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강용은 장소월을 괴롭히지 않는다!정말 신기한 일이다...강용은 결국 농구에 흥미를 잃고 옆에 있는 물을 집어 들고 곧바로 코트를 떠났다....30 분 안에 수학 문제지를 푸는 건 확실히 어려웠다. 게다가 모두 교과서의 지식을 넘어서는 내용들이었고, 일부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들이었다. 그녀에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지만 문제를 푸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었다.마지막 수업의 종소리가 울리자 한결은 교과서를 닫았다.“여러분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은 인시윤 학생의 생일이니 시윤 학생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며 오늘은 야자 안 합니다. 대부분 친구들이 인시윤 학생의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았죠?”“모두가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라요.”인시윤은 반에서 가장 활동적인 학생으로 꼽힌다.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장소월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천만에요.”1반에서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한결이 나가자마자 인시윤은 장소월의 옆으로 달려가 말했다.“소월아, 가슴 큰 친구야... 이제 그만하고 같이 가자!”인시윤은 정말 그녀를 골치 아프게 했다. 웬 이상한 별명을 붙여줬는지.장소월은 마지막 글자를 쓰고 재빨리 책을 닫았다.“다 했어. 가자.”인시윤이 그녀를 칭찬했다. “문제 정말 잘 풀었네! 어디 보자, 거의 다 정답인데 우리 올림피아드 그룹에 오지 않아서 아쉽다. 어쩌면 우리가 같이 서울대에 붙을지도 모르는데.”장소월은 동작을 멈췄다. “나도... 가도 될까?”“당연하지! 왜 안 돼?”“올해 올림피아드 대회는 총점으로 순위를 매기는데... 제운고랑 서울 2중 애들만 참가하는 거 아니야. 네가 전국 대회에서 10등 안에 들면, 소월아... 이건 가문의 영광이야!”“알았어! 혹시 그룹에 들어가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해?”장소월의 뒤쪽에 앉은 두꺼운 안경을 쓴 소년의 표정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감정이 감돌았
백윤서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뒷좌석에 앉아있는 장소월을 발견하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억울한 듯 말했다.“미안해, 소월아. 나 오늘 너희 반 수업시간표를 봤는데 오늘 저녁 자율 학습이 있더라고. 그래서...”장소월은 이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았고 지금 백윤서의 표정에 대해서도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 탓에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질근 감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다 제 탓이에요. 아저씨, 출발하죠! 먼저 윤서 언니를 데려다줘요.”“알겠습니다. 아가씨.”역시 장씨 가문에서 잔뼈가 굵게 일한 사람이라 무슨 말이든 과감히 내뱉는다. 정 집사는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다. 하여 장해진도 지금까지 그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이다.백윤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집사님, 절 연우 오빠 회사에 내려주시면 돼요. 할 얘기가 있어 오빠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요.”정 집사는 백윤서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백미러로 장소월에게 말했다.“소월 아가씨, 장소를 바꿀까요?”그는 장소월의 동의를 구했다.장소월이 희미한 정신으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백윤서는 무안함에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예전 장소월이 전연우를 좋아할 때에도 늘 학교를 마치면 그의 회사에 가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녀는 억지를 부리고 떼를 써서라도 회사에 갔었다.이렇듯 그녀와 백윤서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다.장소월은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화려한 배경에 크나큰 부와 권세를 쥐고 있어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인시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함께 갖은 시련을 이겨내 왔던 백윤서... 전연우는 과연 둘 중 누구를 선택할까?예전엔 당사자였지만 이젠 구경꾼에 불과하다.장소월도 전연우가 백윤서와 결혼해 전생에 진 빚을 갚기를 원했다.하지만 그녀의 빚은 이미 깨끗이 갚았다.그녀가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했던 그 날...지금은 퇴근 시간이라 남천 그룹까지 평소라면 30분 정도밖에 걸리
전연우가 오늘 파티에 그녀를 부른 건 그녀와 파트너로 함께하고 싶은 건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백윤서는 긴장된 마음에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순식간에 가슴속에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장소월은 인시윤의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간 것이었다. 파티에 빈손으로 참석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작은 선물은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었다.그저 겉으로만 친구일 뿐이니 고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선택한 스카프가 가격표를 보니 20만 원이나 되었다. 그녀는 구매를 취소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이미 점원이 가격표를 뜯은 뒤라 되돌릴 수 없었다.다행히 장해진이 준 카드가 있어 절반 정도 할인받을 수 있었다.그래도 10만 원이다.장소월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지끈거렸다.남원 별장.방 안에 들어간 그녀는 인시윤의 생일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옷방 서랍을 열어보니 하얀색 박스가 하나 있었고 안엔 마침 그녀가 찾던 드레스가 들어있었다.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올블랙 드레스...이 옷이면 괜찮을 것이다.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라 많은 옷을 준비하진 못했다. 모두 한물간 디자인이라 그녀의 마음에조차 들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눈엔 어떻겠는가.이 옷은 아주 심플하면서도 유행을 타는 디자인이 아니라 언제든 예쁘게 입을 수 있었다.장소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과연 그녀에게 어울릴까?“한 번 입어볼까?”장소월은 재빨리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드레스가 그녀의 몸에 딱 들어맞았다. 조금 더 말랐다면 가슴 부분이 빈약했을 것이고 조금 더 살집이 있었다면 부담스럽게 팽팽해졌을 것이다.이런 매혹적인 그녀의 몸매를 보고 그 누가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여덟 시 반.파티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인시윤이 2억이 되는 고액의 드레스를 입고 최근 대세 남자 연예인과 함께 커플 댄스를 추며 파티의 포문을 열었다.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정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거나
