. 진심으로 우리를 축복하든 아니든, 이 팔찌는 받지 않겠어요. 과거의 일은 이제 해이와 아무 상관없어요.”장소월은 받지 않았다. “이건 애초에 네 것이었어. 난 그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을 뿐이야.”강영수는 유월의 손에서 팔찌를 가져와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럼 버려야겠네요.”장소월이 말했다, “마음대로 해. 네 물건이니까.”‘강영수, 네가 잘 지내는 모습 봤으니까 난 이제 충분히 만족해. 우리 이제 여기서 작별하자.’장소월은 여전히 바닷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견디질 못할 습기와 한기에 온몸이 아파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그녀는 또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밤 8시, 침대 옆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서철용이 전화기 너머 그녀의 기침 소리를 듣고 물었다. “감기 걸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