춤을 마친 뒤 인시윤은 도우미가 건네준 외투를 받고는 인정아의 곁으로 걸어갔다.“엄마.”살짝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본 인정아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왜 그래? 생일인데 왜 별로 안 즐거워 보이지?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도 초대했잖아. 아가, 표정 풀어. 엄마랑 같이 삼촌들한테 인사하러 가자.”인시윤의 눈썹이 다시 찌푸려졌다.“저 안 가면 안 돼요? 전 친구들과 놀고 싶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저만 보면 온갖 질문을 쏟아내요. 정말 너무 지겨워서 짜증 나요.”파티장엔 음악을 틀었고 인시윤의 목소리도 크지 않아 인경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됐어. 이것도 앞으론 익숙해질 거야. 후계자는 후계자답게 행동해야지.”두 모녀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인시윤은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인씨 가문 사업가들을 만나러 향했다.이번 파티에 강씨 가문은 초청하지 않았다.“엄마, 오빠는 오지 않겠대요?”인경아의 얼굴에 잠시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영수는 최근 강한 그룹을 인계받고 있어서 바쁜가 봐. 그러니까 될수록 귀찮게 하지 마. 엄마가 이미 말했으니까 바쁘지 않으면 올 거야.”예전엔 그 집에서 강영수를 볼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럴 자격도 없다.그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다!드디어, 인시윤이 전연우와 마주 섰다.인경아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당신이 우리 시윤이를 구해줬다면서요?”검은색 정장을 입고 곧게 서 있는 전연우에게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 비하면 많이 부드러웠다.“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인경아가 다시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시윤아, 감사 인사는 제대로 했어?”그녀의 말투는 부드럽고 예의 있고 차분했으나 그 안엔 확연한 거리감이 담겨있었다.이렇듯 능력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시윤이의 곁에 두고 유용하게 쓰는 게 좋을 것이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장해진의 사람이다.때문에 분명 더럽고 비열
이미 아홉 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어 파티가 끝났을지도 모른다.이번 파티는 인씨 집안 별장에서 진행되었다.장소월이 문 앞 경비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주자 그는 곧바로 그녀를 안내했다.“아가씨의 친구분이시면 이 길을 따라가세요. 끝까지 가면 보일 겁니다.”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감사합니다.”경비원은 장소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토록 아름다운 아가씨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느 집 아가씬데 여태껏 한 번도 오지 않았단 말인가?장소월은 외투를 걸치고 경비원이 말한 방향으로 걸어갔다.파티장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이미 한 번씩 인사를 마쳤다.뒷마당에선 한창 수영장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다!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친한 친구들이다. 그녀는 힘 빠진 몸을 의자에 축 늘어뜨렸다.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힘들어 죽겠어... 그 변태 같은 영감들한테 왜 인사를 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아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왜겠어? 집안 재산을 상속받기 위함이지!”꽃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 허철이 말했다.인시윤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난 이미 말했어. 앞으로 재산, 회사... 모두 다 오빠한테 주고 싶다고! 난 그냥 오빠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면 돼! 나같이 예쁜 여자가 뭣 하러 엄마처럼 힘들게 살겠어. 안 그래?”허철이 말했다.“돈 많은 걸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인시윤은 와인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그를 쳐다보았다.“봤어?”“뭘?”“장소월 말이야! 설마 안 온 걸까?”허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장소월도 불렀어? 너 미쳤어? 장소월을 왜 불러! 나 걔랑 절교했잖아!”인시윤이 이마를 찌푸리고 허철을 툭 두드렸다.“너와 장소월 사이의 일은 관여하지 않을게. 하지만 앞으로 감히 내 앞에서 장소월을 욕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허철이 말했다.“이봐, 아가씨... 장소월이 어떤 앤지 몰라? 왜 그런 애와 친구로 지내려고 해? 너 친구가 부족
그녀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악마처럼 고소해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나쁜 놈! 이게 재밌어?!”장소월은 접질린 발목을 부여잡았다. 너무 아파 눈물까지 질끈 나왔다.강용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웃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어떻게 재미없겠어? 장소월... 네가 이렇게 바보 같은데!”장소월은 이곳에서 강용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강용의 집안은 이곳에 초대될만한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역시 강용과 마주치면 좋은 일이 없다.장소월은 통증 때문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일어나 치마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검은색이라 얼룩이 선명하지는 않았다.“운도 없이 널 만났네.”그녀는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하지만 등 뒤에서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봐!”장소월은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강용의 부름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앞으로 더 가면 길이 없어. 너 어디로 가려는 거야?”장소월은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어쩐지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더라니.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강용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틀린 길인 걸 알면서도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장소월은 몸을 돌린 뒤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좁은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장소월이 그를 지나치려한 순간, 돌연 그가 몸을 움직였다. 깜짝 놀란 장소월은 중심을 잃고 그의 어깨에 축 늘어졌고 그는 한 팔로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너 뭐 하는 거야! 날 놔줘! 강용!”장소월이 아등바등 그의 등을 내리쳤다.3층은 아직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큰 유리창 너머에 서 있는 남자는 고귀하고 우아해 보였지만 그 눈빛엔 말 못할 냉담함이 담겨있었다.“저와 손을 잡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얼마를 원하든 다 줄게요.”인경아가 말했다.“영수야, 그 프로젝트를 갖고 싶다면 내가 줄게. 한 푼도 받지 않아도 돼.”강영수는 그녀의 말을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떠오른 강영수가 진봉에게 말했다.“인씨 집안 사람에게 파스를 갖고 정원으로 가보라고 해.”“네.”진봉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지만 강영수의 분부대로 도우미에게 파스를 쥐어 보냈다.수영장에선 한창 뮤직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머지않은 곳에서 걸어오고 있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한 허철의 눈동자가 번뜩거렸다.강용? 어깨에 여자를 안고 오네?이제 이렇게 화끈하게 논다고? 설마 벌써 첫 거사를 치른 거야?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은 허철은 더더욱 놀랐다.“헉!”장소월의 목소리는 변하긴 했어도 충분히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강용은 그녀를 의자에 던져버렸다.“젠장, 너무 무거워. 돼지 같아. 너 좀 적게 먹지 그래?”“네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잖아!”그때 위가 뒤집히는 고통이 밀려오더니 이어 그녀는 오늘 먹은 모든 것들을 깡그리 토해냈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을 먹지 않았다. 위가 경련하는 듯한 통증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야! 장소월! 너 내 몸에 토하면 죽을 줄 알아!”허철은 눈을 감은 채 보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너무 역겹다.강용은 그녀가 거의 다 토해내자 그녀의 뒷목을 잡아 올리고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너 거기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얼른 꺼져! 나 너무 괴롭단 말이야.”허철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이게 내 탓이야?”“꺼져!”허철은 어쩔 수 없이 바닥의 토사물을 치웠다.그때 도우미 한 명이 파스를 쥐고 걸어왔다.“아가씨, 혹시 파스 필요하세요?”장소월은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전 가져다 달라고 한 적 없어요.”도우미가 말했다.“어떤 남자분이 아가씨에게 드리라고 했어요. 아가씨가 발목을 삐었다고요.”장소월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저 확실히 발목을 접질렸어요. 하지만 저한테 준 거 아닐 거예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옆에 있던
장소월이 미처 자신의 발을 걷기도 전에 발목이 잡혔다.“내가 약 발라주고 있는 거 안 보여?”강용은 고개를 들고 여전히 거친 말투로 말했고, 장소월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나한테 약을 발라줘?’학교에서 그녀를 목졸라 죽일 뻔했던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약을 발라준다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진짜 약이 맞는지도 안심할 수 없었다.‘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어? 조금만 호의를 보이면 바로 마음이 약해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강용은 이미 손에 약을 붓고 장소월의 부어오른 발목에 바르려는데, 장소월이 즉시 자신의 발을 걷었다.“난... 괜찮아. 약 바를 정도는 아니야.”장소월은 그가 또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강용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웅크렸던 몸을 폈다. 무심하게 고개를 숙인 채 한쪽에서 휴지를 뽑아 자신의 손을 닦으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장소월은 한 걸음 내딛자마자 발목에서 전해오는 고통에 넘어지고 말았다.“너 같은 고집불통은 처음이야. 호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강용은 손에 있던 종이를 버리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바로 이때 명랑한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강용? 여기 왜 왔어?”장소월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인시윤이 우아하고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총총 걸어왔다.장소월은 인시윤이 강용을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원수를 보듯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럽다는 것을 눈치챘다.바로 이런 눈빛이었다. 6반 전체 학생이 장소월을 바라보던 눈빛. 장소월은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강용이 이런 눈빛을 받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인시윤은 장소월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 어디 다쳤어?”장소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별일 아니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시윤은 다시 여주인의 자태로 팔짱을 끼고 눈앞의 사람을 보며 말했다.“강용... 우리 집은 널 환영하지 않는다고 분명 말했잖아! 당장 나가!”이쪽 상황을 본 방서연은 즉시 하던 이야기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